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년 동안 단 두명의 선수가 달성한 진기록
지난 50년 동안 NBA 데뷔 후 3년 만에 한 팀에서 3번의 우승을 경험한 선수는 스캇 윌리엄스(Scott Williams, 시카고 불스)와 데빈 조지(Devean George, LA 레이커스)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두 선수에게는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1987년 19살의 스캇 윌리엄스(Scott Williams)는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의 2년차 센터였습니다. 그해 10월 어느날 학교에서 연습중이던 스캇 윌리엄스는 딘 스미스 감독으로부터 청천병력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날 부부싸움 끝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살하고 그 총으로 자살했다는 끔찍한 내용이었습니다.
스캇 윌리엄스 가족의 엄청난 비극에 많은 노스 캐롤라이나 동문 선수들이 안타까워 했고, 그 중에는 제임스 워디와 마이클 조던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선배들의 격려에 윌리엄스는 다시 농구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스캇 윌리엄스는 어깨 부상으로 고생했고, 그가 졸업했을 때 NBA의 어느 팀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윌리엄스는 NBA에 드래프트 되지 못해서 좌절했습니다.
그때 윌리엄스를 친동생처럼 아꼈던 제임스 워디가 레이커스의 제리 웨스트 단장에게 스캇 윌리엄스를 영입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윌리엄스는 어릴저부터 열렬한 레이커스 팬이었습니다. 구단 사정상 윌리엄스와 계약이 어렵게 되자 워디와 딘 스미스 감독은 마이클 조던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이클 조던이 제리 크라우스에게 스캇 윌리엄스와 미니멈 샐러리 계약을 맺을 것을 건의했는데, 윌리엄스가 팀에 있는 동안 자신이 그의 멘토가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미니멈 계약이 이뤄져서 그가 팀에 합류한 후 조던은 윌리엄스의 락커를 자신의 바로 옆에 배정하도록 코치진에게 요구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스캇 윌리엄스가 불스에 오래 머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6' 10"이던 그의 포지션에는 젊은 피의 호레이스 그랜트와 스테이시 킹이 있었습니다. 센터에도 카트라이트와 윌 퍼듀가 있었습니다
만년 벤치워머 윌리엄스를 마이클 조던은 혹독하게 갈궜습니다. 윌리엄스는 조던이 자신을 위해 그러는 것을 알고 모두 감내했습니다. 그런데 시즌 중후반부터 시카고 불스는 내홍을 겪었습니다. 불스의 백업 파워포워드 스테이시 킹은 대학시절 슈퍼스타로 1989년 드래프트 전에 넘버1픽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성격의 결함이 알려지면서 최상위 픽을 가진 구단들이 모두 스테이시 킹을 패스해서 불스는 킹을 6번 픽을 드래프트하는 예상 외의 성과를 올렸습니다. 언론은 역대 불스의 드래프트 중에서 조던과 쌍벽을 이루는 대박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스테이시 킹은 본인의 기대와 달리 데뷔 첫 해에 식스맨으로 뛰면서 호레이스 그랜트의 백업을 맡았습니다. 이듬해인 90-91 시즌에도 여전히 백업 선수로 머물자 킹은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고 결국 필 잭슨 감독과 코치진의 눈밖에 나 버렸습니다. 플레이오프 때 스테이시 킹은 서서히 로테이션에서 배제되었고 그 자리를 윌리엄스가 메꿨습니다. NBA 파이널이 펼쳐질 때 스캇 윌리엄스는 기존에 스테이시 킹에게 주어졌던 역할을 완벽히 소화했습니다. 그는 프로 대뷔 첫 해에 우승 반지를 얻었습니다.
스테이시 킹과 불스의 불화 속에서 스캇 윌리엄스는 미니멈 샐러리 15만 달러의 두배가 넘는 35만 달러로 불스와 재계약 했습니다. 마이클 조던의 모진 갈굼을 이겨낸 덕분에 윌리엄스는 2년차에 훨씬 더 많은 롤을 맡았습니다. 그는 2년차에도 우승 반지를 얻었고, 연봉을 두배 가까이 올리며 불스와 계약을 연장했습니다. 데뷔 3년차에는 시즌 동안 다섯 경기에 선발로 출장했고, 경기당 평균 20분의 출장 기회도 얻어 팀의 확실한 전력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데뷔 3년차에도 윌리엄스는 우승 반지를 얻었습니다. 드래프트에서 버림받은 선수가 데뷔 3년만에 3번 우승하는 경우는 앞으로도 스캇 윌리엄스가 유일할 것입니다.
세번째 우승 조던이 은퇴하자 윌리엄스는 식서스와 다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의 연봉은 NBA 평균보다 제법 높았습니다. 윌리엄스는 2005년까지 15년동안 NBA에 머물며 3천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벌었습니다. 커리어 연봉이 3천만 달러이면 90년에 NBA에 입성한 선수들 중에 아주 상위권입니다. 스캇 윌리엄스는 NBA 마지막 시즌에 클리블랜드의 최고 베테랑이 되어 루키였던 르브론 제임스의 바로 옆 라커를 사용했습니다.
데빈 조지는 미니애폴리스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은 슬럼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살인사건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동네에서 부모의 케어도 거의 못받고 자란 데빈 조지는 고등학교때까지 몸이 허약한 농구선수였습니다. 데빈 조지가 고등학교 졸업이 임박했을 때 NCAA 디비전 1에 속한 어느 대학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디비전 2 학교들에게서도 오퍼를 받지 못했습니다. 조지는 결국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NCAA 디비전 3 학교인 오그스버그 칼리지에 입학해서 농구선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대학 입학할 때 186센티미터에 마른 체형이었던 조지는 그때부터 키가 자라고 몸이 불어나서 3학년으로 올라가지 직전 2미터의 장신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때 여러 NCAA 디비전 1 학교로부터 편입을 원하는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데빈 조지는 자신을 받아줬던 오그스버그 칼리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조지는 오그스버그가 속한 디비전 3 컨퍼런스에서 2년 연속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고 4학년 때에는 평균득점 27.5를 기록하며 오그스버그를 디비전 3전적 24승 4패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미니애폴리스 밖에서는 어느 누구도 오그스버그 대학과 데빈 조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데빈 조지는 1999년 NBA 드래프트 캠프에 참가해서 여러 구단의 관계자들에게 자신을 알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드래프트 캠프에 나타났을 때 단 한명의 에어전트도 조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지는 드래프트 캠프의 경기에서 디비전 1 선수들로 구성된 선수들과 맞서 평균 14득점에 10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모두에게 인상을 남길 만한 투지와 열의를 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지는 LA 레이커스의 제리 웨스트 단장의 눈에 들었습니다. 데빈 조지는 1999년 드래프트에서 LA 레이커스로부터 1라운드 23번째 픽으로 지명받았습니다. 역사상 유일하게 NCAA 디비전 3 출신 선수가 NBA 1라운드 드래프트로 지명된 것입니다.
조지는 1999-2000시즌 루키로 LA 레이커스에 합류했는데 그 팀은 스타 플레이어들도 많고 선수층이 두터웠습니다. 데빈 조지는 첫 해에 49경기에서 경기당 7분밖에 출전시간을 얻지 못했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 그는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시즌 후에 자신을 드래프트해 준 은인 제리 웨스트가 레이커스를 떠났습니다. 그의 팀은 우승했지만 데빈 조지는 좌절했습니다. 그때 한 선수가 데빈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Deal with it. This is the NBA."
코비 브라이언트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디비전 3 출신인 데빈에게 동지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자로 남았습니다. 조지는 모든 연습에서 코비의 1-1 맞상대가 되었습니다. 매 경기 몸을 던지는 투혼으로 팀 내에서 데빈 조지의 비중은 갈수록 높아졌고, 3년차에는 전 경기에 출전하며 평균 21.5분의 출장 기회를 얻어 명실상부 레이커스의 로테이션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레이커스는 3번 연달아 우승했고, 데빈 조지의 루키 계약은 끝났습니다. 데빈 조지와 재계약을 망성이던 레이커스에게 코비 브라이언트가 직접 나서서 그에게 오퍼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데빈 조지는 레이커스와 4년 2천만달러에 가까운 대형 계약을 성사시켰습니다. 데빈 조지는 11년 동안 NBA 선수로 활약했고 그 중에서 7년을 레이커스에 몸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레이커스 커리어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Kobe Bryant took me under his wing.”
골스와 랩터스에서 우승한 그 선수도 있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