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학적 관점으로 본 임진왜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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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참전과 조명 연합군의 반격
자 이제 명나라가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자잘한 과정은 생략하기로 하고, 자 그럼 대체 명나라는 왜 참전하였을까요?
아무리 조선이 명나라의 최고 동맹국이라고는 하나 자국의 이익이 하나도 없는 남의 집 싸움에 왜 발벗고 나섰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명나라는 당시 재정적으로도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만력제가 이미 지난 30여년간 태업을 하며 온갖 사치를 하였으며, 관료들은 부패하였고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한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도무지 정치와 통치에 아니 그냥 출근조차도 안 하는 이 황제가 대체 왜 조선의 일에는 발 벗고 나섰느냐 이 말입니다. 행간에는 만력제가 고려천자다 조선의 황제다 등 조선을 매우 사랑하는 황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만력제는 조선을 좋아 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뭐 한류도 없었고, 만력제는 조선에 가본 적도 없으며 애첩들 중 조선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선조가 의주에서 망명과 헬프를 계속 칠 때에도 만력제와 명 조정은 이거 일본과 조선이 연합하여 쳐들어오는 것 아니냐며 의심을 하였고, 선조가 명나라 땅에 피신조차 오는 걸 불허하였습니다. 그럼 왜? 대체 왜 명나라는 없는 재정 털어가며 조선을 도와준 것일까요? 이건 제 뇌피셜인데, 원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조선에 외교적으로 명을 정복할 테니 조선이 선봉에 서라라고 하는 등 이미 전쟁 전부터 전쟁의 명분과 목표가 명나라임을 온 천하에 선포하였습니다. 명 황제인 만력제 입장에서는 이 기회야 말로 자신의 떨어진 위엄을 세우고 감히 대놓고 명을 업신여기며 쳐들어오겠다는 저 오랑케를 힘으로 찍어 누름으로써 당시 명 변방에 일고 있는 여러 반역의 기운들을 한방에 잠재우고 30년 태업으로 위엄이 떨어진 자신의 위엄을 세울 뭐 그런 기회였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만일 안 도와주었다가 정말로 조선이 일본에 정복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이제 명이 그 다음 차례가 될 것임으로, 아직 일본이 조선에서 허우적 될 때 미리 가서 싸우는 게 낫다고 여겼습니다. 전재을 굳이 하려면 남의 땅이 낫죠. 결과론이지만 히데요시가 너무 자만하고 쓸데없는 허풍을 치는 바람에 명나라에게 참전 명분을 준 것이기도 합니다. 그냥 명분을 조선과 일본과의 어떤 사소한 것으로 하고 최대한 명이 참전할 명분을 안 만들어 줬으면 조금이나마 일본에게 더 유리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제 아무리 만력제가 도와주라고 하여도 명 대신들이 재정상의 문제로 반대하였을 가능성이 높았을테니까요.
자 그럼 조선에게 명의 참전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우리는 임진왜란 일본에 대하여 온 국민이 100%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그럼 명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선조는 기록상으로 보면 이 전쟁의 승리를 온전히 명에게 돌리며 치켜세웁니다. 당연합니다. 그렇게 해야 이순신의 공적이 작아지고 명을 끌어들인 자신의 외교적 공이 커지니까요. 의주로 런한건 자신이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명을 불러오려고 하는 자신의 피나는 빅픽쳐다 이거지요. 조선의 대신들은 반반이지만, 명의 갑질과 태업에 혀를 내두르며 드라마 '징비록'이나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류성룡 같은 재상들은 명나라를 아주 싫어합니다. 민초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약탈과 부녀자 강간, 그리고 전쟁 내내 명나라 밥 대 줄려고 뼈빠진 거 생각하면 이가 갈립니다. 대부분의 드라마나 문학작품에는 명나라를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럼 명나라는 과연 나쁜 군대일까요? 저는 이 글을 오로지 군사학적 관점에서 전쟁 승리에 어떻게 작용하였는가에만 초점을 맞추어 쓰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명을 오로지 그런 관점에서만 평하겠습니다. 자 그럼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명나라의 참전은 조선이라는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99% 이득입니다. 나머지 1%가 일부 참전한 명나라 대신들이나 병사들 개인들의 민폐스러운 행동이 조선의 개인들에게 사적으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준 것이지, 조선 전체에게 있어 전쟁으로 나라가 빼았기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멸망 직전의 기준에서 보자면 명나라의 참전은 무조건 이득입니다.
자 왜 이득인지 그럼 만약에 명이 참전을 안 했을 경우 임진왜란의 상황은 어떠했을 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시 연 이는 해전의 승리와 전라도 방어와 진주성의 전투를 승리했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부 거점에서 우주방어로 승리를 한 것이지 아직까지 조선군은 방어를 풀고 나와 일본군을 공격할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로 치면 여기저기 벙커와 시즈탱크, 그리고 터렛과 사이언스 베슬로 잘 버티긴 하나 한방러쉬갈 상황은 아니었다 이겁니다. 여전히 15~20만 가까운 일본의 병력이 조선 땅에 상주 중이며, 조선군은 그 때까지 의병들과 기타 고을들의 수령급들이 지금으로 치면 예비군과 미방위 박박 긁어 모아 지역을 방어하는 민병대 수준이었습니다. 시즈 풀고 나가는 순간 쌈싸먹혀 순삭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유일하게 나가서 한방 치고 온 부대는 이순신의 수군으로 한산도를 넘어 부산진까지 가서 일본군에게 한방 먹이고 돌아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조선의 압도적인 수군의 얘기임으로 예외이며, 이 때에도 일본 수군은 히데요시의 엄명으로 해전이 금지되었던 때라 좀 얘기가 다릅니다.
또한 일본군이 시간을 벌어 다시 재정비하여 작전을 날카롭게 새우고 다시 전라도 한 곳에 집중 공세를 퍼부을 경우 이를 다시 운 좋게 막는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평양까지의 보급선이 길어져 어렵긴 했으나, 한양 밑으로 전선을 축소한다면 충분히 해볼만 했을 것이라 봅니다. 아니 안정적으로 경상도만 일단 먹어놓고 본토에서 재정비해서 다음해에 날씨 풀리면 다시 러쉬를 해도 됐습니다. 더구나 일본 본토에는 조선에 상륙한 병력보다 더 강한 2~3배 이상의 군대가 있었고, 히데요시가 추가 증원군을 보낼 경우 조선이 계속 이긴다는 보장도 없으며, 일본 역시도 학습효과를 통해 조선의 방어를 뚫는 파해법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조선은 자력으로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그런 암울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명군의 참전은 일본군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해 다른 생각을 아예 못하게 하였습니다. 조승훈-이여송으로 이어지는 선봉부대의 병력이 4만 정도이긴 하나, 이를 뒤이어 40만이 내려올지 알 수도 없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었습니다. 가뜩이나 보급문제와 연 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마당에 명군의 참전은 그야말로 사기를 땅에 떨어트리는 효과를 내였습니다.
당시 일본군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총대장인 우키다 히데이에가 10대 후반인 관계로 리더쉽을 발휘하긴 어려워 일본군은 하나로 의견이 모이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일본 드라마 ‘군사 칸바에’에서 이 시기의 장면을 보면 히데요시가 노발대발 하며 자신이 직접 조선으로 가겠다는 것을 칸바에가 자신이 갈 테니 관백께서는 남아 있으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저도 가겠습니다며 엎드리는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이시다 미쓰나리입니다. 이 이시다라는 인물은 훗날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이 동군 서군으로 나뉘어 대전투를 벌일 때 서군의 대표격인 인물이 되는 인물로, 많은 사람들 특히 무장들에게 재수없는 이미지를 주는데 아주 탁월한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무튼 이 때 이시다도 건너와 히데요시의 책사를 자처하며 간섭을 하였는데, 제 생각에는 이 때부터 일본군은 뭔가 서로 따로 각자 알아서 플레이 하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서부전선은 상인파인 고니시-우키다-이시다 라인이고, 동부전선은 가토 유아독존, 중부가 중립적이며 비 히데요시 시종 출신 다이묘들, 남부 해안에 도도-와키자카 라인 이렇게 따로 노는 느낌이 생깁니다. 이 때 가토는 이시다를 얼마나 미워하였는지 나중에 본토에서 히데요시 죽자마자 이시다를 죽이겠다며 찾아다니기까지 합니다.
여튼, 임진왜란의 주된 스토리는 이 일본군에서 서부전선과 남부전선의 스토리가 가장 많습니다. 사실 가토는 나중에 울산왜성 공성전 이전까지 뭐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가토가 왜 명군의 옆치기를 하러 안 왔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니시만 죽어라 명군에게 털리는데, 이게 서로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조명 연합군은 기세 좋게 평양성을 공격합니다. 이게 4차평양성 전투인데, 잠시 명군의 병력 구성을 잠시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명군은 크게 몽고인과 북방 유목인으로 이루어진 기병부대와 한족 중심으로 이루어진 보병 부대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중 한족 중심의 보병부대는 굉장히 사람 비율에 비해서 많은 량의 화포를 지니고 있는 화력덕후였습니다. 평양성 전투나, 훗날 울산성 전투를 보면 명군은 앉아서 계속 화포만 쏟아 붇는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이렇게 편하게만 전투하는 명군에 대해서 전투의지는 없고 비겁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히 류성룡이… 그러나 제가 평가할 때는 조총 중심과 근접 백병전에 극강의 실력을 보이는 일본군을 상대로는 차라리 화약과 탄약만 충분하다면, 그냥 일본군이 닿지 못하는 사거리에서 화력으로 쳐바르는 것도 괜찮은 전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매복작전에서 털린 것을 제외하고 명군은 야전에서 일본군에게 조선처럼 탄금대 전투나 용인전투처럼 완전히 힘에서 밀린 적은 없습니다. 이 말은 명군의 화력이 일본군의 조총에 절대 밀리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스타로 비유를 하자면 일본군 조총부대가 히드라나 드라군이라면 명군은 화포부대는 시즈 탱크나 리버 쯤 되겠죠.
이렇듯 명군의 참전으로 일본군은 수세로 조명 연합군은 아주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합니다. 이 때 명군의 남하 소식을 들은 권율 장군도 한양 양공작전을 펼치기 위해 시즈 풀고 3천의 병력을 끌고 올라가 현재 일산 지역의 행주산성에 진을 칩니다.
그런데 평양에서 한양까지 진군하며 중간에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이 호되게 매복을 당해 잠시 명군이 평양으로 다시 회군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벽제관 전투가 제가 알기로 일본측 임란 3대전투 중 하나라는데, 그만큼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보다는 명나라가 부담스러웠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일본군은 명군이 잠시 회군하자, 행주산성에 있는 조선군을 다구리쳐 포위섬멸하기 위해 3만의 대군을 집결합니다. 이 때 모인 지휘관들만 봐도 우키다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 구로다 나가마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임란 주요 유명 지휘관들 상당수가 집결합니다. (가토는 어디에…?) 이렇게 해서 임란 3대대첩 중 하나이자 이번 회의 클라이막스인 행주대첩 전투가 펼쳐집니다. 어찌보면 이 전투는 권율과 조선군이 명군의 남하에 너무 격양 된 나머지 시즈 풀고 조촐한 병력으로 한방러쉬 나갔다가 대병력에 쌈싸이는 최악의 상황에서 벌이진 전투이기도 합니다.
자세한 전투의 경과는 검색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간단하게 적기로는 전편에 논평한 것처럼 또다시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이 무한 반복이 되었으며, 조선군은 지혜롭게 다양한 화기로 고지대 요세에서 퍼부어 물리쳤다는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우키다 히데이에와 이시다 미쓰나리가 부상을 당했으며, 이 전투의 패배로 명군이 돌아가다 다시 방향을 돌려 내려왔습니다. 해외 방송에서도 화차라는 신무기를 소개하는 프로가 있었는데,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행주대첩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컸습니다. 만일 행주대첩이 없었으면, 명군이 다시 한양까지 진군하는데 상당한 세월을 허비했을지 모르며, 일본은 일본대로 한양의 방비를 할 시간을 벌어 전선이 한양에서 교착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명군과 남쪽 전라도 쪽의 조선군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형세가 되어 일본군의 재침으로 전라도가 다시 위험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행주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이 소식을 들은 명군이 다시 남하를 함으로써 일본군은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기에 이릅니다. 일본군 지들 말에 의하면 행주의 복수를 위해 10만을 모아서 권율이 다시 진을 친 파주산성으로 향하다 포기했다고 하는데, 이는 허풍으로 들립니다. 이제 일본도 별 수 없이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됩니다.
강화협상 그리고 재침(정유재란)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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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있습니자. 추천드리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