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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저편에서" by 폴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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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11-28 16:57:18

 

(The Players Tribune에 폴 조지가 작성한 글입니다. 폴 조지의 어린 시절과 LA 에 오기 까지에 대한 얘기가 담겨 있네요. 관심있으신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간만에 번역해서 올립니다. 약간의 의역과 오역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나 조용해졌어. 마치 경기장 내에 모든 공기가 사라진 듯한 느낌. 물론 고통 때문에 쇼크에 빠져서 잘못 들은 것 일 수도 있지만, 관중들이 '헉' 하고 조용히 내뱉는 숨 소리도 하나 하나 다 들리는 것만 같았어. 사람들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더라.

 

트레이너가 나에게 달려오는 것을 봤어.

맨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처음에는 일어나서 그냥 훌훌 털어버리려고 했는데, 일어날 수가 없는거야. 그때까지는 아직 내 다리를 보기 전이었지.

 

그런데 관중들이 핸드폰을 꺼내서 날 촬영하는 것을 봤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 바로 그때서야 난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는 것을 예감했어. 그리고 고개를 내려서 내 다리를 봤고... 쩝...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난 미국 대표팀에서 농구 하고 있었고, 다음 시즌에는 인디애나 팀에서 다시한번 우승에 도전하려는 24살의 유망한 농구 선수였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었지... 지금까지 내 농구 경력이 주마등 처럼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갔어. 

 

바닥에 누워서, 들것을 가져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생각했어. "다시 일어 날 수 있을까?" 

 

그날 어머니께서 경기장에 계셨던 것이 내게는 정말 다행이었어. 나와 어머니 사이에는 정말 특별한 무언가가 있거든. 어머니께서는 나와 같이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에 가셨고, 가는 내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 "아들아, 모든것이 괜찮을 거야. 정말로 괜찮을 거야"

 

만약, 어머니 외에 다른 사람이 그 순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정말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거야.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었기에, 괜찮을 거라는 그 말이 정말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어. 왜냐면 내 어머니야 말로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 분이었거든. 어머니께서 내가 어렸을때 이겨내야 했던 고통과 비교하면, 지금 나의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6살이 되던 해, 어머니께서는 두번의 혈전과 한번의 심각한 뇌졸증을 겪으셨어. 얼마나 심각했냐면, 응급 구조사들이 한때는 실제로 사망선고를 내릴 정도였지. 하지만 그당시의 나는 너무 어려서, 어머니께서 살아 남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지 온전히 알지 못했어. 어머니께서는 다행히 살아 남으셨고,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길고 괴로운 회복과정을 이겨내셔야 했어. 어머니께서는 우리가 기도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하게 회복해 내셨지만, 안타깝게도 부분 마비가 생기셨고 현재까지도 평생 고통스러운 재활 과정을 반복하셔야만 했어. 정말로... 긴 시간동안 말이야.

 

어머니께서 입원해 계셨을때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냥 엎드려서 잠을 잤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어머니께서 퇴원하셨을 때 환자용 침대가 너무 커서 침대를 거실에 둘 수 밖에 없었는데, 그때도 난 거실로 이불과 베개를 가지고 가서 어머니 옆 바닥에서 잠을 자곤 했어.

 

그런 어머니였기에, 다리가 부러진 채로 앰뷸런스에 누워있는 내 손을 잡고, "아들아, 모든 것이 괜찮을거야" 라고 말해 주셨을 때... 난 그말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었어.

 

 

 

기나긴 재활 기간 동안 가끔은 모든것이 너무나 우울하고, 너무나 괴롭고,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어. 그럴때마다 난 어머니와 통화하며 힘을 얻었어. 그녀는 내가 농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내가 결국엔 멋지게 회복해서 농구 코트 위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계셨어. 난 정말 내 인생에서 농구 외에는 하고 싶은 것이 한개도 없었어. 이건 전혀 과장이 아니야. 어머니께 물어보면 알거야. 그러면 그녀는 내가 어렸을때 24시간, 일주일 내내 맨발로 나가 농구만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줄거야. 밤 11시, 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쳐도, 나는 맨발로 농구 코트로 나갔어. 신발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게 아니라, 신발을 신는데 걸리는30초도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난 농구를 사랑했어. 그정도 나는 농구에 미쳐있었고, 지금도 같은 마음이야. 

 

내 누나에게 내가 얼마나 농구에 미쳐있었는지 물어보면, 내가 동네 YMCA에 5:5 경기를 하러 갈때면, 상대팀 선수들은 프로 선수 처럼 모든 장비를 갖추고 있는데, 나는 내가 직접 잘라서 만든 청반반지를 입고 코트위를 뛰어다녔지. 그냥 낡은 청바지를 무릎 아래로 가위로 대충 잘라버리면 만사 오케이였어. 

 

나는 농구 외에는 그 어느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농구에 빠져있었어. 거의 '열정'의 범주를 넘어서는 수준이었지. '병적인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농구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실제로도농구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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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우리가 살고 있는지역에 대해서 좀 알아야지 말이 통할 것 같으니, 알려줄게. 혹시 캘리포니아 출신이 아니라면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봐. LA 하면 할리우드랑 베벌리 힐스(지역번호 213)가 떠오르잖아? 일단 내가 살던 곳은 그런 곳이 아니야. LA 중심부에서 저~ 멀리 보면 언덕이 하나 있거든? 우리는 그 언덕 너머(지역 번호 661)에 살았어. 

 

동네 이름은 팜데일... '다른' 로스 앤젤러스. 그 지역은 80년도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환경을 찾아서 떠날 사람들은 이미 다 떠나버린 그런 곳이였어. 사막 한가운데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곳... 동네에 한개 밖에 없는 쇼핑몰에 가거나 농구를 하거나, 뭐 그 외에는 딱히 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지. 2000년에 나는 10살이었고, 당시 코비와 레이커스는 쓰리핏을 위한 대장정을 시작하려는 참이었고, 클리퍼스는 다리우스 마일스, 라마 오덤, 엘튼 브랜드 같은 젊은 선수들과 함께 나름의 멋진 시즌을 보내고 있었어. LA 농구 팬들에게는 좋은 시절이었고, 우리 가족들도 레이커스 vs 클리퍼스 팬으로 딱 반반 나뉘어 있었지.


코비는 내 우상이었어, 100%. 코비는 모든 면에 있어서 나의 롤모델이었어. 하지만 클리퍼스에는 다리우스 마일즈가 있었지. 화이트 헤드밴드를 쓰고 롭 패스를 받아서 림에 꽂아 넣는 고졸 신인. 나에게 있어서 코비는 역사상 최고의 농구 선수이지만, 클리퍼스 팀에는 그들만의 '문화' 라는 것이 있었어.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시 난 완전 농구에 미쳐있었다는 거야. 나랑 말하려면 오직 '농구'에 대한 이야기만 할 수 있었어. 농구 외에 다른 주제로는 나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나는 우리 집 차고 앞에 있었던 간이 농구대에서 다섯살 많은 테이오샤 누나와 1:1 경기를 하곤 했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차고 앞에서는 할 수 없었지.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언제나 "너희들 그 공으로 내 자동차 맞추기만 해봐라!!" 라고 소리지르셨거든.

 

그래서 어쩔수 없이 우리는 낡은 간이 농구대를 동네 막다른 골목까지 끌고가서 그곳에서 1:1 농구를 했어. 이 간이 농구대는, 너희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낡은 상태였어. 골대는 거의 반쯤 주저 앉아 있고, 네트 대신 검은색 전기줄이 주렁 주렁 달려있었지. 보고있으면 슬픈 수준이었달까? 하지만, 그래도 그건 '우리의' 농구 코트였어. 그곳에서 나와 누나는 하루 종일 농구를 했어. 그리고 오해 하지 마. 우리 누나는 정말 농구를 잘했어. 거의 미친 수준이었지. 팀 던칸 처럼 중거리를 던졌고, 어디서든 슛을 넣었어. 진심으로,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한번도 그녀를 이길 수 없었고, 딱 한번 이긴 후에는 지금 까지도 평생 리매치를 요구하는 누나를 피해다니고 있는 상태야.

 

 

나와 우리 가족이 살던 661 지역으로는 그 어떤 스카우터도 오지 않았어. 아.무.도. 동네에서 대학 농구를 하는 사람을 난 단 한명도 알지 못했어. 내가 조금 자라고 나서 유튜브가 처음 나왔을 때, 거기 올라와 있는 LA 나 뉴욕 출신의 AAU 선수들의 동영상을 보고있자면, 완전 다른 세상의 사람들 같았어. 랜스 스티븐슨, 더마 드로잔, 즈루 홀리데이... 그들은 내 또래였지만, 나에게 그들의 거의 '유명인' 처럼 느껴졌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에게는 AAU 팀이나 트레이너가 없었기때문에 나만의 말도안되는 DIY 훈련 방법을 만들었어. 한번은 누나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점프솔'을 받았는데, 나는 그걸 빌려 신고 동네를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이걸 신고 6개월만 돌아다니면, 덩크 할 정도로 점프력이 좋아지겠지!" 라고 생각했었어. 가끔은 책가방에 돌을 가득 넣고서는 우리 집 바로 뒤에 있는 사막을 뛰어다니기도 했고, 그 돌가방을 메고 가시덤불 속에서 팔굽혀펴기를 하기도 했어. iPOD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어. 그저 조용한 바람소리만 들리는 곳. 그곳이 내가 살던 팜데일이야.

 

나는 저 언덕 너머로 가고 싶었어. 사람들에게 폴 조지란 선수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만 했어. 그리고 난 절대로 실패할 수 없었어. 왜냐면 아버지께서 병상에 쓰러져있는 어머니와 우리 가족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계셨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아버지께서는 자동차 휠 샵에서 일하셨고, 2000년대 초반에는 정말 일이 많으셨지. 당시에는 모두가 멋진 자동차 휠을 달고 싶어했으니까. 그 이후 내가 좀 나이를 먹은 이후에는 아버지께서는 부업으로 목수일을 하기 시작하셨어. 아버지께선 매일 새벽 3시에 출근하셔서 밤 7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셨지.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할 수록 더 놀라운 일은,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집안일을 다 처리하셨고, 누나를 쇼핑몰에 데리고 가시기도 했고, 또 나와 호수에 낚시하러 가시기도 했다는거야.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봐온 나였기에, 난 절대로 실패를 용납할 수가 없었어. 나에게 실제로 기회가 오기 까지는 좀 시간이 걸리긴 했어.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약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지. 이 자리를 빌어서 다나와 데이비드 펌프 형제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그들은 나를 어느 작은 토너먼트에서 우연히 한번 보고는, Pump-N-Run 이라는 AAU 팀에서 뛸수 있도록 날 초대해 줬어. 이건 나에게 정말 커다란 사건이었지. 단순히 경기를 뛰는 것 뿐만 아니라, LA의 다양한 (더 좋은) 동네들에서 열리는 여러 훈련 프로그램이 참여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당시 아버지께선 너무 일이 많으셔서 그런 훈련들에 날 태워 줄 수 없었고, 어머니는 마비 때문에 운전 하실 수 없었어. 하지만 펌프 형제들은 그런 나의 사정을 알고는, 늘 자동차를 보내서 아침에 날 픽업 해주고 저녁에는 날 우리 동네로 태워다 주었어. 그들의 친절함이 내 인생 전부를 바꾼 거야.

 

 

만약 그들이 날 그때 도와주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도 못할거야. NBA선수가 되지도 못했을 거고,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지도 못했겠지. 당시 나는 잘 알려진 선수가 아니었어. 내가 Pump-N-Run 에서 첫번째 훈련 하러 갔을 때, 내 동료들이 모두 날 바라보며 속으로 "너에대해서는 들어 본 적 없는데, 너 누구야?" 라고 생각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그리고 난 그들을 보면서, "음... 난 너희가 누군지 잘 알고 있는데..." 라고 생각했고.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클리퍼스로 오기로한 이후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오, 너와 카와이, 너희들은 모두 LA 출신이고 AAU 때서부터 서로 잘 알았겠다?" 라고 말하더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거야. 카와이와 나는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었어. 나는 대학교 2학년때 그를 상대팀 선수로 만나기 전까지 카와이랑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거든.

 

 

사실 카와이랑은 대학교 1학년 때 르브론 농구 캠프에서 한번 만날수 있는 기회가 있었거든? 당시 캠프 내 모든 선수들이, "카와이란 선수 들어봤어? 그 친구 장난 아니라던데" 라고 말하고 다녔어. 하지만 카와이는 캠프 시작하고 이틀간 나타나지 않았고, 그 동안 소문은 오히려 점점 더 확대되었어. "카와이, 그 친구 거의 실력이 미친 수준이라던데"

 

나는 캠프 도중 부상을 당해서 캠프를 일찍 떠나야 했고, 카와이랑은 결국 그 캠프에서 만나지 못했어. 그리고 대학교 2학년때 그를 상대팀 선수로 만나기 전까지는 그에 대해서 잊고 지내고 있었어. 상대팀 로스터에서 "포워드-카와이 레너드" 라는 글을 보고서야, "오오오오오~~~ 이 친구?" 라고 말했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때까지도 속으로는, "카와이 이녀석.... 소문이 진짜일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때로는 선수 주변에 어떤 '아우라'가 느껴질 때가 있어. 와우... 카와이가 웜업을 위해 코트위로 나왔을 때 부터 그 아우라가 느껴졌어. 우린 점프볼 순간부터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고, 그날 경기 내내 치열하게 대결했어. 뭐 예상 가능하다시피 당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카와이의 집중력은 완전 다른 레벨에 있는 듯 했어. 경기가 끝나고 카와이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오케이...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넌 뭔가 달라. 넌 짱이다" 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나.

 

당시 그 농구장에 있었던 그 누구도 두명의 퓨쳐 NBA 올스타의 대결을 봤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지. 그냥 LA 외곽 출신의 두 선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했던 두 선수가 어느 화요일 밤 대학 농구 경기를 뛰었다고 생각했을거야.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서 지금, 나와 카와이는 다시 LA로 돌아와서 같은 팀에서 뛰게 되었어. 이번에는 213 지역에서 말이야...

 

Pump-N-Run에서 시작되서, Fresno 주립 대학 시절, 많이 출전도 하지 못한 루키 시즌, MIP를 받고, 인디애나에서 NBA 올스타가 되고, OKC를 거쳐.... 잠깐.... 여기서 잠깐 멈추고 꼭 말하고 싶은게 있는데, 나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OKC 팬들을 위해 경기하는 것이 즐거웠어. 내가 OKC에 처음 도착한 그 순간부터 팬들을 날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고, 그곳에서 나와 러스는 정말로 특별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어. 나는 진심으로 OKC에서 뛰었던 모든 순간에 감사해. 

 

다시 LA로 돌아오기 까지 이 기나긴 여정을 되돌아 보면, 놀라운 감정이 들어. 10년 전 대학교를 가기 위해 내가 고향을 떠난 이후,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 그 누구도 내가 다시 내 고향으로 돌아와 농구를 할 거라고 상상한 사람은 없었거든. 특히 나의 어머니, 아버지... 내 부모님께서는 내가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내가 홈경기를 치룰때 마다 왕복 7시간을 자동차로 운전해서 나를 보러 오셨었어... 정말 농구하는 아들을 한번 멀리서라도 보기 위해서 말이야. 

 

부모님의 눈에 나는 아직도 낡아서 무너지기 직전인 농구대에서 누나와 농구를하던 그 어린 꼬마처럼 보일거야. 부모님의 눈에는,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거든.

 

 

그래서 내가 지난 여름 어머니께 전화해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구를 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을 때 기분이 정말로 좋았어. 그녀의 몸상태나 여러 상황 때문에, 어머니께서 내 경기를 보러 오시는게 점점 더 힘들어 지고 있었거든. 몸이 불편한 어머니께서 비행기를 타시는건 정말 보통일이 아니라서 말이야.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강인한 여전사 이시고, 한번도 그런 것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불평하신 적이 없어. 하지만 이제는 내가 클리퍼스에서 뛰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차를 타고 아들의 경기를 보러 오실 수 있지...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 

 

이봐,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려하고 잘사는 LA에서 자라지 않았어.

 

나는 언덕 너머 '다른' LA에서 자랐어.

 

난 661 지역 출신이고 그것에 당당해. 아무도 없는 사막을 돌맹이가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등에 메고 맨발로 달리면서,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길 꿈꾸고, 저 언덕 너머로 갈 수 있기를, 언젠가는 스태이플스 센터에서 뛸수 있기를, 그 반짝이는 불 빛 속으로 내가 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랐던 꼬마의 꿈이 현실이 되었어.

 

TV에 나오는 화려한 도시는 LA의 극히 일부일 분이야. 나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모든' LA 지역을 대표해서 뛰고 싶어. 모두를 위해 승리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이곳에 온거야.

 

LA로 우승 반지를 가지고 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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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3
2019-11-27 21:20:19

생각이 많아지는 글이네요. 역시 멋있습니다 조지

2019-11-27 21:21:43

하..진짜 얼굴도 잘생기고 농구도 잘하고..

2019-11-27 21:21:56

번역 감사합니다.

2019-11-27 21:23:58

 멋있네요

2019-11-27 21:34:07

뭐 예상 가능하다시피 당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2
2019-11-27 21:55:36

어쩌면 '다른 la'에서 자랐고 그에 자긍심을 갖고있기에 마찬가지로 '다른 la'인 클리퍼스를 선택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2019-11-27 23:49:46

우승반지를 위해 클맆에 간 만큼 꼭 우승 한번 하면 좋겠네요..

2019-11-28 00:26:57

좋은글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11-28 10:09:54

진짜 대박이네요..영화로 만들어도 될 정도의 스토리같아요 괜히 폴간지 하는게아니구나 역시...

2019-11-28 11:34:23

 PG13 어머니에 대한 스토리는 오늘 처음 알았네요.

인디시절때 왜 LA로 가고싶어 했었는지 이제는 조금 공감이 갑니다.

행복하렴! 

 

+좋은 글 번역 감사합니다 :)

2019-11-28 12:07:14

결국 고향 LA로 돌아왔네요.

 

정말 기대가 많이 되는 시즌입니다. 그 어느때보다 강팀이 많은 시즌인거 같아요. 

2019-11-28 13:35:44

LA를 그토록 원한데에는 어머니의 사정도 있었군요. NBA선수들의 어머니 사랑은 참 각별한것 같습니다.

1
2019-11-28 15:08:41

 이런 글을 보면 한편으로는 어빙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우리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농구에 몰입해서 선수들을 게임 속 캐릭터처럼 인식하고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상화해서 바라보지만 사실은 그들도 사람이고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직업인에 불과하죠.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복추구에 대한 욕구를 제한하는게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2019-11-28 16:28:50

이 글을 읽고 폴 조지에 대한 증오가 조금은, 아니 많이 사라졌습니다.

원래 제일 좋아하는 선수들 중 한 명이었고, 갑작스럽게 썬더를 떠났을 땐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는데

점점 나이 들어가고 몸이 안 좋아지시는 부모님을 생각한다면...

제가 조지였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라도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급 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19-11-28 17:53:53

폴조지 좀 어렵게 컷었군요.. AAU에도 연줄이 없엇던거 같고요. 진짜 농구 하나만 보고 달려들엇단건데 대단하네요 PG13

2019-11-28 20:02:24

소설보다 재밌네요.
좋았어. 이번 주말 신을 농구화는 pg2.5다.

2019-11-29 15:51:08

'간지' 수식어가 괜히 달린게 아니긴한데.. 아이거.. 너무 간지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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