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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황인태, 한국에서 NBA로 가는 길을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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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08-31 16:01:28

 

   지난 시즌에 '한국 국적의 심판이 NBA 정규 시즌 경기에 배정됐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죠. 

   그 소식의 주인공인 황인태 심판님의 여정을 다룬 두 기사를 번역해보았습니다. 

 

  지난 2022년 10월 11일자로 AP에 올라온 Tim Reynolds의 아티클과 올 7월 13일자로 Washington Post에 올라온 Ben Golliver의 아티클을 우리말로 옮긴 뒤, 중복된 내용을 제하고 한 글로 합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내용 상의 편집이나 수정은 없었고, 글 흐름에 맞게 단락을 재배치하기만 했습니다. 

 

  워낙에 공부 목적으로 해본 졸역임에다, 원활한 의미 전달을 위해 의역을 다소 섞었습니다. 이 점 양해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원문입니다.  

 

https://www.washingtonpost.com/sports/2023/07/17/intae-hwang-nba-referee/

 

https://www.nba.com/news/for-one-referee-path-from-korea-to-the-nba-wasnt-easy

 



 

 

 

 

한국에서 NBA 심판이 되기까지, Intae Hwang이 걸어온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

 

 

Intae Hwang's Trailblazing Journey form South Korea to NBA Referee 

 

 

 

by Ben Golliver, <The Washington Post>

Jul 17, 2023

 

 

 

 

 

비 북미 출신 최초의 NBA 심판이 된 황인태 심판. ⓒ AFP

 

 

 

 

 

   마산의 한 중학교.

 

   축구를 하는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운동장에는 발디딜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미처 시합에 끼지 못했던 중학생 황인태는 축구 골대 옆에 서서 끼어들어갈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운동장 모퉁이에 우두커니 세워져 있던 농구 골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북적거리는 축구 골대와는 달리, 학생들의 관심을 받지 못해 외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 이야기는 1993년에 시작된다. 

 

   1993년은 한국 프로농구 리그(KBL)가 출범되기 4년 전이었고, 그의 고향인 마산의 작은 동네에서는 아직 NBA 중계를 볼 수가 없을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근력이 부족해 림까지 공을 던지지도 못하던 그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공을 던져대곤 했다. 

 

 

   어린 인태는 농구 선수를 꿈꿨으나,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내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산외국어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후 학교 농구 동아리에 가입한 그는, 지역 라이벌 대학과의 친선 경기에 출전했다. 치기어린 1학년이었던 인태는 그 날 하프타임 때에 코트에 나가 덩크슛을 시도했는데, 보기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덩크를 실패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졸업반이던 동아리 선배, 신기록 군이 인태의 장난을 목격한 것이다. 그는 인태의 허세와 상대방에 대한 결례를 따끔하게 다그친 뒤, 농구의 기본적인 부분들에 대해 숙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코트 규격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나? 농구공 지름이 몇이고? 림에 후크가 몇 개 달린지는 아나?'

 

  

   신입생이던 인태에겐 그 즉석 테스트를 통과할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 '농구와 관련된 모든 걸 다 알고 싶다!'라는 열망이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한 신기록 군은 후에 지방에서 활동하는 농구 심판이 되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은 인태 역시 2004년이 되자 생애 첫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그는 심판이 된 신 군을 보며 심판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이렇듯, 중학생 때에 축구 경기에 끼지 못해 운동장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됐던 것,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 4학년 선배 신기록 군을 만났던 그 두 사건으로 인해 어린 인태가 농구 심판이라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두 사건은 43세가 된 황 심판을 비 북미 출신 첫 정식 NBA 심판으로 만들었다. 

 

 

   " 'NBA'라는 곳은 그저 꿈 속에 있는 장소일 뿐이었죠."

 

 

   황 심판이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얘기했다. 

 

 

   "TV로 보긴 했습니다만.. 그게 다였죠. 단 한 번도 NBA에 가려는 시도를 (진지하게)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황 심판이 NBA의 문을 두드린 것이 아니었다. NBA가 그를 찾아냈다. 

 

   지난 2019년, 황 심판은 NBA의 '심판 양성 프로그램(Referee Development Program, 이하 RDP)'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초청장을 확인한 그는 아내와 두 자녀를 낯선 땅, 미국으로 데려왔다. 가족을 모두 데리고 뉴 저지의 Fort Lee로 거처를 옮긴 덕에 NBA의 초청에 화답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NBA와 WNBA, 그리고 NBA G-League에서 활동할 심판을 육성하는 프로그램이다. 


   그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발전'을 향한 그의 무서운 집념 덕분이었다. 그 집념이 일가족을 낯선 미국으로 이끌었다.  

 

 

   "심판을 보는 것도 중독성이 있거든요."

 

 

   '심판을 본 첫 경기가 기억나느냐'는 질문에 황 심판이 대답해주었다. 

 

 

   "사실, 시합이 끝나면 기분이 유쾌하진 않습니다. 매 시합마다 그렇죠. 사람들은 나한테 고함을 치고 있는데, 지금까지 룰 북에서 배웠던 것들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 기분이 정말 끔찍합니다. 저는 계속해서 발전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완벽해지고 싶죠. 그런데 수업을 들으면서 배운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훌륭해질 수는 있을지언정, 완벽해질 수는 없다는 것 말입니다."

 

 

 

  

 

지난 주, 황 심판은 베가스에서 개최된 2023 NBA 썸머 리그에 출장했다. '태권도 검은 띠 3단'이라는 특이한 이력 덕에 남보다 더 명확한 수신호를 뽐낼 수 있었다. ⓒ Bart Young for NBAE via Getty Images 

 

 

 

 

   그는 경기 중에 어딘가 모르게 찜찜한 부분이 생기면 반드시 그 부분을 해결해야 직성이 풀린다.

 

    자신의 콜 장면을 최소한 다섯 번씩은 돌려보고, 심판 가이드 북을 샅샅이 뒤져서 답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을 빡빡하기로 유명한 NBA 심판의 게임 데이 루틴들을 모두 지켜내는 가운데 동시에 해낸다. NBA 심판들은 시합날에 유산소 운동과 웨이트, 스트레칭, 그리고 동료들과의 시합 전 미팅을 소화해야 한다.

 

 

 

   이러한 헌신 덕에 황 심판은 3년 프로그램인 RDP를 단 18개월만에 마칠 수 있었다. 지난 두 시즌 동안  동기들보다 먼저 G 리그 심판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덕이었다. 

 

   특히 지난 시즌에는 G 리그에서 61 경기에 출장했는데, 시즌 중에 NBA의 비 상임 심판non-staff official으로도 선발되어 프리 시즌 경기와 정규 시즌 경기에 출장할 수 있었다. 비 상임 심판 자리는 한 시즌에 단 8명에게만 허용되는 자리다. 

 

 

   NBA 심판국은 다가오는 23-24 시즌의 상임 심판 자리를 황 심판 같은 비 상임 심판들 중에서 채울 계획을 갖고 있다. 

 

 

 

   "큰 꿈을 꾸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취재에 응해준 Monty McCutchen이 말한다. 그는 NBA의 심판 육성 & 트레이닝 부서의 헤드이자, NBA 심판국 수석 부총재를 맡고 있다. 

 

 

   "인태는 본인의 심판 커리어와 가족의 행복을 걸고 이 곳에 왔습니다. 리스크를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언가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는 데에 필요한 '용기'가 인태에게 있었던 거지요."

 

 

 

   RDP에 선발되기 전, 황 심판은 10년 넘게 KBL과 FIBA 국제 대회에서 심판으로 뛰었다. 

 

   그는 FIBA 소속으로 2016년 리우 올림픽 여자 농구 결승전의 심판으로 배정되었는데, 바로 이 경기에서 NBA 심판국 고위 인사들의 눈에 띄었다. 사무국에서 의도적으로 여성 심판이나 다국적 심판을 더 뽑기 위한 쿼터를 만들어 놓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McCuthen 부총재는 '심판국의 목표는 최고의 심판들을 양성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NBA 심판국의 인종/성별이 다양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RDP 기간동안) 인태는 본인이 대단히 빠르게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굉장한 응용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보여줬습니다."

 

 

   McCuthen 부총재가 말한다.

 

 

   "우리 프로그램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있는 친구였죠. 이 프로그램이 가진 메리트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새 언어와 새 문화를 배워야 하는 어려운 환경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어떤 약속도, 보장도 없는 이 곳에 말입니다."

 

 

 

 

 

RDP의 모든 과정을 18개월만에 조기 수료한 후 WNBA와 G 리그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황 심판. 

ⓒ Jordan Johnson for NBAE via Getty Images  

 

 

 

 

 

   RDP는 유급 프로그램이기에 황 심판 역시 그 기간 동안 봉급을 받았다. 

 

 

   하지만 RDP가 시작되기 전, 7천 마일 거리의 낯선 땅에 떨어진 황 씨 가족에게는 아무런 보장도, 어떤 경제적 지원도 약속되지 않은 상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판 가족이 이주해온 지 몇 주가 지나지 않아 팬데믹으로 인한 셧다운이 시작되었다. 

 

 

   그나마 팬데믹 기간 중에 Secaucus 소재의 YMCA 체육관에서 종종 프로 암 경기가 개최된 덕에 황 심판은 그 곳에서 심판을 볼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G 리그 경기와 NBA 경기들을 분석하며 공부를 이어갔다. 물론, 이 시기에 영어 역시 열심히 갈고 닦았다. 

 

 

   그러면서 심판 수업과 비디오 리뷰 클래스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 무렵, 황 심판은 취업 비자를 발급받게 되었는데, 매년마다 갱신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이 비자 덕에 가족들이 걱정없이 미국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NBA에서 초청장을 보내온 거잖습니까. 이 세상 모든 심판들이 저와 똑같은 결정을 할 겁니다. NBA에서 보낸 편지라면 읽기도 전에 일단 미국으로 가겠다고 생각할 거예요."

 

 

   황 심판이 말한다.

 

 

   "단 1초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물론, Fort Lee에 정착하면서 완전히 달라진 생활이 펼져졌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큰 규모의 한국인 커뮤니티가 있다는 걸 알게 됐죠."

 

 

 

 

   황 심판이 RDP에 처음 들어왔을 땐, 프로그램 내의 그 어떤 심판들 보다도 출장 경력이 풍부한 상태였다. 이미 다섯 대륙에서 출장한 경력이 있었던 그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화적인 공백'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RDP에서 그를 지도하던 NBA 소속 인스트럭터들 역시 '동료 심판들, 그리고 선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며 그에게 문화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황 심판은 이 문화적 갭을 채우기 위해 동료들의 가족과 관련된 정보를 열심히 암기해놓고 있다. 동료 심판들과 같이 식사를 할 때 대화 주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는 유창한 한국어, 영어와 약간의 중국어, 일본어, 터키어 등을 포함해 총 5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앎에도 여전히 한 단어, 한 단어를 조심해서 내뱉는다. 


 

   (문화 차이 때문에) 행여나 실수를 하게될 수도 있고, 본인의 의사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NBA에 오기 전부터 KBL과 FIBA 소속으로 풍부한 경험을 쌓았던 황 심판. ⓒ KBL

 

 

 

 


   "언어가 바뀐다는 것, 그리고 주변의 생활과 문화가 바뀐다는 건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McCuthen 이사의 말이다. 

 

 

   "반대로 우리가 한국에 가서 정착한다 해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인태는 이 곳, 미국 농구계의 문화에 훌륭히 융화되더군요. 멋지게 해냈습니다."

 

 

   "인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단 하납니다. 해가 뜨는 순간부터 잠에 들 때까지 그가 쏟아부은 모든 노력들, 바로 그 노력들 덕이지요."

 

 


   황 심판은 문화 장벽을 뛰어넘기 위한 여러 노력을 했는데, 예를 들면 본인이 (미국 출신이 아님에도) Cheesecake Factory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어필한 덕에 동료들과 한층 유대감이 깊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Cheesecake Factory는 NBA 구성원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는 브랜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빡빡한 원정 스케쥴에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시즌에는 본인이 출장하는 한 NBA 프리 시즌 경기에 두 자녀를 초대했다. NBA 경기장에 와본 것이 처음이었던 두 아이들은 잊을 수 없는 첫 인상을 받게 됐다.

 

   제 아버지가 심판을 보고 있는 경기에서 유서깊은 'Refs, You Suck!!' 구호가 나왔기 때문인데, 관중들이 무슨 챈트를 하는지 전혀 몰랐던 아이들은 덩달아 'Refs, You Suck!!'을 따라 외쳤다고 한다. 이 일화를 얘기해주며 크게 웃음을 터뜨리던 황 심판은, '우리 가족들은 내가 전세계를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나를 100% 이해해주고 지지해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희 애들이 제 판정을 실제로 Suck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웃음)'라고 덧붙였다. 

 

 

 

   "저는 금방 (이민가겠다는) 결심을 굳혔어요. 하지만 아내와 아들, 딸 걱정이 컸습니다."

 

 

   황 심판이 말했다. 

 

 

   "아내가 정말 많은 걸 포기했습니다. 특히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죠. 이제는 'Thank you.. Hi.' 정도는 할 줄 알게 됐지만요.(웃음)"

 

 

 

 

 

'많이 배워오겠습니다.' RDP의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향하기 전 기자회견 자리에서. ⓒ KBL

 

 

 

 

   황 심판의 부모는 모두 운동선수 출신이었는데, 아들이 당신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어린 인태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했다고 한다. 

 

   부친인 황정익 씨는 자그마한 사업체를 운영하다 은퇴했다. 황 심판은 부친의 성실함work ethic과 과묵한 성품이 본인에게도 그대로 대물림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전업주부였던 모친 정재련 씨로부터는 '한 끼의 맛있는 식사가 한 사람의 기분을 얼마나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는지'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조금이라도 공정성에 의심을 품게 만들 수 있는 언행은 자제한다. 그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그렇기에 어렸을 적에 어떤 KBL 팀을 가장 좋아했었는지, NBA 레전드들 중에 누구를 가장 좋아하는지, 가장 좋아하는 심판은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 모두에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NBA의 룰과 FIBA의 룰이 어떻게 다른지를 묻는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간단한 답변이라도 자칫 한 쪽을 선호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며, '그렇게 되면 감독들이나 선수들과의 관계에 악영향이 갈 수 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심판은 코트 내에서 가장 많이 무시thankless 당하는 포지션이다. 황 심판은 2014년에 한 감독으로 부터 박치기를 당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되려 그 경험이 미래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전무후무할 정도로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가 '박치기와 고함'이였다는 사실에는 황 심판 역시 동의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직업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더 이상 코트를 왔다갔다할 힘이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심판으로 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서도, '개척자'라는 말에는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저는 스타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주연도 아니고, 특출난 사람도 못됩니다. 경기를 보고 돌아가는 관중들이 그 날 나온 멋진 플레이들과 덩크들, 그리고 3점 슛들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제 목표가 바로 그거거든요. 팬들이 심판에 대해서 나눌 얘기가 없었으면 하는 거죠."

 

 

   "(선수와 감독들이) 시합 중에 제게 한 번도 고함칠 일이 없었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이제는 가족들도 미국 생활을 너무나 좋아한다. 황 심판은 '그저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라고 말한다.

 

   비록 '농구선수가 되겠다'는 어린 인태의 꿈은 현실이 되지 못했지만, 인간 황인태는 세계 최고의 농구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았다. 

   

 

   

   "저는 농구를 사랑하니까요."

 

 


 

 

ⓒ AP


 

-끝-

 


 

 

 

 Fun 게시판에서 쓸 데 없는 드립 욕심 부리다가 민감한 쪽을 건드리는 바람에 정지 먹고 돌아왔습니다. 유의 이외에 활동에 제한있는 징계는 처음 받아보는데.. 매니아 금단 현상이 장난 아니더군요. 

 

 아무쪼록 회원 분들 모두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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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WR
Updated at 2023-08-31 11:12:38

본문에 나오는 '박치기'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ZlSFKb0Cx8&ab_channel=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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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09:26:07

대박..

2023-08-31 10:02:29

정재근의 감독 커리어를 끝내는 박치기였죠. 심지어 오심도 아니었습니다.

2023-08-31 12:59:52

외국에도 보도 됐었죠?

2023-08-31 09:31:24

 크 황인태 심판님 멋있습니다!! 이번 시즌 전국방송에 한번 나오셔야죠!!!

2023-08-31 09:42:20

잘 봤습니다 노력하는 사람에겐 언젠가 희망이..

WR
Updated at 2023-08-31 11:08:36

좋은 기사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닷.

2023-08-31 11:08:57

제가 감사 합니다

2023-08-31 09:43:21

박치기 이후로 벌써 9년이나 지났나요  

아직도 생생한 사건인데...

2023-08-31 10:13:18

너무 멋있네요

2023-08-31 10:18:29

확인해보니 NBA 심판은 다른 종목에 비해 돈을 꽤 많이 버네요

초봉이 20만불, 최고 연봉자가 50만불 정도라고 하니.. 

2023-08-31 11:06:58

그 정도는 수당이 되어야 승부조작등의 유혹에서 흔들리지 않겠네요.

2023-08-31 10:36:00

하승진 선수 이 후로 당연히 NBA에 진출할 선수가 먼저 나올 줄 알았지 한국인 심판이 진출할 거라고는 절대 생각 못 했었습니다. 참 멋지십니다.

2023-08-31 10:51:03

 오늘도 유익한 번역글 감사합니다

국뽕 차오르네요!!!

느바를 보는 새로운 재미요소에요

2023-08-31 11:05:42

덩크한게 왜 문제지? 선배가 꼰댄가? 했는데 다시 보니 하프타임에 덩크 시도라뇨 혼나실만 했네요

2023-08-31 11:44:39

 번역 감사드립니다. 

2023-08-31 13:54:05

아 정재근에게 박치기 당한 분이셨군요. 정재근 선수 때 팬이었는데 정말....

2023-08-31 15:03:18

번역 감사합니다
황심판님 나올때 눈여겨볼 것 같네요

2023-08-31 15:08:47

 아 정재근 사건 피해자군요....잘풀려서 다행입니다 정말

2023-08-31 19: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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