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자동
NBA Maniazine
/ / / /
Xpert

포틀랜드의 2000년대 - (2) Frustration and Failure

 
1
  1466
2010-05-13 20:29:00

원문

Blazer's Edge의 Dave씨가 지난 10년간의 포틀랜드를 간략하게 회고한 글입니다.

포틀랜드 팬들에게 유익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번역을 해봤습니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과 본문의 평어체에 대해서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2002-2003


Record : 50승 32패


감독 : 모리스 칙스


IN : 안토니오 다니엘스, 제프 맥기니스, 아비다스 사보니스, 찰스 스미스, 퀸텔 우즈


OUT : 에릭 바클리, 릭 브룬슨, 미첼 버틀러, 숀 켐프, 스티브 커


드래프트 : 퀸텔 우즈(21번픽), 제이슨 제닝스(42번픽), 페테리코 캐머리크(46번픽)


Leading Scorer : 라쉬드 월러스(18.1 득점)


Leading Rebounder : 라쉬드 월러스(7.4 리바운드)


Most Minutes : 라쉬드 월러스(36.3 분)



증오하는 레이커스에게 2년 연속 1라운드에서 스윕을 당하는 충격적인 붕괴로 01-02 시즌이 끝난 후, 포틀랜드 팬들은 냉소와 방어적 낙관론이 뒤섞인 채로 02-03 시즌을 맞이했다. 긍정적인 부분은 밥 윗싯의 과투자에서 가장 번쩍거리는 상징이었던 숀 켐프가 substance abuse issue 재발의 압박 때문에 팀을 떠난 것이었다. 켐프의 연봉은 여전히 팀에 부담이었지만, 켐프가 사라진건 대중들이 인식하기에 새로운 희망의 전조로 보였다. 잠시 은퇴했고 널리 인기가 많은 센터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복귀는 여기에 힘을 실어줬다. 추가로 윗싯은 데이먼 스타더마이어를 대체하기 위해 또다른 PG인 돌파형, 득점형 가드 제프 맥기니스를 데려왔다. 맥기니스는 클리퍼스에서 평균 15득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안토니오 다니엘스는 운동 능력 좋은 가드였고, 포틀랜드는 1라운드픽으로 슈퍼 스코어러이자 엄청난 운동능력을 가진 퀸텔 우즈를 지명했다. 퀸텔 우즈는 또다른 고졸 유망주로서 저메인 오닐을 잃은 아픔을 달래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모두 성공할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지만, 둘 정도만 성공해도 포틀랜드는 굉장한 전력을 갖게 될터였다.


로테이션은 여전히 라쉬드 월러스와 본지 웰스 중심으로 돌아갔다. 라쉬드 월러스는 아직 경기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선수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다. 비록 일부에서는 이제 더 이상 전 코치 마이크 던리비가 월러스에게 퍼리미터에서 놀기보다 포스트업을 할 필요성을 주입시키지 않기 때문에 월러스의 공격이 나빠지고 있다고 수근대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웰스는 커리어 하이인 평균 17득점을 올리고 있었고, 스타덤에 오를듯 보였다. 사보니스와 더불어 베테랑인 데일 데이비스와 스카티 피펜은 계속해서 프론트코트를 지탱했다. 포틀랜드의 희망은 이 3명의 베테랑이 기초를 충분히 다져주면 젊고 에너지 넘치는 선수들이 정상으로 팀을 이끄는 것이었다. 스타더마이어와 데릭 앤더슨의 백코트는 경쟁력이 있었고 가끔은 엄청났다. 수비수 루벤 패터슨은 누구든 마주치는 족족 잡아냈다. 라인업은 견고했고, 매일 밤 팀에게 찬스를 제공했으며, 모든 것들이 융합된 순간 상대를 지워버렸다.


불행하게도 막후에서의 드라마는 계속 팀의 발목을 잡았고, 정상적 기반 하에서 일어났을 융합을 막았다. 월러스와 웰스는 패거리를 만들었고 감독까지도 안중에 없었다. 피펜과 데이비스는 별난 짓들에 진저리를 쳤다. 경기당 16분 이하로 출전한 사보니스처럼 피펜도 부상에 시달렸다. 득점 우선인 제프 맥기니스는 팀원들과 잘 맞지 않았다. 데이먼 스타더마이어는 표면상 해마다 그를 대체할 새로운 PG를 데려오는 고향 프랜차이즈와 애증 관계를 계속했다. 팀에서 3번째로 많은 득점을 올리는데도 데릭 앤더슨은 소프트하고 실망스럽게 여겨졌다. 앤더슨은 출전시간을 웰스와 나누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결코 평온을 찾지 못했다. 크리스 더들리는 부상으로 코트 구경도 거의 못했다. 루키인 퀸텔 우즈조차 사고를 쳤다. 우즈는 Terwilliger Curves에서 경찰에게 제지당했을 때 운전면허증이 없어서 자신의 rookie trading card 중 하나를 내밀었다. 다시 한번, talent는 코트 위의 케미스트리와 코트 밖의 상식이 부재하면서 흠집이 났다.


이 시즌에서 한가지 희망적인 부분은 작년에 드래프트한 잭 랜돌프의 새로운 성장이었다. 랜돌프는 경기당 17분을 뛰면서 야투율 51.4%, 8.4득점, 4.5리바운드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특히 월러스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몇몇은 랜돌프를 월러스의 후계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인기의 추락에 대해 말하자면, 이번 시즌 역시 구단과 지역 언론, 대중들 간에 너무도 공공연한 불화가 계속되었다. 월러스와 웰스의 상스러운 행동에 대한 얘기는 처음에 루머로 돌더니 그 다음에는 기사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점은 1월 15일이었다. 라쉬드 월러스는 로즈가든의 창고에서 팀 도나기 심판과 경기 후 충돌했다. 월러스의 오랜 테크니컬 파울 적립 경향과 최근의 산만한 플레이 및 행실이 합쳐져서, 이 사고는 월러스를 더욱 더 냉담한 존재로 만들었다.


라쉬드는 밥 윗싯과 더불어 포틀랜드 팬들의 집중적인 성토 대상이 되었다. 99-00 팀의 해체와 영광을 되찾으려는 오프시즌의 몇가지 움직임으로 인해, 밥 윗싯의 철학은 심각한 위기에 몰렸다. 윗싯은 케미스트리는 상관없다는 주장으로 유명했다. 윗싯은 해마다 로스터의 절반을 갈아치웠다. 윗싯은 PR에 파탄을 가져왔다. 윗싯의 설명은 간단했다 : winning was all that mattered. 몇년전 아깝게 영광을 놓친걸 기억하는 포틀랜드 팬들 외에는, 계속되는 1라운드 탈락은 'winning'에 자격 미달이었고, 최소한 구단이 겪고 있는 문화적 대가를 정당화할 정도는 아니었다. 팬들의 사랑은 떠나갔다. 한 지역 여성은 단지 'Trade Whitsitt' 표지를 흔들었다는 이유로 로즈가든에서 쫓겨났다. 지역 언론들은 프런트 직원들에게 꾸짖음을 당했다. 02-03 시즌에 사람들은 충분히 보았다. '트레이더 밥'이라는 말은 찬양의 의미에서 비웃음으로 완전히 변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 신동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이 모든 소란에도 불구하고, 포틀랜드는 존중받을만한 50승 32패의 성적을 기록했고, 증오하는 레이커스의 성적과 동률이었다. 다행히도 생뚱맞은 시드 배정 덕분에 3년 연속 1라운드에서 레이커스를 만나지는 않았다. 타이브레이커를 가진 레이커스는 5번시드를 받아 미네소타와 맞붙게 되었다. 포틀랜드는 덕 노비츠키와 스티브 내쉬가 이끄는 60승 22패의 댈러스를 만나게 되었다.


불행히도 시리즈는 미처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듯 했다. 포틀랜드는 내리 3게임을 패했고, 홈에서 면피용 승리를 거둬 1승 3패를 만들었다. 4차전은 잭 랜돌프를 선발 라인업에 투입한 시기와 일치했다. 포틀랜드는 그 시점에서 더 잃을게 없었고, 랜돌프는 25득점 15리바운드로 팀내 최다 득점과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화답했다. 포틀랜드는 5차전에서 빅 라인업으로 갔다. 랜돌프를 계속 선발로 놓고, 피펜 대신 일단 선발에서 뺐던 데일 데이비스를 다시 선발 라인업에 집어넣었다. 랜돌프는 22득점을 했고, 포틀랜드는 리바운드에서 16개를 앞서며 충격적인 4점차 승리를 따냈다. 6차전에서는 또다시 리바운드에서 압도적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랜돌프는 21득점 10리바운드로 다시한번 더블더블을 했고, 노비츠키는 4점에 묶였으며, 포틀랜드는 22점차로 승리했다. 포틀랜드는 이제 전례가 없고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내기 직전이었다 : 7전 4선승제에서 3패 후 역전을 하는 것 말이다. 포틀랜드 팬들 사이에서 희망은 높아졌고, 특히 6차전의 대승은 이를 부추겼다.


포틀랜드에게는 불행히도, 7차전은 근본적인 쇠퇴를 증명했다. 랜돌프는 제대로 발동을 걸지 못하고 14득점에 그쳤다. 데이먼 스타더마이어와 라쉬드 월러스는 각각 17득점으로 팀내 최다득점을 기록했다. 댈러스는 노비츠키가 31득점, 내쉬가 21득점을 하면서 포틀랜드의 PF와 PG의 수비 약점을 까발렸다. 최후의 반격은 모자랐고, 포틀랜드는 95-107로 패배했다.


실망으로 가득찬 잔에 마지막 한방울이 떨어지자, 밥 윗싯의 시대는 끝날 때가 되었다. 팀은 '트레이더 밥'이 6월의 드래프트 이후 GM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윗싯 최후의 중요한 움직임은 또다른 고졸 유망주 트레비스 아웃로를 드래프트한 것이었다. 윗싯은 50승팀이자 플옵 단골인 팀을 남겼으나, 혼란으로 폭발하기 직전의 로스터와 더욱 심해지는 PR에서의 파탄, 그리고 팀이 몇년간 바닥에서 헤메야 하는 재정적 상황 또한 남기고 떠났다. 일확천금을 위한 최후의 미미한 시도는 불명예와 무익함으로 끝났다. 날개없는 추락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2003-2004


Record : 41승 41패


감독 : 모리스 칙스


IN : 샤리프 압둘라힘, 맷 캐롤, 오마 쿡, 댄 디카우, 카니엘 디킨스, 데스먼 퍼거슨, 에디 길, 대리우스 마일스, 트레이시 머레이, 웨슬리 퍼슨, 테오 래틀리프, 블라디미르 스테파니아, Slavko Vranes


OUT : 안토니오 다니엘스, 크리스 더들리, 스카티 피펜, 아비다스 사보니스, 찰스 스미스


드래프트 : 트레비스 아웃로(23번픽), 네자드 시나노비치(54번픽)


Leading Scorer : 잭 랜돌프(20.1 득점)


Leading Rebounder : 잭 랜돌프(10.5 리바운드)


Most Minutes : 데이먼 스타더마이어(38.0 분)



포틀랜드는 새로운 경영진 하에 03-04 시즌을 맞이했다. 스티브 패터슨과 존 내쉬는 모두 프런트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패터슨은 휴스턴에서, 내쉬는 워싱턴, 뉴저지, 필라델피아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


이 시점에서, 가장 무관심한 관찰자에게도 포틀랜드가 현재의 로스터를 가지고는 컨텐더로 돌아갈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근래에 새로운 조각들이 동일한 핵심에 접붙여졌지만,, 어떤 것도 잘 되지 않았다. 각각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돌아오는 talent의 레벨은 점점 불확실해졌다. 1999년에 월트 윌리엄스, 켈빈 케이토, 아이재이아 라이더를 스카티 피펜과 스티브 스미스로 바꿨던 팀은 이후 추세를 뒤집어서 뎁스에서의 A급 선수 부족을 커버하기 위해 점점 더 B급 선수들을 수집했다.


이런 흐름의 부산물은 계속 증가하는 샐러리였다. 켐프나 피펜같은 옛 스타들은 터무니없는 비용을 차지했다. 팀에서는 유망주들이 팀에게 요구하는 것만큼의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망주들은 트레이드 매물로 나왔다. 포틀랜드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비싼 성분들로 만들어진 델리 샌드위치였다. 메뉴상으로는 환상적으로 들렸지만, 길가에 있는 가게에서는 같은 것을 단돈 5달러에 헛소리듣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새 경영진의 첫번째 업무는 팀의 코어를 골라내는 것이었다. 거기서부터 조연급 선수들을 합리화하고 값비싼 잉여 선수들을 줄이며 페이롤에서 군더더기를 제거하려고 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베테랑 영입의 시대는 갔다. 'Value'가 키워드였다.


포틀랜드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라쉬드 월러스의 만기계약이었다. 쉬드는 몇년간 팀의 심장이었다. 좋든 싫든 포틀랜드는 월러스 없이 성공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쉬드에게는 구단, 대중들의 관심, 언론, 포틀랜드에서의 생활 등이 불만족스러웠다. 월러스는 포틀랜드와 재계약하지 않을 것임을 경영진에게 분명히 했다. 로스터의 정리가 임박했다.


첫번째 움직임은 12월 3일에 있었다. 포틀랜드는 본지 웰스를 멤피스로 보내고, 노장 슈터 웨슬리 퍼슨과 1라운드픽(이후 세르게이 모니아 픽)을 받았다. 1년 전에는 어느 쪽도 웰스의 능력에 대한 충분한 보상으로 여겨지지 않았겠지만, 웰스는 이제 코트 위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코트 밖에서는 환영받을만한 요건들을 없애버렸다.


두번째 움직임은 1월 21일에 있었다. 포틀랜드는 제프 맥기니스와 루벤 붐체붐체를 클리블랜드로 보내고 대리우스 마일스를 데려왔다. 마일스는 22세의 리그 4년차 선수로 클리퍼스 시절, 운동능력과 리바운드-속공 전개- 피니쉬를 혼자 해내는 포텐셜로 많은 주목을 이끌어냈던 고졸 드래프티였다. 클리블랜드는 마일스를 얻기 위해 안드레 밀러를 트레이드했는데, 두 선수 모두 분명한 재능에도 현재의 팀이 자신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과 자신들의 상황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에 딜이 성사되었다는 루머가 있었다. 클리퍼스의 자유분방한 오펜스에 익숙했던 마일스는 클리블랜드에서 납상자에 든 납으로 씌워진 납탄처럼 가라앉았다. 시즌 시작 두달만에 마일스는 현역시절 보수적이고 고집센 선수였던 새로운 감독 폴 사일러스의 분노를 샀다. 마일스의 기록은 실망스러웠고, 태도는 불쾌감을 주었으며, 클리블랜드는 맥기니스가 케미스트리를 잘 모으는 선수가 아니더라도 마일스가 떠나기를 바랬다.


그리고 18일 후, 대지진이 일어났다. 라쉬드 월러스와 최근 영입된 웨슬리 퍼슨을 묶어서 애틀랜타로 보내고, 득점형 포워드 샤리프 압둘라힘, 샷블락커 테오 래틀리프, 포틀랜드 출신인 댄 디카우를 데려온 것이다. 압둘라힘과 래틀리프는 개인적으로 쉬드의 talent 수준과 암팩트에 근접하지는 못했지만, 궁지에 빠진 팀이 기대한 만큼은 받아온 조합이 합리적이라 여겨졌다. 포틀랜드에서 이 딜은 '인성이 재능만큼 중요하다'는 새로운 철학의 시작으로 홍보되었다. 딜에 대한 설명에는 거의 항상 잭 랜돌프의 피어나기 시작한 플레이가 들어갔다. 랜돌프는 1번픽인 엘튼 브랜드처럼 꾸준히 더블더블을 찍는 PF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딜은 수평적이었고, 아주 조금 손해였을수도 있지만, 필요성이 있고 미묘하게 유리했다 설명에 따르면 말이다. 팀은 2000년대의 들어서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월러스의 별난 짓은 전설적이었고, 자신의 패거리 외의 사람에 대한 무뚝뚝함이 분명했다. 월러스는 코트 위에서도 더이상 노력하는거 같지 않았다. 시즌의 첫번째 달은 아이재이아 라이더의 전성기 이후 가장 큰 부재와 쉬드의 pouting으로 채워졌다. 라쉬드의 이탈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딜이 잘된 것처럼 보였다. 마일스는 피펜처럼 타고난 SF는 아니었지만, 달릴 수 있게 풀어만 주면 예전에 더 사랑받았던 제롬 커시를 회상하게 만드는 멋진 덩크를 꽂아넣었다. 마일스의 등장은 또한 루벤 패터슨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 패터슨은 팬들에게 버림받고 코칭스태프와 주기적으로 싸우는 또다른 선수였다. 테오 래틀리프는 블락으로 당장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샤리프 압둘라힘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경쟁력 있는 득점원이자 리바운더였다. 포틀랜드의 프론트코트는 강화되고 다시 활력을 찾은듯 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들은 더 심각한 문제를 가려주고 있었다. 새로 영입한 선수들 중에 누구도 수비적 재능을 갖추지 못했다. 백코트 전체와 랜돌프를 비롯한 현존하는 로테이션 내 선수들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래틀리프의 블락은 기억할만 했고, 블락으로 경기를 바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래틀리프가 그렇게 많은 블락을 했다는 사실은 곧 포틀랜드가 전체적으로 돌파를 허용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샷블락커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슛 시도 중에 작은 부분만이 실제로 걷어내진다. 나머지는 골밑의 슛 시도가 되었고, 그 시도들은 대개 성공했다. 5년만에 포틀랜드의 수비는 최고에서 훌륭한 수준으로 다시 평범한 수준이 되었다가 이제는 월러스의 무관심과 그 대체자들의 무능력함에 희생양이 되어 무용지물이었다.


밀레니엄 시기 포틀랜드의 상징이었던 공격은 더 심해서 놀랄 정도로 평범해졌다. 랜돌프는 훌륭한 무기가 되고 있었으나, 명백히 월러스 트레이드로 얻은 최고의 선수인 압둘라힘은 랜돌프와 같이 뛰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둘다 선호하는게 같았다 : 미드레인지에서의 페이스업, 포스트, 드리블, lane의 활용, 리바운드. 둘은 서로를 보완하는게 아니라 중복되었다. 베테랑인 압둘라힘은 어린 랜돌프에게 포지션을 양보하라는 제의에 분개했다. 몇년전 월러스가 브라이언 그랜트 옆에서 SF로 뛰라는 똑같은 제안을 거부했듯이 말이다. 어떻게 보든간에, 팀내 2번째 공격수와 10년에 한번 나올 딜의 주축선수가 전혀 맞지 않고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트러블의 확실한 조짐이었다.


최종적으로, 새로운 포틀랜드는 쉬드가 이끌던 스쿼드와 거의 똑같은 성적을 냈다. 쉬드가 있었을 때 24승 25패였고, 쉬드가 떠난 후로는 17승 16패였다. 포틀랜드는 41승 41패로 시즌을 마쳤고, 20년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는 고통보다 희망이 더 많을거라 믿었다. 프론트코트를 쇄신하자, 이제 관심은 노쇠하고 평범한 백코트로 옮겨갔다. 가드는 항상 빅맨보다 얻기가 쉬웠다. 가드 포지션은 약간의 스파크를 내는데 비해 빅맨 포지션은 몇년을 두고 계속 타오른다. 새로 들어온 선수들은 노장들보다 더 젊고, 더 굶주렸고, 어느 모로 보나 동기부여가 더 잘 되어 있었다. 상황은 좋아지고 있었다.


경영진은 새로운 방침을 너무도 확신한 나머지 샷블락커인 테오 래틀리프에게 5년 50M의 계약을 제시하는 것으로 재정적 신중성의 시대를 열었다. 오퍼는 래틀리프에 대한 확신과 감사의 표시였을뿐 아니라, 다음의 것들 - 열심히 노력하고, 대중들을 올바르게 대하며, 구단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 을 한다면 여전히 보상이 주어질 수 있음을 팬들과 선수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이후 마일스와 랜돌프도 유리한 계약에 사인했다. 마일스는 매년 7~8M을, 랜돌프는 매년 10~15M을 받게 되었다. 이 세명의 선수들만으로도 팀 샐러리캡의 절반이 찼다. 프랜차이즈의 새싹은 황금으로 번쩍거렸다. 미래의 프론트코트는 보증되었다.


그러나 랜돌프, 마일스, 래틀리프는 그해 구단으로부터 횡재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금리의 추락은 한때 받아들일만 했던 로즈가든에 대한 차관을 끔찍하게 만들었고, 프랜차이즈를 financial Superfund Site로 변화시켰다. 폴 앨런과 구단은 2004년 초에 채권자에게 로즈가든의 지배권을 양도했고, 구단과 로즈가든 경영진 간의 불편한 상황은 자주 악화되었다. 지역 사업은 공중에 떠버렸다. 오랫동안 구단에서 일했던 직원들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해고되었다. 연고지 이전에 대한 루머가 횡행했다. PR은 저점을 갱신하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지듯이, 코트 위의 성적도 곧 뒤를 따랐다.






2004-2005


Record : 27승 55패


감독 : 모리스 칙스 / 케빈 프리차드


IN : 모리스 베이커, 지노 칼라일, 리치 프람, 빅토르 크리야파, 조엘 프리즈빌라, 하승진, 세바스쳔 텔페어, 제임스 토마스, 닉 반 엑셀


OUT : 루벤 붐체붐체, 맷 캐롤, 오마 쿡, 데일 데이비스, 댄 디카우, 카니엘 디킨스, 데스먼 퍼거슨, 에디 길, 제프 맥기니스, 트레이시 머레이, 웨슬리 퍼슨, 블라디미르 스테파니아, Slavko Vranes, 라쉬드 월러스, 본지 웰스, 퀸텔 우즈


드래프트 : 세바스쳔 텔페어(13번픽), 세르게이 모니아(23번픽), 하승진(46번픽)


Leading Scorer : 잭 랜돌프(18.9 득점)


Leading Rebounder : 잭 랜돌프(9.6 리바운드)


Most Minutes : 잭 랜돌프(34.8 분)


2004년의 여름 동안, 새로운 경영진은 고졸 천재를 드래프트 하는 것으로 예전의 구단 철학과 뚜렷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천재가 자신만의 스토리를 갖고 있었다. 세바스쳔 텔페어는 어릴 때부터 뉴욕에서 전설이었다. 행선지만이 미정인 상태였고, 결국 텔페어의 행선지는 포틀랜드가 되었다. 또한 포틀랜드는 1라운드 후반에서 두명의 러시아 스타, 빅토르 크리야파와 세르게이 모니아를 뽑았다. 포틀랜드의 2라운드 선택은 야오밍의 사이즈와 Gilligan의 coordination을 갖춘 한국인 센터 하승진으로 새로운 GM 존 내쉬의 육성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좀더 흥미로운 추가 영입은 베테랑들을 움직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포틀랜드는 내부 정리를 원했다. 포틀랜드는 데일 데이비스와 댄 디카우를 골든스테이트로 보내고, 닉 반 엑셀을 받아왔다. 반 엑셀의 영입은 데이먼 스타더마이어/데릭 앤더슨과 함께 PG와 SG 임무를 분담하면서, 무기력한 두 선수에게 압박을 주고 백코트에서 절실히 필요로 하는 스파크를 줄 계획이었다. 존 내쉬의 2번째 육성 프로젝트는 조엘 프리즈빌라였다. 프리즈빌라는 약간 과체중에 인저리 프론이며 그때까지 별볼일 없던 센터로 원래 밀워키가 뽑았다가 당시에는 애틀랜타에서 벤치만 지키고 있었다. 프리즈빌라에게는 포틀랜드가 마지막 기회였지만, 내쉬는 빅맨들을 좀더 필요로 했고 프리즈빌라의 스킬셋은 팀이 딱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밝혀진 바와 같이 '미래의 프론트코트'가 모두 놀라는 가운데 망가지기 시작하면서 프리즈빌라의 영입은 곧바로 결실을 맺었다. 제일 먼저 비틀거린 것은 테오 래틀리프였다. 래틀리프는 부상을 당했고, 건강할때조차 출전시간, 야투율, 슛 시도, 블락, 리바운드가 줄어들었다. 결국 래틀리프는 프리즈빌라에게 완전히 주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대리우스 마일스는 주전 라인업에 드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시즌의 1/4를 부상으로 날렸다. 잭 랜돌프마저 무릎 부상으로 쓰러지자, 팀은 아주 무기력해졌다.


한편, 유능한 선수 출신 감독이자 nice guy였던 칙스는 모두를 만족시키면서 현상을 유지하는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루벤 패터슨은 불평의 끊임없는 근원이었고, 출전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여길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압둘라힘은 더 많은 역할을 원했지만, 랜돌프는 그걸 나누려들지 않았다. 래틀리프는 별볼일 없었다. 대리우스 마일스는 비디오 분석 시간 도중 칙스에게 인종차별적인 형용어구를 내뱉었고, 이 이야기는 전국 언론에 보도되었다. 데릭 앤더슨은 치통을 변명삼아 연습과 경기에서 빠졌다. 데이먼 스타더마이어는 매우 좌절하면서 헤맸고, 지난 몇년간 그랬듯이 이 아수라장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커리어의 대부분 동안 제정신인지조차 사람들이 의문스러워했던 닉 반 엑셀을 포틀랜드는 마치 나이든 현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코트 밖에서의 사고, 코트 위에서의 플레이, 더 가망있어 보이는 유망주들의 출전시간 부족에 팬들은 분노했다. 모든 것이 한번에 무너졌다. 22승 33패로 올해도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된게 확실해지자 칙스 감독은 해고되었다. 칙스가 떠난 자리는 젊은 간부로서 전직 캔자스 PG이자 마이너리그 감독이었던 케빈 프리차드가 맡았다. 프리차드는 장기적 대체자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앞으로 올바르게 움직이기 위한 관점에서 현재의 로스터 특히 유망주들을 평가하는 것이 임무였다. 프리차드 체제에서 세바스쳔 텔페어, 빅토르 크리야파, 하승진 같은 선수들이 자신의 재능을 보여줄 좀더 많은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스타더마이어, 텔페어, 앤더슨, 반 엑셀, 마일스, 압둘라힘, 랜돌프로 구성된 로스터의 수비를 프리차드가 고칠 수는 없었다. 실험과 과도기적 상태에서는 공격도 전혀 되지 않았다. 포틀랜드는 5승 22패로 시즌을 마쳤고, 상상도 못했던 27승 55패라는 성적을 기록했다. 승패가 뒤집혔다면 대부분의 포틀랜드 팬들은 수긍할만은 해도 눈부시진 않은 결과라 여겼을 것이다. 30승 이하의 성적은 포틀랜드가 오랫동안 겪지 못했던 것이었다.


성적, 팀의 재정적 상태, 카리스마 있는 선수의 부족, 고연봉을 받는 재능들의 실망스러운 성적, 이 새로운 선수들 사이에서조차(팀의 리더와 스타들도 포함해서) 계속되는 만성적이고 수치스러운 코트 밖에서의 사고들의 와중에 구단과 시민들 사이의 관계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팀이 더 우승할 수 있을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팀이 다시 플옵에 나갈 수 있을지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 팀이 살아남기나 할지 궁금해했다. 어떤 이들은 팀이 살아남아야 하는지에 대해 공공연히 의문을 드러냈다. 6년만에 포틀랜드는 "파이널 진출까지 12분 남은 상황"에서 망각의 절벽으로 내몰렸다. 팀은 다시 살아니기 위해 무언가, 아니 무엇이든 필요로 했다. 남아있는 몇 안되는 팬들은 믿어야 할 이유가 절실히 필요했다.


다행히도 몇가지가 이제 막 다가오고 있었다......



* pnics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0-05-17 06:05)
4
Comments
2010-05-13 21:04:35

재밌네요.
밀레니엄 파워포워드시대를 열었던 선수중 쉬드도 그중 한명이었는데, 임팩트에 비해 스탯은 의외로 대단하지만은 않군요.
당시 쉬드는 참 막기 어려운 선수같다고 생각했었고, 성질만 잘 다듬으면 문제없을 선수같았는데 역시 성질머리 때문에 팀에서 버려진거였네요.
군대 갔다와보니 쉬드가 애틀랜타로 갔고, 곧바로 디트로이트로 갔다는 소식에 많이 놀랐었습니다.

포틀랜드라는 팀자체에 문제가 얼마나 많았는지 많이 보여주네요. 예전에 승진이가 싸우려고 했다는 소릴듣고 루키주제에 어처구니없구나 싶었는데, 그럴만도 했겠다 싶었습니다.

2010-05-13 21:46:21

원래,,,90년 중반에도 리빌딩 잘 하고서부터 은근 관심 갖게되었던 팀이었습니다만,,핖의 가세로 완전 팬이 됐지요,,,

그냥 그분이 떠나고 허전한 마음에 핖 땜에 팬이 된 케이스지만,,,

90년대 중반부터 게임도 재밌고,,유망주가 많아서 더 관심을 가졌었네요,,,

말씀하신 두번째 이야기는 그냥 암울 자체였죠,,,

스타더마이어와 밴 액셀이 백코트 스타팅으로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말 다했죠,,,

그 당시에도 갑갑했던 기억이 나는데요,,,7~8년이 지난 지금 숨이 콱 막혀 오네요,,,

당시만 생각하면,,,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2010-05-13 23:23:45

제가 응원을 시작했던 그 시기가 나오니 참 반갑기도 하면서 암울한게...
지금이라도 멤피스에서 제 몫을 해주고 있는 Zach를 보니 반갑기도 하면서 어릴때 저런 마인드를
왜 못가졌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드네요...
여하간 ZuNov님 덕분에 포틀랜드를 되짚어볼 수 있는게 참 좋습니다

2010-05-14 06:38:01

제일 블레이져스의 명성을 들어왔지만 그 상세한 사건들은 잘 몰랐는데

그을 쭉 읽다보니 참 대단한 선수들이었군요.

닉반엑셀이 나이든 현자처럼 보였다....는 부분이 정말 압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min
67
7559
24-04-30
bos
42
3564
24-04-29
73
9182
24-04-29
bosmia
54
3581
24-04-29
cleorl
40
3623
24-04-28
cleorl
36
3840
24-04-27
dengsw
54
5939
24-04-26
bosmia
97
7828
24-04-25
minphx
45
4813
24-04-25
nyk
68
6015
24-04-23
nykphi
34
3839
24-04-21
miaphi
43
7786
24-04-18
bos
81
10391
24-04-16
min
85
15404
24-04-16
atlbkn
41
6903
24-04-13
por
69
16851
24-04-12
hou
33
12221
24-04-08
orl
43
8231
24-04-10
dalsac
48
8638
24-04-05
dal
57
20391
24-04-04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