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밍가의 헝거리 정신과 성장환경 (마인드 읽어보기)
- 워리어스 7픽 조나단 쿠밍가 정말 핫하죠. 이 선수의 마인드와 성장환경을 집약한, 쿠밍가와 SF Chronicle 측과의 최근 90분 간의 베가스 스트립 산책 인터뷰와 내용입니다. 쉽게 풀어썼습니다.
★ 라스베가스 스트립을 거닐면서 월요일 밤의 장관을 구경할 때 쿠밍가는 술에 취한 대학생 무리들을 지나쳤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화려한 네온 사인 간판. 밤거리 무대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내는 사람의 음정도 맞지 않는 멜로디. 사진 포즈를 취하는 쥬빌리 쇼걸들...
쿠밍가 : “전 이 거리에서 놀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어요. 이건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예요. 난 더 이상 어린 꼬마가 아니거든요.”
라스베가스는 성인판 디즈니랜드로 불립니다. 쿠밍가는 맥주를 사려면 2년하고도 더 있어야 하지만, 18살의 나이에 쿠밍가는 나이가 본인보다 2배 더 많은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워 보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피비린내 나는 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 예전에 자이르라고 불렸던 -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태어난 쿠밍가는 (그가 논의하지는 않을) 잔학한 행위들을 목격했습니다. 쿠밍가는 말합니다. “왜 과거에 연연하나요? 미래는 밝잖아요.”
★ 5년전 NBA 꿈을 좇기 위해서 부모님, 친구들, 삶 등등 콩고민주공화국 고마 시에서 그가 알고 지냈던 모든 것들을 뒤로 한 채 미국으로 떠났어요. 이제는 지단달 NBA 드래프트 전체 7번 픽으로서 앞으로 4년간 2500만불을 벌어들일 예정이예여.
6피트 7인치에 7피트 윙스팬에 강력한 득점 본능을 지닌 쿠밍가는 LA클리퍼스 올스타 포워드 카와이 레너드와 비교됩니다. 스카우트들은 쿠밍가를 괴물이라 부릅니다. 워리어스 팬들은 그를 잠재적인 프랜차이즈 선수라고 부르구요. 쿠밍가의 DM에서 어린 콩고 출신 선수들은 쿠밍가를 자신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불러요.
13살에 엄마와 아빠를 떠난 이후 사하라 사막 이남에 위치한 고국을 방문하진 않았으나 쿠밍가는 항상 마음속에서 9260만명의 콩고 사람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국기는 쿠밍가의 소셜 미디어 이름 옆에 붙어있구요. 작년에는 The Players’ Tribune(*프로 운동선수들의 1인칭 시점 스토리들을 게재하는 사이트)에 “All the Kids Back Home” 이라는 내용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https://www.theplayerstribune.com/articles/jonathan-kuminga-high-school-g-league
◆ 기고문 요약 : The discrimination, bullying and disrespect we experience isn’t fair, but, my brothers, your only choice is to make your dreams come true and make your motherland proud. Keep pushing, stay patient and keep working hard.
즉, 우리가 경험하는 차별, 괴롭힘당하는 것, 무례함 등은 불공평한 것들이지만, 형제들이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우리가 갖고 있는 꿈을 실현하고 조국을 자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해주세요!
★ 3달전,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인근 화산 폭발로 인한 용암을 피해 고마 시를 탈출할 때, 쿠밍가는 G리그 샐러리 50만불 중 상당한 액수의 돈을 구호 활동에 기부했습니다.
쿠밍가 : “제가 아직 거기에 있었다면, 화산에서 도망치는 애들 중 한명이 되었을 거예요.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삶에서 겪어왔어요. 여전히 나는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지 잊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나는 운이 좋은 놈 중 한명이예요.”
이러한 점들은 바로 신시티 라스베가스에서의 밤이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쿠밍가를 흥분시키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라스베가스 불바르를 따라 The Chronicle 측과 90분동안 거닐면서, 쿠밍가는 자신의 나이를 어떻게 느끼는지 5번이나 언급했습니다.
남들이라면 대학 신입생용 기숙사로 이사할 수 있는 나이에 쿠밍가는 이미 근 5년간 주로 거의 혼자서 생활해왔습니다. 콩고에 남아있는 몇 몇 친척들은 경제적 상황땜에 여전히 쿠밍가에 의지하고 있고, 고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정량화하기 어려운 무언가 즉 희망을 제공해줄 쿠밍가를 필요로 하죠.
IMF 세계 경제 전망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콩고민주공화국은 세계에서 6번째로 가난한 나라라고 해요. 인구 60% 이상이 하루에 2달러도 안되는 돈으로 살아가구여. 많은 미국인들은 콩고를 기아와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으로 알고 있죠. 반군이 마을을 불태우고 인력이 부족한 병원은 창궐하는 에볼라의 발병을 통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미지...
★ 쿠밍가는 나라의 어려운 점들 중 일부를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보일 수 있지만, 쿠밍가는 세계 뉴스에서 다뤄지지 않는 콩고의 한 단면을 기억합니다. 그건 바로 뒷마당에 있는 기둥에 못으로 박혀진 빨래 광주리 골대에 슈팅을 하면서 보내던 그 시절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족과 함께 한다면 괜찮을 거라는 강력한 믿음.
전에 없었던 풍요로움을 미국에서 다뤄가면서, 쿠밍가는 콩고 시절 폭력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주는 데 도움을 주었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 의지합니다. 큰형이자 전직 텍사스공대 농구선수인 Joel Ntambwe은 사촌 Sylain과 함께 매일매일 스케줄을 관리해줍니다. 앞으로 몇 달 내로는 쿠밍가는 그의 엄마 Brigitte 와 아빠 Didier가 콩고 동쪽의 작은 나라인 부룬디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서 직접 자신의 경기를 볼 수 있길 바라고 있구요.
쿠밍가 : “사람들은 종종 제게 ‘부모님과 떨어져서 그렇게 오랫동안 어떻게 그 상황을 헤쳐나가왔니?’ 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제가 준비했던 일이었거든요. 정말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전 그저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한 그분들을 결국은 다시 보게 될 거란 점들을 알고 있었어요.”
★ 찜통같이 더운 8월 초 밤 7시 30분 직전에 쿠밍가는 흰색 튜브 양말과 검정색 플립 플랍 슬리퍼를 신고 어깨에는 회색 백팩을 메고 Thomas & Mack Center를 나섰습니다.
몇분전, 라스베가스 서머리그 데뷔전에서 올랜도 매직을 상대로 16득점 6리바 3스틸을 기록했습니다. 이 시합은 쿠밍가의 포텐셜에 대한 스넵샷을 제시해주었죠. 림 근처에선 하이라이트 급의 몇 몇 피니쉬 장면을 보여주긴 했으나 3점은 0/4에 자투는 4/7에 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밍가의 업사이드를 의심하는 사람은 극소수였어요. 결국 4일 뒤 오클라호마 썬더를 상대로
https://twitter.com/ClutchPointsApp/status/1426354432086724612?s=20
보여줬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사람들이 믿었던 것보다 쿠밍가가 NBA레벨에 더 준비되어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만드네요. 오프볼 움직임과 샷셀렉션은 후천적으로 가르쳐질 수 있지만 쿠밍가가 갖고 있는 사이즈, 폭발력, 스윀은 쿠밍가의 NBA 등정을 미리 운명 지어진 것처럼 만들어줍니다.
지난 시즌 G리그 이그나이트 헤드 코치였던 Brian Shaw는 쿠밍가가 이번 드랩 클래스에서 공수 최고의 플레이어 중 한명의 선수가 될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쿠밍가는 여러분들이 찾고 있는 툴들을 모두 갖추었는데 겨우 18살에 불과하다고.”
★ 어느날, 쿠밍가가 검정색 케딜락 에스컬레이드에서 팀이 제공해준 기사를 기다리는 동안, 갈라진 아스팔트 땅을 가리켰습니다. “저거 보여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고향에 있는 농구 코트 같아요. 그런데 저게 우리 고향에서는 좋은 코트였어요.”
콩고에서 뛰어놀 수 있는 거의 모든 경기장들은 야외에 있어요. 쿠밍가의 어릴 적 기억 중 하나는 나무로 된 림에 샷을 날리면서 흙 코트로 미끄러지듯 넘어지면서 낡아빠진 운동화를 발가락이 뚫고 나오고 무릎은 찰과상으로 뒤덮힌 기억입니다.
10살이 된 직후, 쿠밍가네 부모님은 가장 가까운 코트까지 45분을 혼자 걸어가도록 허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쿠밍가가 가장 좋아했던 날은 한 달에 한두번, 착한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엄마 Brigitte 가 지역 인터넷 까페(피시방)에 갈 수 있게 돈을 주던 때였대요.
헤드폰을 쓰고 쿠밍가는 곧장 유튜브로 접속해서 ‘코비 브라이언트 하이라이트’를 검색합니다. 30분 동안 코비 브라이언트의 관중을 현혹시키는 아크로바틱한 덩크를 보면서 쿠밍가는 뿅 갑니다. 마침내 돈이 떨어지고 피시방 시간이 끝나면 쿠밍가는 현실로 돌아갑니다. 해질녘이 다가오구요. 쿠밍가가 어둠 속에서 집으로 걸어갈려고 한다면 적대 민족 무리들 측의 사람들에게 쳐맞을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르완다 대학살에 뿌리를 둔 제 2차 콩고전쟁은 공식적으로는 2003년(쿠밍가가 태어난 다음해)에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폭력은 거의 멈추질 않았습니다. 수십개의 무장단체들이 고마 북부 키부 지방에 테러행위를 자행했거든요.
★ 쿠밍가의 이웃들은 쿠밍가에게 일종의 안식처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극도의 가난과 기아를 목격했으나 쿠밍가는 그 누구도 죽임을 당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라 분쟁에 대한 가장 본능적인 기억은 2012년 11월, 이웃 르완다가 지원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반군단체 M23이 유엔 평화유지군이 보는 가운데 고마 시로 행진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콩고 대통령이었던 Joseph Kabila가 살던 곳과 같은 지역에 살던 쿠밍가는 “어떤 시기에는 반군이 제가 살던 곳으로 오기도 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도망가진 않았어요. 우리가 있던 곳에 머물렀어요.”
왜? 쿠밍가의 목표는 이미 명확했거든요.
◆ 미국에서 농구 장학금 받고 NBA를 향한 길을 달려나가기 ◆
★ 쿠밍가의 아빠 Didier는 파워포워드로서 콩고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었습니다. 청년 시절의 Didier는 미국에서 대학 농구를 할 기회를 얻었으나 고딩 여친 Brigitte(현재 쿠밍가 엄마)와 결혼을 하기 위해 고국에 머물렀습니다.
쿠밍가네 부모님은 공무원이 되어서 네명의 아들을 키웠습니다. 가장 나이 많은 두 아들 조엘과 쿠밍가는 그 중에서 농구 쪽으로 도미넌트한 선수로 꽃을 피웠습니다. 쿠밍가가 12살일 때 쿠밍가네 아빠는 다 허물어진 콘크리트 코트로 쿠밍가를 데려가서 최고의 무브를 보여주라고 말했습니다. 30분 동안 쿠밍가네 아빠는 폰으로 쿠밍가를 녹화하면서 키가 끄고 깡마른 6-4의 쿠밍가는 다리 사이로 드리블을 하고 점프슛을 쏘고 덩크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문 카메라맨이 녹화영상을 하이라이트를 편집하는 것을 도왔고 미국 전역의 프렙 스쿨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버지니아 남서부 시골에 위치한 기숙학교 Mountain Mission School 은 쿠밍가에게 전액 장학금을 제시했습니다. 2016년 여름, 형 조엘이 NBA 꿈을 좇기 위해 플로리다로 날아간 지 불과 6개월 후, 쿠밍가는 르완다의 키갈리 국제공항으로 부모님과 함께 4시간을 달려 갔습니다.
여행 가방 달랑 하나 들고 쿠밍가는 (헤어짐이) 몇 년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아버지 Didier 어머니 Brigitte와 마지막으로 포옹을 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진 않았습니다. 이건 운명이라고 쿠밍가는 스스로에게 되뇌였다고 합니다. ‘모든 건 잘 될 것이고, 다른 선택도 없을뿐더러.’
쿠밍가의 사촌이자 콩고 출신 2015 NBA 드랩 선수인 엠마뉴엘 무디아이는 말합니다.
“쿠밍가가 현재 위치에 있는건 놀랍지 않아요. 우리가 처했던 상황에서 오게 되는 궁극적인 모터베이션이 뭐냐면... ‘가족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자!’ 이 보다 더 큰,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어요.”
★ 빨래 광주리를 못으로 박고 농구 골대로 삼아서 형 조엘에게 1:1 매치를 신청했던 그날 이후로 참 많은 것들이 바뀌었습니다. 나이키와의 수백만불의 다년 후원 계약.. 워크인 클로젯(*대형 드레스룸이라고 보면 되요)에는 최고의 스트릿웨어 브랜드들로 채워져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미국식 부유함이 쿠밍가를 짜증나게 한대요. 어린 시절 친구들을 회상하면서 쿠밍가는 말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차를 부모님이 사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남들에게 불평하는 사람들에겐 공감하기가 참 어려워요. 저는 진정한 역경이라는 게 뭔지 알아요. 돈이 없는거, 먹을 음식이 없는거요... 여기(미국)은 말이죠. 완전 다른 세상이예요.”
★ 드래프트를 앞두고, 쿠밍가는 스카우트들이 그의 기질에 대해서 의구심을 제기하면서 몇몇 프론트 오피스 보드에서 순위가 미끄러졌습니다. 항간에서 떠드는 사람들은 쿠밍가가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선수고 NBA 라커룸에서는 맞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유포(?) 하기도 했었습니다. 몇 몇 팀들은 쿠밍가가 (팀/동료에 대한) 헌신이 부족하지 않나 의문을 가졌구요.
쿠밍가와 가장 가까운 측근들은 쿠밍가가 종종 오해를 받는다고 믿습니다. 쿠밍가의 유동적인(*일시적으로 머무르는) 라이프스타일(*미국으로 이주한 후 4년동안 4개의 학교와 4개의 주를 다님)이 쿠밍가로 하여금 고독 속에서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죠. 그러나 어디에 있든 간에 만난 팀원들은 쿠밍가를 상냥하고 호감이 가는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간혹 쿠밍가가 시합을 뛰면서 drifting through 즉, move aimlessly죠. 다시 말해 방향성을 잃고 이리저리 흘러보내는 점에 대해서는, 쿠밍가의 전직 코치들은 그건 경쟁 수준에 싫증 혹은 지루함을 느낀 결과에 가까운 점이라고. 쿠밍가는 좌절감을 느낄 때 조용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난 시즌 G리그에서 성인 선수들과 매치업되었던 쿠밍가는 실제로 열의가 꺾였을 때(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무심 혹은 무관심해보였을 지도 모른다고.
어쨌든간에 Our Savior New American School (Centereach, N.Y.)에서 소포모어 시절의 쿠밍가를 지도하고, The Patrick School (Hillside, N.J.)에서 주니어 시절의 쿠밍가를 지도했던 Eric Jaklitsch 씨는 ‘시합에 대한 쿠밍가의 헌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그를 잘 모르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쿠밍가는 오늘날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 누구보다 많은 것들을 희생한 놈이예요.”
★ Mountain Mission School에 쿠밍가가 들어온 지 몇 달만에, 쿠밍가는 본인 Class에서 최고의 선수 중 한명으로 리루크팅 리스트에 부각되었고, 그 후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국 쇼케이스에서 미래 드랩 1픽이 될 케이드 커닝햄의 AAU팀을 상대로 43득점을 때려넣었고 쿠밍가는 전미에서 떠오르는 탑 주니어로 부상했습니다.
그 찬사들은 쿠밍가로 하여금 어떻게 그 자신이 (사람들에게) 인식될 수 있는지 절실히 의식하게 만들어주었답니다. 팀원들이 파티에 쿠밍가를 초대할 때, 쿠밍가는 종종 거절했답니다. 순간적인 판단 착오조차도 그를 부적절한 이유로 뉴스에 등장시킬 수 있고, 그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를 위한 그의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쿠밍가는 여가시간을 더 많은 농구로 채워나갔습니다. The Patrick School에서 주니어 시즌을 보내면서 쿠밍가는 개인 기술 코치와 함께 훈련을 계속해나갔고, 때때론 밤늦게도 추가적인 슛연습을 위해 체육관으로 돌아오곤 했었대요.
1년 일찍 졸업하고 2020 Class로 재분류된 쿠밍가는 지난 여름 G리그 이그나이트 팀(*대학 진학 대신 G리그행을 택한 엘리트 유망주들에게 대학 농구를 대체할 1년 간의 대안을 제공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디벨롭 전용 G리그 팀)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듀크나 켄터키대 같은 대학의 장학금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서요. 쉬운 결정이었다고 해요. 쿠밍가가 미국으로 왔을때의 목표는 프로로 전향하는 것이었고 이그나이트는 50만달러의 게약, NBA 무대 준비를 위한 높은 수준의 경쟁 그리고 후원 계약을 채결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죠.
★ G리그 초반에 아주 좋은 출발을 했던 쿠밍가는 잠재적인 드랩 1픽으로 잠시 화제를 모았으나 수비에서의 결점, 비효율적인 슈팅 등이 드랩에서 쿠밍가의 가치를 하락시켰습니다. 그러나 드랩 순위가 어디까지 떨어질지 쿠밍가가 가졌던 그 어떠한 걱정들은 5월 말 고국의 니라농고산이 근 20년만에 폭발하면서 용암이 분출되었다는 소식을 사촌으로부터 듣게 되었을 때부턴 뒷전이 되어버렸습니다. 쿠밍가의 유년시절에도 끊임없는 위협요소였던 그 화산은 쿠밍가가 태어나기 한 9개월 전(2002년 1월)에도 폭발하여서 수백명이 사망하고 1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을 잃었었습니다.
쿠밍가가 마이애미 아파트에서 친척들에게 미친 듯이 전화를 걸고 문자를 할 때, 쿠밍가는 고향 고마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악의 상황이 다가올까봐 우려했습니다. 쿠밍가의 조부모님들은 도시를 탈출한 100만명의 거주민들 중 두분이었습니다. 쿠밍가의 친척들 그 누구도 부상을 당하거나 집을 잃진 않았으나, 화산 폭발로 고마시의 저수지와 물 공급 파이프가 파괴되면서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대피를 했고 또 다른 50만명의 사람들은 깨끗한 식수 공급이 차단되었습니다.
교회, 학교, 밖에서 잠을 청하는 집을 잃은 이재민들의 영상은 쿠밍가로 하여금 드래프트 준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떠올리게 했대요.
★ 한달 후 워리어스 경영진이 마이애미에서의 저녁식사 회동에 쿠밍가를 데리고 갔을 때, 워리어스 경영진들은 쿠밍가네 고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카오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들은 쿠밍가가 유망주로서 엄청난 업사이드를 갖고 있을뿐만 아니라 또래 애들 사이에게는 보기 드문 성숙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불어, 스와힐리어, 링갈라어 다음으로 영어를 4번째 언어로 사용하는 쿠밍가에 대해 밥 마이어스 단장이 평한 내용은 “18살짜리가 구단주, 단장, 스카우트들 앞에서 앉아서 질문에 대답하는 건 여간 쉬운 게 아니다. 쿠밍가는 스스로 처신을 잘했고, 부모님이 미국으로 오시는 거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행복해보였다. 왜냐면 콩고에서 미국으로 떠난 이후로 오랫동안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
드랩날 아담실버 총재가 ‘워리어스 구단은 콩고민주공화국 고마시에서 온 쿠밍가를 뽑습니다’ 라고 발표했을 때, 쿠밍가는 아버지 Didier, 어머니 Brigitte와 포옹을 하면서 활짝 웃었습니다. 그 순간은 그들이 5년전 공항에서 이별을 할 때 마음속에 그렸던 순간이었습니다. 차기 시즌 쿠밍가가 NBA 데뷔를 하게 되면, 쿠밍가는 NBA 역사에서 6번째 콩고 출신 선수이자 콩고 고마시 출신으론 첫 번째 선수가 되는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예요.
https://twitter.com/afroballers/status/1420361774474448897?s=20
★ 라스베가스 스트립을 산책하는 동안, 쿠밍가는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들을 어떻게 만회할 지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했습니다. 남동생 13살 Alex, 11살 Flory는 최근에 학교를 위해 미국으로 들어왔답니다. 이제는 자신의 부모님이 은퇴를 한 나이에 당신들만의 아메리칸 드림을 경험하길 바란다는 쿠밍가의 소망을 막 설명하려던 즈음에, 갈색 양키스 모자와 흰 티셔츠를 입은 한 남자에게 말이 끊겼습니다.
“헤이맨, 너 쿠밍가 아님? TV에서 너 봤는데, 사람들이 너가 굉장히 특별한 선수가 될거라고 하던데~ 그거 사실이야?!”
https://twitter.com/WarriorNationCP/status/1428397262850326529?s=20
▲ 그저 미소만 지을뿐 트레쉬토킹을 안하고 농구로 보여줄 뿐이라는 쿠밍가. 성장환경에서 비롯된 헝거리 정신이 쿠밍가를 독한 놈으로 만들어주고, 궁극적으로 본인의 포텐셜 폭발과 워리어스 구단의 미래에 청사진을 제공해줄 것 같네요.
커 감독이 며칠전 Dubs Talks 팟캐스트에서 말했습니다. 팀의 컬쳐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거뿐만 아니라 기존의 컬쳐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주입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그럴려고 디벨롭 코치들을 여러명 영입한 것이고. 쿠밍가든 무디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디벨롭을 시켜나갈 것이고, 던풀이가 그랬듯 출전시간은 본인들이 따내야 할 것이라고도 밝혔습니다. 즉전감이라고 평가받는 무디에 비해 쿠밍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기용이 될지 (혹은 G리그로 일단 보낼지) 등등에 대해 로컬팬들과 한국팬분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한데, 루키라고 디스어드벤티지를 주지 말고 공정한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슈팅을 비롯해서 개선해야 할 점이 많긴 하나 위닝팀에서 큰 기여를 해 줄 근래 워리어스 10년 드랩 중에서 최고의 기대주니까요. 화이팅!
https://twitter.com/sfchronicle/status/1428757473725345792?s=20
좋은글 감사합니다
분명 쿠밍가는 워리어스에서 큰 역할을 해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