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은 닉스이기를 포기하는가? 上
① Knicks Pride
질문이 하나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NBA' 하면 어떤 팀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LA 레이커스? 보스턴 셀틱스?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뉴욕 닉스"
1990년대 NBA를 처음 접한 국내 팬들에게 닉스라는 이름은 각별하리라 생각한다. 그 위대한 마이클 조던의 라이벌로 맹렬히 덤벼왔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패배하고 마는 팀. 어쩌면 너무나 처절하게 도전했고 또 패배했기에 더욱 강인하게 각인 되어 있는 이름일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 또래 국내 NBA 팬들의 대부분이 그렇게 닉스라는 이름을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뉴욕과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를 알게 되는 순간, 닉스는 전혀 다른 팀이 되어 다가온다. 아마도 전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졌을 도시를 연고지로 하는 팀. 농구는 스포츠가 아닌 종교라고 말하는 팬들을 등에 업은 팀. 수많은 역사의 순간들이 스쳐지나간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홈코트로 사용하는 팀. 그렇기에 결코 느긋하게 플레이 할 수 없으며 매경기 목숨을 걸듯 게임에 임해야하는 팀. 시시하게 승리하기 보다는 차라리 장렬하게 산화하기를 원하는 팀.
바로 뉴욕 닉스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뉴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의 체력마저 고갈시켜버리던 뉴욕의 농구가 사라졌다. 경기 종료 버저가 울리는 순간까지 상대팀을 괴롭히던 그들이 사라졌다. '8번 시드의 기적'을 일으키며 파이널 무대를 밟았던 그들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수많은 농구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던 그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뉴욕은 이대로 닉스이기를 포기하는 것인가?
② Scott Layden Era (1999 ~ 2004)
뉴욕 몰락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가장 먼저 이 사람의 이름을 언급해야만 한다. 스캇 레이든.
- Layden 1999-2000
만나서 반가워~ |
레이든은 앞서 언급한 '8번 시드의 기적'이 끝난 직후인 1999-2000 시즌 개막과 함께 뉴욕의 GM으로 부임했다. 뉴욕에서의 첫 시즌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1999 드래프트에서 15번 픽으로 지명했던 프랑스 산 7풋 센터 프레드릭 바이스가 단 한 경기도 NBA에서 플레이하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지만, 그것은 전임자였던 에드 탭스캇의 선택이었다. 팀은 50승 32패를 기록하며 무난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인디애나에게 아쉽게 패배하며 시즌을 마무리한다. 성적만을 놓고 본다면 흠잡을 것 없는 시즌이었다. 라트렐 스프리웰에게 5년간 $61.9m에 육박하는 거대 계약을 안겨주긴 했지만, 이미 뉴욕 최고의 스타였던 스프리웰이었기에 이해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문제아 기질이 다분했지만 훗날 스프리웰이 어떤 모습으로 리그를 떠나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으니까.
- Layden 2000-01
도대체 누가 유잉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
문제의 발단은 2000-01 시즌부터다. 레이든은 불현듯 리빌딩을 선언하며 팀을 뜯어고치기 시작한다. 뉴욕 팬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그날. 2000년 9월 20일. 레이든은 대형 사고를 친다. 뉴욕의 상징이자 닉스의 심장과도 같았던 패트릭 유잉을 트레이드 해버린 것이다. 물론 당시의 유잉은 이미 수많은 부상으로 전성기 기량을 잃은 뒤였다. 하지만 1999-2000 시즌에도 팀의 주전 센터로 62경기에 출장하며 제 몫을 해내던 유잉이었다. 아니 기량 문제를 떠나서, 그는 유잉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유잉을 리빌딩 과정의 일환으로 트레이드 해버린 것이다.
유잉의 트레이드는 비즈니스로 이해한다 치더라도, 유잉을 보내며 받아온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레이든은 무려 4개 팀이 연루된 트레이드를 이끌어내면서 글렌 라이스, 라자로 보렐, 버논 멕스월, 룩 롱리, 트레비스 나이트, 블라디미르 스테파니아를 영입했다. 이 중 실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을만한 선수는 하향세에 접어든 라이스 뿐이었다. 허나 라이스는 당시 뉴욕의 중심이던 트윈 테러(스프리웰-앨런 휴스턴)와 포지션이 겹치며 벤치 멤버로 출장해야 했다.
다른 선수들은 뉴욕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결국 레이든이 유잉을 떠나보내며 실질적으로 챙긴 실익은 라이스, 두 장의 1라운드 지명권, 이름 모를 몇몇 선수들 뿐이었다.
그리고 유잉을 보내며 얻어온 두 장의 1라운드 지명권은 각각 토론토의 마크 잭슨과 밴쿠버의 오델라 헤링턴을 영입하는 트레이드 카드로 사용됐다. 레이든은 리빌딩을 명목으로 계약 만료를 눈 앞에 둔 유잉을 샐러리 덤프 처리하며 라이스, 잭슨, 헤링턴 등을 영입했고 단 한 장의 1라운드 지명권도 챙기지 못했다.
뉴욕은 스프리웰, 휴스턴, 라이스 등의 활약 속에 48승34패를 기록,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만 1라운드에서 토론토를 만나 탈락하고 만다. 전년도에 비해 겨우 2패를 더했을 뿐이라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뉴욕은 이미 크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잉을 떠나보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50승 고지를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
- Layden 2001-02
본인도 민망했을 6년 $100m |
유잉을 떠나보낸 것도 충격적이지만, 유잉을 보내면서 얻은 것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트리플 테러라는 이름으로 활약하던 라이스는 단 1년 만에 휴스턴으로 떠나보냈다. 라이스를 보내며 얻어온 선수들은 댈러스의 하워드 아이즐리와 휴스턴의 섄던 앤더슨.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트레이드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잔여 계약을 살펴보면 또 다시 한숨을 쉬게 된다. 당시 라이스는 2년의 계약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아이즐리와 앤더슨은 각각 6년의 잔여 계약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 트레이드는 훗날 뉴욕의 샐러리 상황을 교묘하게 흐트려놓는 교두보가 된다. 덧붙여 두 선수가 뉴욕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는 기억하는가? 결과론적으로 이 두 선수가 유잉을 떠나보내며 얻은 댓가라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정말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한편 2001년 드래프트 지명권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유잉 트레이드 당시 자신들의 1라운드 픽을 선즈에게 넘겨줬는데, 이는 18번 지명권이 되어 휴스턴의 것이 되었다. 트레이드에서 얻은 레이커스의 1라운드 픽은 앞서 언급한 헤링턴과 트레이드되어 밴쿠버의 27번 픽으로 날아갔다. 결국 리빌딩을 선언하고도 1라운드 신인을 단 한 명도 지명하지 못한 채, 리그에 데뷔도 하지 못하고 사라져갈 두 명의 2라운더 루키를 지명하는 것으로 드래프트를 마감했다.
레이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FA가 된 휴스턴에게 무려 6년 $100m의 초거대 계약을 안겨준 것이다. 물론 휴스턴은 뉴욕의 에이스로 활약하던 선수였지만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시즌 평균20+득점 조차 기록한 적이 없었던 선수였다. 그런 휴스턴이 단숨에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많은 연봉을 받게된 선수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후 휴스턴은 부상 악령에 시달리며 2004-05 시즌을 끝으로 커리어를 마감하게 된다. 덕분에 뉴욕은 계약의 일부분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지만 이것을 행운이라 봐야할 지 불행이라 봐야할 지. 어쨌든 이 시점에서 이미 뉴욕은 리빌딩도 즉시 전력 보강도 아닌 너무나도 애매한 움직임에 갇히기 시작했다.
화룡 점정은 레이든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제프 밴 건디의 자진 사임이었다. 그 동안 자질에 대한 무수한 의심들과 맞서 싸우며 '8번 시드의 기적'까지 일궈낸 밴 건디였다. 하지만 더이상의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다며 스스로 뉴욕의 지휘봉을 놓고 말았다. 당시 뉴욕은 10승 9패를 기록 중이었다. 레이든은 돈 체이니를 신임 코치로 임명하지만 이후 20승 43패라는 끔찍한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뉴욕은 1987-88 시즌 이후 15년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탈락의 쓴 잔을 들이켰다. 레이든이 GM으로 부임한 지 단 3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 Layden 2002-03
캠비 + 네네 = 맥다이스 ?! |
레이든은 2002년 드래프트를 통해 뉴욕을 거의 회생 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당시 뉴욕은 1라운드 7번 픽으로 네네 힐라리오를 지명했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든이 덴버의 안토니오 맥다이스를 영입하기 위해 움직이면서 모든 일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당시 맥다이스는 부상으로 전성기의 기량을 상당 부분 잃은 뒤였으며 2001-02 시즌에는 겨우 10경기에 출장했을 뿐이었다. 그런 맥다이스를 영입하기 위해 당시 닉스 골밑의 핵심이었던 마커스 캠비, 주전 포인트 가드였던 잭슨과 신인 네네에 대한 권리마저 덴버로 넘겨버렸다. (뉴욕은 덴버가 1라운드 25번으로 지명한 프랭크 윌리암스의 지명 권리를 획득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선수였는지를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있는가?)
캠비와 네네를 넘겨주며 영입한 맥다이스는 부상으로 인해 2002-03 시즌을 통째로 결장한다.
- Layden 2003-04
트윈 테러 해체 |
레이든은 역대급 뎁스를 자랑했던 2003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9번 지명권으로 마이크 스위트니를 호명했으며, 2라운더 루키로 마칙 람페 등을 호명했다.
그리고 오프 시즌 동안, 자신이 GM으로 부임한 이후 처음으로 거액의 장기 계약을 안겨줬던 스프리웰을 트레이드 시키기에 이른다. 역시 총 4개의 팀이 연루된 트레이드를 통해 스프리웰을 미네소타로 보내고, 뉴저지로부터 키스 밴 혼을 영입했다. 이후 밴 혼은 뉴욕에서 단 1년도 버티지 못하고 2라운드 지명권까지 묶어서 트레이드 패키지로 활용된다. 뉴욕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스프리웰을 트레이드 한 끝에 얻은 것은 결국 밴 혼을 재트레이드 하며 영입한 팀 토마스와 나즈 모하메즈였다.
전성기를 훌쩍 지난 디켐베 무톰보와 2년 계약을 체결한 것을 마지막으로 비로소 뉴욕은 레이든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 당시 뉴욕은 10승 18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구단주 제임스 돌란의 인내심을 바닥낸 레이든은 그렇게 뉴욕에서 떠나갔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가득 채운 팬들은 더이상 "레이든을 해고하라!"며 소리치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란은 레이든의 후임으로 아이재이아 토마스를 신임 GM에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토론토와 인디애나에서 GM과 코치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던 토마스였기에, 아니 최소한 더이상은 레이든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기에 뉴욕 팬들의 기대는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뉴욕의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 계속
슬픈 스토리인데 너무 재미나게 쓰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