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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신념이 빛났던 역사적 장면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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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8 16:01:44

 

  마음을 경건하게(?) 다잡고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이 담긴 책들을 가끔씩 읽습니다만, 제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나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잘 이해했다고는 말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잘 이해하지는 못하는 와중에도 그의 역사적 행보를 살펴보면 볼수록 대단히 멋진 삶을 살았다는 생각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펠로폰네소스전쟁(고대 그리스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전쟁)에 관심이 많았던 시기에 이를 다룬 역사책을 읽다가 발견한 소크라테스의 역사적 행보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는데요.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면서도, 사람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정의 원칙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데, 소크라테스는 이런 정의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떤 역경을 맞이하더라도 굽히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 용기와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소크라테스의 신념이 빛났던 두 가지 역사적 무대의 배경이 꽤 다르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시간순으로는 뒤의 일이지만 이 글에서는 먼저 다룰) 첫 번째 사건은 30인 참주정이라 하여 친스파르타 지도자 30명이 아테네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고 통치하던 시대가 배경이고, 두 번째 사건은 스파르타에게 전쟁에 패배하기 이전에 직접 민주주의 체제가 돌아가던 시대의 사건입니다. 

 

  전자의 사건에서 소크라테스는 30명의 권력자들이 사실상 독재정처럼 펼치는 공포 정치에 대항했다면, 후자의 사건에선 민주정 체제에서 법 제도를 무력화하고 감정적으로 일을 진행코자 했던 다수의 압박에 굴하지 않는 소신 보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다르건 두 가지 사건 모두에서 소크라테스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합니다.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직접 실천에 옮긴 소크라테스의 역사속 행보는 대단히 존경스럽고 멋진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먼저 공포 정치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부터 다뤄보겠습니다.  

 

공포 정치 시대속 소크라테스의 행동

  기원전 431년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404년까지 이어진 아테네 진영 vs 스파르타 진영 간의 전쟁은 결국 스파르타측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패전국이 된 아테네는 사실상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는데, 아테네의 자랑이던 강력한 해군 전력과 항구부터 도시를 이어주던 성벽은 해체 스파르타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자들을 아테네의 새로운 통치자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친스파르타 정권으로서 아테네에 들어선 '30인 정권'은 끝까지 민주정을 수호하려는 이들을 살해하고 체포한 것은 물론이고, 중도파와 선량한 시민들까지 무참히 탄압하는 경악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테네의 전통이던 광범위한 직접 민주주의 정치 제도를 파괴하던 이들은 대단히 잔인한 발상을 실현에 옮기기도 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기존에 시민들이 재판 보조 업무를 맡는 아테네의 제도를 악용한 사례입니다. 30인 정권은 아테네인들을 여전히 재판 보조원으로 씀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민주정 지지자들과 죄 없는 아테네 시민들을 잡아오게 하는 동족상잔의 길을 걷게 강제한 것입니다. 


  공정한 판결은 커녕 사법 살인을 자행하던 이들의 무자비함을 고려했을 때 동족을 재판정으로 이끄는 것은 사실상 처형장으로 인도하는 꼴이었습니다. 무고한 이들도 거리낌없이 해치우던 공포 정치속에서 당연히 이런 잔인한 제도에 대항하는 아테네인들 거의가 사형 판결에 처해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이 잔인한 업무를 소크라테스가 해야 되는 시점이 왔을 때, 그는 행동으로써 이러한 정부의 정책에 분명한 반대의 뜻을 표합니다. 정부의 명령이더라도 옳지 못한 것이 분명하기에 따를 수 없다라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참고로 소크라테스와 함께 명령을 하달받은 다른 아테네인들은 충실히 그 명령을 이행합니다).


  이는 30인 정권에 대한 강력한 항의 표시로 받아들여질 일이었고, 얼마 뒤에 대변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소크라테스는 이 일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로서는 다행히도 이 일이 있고 얼마 안 가서 30인 정권의 통치는 막을 내립니다. 탄압받던 민주정 지지자들이 세력을 모아 30인 정권을 몰아낸 것입니다. 


  거부하면 분명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어떤 행위에 대해서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행하기를 거부한 소크라테스의 소신 '행동'은 참으로 눈여겨볼만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덕목이 담겨있는 또 다른 에피소드는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민주정 체제를 무대로 합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후 재판에서의 소크라테스

해당 사건에 대해서 예전에 매니아에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286096 

 

  당시 상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아직 스파르타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양측의 해군은 격돌하여 아테네 해군이 대승을 거둡니다. 전투 결과는 아테네로서 최상이었지만, 진짜 문제는 전투가 끝난 이후 바다에서 전사자들의 시신을 인양하는데서 벌어졌습니다. 하필 그때 폭풍우가 거칠게 일어서 전사자들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고, 이에 대한 책임 소재 문제가 부상한 겁니다.


  아테네는 따로 전사자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국립묘지까지 둘 정도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 대한 대우를 남달리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설사 순직하더라도 유해만은 수습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전투에서 가족을 잃은 이들과 이들을 포함한 아테네 시민들을 교묘하게 선동하는 자들이 뒤섞여 일반 여론은 점차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들에 대한 비합리적인 분노로 변해갔습니다. 천재지변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적 맥락은 제거된 채 대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은 분노와 슬픔의 감정에 맹목적으로 이끌린 겁니다. 


  유족들과 선동꾼들은 여론을 등에 업고 재판을 준비하고 공정한지 심사하는 준비 위원회 일원들을 겁박하였습니다. 선동꾼들은 당시 아테네 법체계가 엄격하게 정한 룰을 크게 어기고 있었는데, 첫 번째로 고소당한 장군들에게 줘야하는 재판 준비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았고 두 번째로 장군들 각각을 고소해야 하는데 이들을 묶어서 한꺼번에 다룸으로써 불공정하게 대했습니다. 이를 보고 법에 위반된다며 반대 의사를 표했던 일원들도 결국은 하나 둘씩 다수의 압박에 못이겨 자신의 뜻을 꺾었는데, 아주 우연히도 이때 협의회 일원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이들의 감정적인 선동을 크게 비판하며 재판의 잘못된 형식을 꾸짖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무슨 시민의 대표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테네 시민 중 한명으로서 제비뽑기에 걸려 위원회에 있었던 상황이기에 선동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신변을 위협하는등 아테네 대다수 시민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대단한 압박을 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때도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사법 절차에 대해 설사 절대 다수가 이번만은 특별하게 처벌해야 한다며 감정적으로 나설 때 소크라테스만큼은 재판을 치르는 장군들에게 공정한 절차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겁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결국 소크라테스 한명의 의견은 무시한 채로 장군들을 재판에 회부했고 장군들을 사형에 처합니다. 전투에 능숙한 장군들을 한꺼번에 제거했다는 비극과 더불어 이렇게 시민들이 선동 당하여 자신의 지도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행동을 본 차기 지도자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아테네의 전망을 매우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눈여겨 볼 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걸 아테네인들 스스로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장군들을 부당하게 처형시킨 걸 매우 후회하면서 이번에는 시민들이 그렇게 행동하기를 부채질했던 선동가들을 고소하는데, 정작 이들은 법의 처분을 받기도 전에 아테네에서 도망쳐버렸습니다. 훗날 아테네에 돌아온 주동자는 아테네인들의 경멸을 한몸에 받으며 굶어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전 이 부분도 굉장히 부정적으로 바라봤습니다. 물론 선동가들이 제일 나쁘지만, 거기에 속아 넘어가 이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죽일듯이 달려들던 나머지 아테네 시민들이 마치 자기들은 죄가 없다는 듯이 주동자들만 대표로 처벌하는 걸 좋게 보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살펴보니 아테네인들이 이렇게라도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는 게 그나마 낫다는 생각도 듭니다. 논리가 아닌 감정적인 선동에 넘어간 결과가 얼마나 나쁠지 상상해보지도 않은채 거기에 흠뻑 빠져놓고 나중가서 결과가 시궁창이라도 끝까지 자신들이 옳았다고 우기는 더 비열한 사례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이 어떻든 감정에 휩싸여 법을 무시한 아테네인들의 비합리적인 행위는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 몇 세기동안에도 크나큰 비판을 받았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한 소크라테스는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안 나오는데요. 소크라테스의 용기있는 행동들을 반추하면서 소크라테스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아테네인들이 한 것처럼 대중의 무리에 섞여서 다른 사람들의 소신을 위협하고 자기만의 빈약한 윤리관을 남한테 들이대는 광폭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는 교훈을 스스로 되뇌곤 합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6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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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8 16:57:19

참 저시기의 역사는 지금 한국을 포함한 지구위의 여러 국가들의 상황과 비교해봤을때 소름끼치게 하는 장면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2500년전이나 지금이나 대중들은 감정과 선동에 이끌리기 쉽고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공하고 존재하니까요..

결국 예나 지금이나 대중은 믿을수 없는 존재이기에 합리적인 결정을 현명하고 훌륭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이끌어야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강력한 권력은 부패를 만들기 마련이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대중이 결정에 참여해야하는 아이러니한 현대 국가의 시스템을 발전시켜 수천년 수만년 뒤의 인류들은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WR
Updated at 2020-07-08 23:07:00

말씀하신 것처럼 이 당시 모습만 봐도 법으로 정해진 원칙을 무시하고, 감정에 휩싸인 채 나서는 집단행동의 무서움이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방심하다간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까지도 넘어갈 수 있어서 더 무서운데, 저는 쇼펜하우어의 방심(?)도 인상깊게 생각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자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어떤 민족적인 통일감 같은 걸 자랑스러워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썼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쇼펜하우어 사후에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던 나치가 독일에서 전국민적인 인기에 힘입어 집권했던 역사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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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7-08 17:26:05

 소크라테스가 30인 정부에게 협력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30인 정부의 최고 지도자였던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사촌이자 친구였고, 다른 지도부 구성원 중에도 소크라테스와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 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금만이 아니라 당대에도 논란이 있는 문제였습니다. 30인 정부는 총 8개월 동안 정권을 잡았는데 그 동안 아테네 인구의 5%가 죽거나 추방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하나 어떻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아테네에 남아 있었습니다. 민주정이 회복된 뒤 소크라테스가 결국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것 역시 과두정파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고대부터 유력했습니다. 그리고 플라톤의 저술을 보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 및) 30인 정부 사이에 선을 긋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는 대목들이 나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사람들 그런 인식이 퍼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크라테스가 30인 정권에게 저항한 방법 역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본문에 적혀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집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대로 30인 정부의 명령을 수행했고, 살라미스의 레온을 잡아와서 아마도 사형시켰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레온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취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정의는 일단 자기만 악행에 끼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을까요? 유태인을 찾아다니는 나치에게도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누군가처럼, 유태인/레온이 어떻게 되는지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일까요?

WR
5
2020-07-08 17:39:27
30인 정권에 대항했을 때 목숨을 걸었다는 표현은 어떤 역사학자들의 해석이 아니라, 아예 소크라테스가 직접 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정권은 그렇게 힘이 있었지만 옳지 못한 일을 하도록 저를 협박할 수는 없었으며, 또 우리가 원당을 물러나온 후에, 다른 네 사람은 살라미스로 가서 레온을 끌어 왔지만, 저는 집으로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 정권이 곧 붕괴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는 그 일 때문에 사형을 당했을 것입니다. 여기 대해서는 많은 증인을 댈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직접 저서를 남긴 적이 없고 플라톤이 쓴 서적들은 소크라테스와의 가상의 대화 내용 또한 담고 있다고 알려져있지만, 적어도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다룬 <변론>만큼은 재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충실하게 반영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위 내용은 그 변론에서 나온 소크라테스의 발언이고요.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고고학적 서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고요. 그리고 '민주정이 회복된 뒤 소크라테스가 결국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것 역시 과두정파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왜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죄목이 과두정파에 은연적으로 가담한 행위가 아닌 다른 죄목이었을까요? 
 
더군다나 소크라테스가 혐의를 받은 불경죄는 실제로 처분이 내려진 사형이 아니라 벌금형에 그칠 수 있던 범죄로 중범죄가 아닙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를 죽이려했다면 혹은 죽여야할 명분이 있었다면 더 확실한 죄목으로 기소를 했겠죠. 참고로 말씀 드리면 소크라테스가 어떤 명확한 '행동'으로써 불경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불경하여 주변 사람들도 그에 영향을 받아서 엇나갔다며 고소된 것도 그 당시로서는 최초의 사례였고요. 그만큼 법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억지 느낌이 강하게 나는 기소였습니다. 
 
고소인이 제시하는 형량과 피고소인이 제시하는 형량중에서 배심원단이 선택하여 처벌을 내리는 아테네의 사법 제도를 고려했을 때, 고소인이 제시한 사형은 죄목에 비해 훨씬 무거운 죄였으므로 만약 소크라테스가 시민들한테 고개를 굽히고 잘못했다는 시늉을 하며 벌금형 받겠다고 했으면 그렇게 되었을 거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의 장단에 맞추지 않고 자기가 생각할 때 잘못을 한적이 없다고 말하며 오히려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한테 오히려 상을 줘야한다며 쎄게 나가서 그들의 빈정을 상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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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7-08 18:15:00

플라톤의 <변론>이 실제 변론 과정을 충실하게 담았을 거라는 입장은 하나의 입장에 불과합니다. 수십 년 전까지는 플라톤의 저작에 관한 3중 분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초기 저작, 중기 저작, 후기 저작이 있는데, 초기 저작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전달하는 데 힘썼고, 중기 저작은 플라톤 자신의 철학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후기 저작에서는 자신의 기존 철학을 반성하고 극복하는 내용이 들어갔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여러 학자들이 등장함으로써 이 입장은 정설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사실 플라톤이 언제 각 작품을 썼는지 객관적인 판단이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그렇다고 내용을 가지고 저술 시기를 판단하려고 하면 "저술 시기로 내용을 판단할 수 있다 - 저술 시기는 어떻게 아는데? - 내용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이 입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기는 합니다. 디리클레 님이 읽으신 것도 아마 이러한 입장을 가진 저자일 것입니다.

 

 제 입장을 말씀드리면, 일단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사형이 실제 사건인 건 틀림없습니다. 280:220이라는 표결 등도 아마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 일체가 속기록처럼 실제 변론을 옮겨 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플라톤처럼 창조적인 저자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크세노폰의 <변론>과 차이가 나는 부분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플라톤은 그대로 옮겼고 크세노폰은 창작을 가미한 걸까요?

 

 설사 "제 목숨이 위험했습니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실제 발언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사태를 과장하거나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위험했을지는 별개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각오했을지라도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를 죽일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 역사는 이쪽을 지지합니다.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를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 하나 죽이거나 추방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죄목이 과두정파에 은연적으로 가담한 행위가 아닌 다른 죄목이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소크라테스가 명시적으로 과두파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심증이 있어도 "저놈은 크리티아스의 사촌이자 친구였다"로 기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 민주파가 다시 정권을 잡은 이후, 과두파에 대한 복수는 하지 말자는 동의가 있었습니다. 이미 국력 소모가 극심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복수를 하고 싶다면 길을 우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를 죽이려했다면 혹은 죽여야할 명분이 있었다면 더 확실한 죄목으로 기소를 했겠죠." 

 

 기소한 자들이 소크라테스를 죽이려 한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소크라테스가 받아야 할 형벌로 사형을 제시했다는 건 문헌으로나 실제 사형 집행으로나 증명됩니다. 사형을 제시하지 않았는데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았을 수는 없으니까요. 죽여야 할 명분은, 그들 자신은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당연히 없었습니다. 없었으니까 그런 궁색한 기소 내용이 나온 것이지요.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기소당한 항목은 두 가지였습니다. 1.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 2. 폴리스가 믿는 신을 믿지 않았다. 후자는 불경죄이지만 전자는 불경죄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가 굽혔다면 사형을 받지 않았을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WR
2
2020-07-08 18:18:52
저는 플라톤의 저작이 시대 구분에 따라 그 충실도를 가진다는 주장을 한 적도 없는데 왜 여기서 플라톤의 저작이 얼마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반영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플라톤의 <변론>에 대해서 저는 변론 원문을 하나 읽었고 이를 다룬 다른 책들도 여러 가지 읽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읽었던 책 내용들에서는 <변론>이 실제 재판과 사소한 차이는 있을지라도 변론 논리 구조 자체는 충실히 기재했을 거라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내용이 다르다고 거론하신 크세노폰의 <변론>은 제가 읽어보질 못했는데, 말씀을 꺼내셨으니 여쭤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슈가 되는 내용인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목숨을 걸었다는 변론이 크세노폰의 <변론>에 있다는 말씀인가요 없다는 말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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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7-08 18:54:53

 제가 왜 플라톤의 저술 시기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냐면, 디리클레 님께서 읽으신 책의 입장이 이러한 입장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리 구조 자체를 충실히 기재했다는 말은 변론 과정에 쓰인 모든 말을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살라미스의 레온 건을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저렇게 이야기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적었듯이,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저렇게 이야기했고 진심으로 자기가 위험했다고 믿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위험했을지는 또 미지수입니다.

 

 크세노폰의 <변론>에는 살라미스의 레온 건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습니다. 크세노폰의 <변론>은 사실상 플라톤의 <변론>에 대한 저격으로 시작합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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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8 19:00:16
레온의 체포와 관련된 내용의 유무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크세노폰의 <변론>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살라미스의 레온 건을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저렇게 이야기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적었듯이,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저렇게 이야기했고 진심으로 자기가 위험했다고 믿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위험했을지는 또 미지수입니다.'라고 이번 댓글에 써주셨는데, 
 
그러면 맨 첫 번째 댓글에 쓰신 내용인 '민주정이 회복된 뒤 소크라테스가 결국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것 역시 과두정파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고대부터 유력했습니다.'라는 내용은 어느 서적으로부터 추론된 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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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7-08 23:56:32

어디서 봤는지 확실히 기억이 안 나서 새로 찾아봤습니다. 아래는 Routledge Philosophy GuideBook to Plato and the Trial of Socrates(2004)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One possible charge is decidedly political in nature: the notion that Socrates’ political sympathies were an important issue to many jurors is not wholly without foundation. Aristophanes made Socrates the butt of many jokes, and sometimes he suggested that Socrates was sympathetic to Sparta, Athens’ enemy during the Peloponnesian War.” (p.91, 근거 중 하나로 아리스토파네스 새 1281-4를 들고 있습니다)

 

 “Other commentators, relying on evidence from later writers, believe that the real concern about Socrates involved his well-known association with three men in particular, Alcibiades, Critias, and Charmides, who, in different ways, did enormous damage to Athens.” (p.93. 여기서 말하는 later writers는 폴뤼크라테스, 이소크라테스, 크세노폰입니다)

 

 그리고 아테네 사법 제도는 죄에 따른 형벌을 정해놓질 않아서, 가령 불경죄로 유죄가 나왔을 때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는 철저하게 당시 분위기에 달린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불경죄라는 게 딱히 형태가 정해진 죄목이 아니라 정적을 축출하기 위한 도구로 자주 쓰였습니다. 그 예로, 철학자이자 페리클레스의 친구였던 아낙사고라스는 (아마도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에 의해서) 불경죄로 기소당했고 결국 추방당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된 알키비아데스 역시 정적들에 의해 불경죄 등으로 기소당했고 사태가 심상치 않자 적국으로 도주했습니다. 이후 부재 중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아테네의 사법 제도상 재판을 맡은 시민들은 원고가 제시하는 형량이나 피고가 제시하는 형량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즉 유죄가 선고된 뒤 원고와 피고 사이에는 치열한 눈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상대방보다 더 여론에 가까운 형량을 제시해야 하니까요. 터무니 없이 높은 형량이나 낮은 형량을 제시했다간 불리해지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멜레토스 측이 소크라테스보다 먼저 사형을 제시했다는 것은, 적어도 그들은 사형을 받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젊은이들을 망쳐놨다느니 도시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새 신을 도입했다느니 하는 사소한 기소 내용만 보면 이상한 일이지요. 배경이 더 있다고 보는 게 설득력을 가지는 대목입니다.

WR
2020-07-09 00:40:49

따로 시간 내주시면서 찾아주신 내용 써주신거 잘봤습니다.

다만 원고측이 불경죄 항목으로 사형 판결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신 부분은 동감이 안 가는 게, 일단 불경죄 처벌 사례의 하나로 들어주신 알키비아데스 같은 경우는 불경죄 처벌 그 자체에 대한 공포 때문에 도망친 게 아닙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함대를 이끌고 출정을 막 떠나간 상태에서 고소를 당하는데, 재판을 받으러 아테네 본토로 돌아간다면 자신이 기획했던 원정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그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엉망이 될 것을 알고서 적국으로의 망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건데요.

그를 고소한 정적들도 처벌 그 자체로 고통을 주기 보다는 재판을 벌려  알키비아데스의 원정을 방해하고자 재판에 회부한 거고요.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이들이 진짜로  사형 판결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핀트가 좀 안 맞는 느낌이 있네요.

페리클레스의 스승인 아낙사고라스가 추방당한 걸 말씀하셔서 생각난 건데, 파르테논 신전 건축의 총책임가인 페이디아스 또한 페리클레스의 친구였습니다.

이 사람도 불경죄로 처벌받는데, 이 사람의 죄를 보면 불경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알 수 있습니다. 페이디아스가 무엇을 하였냐하면 신들의 조각상을 만드는 데 이걸 자기나 자기 친구들을 모델로 삼아서 만들어버립니다.

신앙심이 대단히 높은 그리스에서 대놓고 인간을 모델 삼아 신의 형상을 만들었다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이렇게 증거가 확실한 상태에서 처벌하는 게 불경죄였습니다.

조각상 같은 확실한 물적 증거가 하나도 없다면 (돈을 받고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에게 당시 기준으로 불경한 사상을 말한 거라도 찾아야 하는데, 설사 소크라테스가 이 경우에 해당하더라도 추방당한 아낙사고라스의 사례를 봤을 때 추방형이 최대치였을 겁니다.

사실 확실한 죄를 지은 페이디아스부터가 사형당하지 않고 추방형에 그쳤다는 설도 있을 정도이니, 오직 '생각'과 '말'들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성 모독했다는 주장이 설사 먹히더라도 그걸로 사형 이끌어내는 건 무리였다고 봅니다. 이점을 당시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이들도 잘 알았으리라 보고요.

이들은 소크라테스가 '상식적으로 행동'하여 벌금형이든 뭐든 사형보다는  가벼운 형별을 내세우고 적당히 배심원들한테 굽혀서 그쪽으로 처벌받을 거라 생각했겠죠. 이렇게만 되도 소크라테스와 이들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충분했을 테니깐요.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에게 굽신대기는 커녕 도발하여 화나게 하고, 결국 사형 판결을 받습니다.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이들이 속으로는 진짜로 죽었으면 하고 바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 사형 판결을 얻어낸 건 죄목 그 자체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배심원들 시점에서는 대단히) 불량한 태도였습니다. 저는 원고인단이 고소할 당시에는 이런 변수를 당연히 예측하지 못했을 거라는 입장이고요.

서로 의견이 다른 부분도 있고해서 논의가 길어졌는데, 코시모님이 여러가지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궁금한 부분에 대해서 따로 시간 들이시면서 댓글로 알려주셔서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Updated at 2020-07-09 02:21:06

 알키비아데스가 형벌이 두려워서 도망간 게 아니고, 그의 정적들도 처벌을 기대한 건 아니라는 해석은 좀 생소합니다. 혹시 출처를 질문드려도 될까요?

 

 페이디아스의 경우는 아테나 신상에 쓰일 황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기소당했습니다. 그러고나서 불경죄로 기소당했다느니, 감옥에서 죽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으나, New Pauly는 진위가 의심스럽다고 쓰고 있습니다.

 

"Between 438/7 and 433/2 BC, P.'(페이디아스) connections with Pericles resulted in charges of having misappropriated gold meant for use in the statue of Athena Parthenos. Reports that he died in an Athenian prison (Plut. Pericles 31) are false, but it is certain that he was in Olympia following the charges raised against him. Stories of other accusations and his subsequent murder in Elis are suspect."

 

 만약 플루타르코스의 서술을 믿는다면, 페이디아스는 아테나 신상의 방패에 자신과 페리클레스의 얼굴을 조각했다는 이유로 불경죄로 기소되었고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아테네에 징역이 없었음을 고려하면 사형이라고 봐야겠지요. 또 플루타르코스는 페이디아스에 대한 공격이 페리클레스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었다고 명확히 서술했기 때문에, 불경죄가 정치적 공격의 수단이 되었다는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 라는 판단은 당시의 법적 안정성을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의 판결이나 형량이 분위기에 크게 좌우되었음을 알려주는 가장 큰 예시는 다름아닌 본문의 두 사건입니다. 소크라테스 건이야 불경죄로 사형받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지만, 아르기누사이 해전 건은 아예 법을 싹 다 어기면서까지 사형 언도와 집행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알키비아데스와 그 무리가 사형을 언도받은 바 있었으니 불경죄에서 사형이 나오는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를 따르자면 페이디아스 건 역시 그 판례입니다.

 

 그리고 멜레토스가 사형을 제시했다는 것 자체가 사형을 기대할 만했다는 하나의 근거입니다. 사형을 요구하면서도 '소크라테스가 알아서 잘 빠져나가겠지'라고 생각했으리라는 너무 많은 짐작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원고가 자기가 받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형벌을 받아내려고 했을 거라고 보는 게 상식적이죠. 멜레토스 측이 사형을 요구했으므로, 멜레토스 측은 사형을 바랐고, 실제로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고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WR
2020-07-09 09:29:37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이야기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실수도 있겠지만 투키디데스는 실증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학자고요.

그리고 이에 대해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알키비아데스가 고소당한 이유도 신의 조각상을 훼손했다는 혐의에서 비롯된건데, 투키디데스는 이에 대해서 사실 알키비아데스가 한 것도 아니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걸 알든 모르든 정적들이 그의 시간을 빼앗을 수 있다면 좋다고해서 고소를 한거고요.

또한 플루타르코스에 대한 서술에 의구심을 표하는 건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군요. 플루타르코스는 지금은 전해져오지 않는 고대 그리스 장서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지금은 파괴되었지만 플루타르코스 실존 당시에는 남아있던 조각상 - 페이디아스를 처벌에 이르게 한 조각상을 실제로 그리스로 가서 보고 왔다고 썼습니다.

고대 그리스 역사의 최고 권위자인 도널드 케이건을 비롯해서 제가 읽은 사학자들 대부분이 사람들이 플루타르코스의 글을 신빙성 있겨 여기며 많이 인용했고요.

이 이야기를 왜 했냐면 저렇게 조각상이라는 뚜렷한 증거가 있어야 사형 판결 받고 죽기 때문입니다. 페이디아스도 그렇고, 알키비아데스도 모두 물리적인 조각상에 대한 어떤 행동을 해서 기소를 당한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게 없었고요.

정치적 동기는 왜 계속 언급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속마음인거고 결국 처벌로 이끄는 건 재판에서의 다툼인데 말입니다.

이건 페이디아스도 그렇고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고소한 정적들이야 당연히 그들을 해치고 싶어서 고소했겠지요. 문제가 되는 건 죄의 경중과 그거를 증빙하는 증거의 유무인데, 아까부터 말씀드리지만 페이디아스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고 이걸 플루타르코스 또한 본인이 직접 그리스로 가서 봤다고 적었습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게 없고요. 애초에 제자들한테 돈을 받으며 교습활동을 한 것도 아니라서 아낙사고라스처럼 엮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원고가 사형 판결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실시했다는 의견은 동의라지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아보이는군요.

Updated at 2020-07-09 11:49:24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단, 투퀴디데스가 당시 역사에 관한 가장 믿을 만한 전거임은 틀림없으나, 알키비아데스가 정확히 무엇 때문에 도망갔는지,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이 알키비아데스를 형벌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발목만 잡는 게 목적이었는지는 투퀴디데스로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투퀴디데스가 그렇게 적었다면 그건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알키비아데스와 다른 인물들이 사형을 받았으므로, '정적들도 형벌에 처할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라는 입장은 흠이 생깁니다.

 

 원전을 확인할 상황이 아니라서 도널드 케이건의 책만 확인했는데, 알키비아데스가 형벌이 무서워 도망간 게 아니라거나, 정적들도 실제로 형벌을 줄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관련 부분의 묘사입니다.

 

"알키비아데스가 비교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것의 반향 역시 모든 기대와 반대로 나타났다. 비록 알키비아데스는 헤르메스 상 공격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적들은 만연한 공황 상태를 이용하여 그가 막 항해에 나설 때 그를 불신임당하게 했다. 그의 모든 적들은 이후에 그를 아테네 법정에 소환했는데, 이때 알키비아데스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은 원정을 떠나 자리에 없었고, 따라서 그는 법정에서 우세를 차지할 수 없었다." (pp.353-354/644)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삼단노선을 타고 살라미니아를 따라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살라미니아의 선원들로부터 아테네의 상황을 전해 들었고,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이탈리아의 투리에서 그는 육지에 내려 펠로폰네소스로 향해 갔다.

 

  아테네에서는 알키비아데스가 궐석 기소되었다. 기소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고 그의 재산은 압류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불명예의 비석에 새겨졌다. 그리고 도주한 자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1탈란트의 보상금이 약속되었다. 또다른 법령으로 알키비아데스의 이름과 추측컨대 유죄를 선고받은 나머지 사람들의 이름이 엘레우시스의 사제들에 의해서 저주받게 했다."(p.362/644)

 

 New Pauly(Der Neue Pauly)는 제가 아는 한 이 바닥에서 가장 권위 있는 백과사전입니다. 거기서 other accusations가 의심스럽다고 했으면, 틀림없이 의심할 만한 전거가 있을 겁니다. 심지어 "페이디아스가 아테네의 감옥에서 죽었다는 플루타르코스의 보고는 거짓이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건 전거 없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다만 저 자신이 그 전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플루타르코스가 거짓인 경우와 참인 경우를 나눠서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가 우리 눈에는 되게 옛날 사람처럼 보이지만 페이디아스로부터 500년 뒤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설사 아테네에 가서 문제가 되었던 조각상 - 아테나의 방패에 조각된 얼굴들 - 을 보고 왔다고 하더라도, 플루타르코스는 그게 페리클레스의 얼굴인지 누구 얼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원전에는 "양쪽으로부터 분명했다"고 적혀 있는데(보고 왔다는 말은 명시적으로 없습니다), 이 분명했다는 전해들은 이야기이거나 다른 페리클레스 조각이랑 비교하니까 비슷하더라 정도일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그로 인해서 불경죄로 기소를 받았는지 여부 역시 전해들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다른 전거가 있다면 플루타르코스도 당연히 의심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진술이 어긋날 때 우리가 둘을 의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되는 건 죄의 경중과 증거의 유무라고 적으셨는데, 이게 제가 반복해서 지적하는 것입니다. 당시 죄의 경중은 법전에 적혀 있지 않고 시민들이 판단합니다. 즉 분위기를 탑니다. 그리고 증거 유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알키비아데스가 헤르마를 파괴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유죄 판결과 중형 언도에 중요한 건 시민들로 하여금 유죄이고 중죄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한 주요한 도구는 증거보다는 연설이었습니다.

 

 정리하면

 

1. 증거가 없었으므로 소크라테스가 중형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조각상이라는 뚜렷한 증거가 있어야 사형 판결 받고 죽기 때문입니다.")

 : 중형을 받기 위해 증거가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증거가 없었는데도 알키비아데스는 유죄 및 사형을 받았고, 소크라테스 역시 아무 증거 없이 유죄를 받았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도발적으로 나오자 중형이 나왔다. 이는 유죄와 중형 여부가 증거가 아니라 시민들의 분위기에 좌우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2. 멜레토스가 사형을 요구하면서도 사형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사형을 요구할 때는 사형을 기대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3. 멜레토스 패거리는 어떻게 사형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혹은, 어떻게 아무 증거도 없이, 소크라테스가 딱히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는데도, 280:220으로 유죄가 나왔을까?

 : 소크라테스를 향한 시민들의 눈초리가 절대 곱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곱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로 짐작해볼 수 있다.

 

 1) 당시 종교적으로 급진적인 태도를 보이던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이 불경죄에 상당히 민감했다 

 -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설득력 부족

 

 2) 소크라테스에게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그 모습이 중장년층 시민들에게 불쾌하게 다가왔다

 - 이걸로 유죄 및 사형까지 가는 건 좀 과하다

 

 3) 소크라테스가 타락시켰다고 생각되는 인물들 중에는 배신자 알키비아데스, 30인 정부의 중요 인물 크리티아스 / 카르미데스가 끼어 있었다. 즉 소크라테스가 이런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뒤집어썼을 가능성이 있다.


 제가 보기에는 3)이 꽤 그럴듯한 설명입니다. 특히 고발자들 중 하나인 아뉘토스는 30인 정부 시절 추방당했다가 돌아와서 민주 쿠데타를 일으킨 핵심 인물로서, 이 고발을 좀 더 정치적으로 읽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이 모든 걸 설명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판결에 분명히 중요한 요인을 차지했을 겁니다.

 

 * 아낙사고라스가 돈을 받고 제자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나요? 아낙사고라스는 소피스테스 세대가 아니고, 그의 제자래봐야 페리클레스 정도인데 둘은 친구에 더 가까웠습니다. 아낙사고라스는 태양이 불타는 돌덩어리라고 했다가 불경죄로 엮였는데, 거기에는 그가 평소에 하고 다녔던 말과, 특히 그가 써낸 책이 주효했을 겁니다.

 

WR
Updated at 2020-07-09 17:24:56

2천년도 더 지난 일을 현재 시점에서 정확히 알 수 없는건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렇게 따지면 New Pauly에서 의구심을 표한 부분 또한 확실한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도 그런 의심에 대한 근거로서 어떤 입장이 담긴 서적을 참고한 거 아닌가요.

당연히 역사를 다루는 입장에서는 어떤 사건들에 대해서 역사가의 주관과 입장이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포함하여 고대 그리스 역사를 다루는데에 있어 투키디데스와 플루타르코스의 서적이 폭넓은 인용을 받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와 혐의를 받은 무리들이 받은 처벌은 죄목 그 자체뿐만 아니라, 알키비아데스가 법정에 나서지 않은 것 그 자체 또한 영향을 준겁니다. 그래서 '궐석 기소'라 표현한 거고요.

인용하신 부분에 선후 관계가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서술을 봐도 아테네가 알키비아데스를 본국으로 이끄려는 자들을 파견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도망가버렸고, 이를 인지란 상태에서 피신한 알키비아데스가 부재하는 가운데 재판이 이루어진 거고요.

알키비아데스도 조각상과 관련되어 고소당했다고 말씀드렸는데 자꾸 물적 증거가 왜 없다고 말씀하시는지도 잘 이해가 안 가고요. 애초에 고발장에 알키비아데스가 본인 집에서 신의 형상을 꾸며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써놓았는데, 이게 조작된 증거라는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실체가 없는 거라는 말씀인가요?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알키비아데스의 죄목이 어떤 물리적 행위에 대한 건 틀림이 없는데, 소크라테스는 아예 고발장에조차 이런 주제가 될 물체라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아까부터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죄의 경중을 판단하는 건 당연히 배심원들인 시민이고 어떤 범죄에 대해 고정된 형량이 딱딱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 게 사실입니다만, 그게 어째서 재판 결과가 시민들의 분위기에 의해 좌우되는게 당연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지 잘 모르겠군요.

오히려 그런 감정적이고 돌발적인 판단이 나왔기 때문에 플라톤 <변론>에서의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을 비판하고 있던 거고, 이 일이 설사 사실이 아니더라도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그 자체를 비판하고자 하는 플라톤의 의중이 들어가있던거 아닌가요.

역사에 치욕으로 남고 비판을 받을만한 행동이었다는 인식은 원래 재판이 그렇게 되면 안 되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리 진행되었다는 사고가 깔려있는 발상입니다. 그런데 이걸 원고측에서 배심원들이 이리 감정에 휘둘려 판결할거라 예측하고서 사형을 확신했다는 입장은 저로서는 동감이 가질 않네요.

버젼이 여러가지 있는 <변론>뿐만 아니라 투키디데스나 플루타르코스 저작들에 담긴 내용들에 대해서까지 의구심을 표한다면 저로서는 관련 종사자도 아니고 전공도 아니기때문에 더이상 논의를 이어가기 힘들거같네요.

2020-07-09 23:31:15

저는 투퀴디데스 플루타르코스를 덮어놓고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사실 관계를 의심하는 의견이 있다는 사실을 전달한 것일 뿐입니다. 게다가 저 개인은 플루타르코스가 참인 경우와 거짓인 경우를 둘 다 이야기했습니다.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말을 하고 있는 건 디리클레 님입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처벌이 두려워서 도망간 게 아니다. 정적들도 처벌을 줄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라는 해석은, 사료에 기반해서 사실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인물들의 머릿속에 대한 추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근거를 질문드리자 투퀴디데스의 해석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가져온 부분에서 케이건/투퀴디데스는 그냥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소식을 듣고 도망갔다. 아테네에서는 궐석 재판을 통해서 사형을 선고했다.” 등 사실만 전달하고 있지 머릿속에 대한 추정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원래 재판이 그렇게 되면 안 되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리 진행되었다는 사고가 깔려있는 발상입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원래 그게 옳든 그르든 실제 재판은 상당수가 당시의 분위기와 민중들의 감정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었습니다. 디리클레 님도 실제로 감정에 좌우된 경우가 있었다고 말씀하시고, 저도 똑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감정에 좌지우지되므로, 분위기를 잘 읽고 여론조작에 능하다면 별다른 증거없이도 유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는 거지요. 그 사례가 소크라테스 재판입니다. 어디에 반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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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8 18:48:25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충실히 반영되는 초기 저작인가에 대한 문제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플라톤의 창작이 가미되지 않았다'는 게 전제되어 있는 듯합니다.

만약 창작이 가미되어 있다면 '목숨을 걸었다'라는 대목은 단지 수사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글쓴이님께서 읽으신 저작에서 '실제 재판과 사소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변론 논리 구조는 충실히 기재했을 것'이라고 서술하였더라도 '사소한 차이' 부분에 해당된다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본질적인 변론 논리구조에 해당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위험했을지의 여부는 코시모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별개의 문제라는 점도 여전히 유효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부분 중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크세노폰의 <변론>에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내용이 나오는지 여부가 왜 중요한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핵심은 동일한 사건에 대해 두 저작이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고, 어떤 저작이 실제 사건에 더 가까웠는지를 알 수 없다면 두 저작 모두 100%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되는 것 같습니다. 크세노폰의 저작에서 소크라테스의 '목숨을 걸었다'라는 발언이 나오는지 확인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2020-07-08 18:49:46

앗 코시모님 댓글이 달리지 않아 작성중이었는데 제가 글을 쓰는 사이에 답을 다셨군요.. 두 분의 논쟁 흥미롭습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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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8 19:10:55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드리자면, 아주 오래전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책이 큰 틀에서 봤을 때는 가리키는 방향이 다르지만, 세부적인 내용에서 그 둘이 공통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저는 그 공통된 내용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을 했기에 혹시나 크세노폰의 책에 공통된 내용이 담겨 있는지 여쭤본 겁니다. 저는 위댓글에서 쓴것처럼 플라톤의 <변론>만 읽어봤는데, 해당 내용이 크네소폰의 <변론>에 있는지, 있다면 어떤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지 궁금했고요.

위에 코사모님이 크세노폰의 저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고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그렇다면 저도 어떤 저서가 더 사실에 가까운지 알 수 없기때문에 제가 읽은 플라톤쪽 주장이 맞다고 말할 수 없는 게 맞습니다. 
Updated at 2020-07-08 23:50:14

확실히 공통되게 서술하고 있다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Updated at 2020-07-09 00:18:28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추적하려는 시도는 어쩔 수 없이 플라톤과 크세노폰에 많이 의지하게 되는데, 둘의 묘사가 부딪칠 때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지는 예전부터 문제거리였습니다.

 

 20세기 후반까지는 플라톤을 따르는 쪽이 주류였습니다. 아마도 플라톤의 명성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이후로는 분위기가 바뀌어서, 플라톤 정도 되는 철학자가 스승의 사상이나 행동을 그대로 옮겨놨을 리가 없지 않냐는 입장이 많아졌습니다. 플라톤만이 아니라 사상사의 거인들을 살펴보면 이전 논의들을 자기 식으로 소화하고 발전시키지 선인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주력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요즘은 플라톤보다는 약간 모자라다고 볼 수 있는 크세노폰의 묘사가 실제 행적과 더 가깝지 않겠냐는 입장이 많아졌습니다.

Updated at 2020-07-08 18:35:12

 마니아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야기를 보니 너무 반갑네요!! 다른 시리즈도 올리신 거 봤습니다. 다 읽어보려고요. 감사합니다.

WR
2020-07-08 23:02:41

이런 의견도 있다고 편하게 읽어주시면 저야말로 읽어주시는 거에 대해 감사할 일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2020-07-08 18:35:07

좋은 내용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WR
2020-07-08 23:03:06

2년전 즈음에도 프톡에 부족한 글 쓰면 좋게 봐주시던게 기억나는데, 응원의 말씀 남겨주셔서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2020-07-08 19:31:08

본문과 댓글 너무 흥미롭네요.

WR
Updated at 2020-07-08 23:04:22

저도 다른 분들이 남겨주시는 말씀들에서 모르던 사실이나 관점들도 배워가고 좋네요.

격론(?)이 벌어지기 쉬운 nba선수나 응원팀 말고 소크라테스가 주제이니만큼 징계로부터도 안전(?)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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