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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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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3-02-25 19:15:48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오은

 

  수면양말을 신고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고. 너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출입증을 검사하는 사람은 없었지. 깐깐한 말투도. 이상한 눈초리도. 가방을 열어 나는 이렇게나 평범한 사람입니다. 나쁜 일을 저지를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고백하지 않아도 되었지. 수면양말처럼 베개처럼 이불처럼 입장했지. 신고 베고 덮고. 수월하게. 스스럼없이 눈뜨는 일처럼. 눈뜨는 일처럼 신나고 눈 감는 일처럼 설렜지.

  너의 꿈속에서는 태양이 지고 있었다. 태양은 너무 커다래서 시간이 흘러도 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 여전히 지평선에 걸려 있었지. 밤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 내일을 감히 상상할 필요가 없었지. 불행을 감히 점칠 필요가 없었지. 수면양말과 베개와 이불은 차라리 거추장스러웠지. 아침이 밝기 전에 탈출하지 않아도 되었지. 꿈속에서 행복하면 실제로는 불행해져! 꿈속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내일은 없어! 협박하는 사람도 없었지.

  너의 꿈속에서도 집이 있었다. 우리가 살 집이 우리가 살던 집이 되어 있었지. 수면양말처럼 베개처럼 이불처럼 익숙했지. 너의 꿈속으로 들어갔던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갈 수 있었지. 불을 밝혀도 될까? 묻지 않아도 되었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지. 침대에서 굴러떨어져도 잠에서 깨지 않았지. 네가 잊어버린 말과 내가 흘려버린 말이 생생하게 들렸지. 우리는 꿈을 가지고 있구나. 마음만 먹으면 뭐든 될 수 있구나. 3음절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있구나.

  태양은 영영 지지 않을 것 같았지. 평범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었지. 자기만의 수면양말과 베개와 이불을 가질 수 있었지. 마음만 먹으면 따뜻해질 수 있었지. 눈을 뜨고.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너의 꿈속에서 나왔지. 수면양말을 신은 채. 베개를 벤 채. 이불을 덮은 채. 태양이 지지도 태양이 뜨지도 않았는데 꿈꾸는 시간과 꿈 깨는 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지. 꿈 밖의 일이 전혀 낯설지 않았지.

 

 

  ㅡ「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왼손은 마음이 아파』. 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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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
2023-02-25 19:16:41

문창과 입학 후
놀면서 2년
군대 2년
4년을 그냥 보낸 제게
시 창작의 동기가 되어준 오은 데뷔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생각납니다

WR
1
2023-02-25 19:33:53

마침 제 책장에도 꽂혀 있는 시집입니다.  

 


1
2023-02-25 20:32:12

제가 좋아하는 시집들이네요

1
2023-02-25 19:38:22

1 2 3 5 7 다 제가 갖고 있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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