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학적 관점으로 본 임진왜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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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막상 시리즈를 쓰려니 이것도 노가다네요...
일본군의 플랜 B
자 일본군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었습니다. 바로 플랜B를 가동합니다.
일본군에게 있어 플랜 B의 목표는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이순신과 전러좌수군의 와해, 두번째는 조선에 식량생산기지 확보. 이 두가지 목표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곳은 전라도였습니다. 전라도는 곡창지대이며, 이순신의 기지가 전라도 남해안에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그동안 부산에서 스트레이트로 한양으로 진군 하였기 때문에 좌하단에 있는 전라도를 그냥 패스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선봉 부대는 그대로 둔 채, 중앙군을 좌양좌 하여 전라도로 진격시킵니다. 전라도를 먹으면 곡창지대를 확보하여 식량을 장기전에 대비해 현지 생산할 수 있으며, 전라좌수군의 진지를 육로를 통하여 파괴하면 이순신도 별 도리 없이 배를 몽땅 타고 북쪽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충청도와 경기도 그리고 개성과 평양이 있는 도(갑자기 생각이 안 남)는 모두 왜군의 수중이었기에… 이렇게 수군이 남해와 한양 밑의 서해를 버리게 되면 사실상 조선 수군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는 것이죠. 한 때나마 남해안에서 이순신에게 털리며 영혼까지 나간 일본군이었으나, 이렇게 플랜B를 생각해보니 정말 기가 막힌 신의 한 수였습니다. 이순신을 바다에서 못 깨면 육로로 가서 깨면 되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일반 대중들에게는 이순신에 가려져 별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영웅인 권율이 등장합니다. 정말 이순신이 너무나 희대의 먼치킨(? 인터넷에 이 말 많이 쓰던데 저는 지금까지도 이게 뭔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치킨일까요?)이어서 그렇지 권율도 대단한 명장입니다.
권율은 아버지가 영의정인 권철의 넷째 아들로 46세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는 한량이었는데, 젊은 시절 행각을 보면 날라리는 아니었고 그냥 워낙 대인배여서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 뭐 그런 성격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아직 40도 젊다고 했다고 하는데, 어쨌든 금수저기에 가능한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뭐 암튼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죽으면서 권율을 보며 “널 내가 낳았구나.”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를 듣고 깨닫는 바가 있어서 이 때부터 공부해서 46세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다고 합니다. “널 내가 낳았구나.”가 무슨 뜻일까요? 제 생각엔 ‘너 같은 놈도 내 몸에서 나왔구나…’ 뭐 이런 조롱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문과에 병과 되었다는데 여기서 병과란 군 관련된 과가 아니라 뭐 등급 같은 것이라고 검색이 됩니다. 전 뭔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결론은 권율은 무관이 아니라 문관이었다는 것이죠. 임란까지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생략하고, 임란 발발 당시 권율은 광주 목사였습니다. 일본군이 한참 한양으로 북상할 때 전라도 순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 등과 함께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근왕군 4만을(8만이라는 설도 있음) 모아 한양으로 일본군 뒷치기를 하러 올라갔으나, 우리가 잘 아는 용인전투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600여명의 일본군에게 완전 캐박살이 납니다. 아마 일본인이 임진왜란에 대한 글을 쓴다면 이 부분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며 찬양 찬양할 것입니다. 갓키자키!!! 스고이 데스요!!! (이 와키자카는 이후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에게 쳐 발립니다.)
이게 일본군의 플랜 B가 발동되기 이전의 전라도 일대의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제가 1편에서 설명 드린 대로 웅치, 이치 등과 같은 전투에서 고지대에서 방책을 세우고 효과적으로 싸우는 ‘일본군 파해법’을 통해 권율은 전라도를 지켜냅니다. 다시 복습을 해 보자면…
- 고지대에 방어물 뒤에 은폐 언폐 하게 되면 직사화기인 조총의 효율을 극도로 떨어트릴 수 있다.
- 이렇게 되면 일본군 입장에서는 조선군의 참호(?)로 돌격하여 백병전을 펼칠 수밖에 없다.
- 그럼 왜 일본군은 굳이 꼭 돌격을 해야만 했는가? 좀 지구전으로 가며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여러 이유들이 있겠으나, 전편에서 설명한데로 화약과 탄약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헛되이 탄알을 낭비하지 않기 위함도 있고, 무엇보다 진지를 공격할 화포나 기타 공성무기가 없었다.
- 이렇게 돌격을 하는 일본군을 향해 곡사화기인 활과 각종 폭탄과 신기전, 그리고 돌멩이까지 막 집어 던지니 싸움은 조선군에게도 해 볼만한 전투가 되기 시작하였다.
- 물론 이 때 전라도를 향한 일본군은 숫자가 전국적으로 흩어지고 여러가지로 작전상 날카롭지 못한 면도 있다.
자 이제 이 플랜B의 클라이막스가 펼쳐집니다. 사실 전라도로 향하는 일본군의 제일 주공은 우키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3만의 병력이 일본군 본진인 부산에서 경상우도(경남 서부)를 뚫고 전라도 남부를 향하는 작전상 남군으로 이를 보면 당시 이순신에 대한 일본측의 분노가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 우키다 히데이에가 누구냐 하면 당시 일본군 전체 총대장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입니다. 당시 10대 후반 정도로 그렇게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외모는 뛰어났다더군요…) 이 것만 봐도 플랜B의 가장 메인 공격은 바로 이 공격이었습니다. 이들의 첫 목표는 경남 서부의 교두보이자 전략 요충지로 진주성을 공략하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 2010년도 초에 진주에 몇 년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어쩌다 그 시절 직장이 거기 있다 보니 진주서 몇 년 살게 되었습니다. 30대 초반에 여친도 없고, 진주에 친구도 없고 해서 주말이면 혼자 가기 좋아했던 곳이 진주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주성을 갈 때마다 성벽을 걸으며 여길 대체 어떻게 해야 함락할 수 있을까 둘러보던 추억이 있습니다. 진주성은 우선 남강이 흐르는 곳 강 위에 아니 바로 옆에 성이 있습니다. 성의 남쪽은 다 강이고, 북쪽은 땅인데 평야에 바로 성벽이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높은 언덕같은 고지대 위에 성이 지어져 있습니다. 제 기억에 평야와 맞 닿아 있는 곳은 동문이었던 동쪽 성벽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도 매우 입구가 협소합니다. 한국 성인데 가보면 유럽 성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안에는 예전 조선시대 지은 건물은 거의 없고, 박물관과 사찰이 있습니다. 반드시 이곳은 여친과 함께 가시길 추천 드립니다. 특히 봄에 꽃필 때와 남강유등축제 때… 저처럼 외롭게 밀리터리를 위하여 진주성을 홀로 가는 매니아 인은 없기를 바랍니다. 하아…
아무튼 여기서 일본 3만의 총공세를 3천의 병력으로 막아냅니다. 여기서 우리의 김시민 장군님도 전사하시고요. 일본은 이 진주성 전투로 지휘관급 3백명, 병사가 1만여 명이 전사를 합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에는 소백 산맥이 있는데, 군대는 산을 넘어 진군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일본은 전라도로 통하는 모든 루트에서 막혔고, 특히나 진주성을 뚫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상 전라도 공략이 육로로 실패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후 1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를 함락시키기는 합니다.
이 플랜B의 실패가 전쟁의 전세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컸습니다. 우선 최전방의 일본군 부대가 매우 위태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제 그들에게 보급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육로를 통한 달구지 수송 밖에 없으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최전방의 고니시 부대와 가토의 부대는 곧 굶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어찌저찌 육로를 통한 보급을 강행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수행할 대부대를 조직해야 하며, 이는 전선의 병력을 대거 차출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군량은 수송하다 중간에 다 먹어 치우거나 가다가 썩거나 하기에 사실상 답이 없습니다. 또한 만일 조선군이 중앙 보급로에 있는 영토인 허리를 탈환이라도 하게 되면 전방부대들은 고립되어 포위된 채 진짜 굶어죽을수도 있게 됩니다. 게다가 이 때부터 슬슬 명나라가 참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플랜B의 실패는 일본군의 사기를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트리게 됩니다. 결국 이는 더 이상 일본은 공세를 할 수 없음을 의미하며, 오히려 이제는 조선측이 반격할 형세가 되게 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군대는 어떠한 군대인가?
다음 스토리로 넘어가기 이전에 일본군대에 대하여 한번 제대로 진단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군대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한번 얘기해 보도록 하죠.
제가 이번편을 통해 하고 싶은 얘기는 일본이라는 나라 군대의 실체와 군대에게 전쟁에 대한 대의명분이 얼마나 중요한가입니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매스컴을 통해 또는 게임을 통해 일본이라는 나라의 무사, 즉 사무라이와 일본도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굉장히 일본이 싸움 잘 하는 뭐 그런 나라로 인식합니다. 물론 세계에서 검을 가장 잘 쓰는 민족 하면 일본일 것이고, 무사도 정신이 사회문화적으로 가장 뿌리깊게 박힌 민족도 일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밀리터리의 종합적인 요건으로 보건데, 싸움 잘하는 것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일본군을 보면 벨런스가 심히 안 맞고 전략 전술적으로 극단적인 행태를 역사 내내 보여왔으며, 대부분 외세를 침략한 전쟁에서 병사들이 싸울 동기를 만들려고 온갖 광적인 사상으로 치닫습니다.
임진왜란만 놓고 봐도 만일 일본에게 대포라는 무기와 공성무기를 만들 공병만 있었어도 조선에게 이정도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군대에 기본 병과인 포병(꼭 화약을 쓰는 대포가 아니라도, 투석기 같은 공성무기를 총칭해서 포병이라 함)이 없기에, 적의 요새를 향해 보병이 돌격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대 로마군만 해도, 로마군의 핵심은 물론 군단병이겠지만, 로마군이 강력한 것은 사실 현장에서 이런저런 공성무기와 시설/설비를 뚝딱뚝딱 뽑아낸 공병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처럼 행주대첩이나 진주대첩 때 일본에게 포병이나 공병이 있었으면 조선이 매우 고전하였을 것입니다. 조총을 일찍 도입하여 야전에서는 강력한 힘을 동시대 동양권 육군에 비해서 발휘했을 지 몰라도, 그 환경이 바뀌어 조총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장소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돌격밖에 없었습니다. 해전에서도 마찬가지로 판옥선을 향하여 돌격밖에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거북선을 향해서는 할 것이 아예 없었고요… (근데 원균 당신은…)
이처럼 일본군은 병과적 다양함이 부족한 군대였으며, 창의적 솔루션을 과학적으로 내는데 부족하였으며, 지나치게 보병의 무용에 기대는 구조였습니다. 물론 일본이 방어가 아니라 공격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국시대 내내 공성전 특히 방어력에 몰빵한 일본성을 상대로 공성전을 수 없이 해온 일본 치고는 너무 성이나 진지를 공략할 수 있는 장비나 기계적 방법론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일본군의 조선 성 공략법의 일반적인 방법은 조총으로 성벽위를 쏴서 엄호사격을 한 다음, 사다리를 병사들이 타고 넘어가 공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조선은 개개인의 무공은 떨어졌고 전체적인 나라의 군체제가 문제가 많았을지 몰라도. 과학적인 접근방식에서 오는 창의력과 응용력은 훨씬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일본은 축성 기술만큼은 임진왜란 때 뛰어남을 보여주기는 했습니다.
둘째로 일본의 전략 성향입니다. 2차대전을 봐도 이오지마 전투 이전까지 일본군은 계속해서 상륙한 미군을 향하여 반자이 돌격만 하다 죽습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라는 미국서 살다 온 장군만이 이오지마에서 사고의 유연함을 발휘해 미군을 내륙까지 끌어들인 다음 요세에서 공격하여 미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죠. 심지어 중국대륙에서 인도로 침공을 펼친 임팔작전의 주인공 무다구치 렌야의 경우만 봐도 정말 이런 꼴통이 어떻게 저 자리에 있을까 싶을 정도인데, 식량이 다 떨어진 군대에게 무사도의 정신을 강조하며 정글의 풀을 뜯어먹으라며 끝까지 진군을 하라고 합니다. 결국 밑의 참모장이 보다 못해서 항명하며 군대를 후퇴시키는데, 이 참모장은 결국 군재판에서 정신병자로 판결을 내리고 쉬쉬 묻어버립니다. (여명의 눈동자에서 최재성이 투입된 바로 그 작전이 임팔작전임.)
여러 전쟁에서 일본은 일단 한번 출전하면 브레이크가 없이 죽을 때까지 공세만 취하는 성향으로 전쟁 내내 사는 전쟁이 아니라 죽기 위한 전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결국 너무나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한 사회가 된 나머지 합리적인 사고가 멈추게 되고 비이성적인 방법론에 집착하게 되어 결국 스스로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렇게 계속 악순환이 되는 이유는 명분 없는 전쟁을 한다라는 게 결국 사람들을 동기부여하기 위해서는 제정신이 아닌 광란으로 몰고 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모든 초기 작전들이 실패로 돌아간 후 사기가 떨어지고, 그 다음에 그 군대가 멘탈적으로 버틸 모멘텀이라는 것이 대의명분인데, 자기 나라 자기 가족이 살 땅을 지켜야 하는 조선군에 비해 일본군은 계속 전쟁을 수행하게 만들 동기라는 것이 광기와 피에 대한 굶주림, 증오 밖에 안 남기 때문에 이는 이후 전쟁을 치르는 내내 일본군의 리더쉽에 큰 부담으로 작용됩니다. 결국 나중에는 히데요시가 배어온 코 숫자대로 상금을 주겠다는 식의 극단까지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기는 상황에서 공명심이 생길 때 얘기지, 자기 목숨을 바쳐야 하는 전쟁에서 상금이 당장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전쟁이란 자기 목숨을 바칠 정도의 대의명분적 동기가 사라지면 군대가 아니라 도적때가 됩니다.
이제부터 일본에게 이제 휴전하고 정유재란이 발발할 때까지 공세와 점령은 커녕 살기위한 몸부림으로 계속된 후퇴만 반복하게 됩니다.
명나라의 참전과 조명연합군의 반격
다음편에 계속…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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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을과-병과는 과거제에서 2차시험 격인 복시를 통해 선발한 33명을 상대로 다시 전시라는 시험을 통해 순위를 나눈 걸 의미합니다. 갑과는 1-3위, 을과가 4위-10위, 병과가 11위-33위까지에 해당하는 성적입니다. 소위 말하는 장원 급제가 이 시험 전체 1등인데, 6품(정인지 종인지 헷갈리네요)을 받고, 병과 23위(전체 33위)는 종9품이 됩니다.
이치전투는 권율이 생전에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공적이라고 하죠. 사위인 이항복에게도 그런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요. 이때 이치에서 막힌 일본군의 대장이 도요토미 정권의 5대로 중 하나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입니다. 사실상 타치바나 무네시게, 시마즈 요시히로와 함께 조선에 온 장수 중에는 가장 손에 꼽힐 명장인데 조선에서는 말년이기도 하고 해서 뭔가 꼬였는지 이후의 행주대첩까지 권율에게는 모두 패했고, 나중에 북인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한테 또 깨지면서 전라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물론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를 캐발살내긴 하지만요.
와키자카는 사실 커리어에 저 용인전투 하나랑 나중에 세키가하라에서의 뒷치기 이 두 개가 전부인데, 우리한테는 충무공께 워낙 시원하게 털려서 유명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