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의 블랙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의 블랙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축복에는 꼬리표가 붙는다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전지(全知)에 가까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로또 번호 맞추기는 유치할 뿐입니다. 세상에 벌어질 모든 일들을 분초단위로 예상, 예측할 수 있으니, 갖가지 대응책을 마련해두고 각 시나리오별로 최적의 해(解)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부를 쌓을 수 있음은 당연하고, 권력도 취할 수 있고, 온갖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려볼 수 있습니다.
적어놓고보니, 능력 치고는 지나치므로, 꼬리표 단서 한 두개쯤은 붙여 놓아도 좋을 듯 싶습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있다.”는 능력은 “시간은 되돌아간다.”는 상황으로 바꾸어 놓는 식입니다. 언제, 어떻게 되돌아가도록 할까요? 이왕 정했으니 “2. 2. 성촉절 24:00가 되면 06:00으로 항상 되돌아간다.”로 하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 꼬리표 단서면,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이 축복일까요? 아니면 굴레일까요? 누구든 한번쯤 꿈꿔볼 수 있는 상상을 이야기로 풀어낸 영화가 있습니다.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은 의지와 상관 없이 하루를 무한히 반복하는 기상캐스터 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려낸 영화입니다.
불만 가득한 필 + 꼬리표 달린 축복
기상캐스터 필은 스스로를 멋지고 매력있다 생각합니다. 이제 곧 메인스트림으로 진출할 예정인데, 겨우 매멋(groundhog)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굴에서 나와 그림자를 보는지 확인하는 행사(성촉절, 매멋이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 더 지속된다고 합니다)에 참여하기 위해 펜실베니아 한 마을에 와야 하는 자신이 불만입니다.
한 겨울 눈 쌓인 추위를 헤쳐 필과 PD 리타, 카메라맨 래리는 성촉절 매멋을 찍어가는데, 필은 끊임없이 자신의 객관적 상황과 주관적 기대를 비교하며 불만을 토로합니다. 다만 리타에게는 관심을 보이며 자신과 함께 메인스트림으로 나아가자는 이야기를 하는데, 리타의 진정성과 매력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평과 허황으로 가득찬 필의 모습은 리타와 래리에게는 새롭지 않았고, 이들은 익숙한 듯 필을 적당히 무시할 뿐입니다.
문제는 이제부터는 시작입니다. 눈이 많이 쌓여 바로 복귀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하루 더 잠을 자게 되는데, 내일인 줄 알았던 오늘이 어제입니다. 성촉절 2. 2.이 거듭 반복되는 상황이 시작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D2ZC11pPPQ
변화하는 필의 모습: 환호 – 좌절 – 수용 – 극복
24:00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같은 날 06:00에 필은 우선 의심하고 부정합니다. 초자연적인 일이 발생했으니 당연합니다. 항상 똑같은 뉴스에 눈을 뜨기 시작하며, 숙소에서 자신을 맞아주는 할머니의 모습, 길에서 만나는 옛 동창 보험 영업사원 친구의 첫 대사가 모두 동일함을 깨닫고 이제는 받아들입니다. 환호하면서.
필은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정보를 취득합니다. 우선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접근하여 하루하루 출신학교,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차근차근 모읍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에게 마치 오랜 동창생인 것처럼 접근해서 하루 연인이 되는데 성공합니다. 자신감을 얻은 필은 은행에서 나오는 돈자루를 완벽하게 채어가기도 하면서 하루 쓸 돈을 충분히 취득합니다. 필에게 부족했던 이성에 대한 인기, 재력은 이제 모두 채워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Q097jOO7l4
어느 정도 누릴 것들을 한창 누린 필은 이제 리타에게 접근합니다. 같은 방법입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물어보고, 다음 날 시나리오대로 가까워집니다. 심지어 프랑스 시까지 외어가면서, 공부하듯 그녀에게 접근합니다. 정성이라면 정성, 집념이라면 집념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대목에서 리타는 필을 의심합니다. “어떻게 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시죠?” 하루가 반복되어도 필에게 사랑이 자연스럽게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이때쯤 필은 좌절합니다. 아무리 가까워져도, 유효기간은 하루입니다. 어떤 일을 해도 무효화되는 일들에 진절머리가 납니다. 리타는 마음을 허락하지 않고, 다른 이성에게 추근대거나 돈을 훔쳐내는 일들 지겹습니다. 필은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어김없이 울리는 06:00 기상알람은 필에게 탈출구는 없음을 잔인하게 알려줍니다.
필은 리타에게 고백합니다. 나는 하루를 반복해서 살고 있노라고. 증명하라는 리타의 요청에, 음식점 내 모든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밝혀줍니다. 리타는 필을 이해하게 되지만,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필은 리타와 서로를 공감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카드 게임을 하는 등 가까워집니다. 이제 리타와 정말로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필에게 어김없이 06:00 알람이 다가옵니다.
이제 필은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마음을 굳힙니다. 2. 2. 죽을 운명인 노인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하고, 보험 영업사원 친구의 모든 보험을 들어주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잡아주는 한편, 피아노를 배웁니다. 하루하루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필이 성촉절 취재에서 말하는 문구들은 깊이가 있고 멋들어지게 되고, 피아노 실력은 일취월장하고, 오래된 인사처럼 마을의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0fvSiRgKTQ
https://www.youtube.com/watch?v=gKGOG-Pr81E
리타는 어제의 필과 오늘의 필이 다름에 무척 놀랍니다. 자연스럽게 흥미와 관심이 생겨 필의 하루를 살 수 있는 경매에서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 삽니다. 그리고 그와 진지하게 대화합니다. 필은 사랑스러운 리타와 또다시 밤을 지샙니다. 그리고... 내일이 옵니다. 둘은 어느새 연인이 되고 영화는 마무리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Fdb16Om40E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영화는 단계별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대강 이런 순서로 보입니다.
돈, 이성에 대한 인기 → 문학, 예술 → 타인에 대한 선의 → 사랑
필은 1단계에서 만족하려 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돈이나 인기는 수단에 가까웠던 모양입니다. 그 다음은 예술입니다. 프랑스 시를 읽고 체호프 명언을 외거나 피아노를 배우고 얼음조각예술을 배웁니다. 이를 통해 무료함을 달랩니다. 문학, 예술보다도 더 만족감을 주는 것은 타인에 대한 선의입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필은 마을 사람들을 돕습니다.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은 마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이제 필은 안정됩니다. 하지만 아직 필을 내일로 이끌어주지는 못합니다.
필이 내일을 맞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리타와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의한 진정한 키스”라는 동화의 클리쉐처럼, 리타와의 진정한 공감과 사랑이 필을 내일로 이끕니다. 적당히 무시하고 멀리했던 필을 이제는 공감하고 이해하는 리타의 모습은 필에게 가장 큰 선물이자 축복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가 소설로 물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톨스토이가 한 대답도 ‘사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모든 문학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돈, 인기, 예술, 도덕, 윤리를 모두 아우르는 사람으로서 가장 필요하고,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자 목적,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영화가 제게 주는 의미
힘들거나 기분전환할 때 보는 영화나 만화들이 있습니다. 어릴 때 저는 유리가면을 참 즐겨 보았습니다. 열혈 근성 마야를 보며 힘을 얻었습니다.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사랑의 블랙홀을 챙겨 봅니다. 주제의식이 제 마음을 울립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 현대판 고전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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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지금봐도 재밌죠. 빌 머레이 정말 잘 나갔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