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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부터 너에게 옳은 말을 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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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6-16 10:04:56

지난 일요일, 아이가 하루종일 아팠습니다.

장염, 혹은 감기로 추정되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강제로 병원에 데려갈 정도는 아니었어서

집에서 약을 먹이며 쉬게 했죠.

 

9살 아이니까 아프니 아무래도 좀 징징징징 합니다.

어제는 마침 장모님이 와 계셨는데 

손주가 아프니 옆에 붙어앉아서 손발도 주물러 주시고,

계속 상태가 어떤지 물어봐주시고 하셨죠.

 

 

그런데, 물어보시는 와중에

9살 아이가 배가 한창 아픈 상황과 시점을 고려했을 때

제가 생각하기에는 약간 불필요한 타이밍과 방식으로

옳은 말씀들을 하시더군요.

 

"재혁아, 아프다고 그렇게 웅크린 자세하고 있으면 더 아파요.

 몸을 이렇게 쭉 펴고 바른 자세로 있으면서,

 나는 이제 하나도 안 아프다 생각해야 안 아파지고 빨리 낫지"  

 

이 비슷한 말씀들을 계속하셨는데

틀린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웅크린다고 뱃 속이 덜 아플리는 없으니

이왕이면 자세가 바른 게 나을 겁니다.

 

아프다 아프다 하면서 징징거리는 것보다는

안아프다 안아프다라고 스스로 생각을 주입시켜라도 보는 게 

그 반대보다는 뭐라도 나을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스스로 자기 뇌와 뱃속을 속이는

플라시보 효과라도 기대해 볼 수 있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내 아들이라면 저 말이 도움이 될까

위로가 될까? 힘이 될까?

아니 귀에 들어오기는 할까?

나는 아픈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고 약올리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저 말씀이 '옳은' 말씀이라 한들

지금 상황에서 '맞는' 말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 초기에는 많은 부부싸움을 한다고 말들을 합니다.

저도 실제로 초기에 부부싸움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서로의 라이프 스타일을 조율해서 맞춰가고,

서로 다르게 생긴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데

꽤 시간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조율과 인정이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벌어지는

다툼의 유형 중 하나가 상대를 내 라이프 스타일로,

혹은 삶의 기준으로 끌어오려 할 때입니다.

 

역시 개인차가 크겠지만,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대체로 결혼 초기에 와이프 쪽에서 

남편의 무언가를 바꿔보고 싶은 생각을 갖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런 역경에 처했었습니다!

 

 

제 경우는 너무 오래 돼서

대화했던 사안이 어떤 것들이었는지는

사실 전부 기억도 안 납니다.

하지만 어떤 사안에 대한 것이든

대화의 전개 패턴은 항상 거의 동일했고,

그 날도 그런 대화가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을 겁니다.

 

그 동일한 패턴을 정리하자면,

제 귀에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오빠가 이래이래 저래저래 한 방향으로 노력을 좀 더 해주면 좋겠어요.

객관적으로 누가봐도 이래이래 저래저래 한 방향으로 가는 게 맞는 거잖아요.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같이 이런 방향으로 노력을......"

 

저는 그 순간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 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같이 올라앉아 이야기하고 있던

침대 위 이불에 머리를 처박았습니다.

 

3~5초 되려나 그렇게 머리를 처박고 있다가 쳐들면서 말했습니다.

 

난 니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정말 미칠 것 같다.”

 

와이프야말로 이 인간이 미쳤나 하고 생각했으려나요.

 

 

숨막혀서 죽겠다

이건 무슨 벽같은 건가

옳은 말로 사람을 옭아매놓고 때리는구나

 

이런 것들이 솔직히 제가 그 때 느꼈던 감정들입니다.

솔직히 좀 유치한 감정도 섞여있을지라도 말입니다.

 

물론 서로의 생활 패턴을 맞추기 위한 과정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다만, 제가 낙타가 회피하는 것처럼 머리를 처박게 된 이유는

옳은 명분을 담을 말들을 앞세워 빈틈을 주지 않은 채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을 몰아간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와이프는

제가 보다 많이 자고,

PC는 덜 만지기를 바랬습니다.

 

와이프는 충분한 휴식과 마음의 안정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보다 심신을 여유롭고 안정적으로 하며

최대한 많은 시간을 저와 공유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저는 잠자는 시간이 상당히 짧은 사람이었고,

와이프와 함께 하는 시간을 최대한 충실히 하되

그 이후 시간은 일정 정도 혼자 보내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보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생활패턴을 갖고

부부 간에 공유하는 바를 넓혀

보다 건강한 삶을 지향하자는 말은

너무나 지당하게도 옳고도 타당한 말이어서

반박하기도 어려운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내용 상 옳은 말이 반드시 맞는 말이 되지는 않으며,

설사 맞는 말이라 할지라도

적절한 말이 되는 것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 간의 생활의 폭의 넓히자는 말은 분명히 옳은 말이지만,

공동의 생활에 충실하다는 전제 하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일정 정도 갖는 것은

그 역시 건강한 삶을 위해서 옳은 말에 해당합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자신만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이나 독립적인 자아를 위해서는

옳지 않은 말에 해당할 수도 있습니다.

 

한 편의 말이 옳은 말이라 해서

그 반대편의 말이 반드시 틀렸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옳은 말이라 해서

그 정도가 한 쪽 극한에 치우칠 때도 옳은 말에 해당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못마땅하거나,

자신의 판단 기준에 벗어나는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은 틀렸다거나,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비윤리적이라고 설정한 후 말을 풀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기 좋기 논리 전개에 해당하기 때문이죠.

 

사실 많은 경우 그 뒤편에 묻어둔 마음은

그저 내 마음에 안들기 때문에인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도 사람이기에

나를 위해 해주는 옳은 말과

자신의 생각을 강제하려는 옳은 말 간에 차이를 분명히 인지합니다.

 

옳은 말도 타이밍과 전달 방법이 잘못되고,

상대방의 마음에 닿지 못하면 실질적으로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아픈 아이에게 바른 자세와 좋은 생각을 하라는 말은

분명히 잘못된 말은 아니지만,

아픈 사람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말도 아니면서

아픈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상황에 맞지 않는 동떨어진 지적으로 들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장모님께서도 아이가 아프니

안타까워서 하시는 말씀이신 줄 잘 알 수 있었기에,

30년 가까이 교직생활을 하셨던 분이셔서인지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방식조차도

바름을 먼저 지적하는 것으로 표현되곤 하는 것으로

굳어진 것으로 생각되어서

장모님 입장도 이해가 되긴 했습니다.

 

다만, 저는 대신 그저 별다른 말 대신

배가 아프다는 아이의 배를 계속 쓰다듬어 주고

밥을 못 먹고 있는 아이에게 사탕을 입에 물려줬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것이 그 시점에서

가장 적절한 행동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논리적이고 냉철함,

그리고 짧은 지식들을 과시하기 위해

불필요한 정도의 옳음과 바름을

상대를 향해 쏟아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잠시 돌아보았습니다.

 

 

와이프는 이제 시간을 함께 하기는커녕

저는 일정부분 방치상태입니다.

아이의 학업과 교유관계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는 시기가 온 것이죠.

 

압박감이 덜한 것 같으면서도 좀 서운하기도 하고

사람 마음이란 게 항상 균형된 만족이란 게 어렵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요즘입니다....  

 

 

13
Comments
1
2021-06-16 10:18:11

옳은 말로 괴롭히는게 정말 힘들죠.

뭐라 반박하기도 그렇고, 지치지도 않더라구요.

WR
2021-06-16 10:25:29

반박하는 것 자체가 내가 나쁜 사람으로 몰리는 느낌?, 

뭐 그렇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

말로 맞아서 코너에 몰린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더군요.

2021-06-16 10:28:42

맞아요. 코너에 몰리는 느낌.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옳은 말로 흠씬 맞아봐야 조금 고치더라구요.

2
2021-06-16 10:21:05

정독했습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시네요. 특히 말씀하시는 경우가 좀 많은 것 같아요. 뭔가 상대방을 자기한테 맞추기 위해 바꾸려고 노력하다가 사단 나는 경우가 많죠. 그게 그럴 필요가 없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줄 필요성도 느껴지고 알아가게 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참고로 저는 사랑의 5가지 언어라는 책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기 블로그에 간략하게 설명해놨네요.

https://brunch.co.kr/@jazz0814/58

와이프는 남편이 자기와 그냥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 하는데에 행복을 느끼는데 남편은 설거지나 청소등 뭔가 해주면 좋아할꺼야 하며 평행선을 달리는데 상대방이 어떤거에 사랑을 느끼는지 아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WR
2021-06-16 10:27:05

사실 저도 예전에는 눈치없는 맞는 말 폭격을 자주했던 편이라

반대로 겪어보고 나선 이전의 언행을 많이 반성하고 살고 있습니다. ㅎㅎ

1
2021-06-16 10:57:11
마음에 와닿는 말씀이네요.
저도 그동안 독선적인 옳고 바름을 상대에게 강요함으로 얼마나 적절하지 못한 말을 했었나 반성하게 됩니다. 한순간 반성일 뿐 앞으로 삶의 태도도 바꾸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더라도여.
잠시나마 스스로를 성찰해보게 되는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개로, 제가 케이치님을 잘 아는건 아니지만 케이치님 같은 분이 '악'소리 내며 침대 이불 위에 머리 박는건 도저히 상상이 안되네요ㅎㅎ
 

WR
1
2021-06-16 11:08:08

정말 무슨 벽과 부딪히는 느낌이어서 

숨막혀 죽겠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와이프도 당황했을지 싶긴 한데,

그 상황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었던 듯 합니다. 

1
2021-06-16 12:41:06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셨네요ㅎㅎ
갈등의 상황에서 어느 순간에도 한쪽의 말이 백프로 옳은 경우는 없는것 같습니다.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그걸 간과하는 순간 그저 상대방을 고집센 사람으로 치부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저는 매니아의 존중과 배려라는 모토가 넘나 좋습니다

WR
1
2021-06-16 12:59:54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신 분들이 아마 많으실 걸로~ ㅎㅎ

업무적인 부분이라면야 각 잡고 상대 논리의 비약이나 문제점을 지적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가족 내에서 대화라는 게 그렇게 풀어갈 수도 없는 일이니 더 난감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매니아의 존중과 배려의 모토를 극호합니다.

1
2021-06-16 15:09:22

저도막 이런일 겪어선지 심하게 공감이 되네요. 주말에 엄마가 산에 가시면 집에 혼자라 하고싶은대로 있곤 합니다. 집이 어질러있는상태로 엄마가 돌아오시곤 하죠.

저는 되도록 그전에 치워야겠다 생각은 하면서도 몸은 최대한 버티다 결국 어질러진 집에 도착하시고 얘기가 이어집니다.
'가족끼리 공동으로 쓰는 공간은 깨끗하게 유지해야한다'는 옳은 말로 공격? 당한 저는 솔직히 할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치워지지 않은 집이라는 문제는 결국 제가 치우면 해결되는건데 거기에 저한테 좀 치워라는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보니 좀 짜증이 나더군요.
결국 일요일을 넘겨 월요일 아침 청소를 했습니다.

물론 제 잘못 100%라고 볼 수 있습니다(저도 쓰고 보니 그렇더군요) 그냥 앞으로는 최대한 치우는 걸로...하는게 맞다지만 나도 치우는거 신경 안쓰고 놀고싶은걸! 답은 독립인가! 메이드인가!

1
2021-06-16 21:35:11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항상 잘 보고 있어요!!

WR
2021-06-16 22:19:47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1
2021-06-17 11:31:11

실제로 복통이 있는 경우 다리를 배 쪽으로 당기는 (웅크리는) 것이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덜 아픈 자세로 가게 됩니다.

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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