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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pert

진짜 'Hoosi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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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12
2009-02-27 15:59:11
http://sports.espn.go.com/espn/otl/news/story?id=3936787가 원문입니다.
들어가시면 오스카 로버슨의 인터뷰도 보실 수 있습니다.


진짜 “Hoosiers"

(Hoosier: 인디애나 촌뜨기를 지칭하는 말인데, 밀란이란 인디애나의 작은 마을에서 주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백인 고등학교 농구선수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새롭게 영구결번을 맞이하는 그의 고등학교 선수 시절 져지가 그와 함께 컨세코 필드하우스 코트의 중앙으로 행진하는 동안 그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모르더라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이, 자신이 신인왕과 올스타 MVP를 동시 석권한 61년보다 더 큰 순간임을.

이 순간이, The Big O 라고 불리며 최강의 트리플 더블 머신으로서 활약한 자신의 NBA 커리어보다 위대한 순간임을.


그의 넓어진 이마와 회색머리는 오스카 로버슨과 그의 고등학교(Crispus Attucks High School) 팀원들이 미국최초의 흑인팀 주대회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한지 시간이 오래됐음을 팬들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의 54년이란 긴 세월은 여전히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는 현재도 여전히 투쟁중이다.

그래서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인디애나 농구 전통을 존중하는 행사의 한 부분으로 로버슨에게 그의 고등학교 선수 시절 져지를 영구결번 시켜도 되냐고 물었을 때 로버슨은 단호하게 ‘No!’ 라고 대답했다. 로버슨은 자신이 아닌 54- 55 시즌 어턱스 고등학교 농구팀 자체가 존중받고 명예롭게 여겨지길 바랐다. 그는 팀의 감독이었던 레이 크로웨(Ray Crowe)를 위해 배너를 올려주길 바랬고, 그와 함께 뛰면서 State 우승을 차지하고 훗날 인디애나 농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8명의 팀원들의 농구 져지도 영구 결번 시켜주길 바랬다.


55년에 인디아나주 우승을 차지한 크리스퍼스 어턱트 고등학교 농구팀



“세상은 여전히 무신경해요.” 로버슨이 말했다. “단지 흑인 학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은 우리에게 무관심합니다. 누가 흑인들한테 관심 가지기나 하나요? 난 그런 걸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룩한 것들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그래서 전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제대로 하지 않을 거면 행사에 참여하지 않겠어.’ ”


그의 말들은 신랄하고 거칠었으며 수십 년간 그가 느낀 분노로 점칠 되어 있었다. 그가 이 문제에 이렇게 민감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로버슨과 그의 팀원들은 말 그대로 잊혀진 'Hoosier'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밀란에서 일어난 기적보다 감동적이면 감동적이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그들은 할리웃에 진출하지 못했을 뿐이다. 인디애나 주를 벗어나면 크로위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미국최고 흑인고등학교 농구팀의 주대회 우승을 일궜던 학교가 KKK의 발상지임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타이거즈가 우승을 한 이후에 그들은 정통적인 축하연과 다른 방식으로 축하연을 치룰 것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까?

1950년부터 57년까지 크리스퍼스 어턱스 타이거즈는 농구에 미친 인디애나주 역사상 최고의 팀이었다. 그들은 화끈한 득점력, 날라다니는 점프력, 미칠듯한 운동능력이라는 삼박자를 바탕으로 지역대회 6회 우승, 준State대회 4회 우승, 그리고 55년과 56년의 백투백 State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이뤄냈다. 그 기간 동안 타이거즈는 179승 20패를 기록했고, 아직까지 기록인 45연승과 56년의 무패 시즌 또한 이뤄냈다. 이 당시 타이거즈 소속으로는 명전 멤버인 오스카 로버슨 뿐만 아니라 할렘 글로브트라터의 전설인 할리 브라이언트와 윌리 가드너도 있었다.

“그 어떠한 말로도 그들이 이뤄낸 모든 것들의 위대함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후지어 속에서는 결승 위닝샷을 넣은 전 밀란팀의 가드 바비 플럼프의 말이다.

“지금까지 강팀이라고 불리었던 어떤 인디아나 고등학교 농구팀이라도 그들이 매일, 매 경기 짊어져야 했던 책임감을 지고는 그들만큼 성공하진 못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크리스퍼스 어턱스 선수들 모두를 존경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레이 크로위 밑에서 인디애나주 대회 우승을 이뤄낸 54-55 크리스퍼스 어턱스 농구팀



차별받은 과거


여기는 앉을 수 있지만 저쪽은 앉을 수 없었던 사실을 기억한다. 교과서에 백인 영화관과 흑인 영화관이 나뉘어 있었음을 기억한다. 이 모든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한다.

당시 인디애나폴리스는 1920년대 이 도시에 살던 KKK의 두목 D. C. 스테픈슨의 영향으로 인종 차별이 매우 심한 도시였다. 흑인들을 격리시키기 위해 흑인학교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도 스테픈슨과 클랜을 지지하는 정치가들이었다. 그래서 1927년, 크리스퍼스 어턱스 고등학교는 영국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최초의 미국인이라고 여겨지는 한 흑인 노예의 이름을 따서 개교했다. 하지만 인디애나주 고등학교 체육협회는 학교에 백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립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학교에 회원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협회는 소속 고등학교들에게 어턱스 고등학교와 연습경기 마저 금지시켰었다. 193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습경기만이 허락되었고, 1942년이 되어서야 어턱스 고등학교는 협회 소속이 되었고 주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


55년 주대회 우승을 차지한 후 네트를 자르고 있는 오스카 로버슨.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턱스 고등학교는 체육관이 너무 작아 경기를 유치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항상 어웨이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심지어 많은 (백인)학교들이 어턱스와의 경기를 학교내에서 치루는 것을 반대하여 도시 밖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동네 체육관에서 경기를 진행했다. 그들은 마치 고등학교 버전의 할렘 글로브트라터들이었다. 언제나 즐거운 농구로 관중을 매료시켰지만 경기가 끝나면 먹을 곳을 찾아 헤매야 했던 할렘 글로브트라터들 말이다.


“우리는 당시에 인종차별적인 시기와 인종차별적인 마을에 살고 있었어요.” 미망인 크로위 부인이 말했다. “특정 식당에서 먹을 수 없었고 특정 영화관에 출입이 불가능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라고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변명하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우리는 단지 더 잘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버슨을 포함한 어턱스 고교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로케필드 가든스라는 곳에서 정부의 보조를 받고 생활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아이들은 전기도 없고 물도 안나오는 집에서 살아야 했다. 그들에게는 학교만이 희망이었는데,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흑인 교사들은 백인 학교에서 가르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턱스 고등학교는 우수한 교사진을 보유할 수 있었고 교사들 모두 석사나 박사 학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학교는 의사, 변호사, 판사, 교수, 정치가 그리고 훌륭한 음악가들을 배출했다.

“나에게 농구에 대해서 말하던 선생님은 없었습니다.” 로버슨이 말했다. “선생님들이 신경 쓰던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대부분의 흑인들은 신경이 쓰였다. 인디애나 주의 체육관 속에서 색깔을 구분하는 선은 매우 선명해보였다. 한쪽에 흑인들, 반대쪽에 백인들 그리고 그 사이에 오락가락 하는 갈색 가죽공. 어턱스 고등학교의 승리는 인종차별이 만연한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이길 때 마다 백인 상사 얼굴을 기분 좋게 바라볼 수 있고, 가슴을 당당하게 펼 수 있어서 기쁘다고 우리에게 얘기했습니다.” 전 타이거즈의 클리블랜드 하프가 말했다. “우리는 당시에 어렸습니다. 사람들이 기뻐하던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해야만 했던, 네트 사이로 공을 넣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THE MAN FOR THE TIMES


어턱스 고등학교 팀의 감독이었던 레이 크로위가 주대회 우승을 이루고 인디애나폴리스 시장인 알렉스 클라크와 악수를 나누는 장면.



레이 크로위가 만약 살아있어서, 제자들이 크로위를 한자리에서 만나면 그들은 등을 조금 더 곧게 세울 것이고 말도 조금 더 부드럽게 할 것이고 감독님의 눈치를 볼 것이다.

그는 생전에 그렇게 존경심을 표하도록 가르쳤다. 나중에 밥 나이트와도 친구가 된 이 남자에게 기강(discipline)이 전부였다. 성적이 나쁘면 시합에 못 나갈 뿐이고. 학교를 안가도 시합에 못 나갈 뿐이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술이나 담배를 했다는 소문만 들려도 팀에서 쫓아냈다. 선수들의 성적표는 학교 복도에 공개되었고, 크로위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른 직장에서 야근을 하는 동안 부인을 통해 선수들이 저녁 8시 반이라는 통금시간을 지키는지 전화로 확인했다. 그리고 선수들 중 누군가 탈선을 하려고 하면 크로위 감독은 몽둥이로 패고 선수를 벽에 집어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체스트 패스로 네 몸을 뚫어주겠다.” 게임을 하기도 했다.


“레이가 없었다면, 난 정말 모르겠어요. 그냥... 정말 모르겠다고요.” 하프가 말했다. “그는 그 시기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뭘 그리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고 있었고 우리에게 알려줬어요. 그는 모든 것을 담당했죠. 선수들은 그가 시킨 것을 지키던지 팀에서 나가야 했습니다. 대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았거든요.”

크로위는 그의 가족이 유일한 흑인 가족이었던 인디애나폴리스에서 25마일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자라났다. 크로위는 백인 친구들과 자라고 백인 선생들 밑에서 배웠다. 그래서 1940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교사직을 시작했을 때 그는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흑인들을 처음 봤고 선생직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는 남았고 1950년 농구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어턱스 농구팀의 코-캡틴이었던 오스타 로버슨(왼쪽)과 윌리 메리웨더가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는 사진.



전혀 다른 생활환경에서 생활하며 인종 문제의 동면의 양면을 본 크로위는 이런 차별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오직 한가지 뿐이라고 믿었다.

닥치고 부당한 처우를 모두 감수하면서 경기를 이기는 것.

투쟁이 삶의 방식이라고 여겨진 흑인 빈민가에서 자라난 선수들에게 그의 방식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것은 저를 미치게 만들었어요.” 크로위 부인이 말했다 “그래서 전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아무말도 안해요?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라고. 그럼 그는 그저 ‘농구 경기는 공을 바구니에 더 많이 넣은 팀이 이길 뿐이야.’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선수들을 훌륭한 젊은이들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보복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를 바랬죠. 만약 그이가 다른 사람들이 원했던 것처럼 격하게 행동했다면 그의 학생들은 아무것도 되지 못했을 겁니다.”

학생들이 안종차별로부터 참을 수 있도록 극한의 참을성을 요구한 크로위 감독.



크로위는 경기 시작 전 항상 선수들에게 5 대 7의 경기를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선수들에게 첫 10득점을 심판을 상대로 득점한 후에야 상대팀에 집중하도록 주문했다. 하지만 주 토너먼트에서 십점차 리드를 경기 내내 유지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1953년에 셸비빌과의 경기에서 동점으로 맞이한 마지막 1분. 이제는 할렘글로브트라터의 전설인 브라이언트는 열린 골밑으로 돌파를 시도했고 셸비빌 선수가 브라이언트를 넘어트리며 돌파를 저지했다. 하지만 심판은 놀랍게도 오펜스 파울을 불었다. 셸비빌은 자유투 2개를 모두 성공시키며 46-44로 승리를 거두었다. 심판콜에 경기장은 술렁거렸고 신문기자들은 심판콜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심판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는 판단을 3일전에 내린 바 있는- 인디애나 심판협회는 공개적으로 심판콜을 지지했다.

크로웨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우리는 항상 리드를 유지해서 심판콜이 경기에 영향을 못 미치도록 노력했어요. 하지만 토너먼트에서 항상 그렇게 이기는 건 불가능이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셸비빌과의 경기가 끝나고 주 대회 우승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실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BREAKING THROUGH


그 다음해에 윌리 메리웨더와 윈프레드 오닐이 빠진 타이거즈는 플럼프의 밀란 팀에게 패배하며 토너먼트를 마감했다. 그 경기가 시작되기 전 길거리를 거닐고 있던 플럼프와 동료들은 옆에 지나가던 차로부터 “그 망할 깜댕이들 따위 이겨버리라고!”란 말을 들었다.

“우리는 무척 놀랐습니다.” 플럼프가 말했다. “하지만 그 도시에서 그 정도 인종차별은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레이 크로웨가 제자들에게 매일같이 그런 혹독한 방식으로 대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지만 55년에는 어떤 부상과 인종차별도 어턱스 고등학교를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은 30승 1패로 시즌을 마감했고, 준결승에서 뉴 알바니 고등학교를 무찌른 어턱스 고등학교는 패자팀의 치어리더들이 승자팀의 선수들을 응원한다는 오랜 전통에 따라 백인 응원단으로부터 응원을 받았다.


55년 우승을 축하하는 타이거즈의 행진.



“그 당시 치어리더들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백인들과 흑인들이 같이 서서 우리를 응원하던 모습이 기억나요.” 메리웨더가 말했다. “우리는 주변에 일어나던 많은 일들에 대해서 모르고 지냈지만 그 일이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이었는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주대회 결승전이 인종차별로 얼룩질 거라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팀인 게리 루즈벨트도 흑인 학교였기 때문이다. 어턱스는 로버슨의 30득점과 함께 루즈벨트를 상대로 97대 74로 완승을 거둔다.


“그날 밤을 전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크리스퍼스 어턱스라고 부르지 않고 인디애나폴리스 어턱스라고 불러줬어요.” 로버슨이 말했다. “나에게 그것은 우리가 뭔가를 이뤘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피부 색깔과 관계없이 우리가 이기길 바랐으니까요.”


우승을 한 어턱스 고등학교 선수들은 관례에 따라 소방차에 올라 도시를 행진하였고, 도시 사람들은 인종에 상관없이 도시 최초의 주대회 우승팀을 축하했다. 하지만 차별은 끝나지 않았다. 선수들은 행진 동안 차에서 내리는 행동이 허락되지 않았고 사람들과 사진을 찍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소방차는 도시 중심부를 한바퀴 돌고 곧장 축하연이 마련된 흑인 빈민가에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연속 우승을 달성한 다음해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우리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도시를 찢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메리웨더가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흑인이었잖아요. 그래서 협회는 우리를 빨리 흑인 동네로 데려다주려고 했죠. 우린 아무도 그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위대함을 축하하며


55년 주대회 우승을 이룬 13명의 크리스퍼스 어턱스 선수들의 이름이 크리스퍼스 어턱스 체육관의 천장에 영원히 매달리는 순간.



모교에 있는 흑인 역사 박불관을 방문한 오스카 로버슨은 뿌듯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박물관에는 마틴 루터킹 목사님과 터스키지 에어맨(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 332전투비행단의 흑인 조종사들. 그들이 참여한 200여회의 폭격기 호위 임무 중 단한대의 폭격기도 격추당하지 않은 걸로 유명하다.)사이에 ‘56년 우승’ 이라고 적힌 팀 쟈켓과 55년 ‘개척자’들을 기념하는 메달이 놓여있었다...


그들의 승리가 도시의 인종 차별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변화를 가져왔다. 백인들은 어턱스 고등학교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유대인들은 축하연을 열어 선수들에게 기념 메달과 벨트 버클을 선물했다. 또, 선수들은 도시의 유명한 식당에도 초대받았다. 오스카 로버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앉아서 먹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경험을 했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어턱스랑 경기를 하기를 꺼려했던 다른 팀들은 이제 어턱스와 경기를 하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으며 흑인 선수를 리크루팅 하지 않는 학교는 사라졌다.


역설적이게도 흑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팀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인종차별--가 그들의 성공 요인이었다.

“아주 특별한 순간들이었습니다.” 로버슨이 말했다. “제가 항상 얘기하던 말이지만, 어턱스의 승리는 우리들 자신에게보다 도시에게 더욱 더 많은 의미를 선사했습니다. 우리의 승리를 통해 사람들은 우리가 깡패나 양아치 혹은 꼬리 달린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죠. 우리는 그저 어린애들이었습니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어턱스의 우승은 오바마 대통령 당선만큼 큰 사건입니다.” 전 어턱스 팀매니져 클리포스 로빈슨이 말했다. “어턱스의 우승은 도시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크로웨의 제자들은 모두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들 중 다수는 대학으로 진학해서 선수 생활을 계속 했다. 인디아나폴리스는 1949년에 인종차별을 폐지하였고, 5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흑인 학생들도 원하는 학교에 쉽게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처음으로 어턱스 고등학교에 백인이 다니기 시작했다.


크로위 감독은 57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감독직을 은퇴하고 학교 체육부 주임을 맡았다. 그는 7년 동안 두 번의 주 우승을 이뤘지만 주 “올해의 감독상”을 끝끝내 수상하지 못했다.

“이건 뭐 코미디도 아니고...” 로버슨이 말했다. “농담도 이런 농담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고등학교 선수 시절을 기념하려는 행사를 지금까지 모두 거절했다. 로버슨은 그의 감독, 그의 팀메이트들 그리고 그의 지인들을 위해 오늘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기념식은 예전에 열렸어야 했지만 1986년에 어턱스 학교는 학생수 감소로 고등학교를 없어지고 중학교만 남기는 바람에 그러질 못했다. 2006년이 되어서야 의료 전문 고등학교로 부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25년만에 타이거즈는 부활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배들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재 3승 14패를 기록중이며 14패중 7패는 40점차 이상의 대패였다. 지난주에 콘세코 경기장에서 있었던 55년 타이거즈 기념식에서 타이거즈는 워싱턴에게 78 대 34로 패했다. 결코 아름다운 경기는 아니었고 관중수도 고작 2000에 불과했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과거에 잊혀진 영광이 미래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콘세코 필드하우스 총괄인 릭 후손은 그날 경기를 콘세코 경기장이 유치한 농구 경기 중에 가장 의미가 있었던 경기라는 말을 통해 그날이 얼마나 특별한 날인지 강조했다.

“우리들의 인생과 인디아나폴리스의 역사를 생각할 때, 위대한 승리를 위해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야 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콘세코 경기장안에 있는 오늘이, 콘세코 경기장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버지가 생전에 이 광경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15
Comments
2009-02-27 16:06:21

엑박압

WR
2009-02-27 16:33:29

이거 영화로 나온 적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스카 로버슨이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혹시 디즈니에서 제작한 2006년 글로리 로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건 ncaa 얘기입니다.
제가 모르고 있었던 다른 영화가 있는 지도 모르겠으니 좀 더 상세하게 얘기해주세요.

2009-02-27 16:34:52

제목 밑의 설명이 잘못 된거죠?

Hoosier: 인디애나 촌뜨기를 지칭하는 말인데, 밀란이란 인디애나의 작은 마을에서 주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백인 고등학교 농구선수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백인이 흑인이 되어야 본문하고 맞는 내용인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여쭤봅니다.

2009-02-27 16:37:28

후지어 영화 있습니다. 진 핵크만 주연이죠.

http://www.imdb.com/title/tt0091217/

WR
2009-02-27 16:45:45

아니요. 후지어는 오스카 로버슨과 전혀 상관없는 (전혀 상관없지는 않죠. 같은 지역에서 같은 시절 선수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니까...) 백인 고등학교 선수들의 이야기의 영화입니다.

미국 스포츠 영화중 손에 꼽히는 영화고 역경을 극복하는 스포츠 선수들의 대명사격인 영화입니다.

원제가 Forgotten Hoosiers인데...

글쓴이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이들이 진짜 후지어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이렇게 지은 듯 하네요.

WR
2009-02-27 16:46:48

이건 오스카 로버슨이 속해있던 크리스퍼스 어턱스와 상관없는 영화입니다.

2009-02-27 16:48:57

그렇군요. 좋은내용 배우고 갑니다.

윗 댓글 말마따나 글로리 로드 처럼 영화화 한다고 해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2009-02-27 16:53:34

설명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러니 글 제목이 "잊혀진 Hoosiers"죠.

사람들은 흔히 영화로도 만들어진 인디애나 깡촌 마을의 백인 고등학생 농구 선수들의 이야기는 잘 알아도, 어떻게 보면 그들보다 더 위대했던, 인종차별의 벽을 뚫어버린 흑인 고등학교 농구 선수들의 이야기는 잘 모르고 있기에, 잊혀졌다는 수식어를 붙인겁니다.

2009-02-27 16:55:37

이 영화는 본문 글의 제목 밑에도 살짝 설명이 되어있지만...

백인 고등학교 선수들의 활약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오스카의 모교인 흑인학교와는 지역만 같을 뿐 별 상관없죠.

시대 배경도 대강 그 무렵입니다만 흑인학교 이야기가 그보다 몇년 후입니다.

WR
2009-02-27 17:05:57

사람들은 흔히 영화로도 만들어진 인디애나 깡촌 마을의 백인 고등학생 농구 선수들의 이야기는 잘 알아도, 어떻게 보면 그들보다 더 위대했던, 인종차별의 벽을 뚫어버린 흑인 고등학교 농구 선수들의 이야기는 잘 모르고 있기에, 잊혀졌다는 수식어를 붙인겁니다.

이 설명을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위에 분들 오해가 한번에 풀릴 것 같네요.

2009-02-28 10:12:48

아. 그렇군요. 제가 잘 못 읽었네요. 죄송합니다.

WR
2009-02-27 16:00:20

그나저나 오늘 피닉스 어쩔... ㅠㅠ

2009-02-27 16:03:58

이거 영화로 나온거죠 ^^

근데 사진이 안나와요 ㅠ.ㅠ

2009-02-27 17:00:06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본문에서 오스카 옹의 한과 격정이 생생히 느껴지네요.

러셀 옹은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를 평소에 숨겼다가 시합 중에 상대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해소해버리고 오스카 옹은 그 분노를 숨기지않고 코트 위에서 격정적으로 펼쳤다고 하는데 다 이런 한맺힌 배경이 있었군요.

2009-02-28 01:10:48

인디애나주가 보퉁 중서부(중북부) 지방 속의 남부...라고 하더군요. 인종차별이 그렇게 심한 지역이 아닌데도 유독 인디애나주만 워낙 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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