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퍼스 빅맨 유망주 캐디 릴레인 이야기
개인적으로 큰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스퍼스의 2라픽 쩌리 빅맨 유망주 캐디 릴레인을 소개할까 합니다
직역보다는 읽기 쉽게...가 아니라 사실은 쓰기 쉽게....(먼산) 의역을 많이 했습니다...
두 기사를 조물조물 버무려(?)서 원문과는 구성이 많이 다릅니다. 원문은 아래를 참조해주세요
작년에 쓰여진 글이라는 점 고려해 주세요
사진은 릴레인의 인스타그램에서 훔쳐왔습니다(...)
http://www.orlandosentinel.com/sports/highschool/os-hs-oak-ridge-cady-lalanne-path-to-nba-spurs-20150715-story.html
www.nba.com/spurs/cadys-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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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는 무척이나 가까웠고 물은 너무나도 맑았기에 손을 뻗으면 만질수 있을 정도였다고 캐디 릴레인은 회상했다.
그 일곱살짜리 아이는 미국으로 향하는 부서질 듯 한 보트에 구겨넣어진 채, 50여 명의 아이티인과 함께 카리브해 한가운데 있었다.
릴레인은 아직까지 1999년, 그 1000킬로미터 여정의 모든것을 기억한다.
수천명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다 죽어갔던 1000킬로미터의 거친 바다.
보트의 모터에서 나오는 증기와 섞인 바닷물의 냄새. 연료를 보충하려 보트가 멈췄을때 그를 깨웠던 소음.
"전 항상 그 보트를 생각해요. 우리가 뭍에 배를 대었던 순간도 기억이 납니다. 우린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수풀 속에 숨어있었죠. 어떤 트럭에 있던 남자가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줬어요. 미국에요."
조용할 때에, 꿈에서도, 그리고 그가 얼만큼 왔는가를 생각해볼 때면 당시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고 한다.
그는 그것이 미국으로 이민가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저 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어떤 사람은 배를 타는가보다 했어요." 지금은 23살이 된 릴레인의 말이다.
릴레인은 2015 드래프트에서 55번째로 스퍼스에 뽑혔다. 그는 14살이 되어서야 농구를 시작했고 오스틴 스퍼스에서 기량 발전을 도모하며 다음 시즌을 보낼 예정이다.
"이것이 얼마나 굉장한 기회인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정도에요. 오스틴에서 뛰는것, 드래프트에서 스퍼스가 제 이름을 불러준 것 그리고 이 조직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요.
정말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우리를 미국으로 데려왔을때 상상하고 바랐던 일들을 뛰어넘은 일이에요."
버사 릴레인은 아들과 딸 베티를 미대륙을 통틀어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데리고 나와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정착했다.
릴레인은 처음엔 풋볼에 빠졌다. 그러나 버사는 그가 고1때 땅에 쳐박히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 이후 캐디는 14살의 나이에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저희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셨어요. 제가 드래프트됐을때 가장 행복해한 사람은 어머니였어요."
그는 고등학교에서 스타플레이어였고 조지아 대학에 영입되었지만 학업 능력에 관한 문제로 경기를 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유매스 대학으로 옮겨 1년을 기다린 후 대학무대에서 뛸 자격을 얻는 방법을 선택했다.
캐디가 정부로부터 추방 경고장을 받은건 그가 두번째 학기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불법이민자라는 걸 알려줄만한 어떤 일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셨고 어떤 문제도 겪지 않았어요." 버사는 입국 후 미국인과 결혼해서 적법한 국민이 되었다.
릴레인과 당시 14살이었던 여동생 베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티로 돌아가야만 했다.
어머니 버사도 동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2주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도착하자마자 대사관은 버사를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캐디보다 피부색이 훨씬 밝다는 이유로 DNA 검사를 명령한 것이었다.
유매스대학의 코치 켈로그은 릴레인이 성실하게 지냈다는것을 알리기 위해 출석증명서를 보냈다.
버사는 이민전문 변호사를 고용했다.
시련은 반년간 지속됐다.
여동생 베티가 말했다. "꼼짝없이 갇힌 느낌이었어요. 절대 돌아갈수 없을것처럼요. 낮선 이들에게 둘려싸여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저 주저앉아 있었죠."
남매는 시멘트로 지은 반지하 집에서 한 목사와 함께 지냈다. 비가오면 물이 새고 밤이 되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날은 벼락과 함께 전기가 나갔고 충전중이던 릴레인의 전화는 통구이가 되었다.
그 곳에서 그만의 공간은 지붕 위였다. 거기서 비행기가 날아가는걸 볼 수 있었다.
"매일 비행기가 지나다니는걸 봤어요. 그때마다 왜 나는 저 위에 있을수 없는걸까 생각했어요."
"우리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건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었어요.
그런일을 겪고나니 제게 주어진 모든 사소한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농구공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베티는 오빠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경우 도미니카 공화국에 가서 NBA에 도전할 생각까지 했다고 전한다.
8월 하순 어느날 남매는 대사관에 불려갔다. 또 서류작성이구나 생각했지만 몇 시간 후 그들은 여권과 사회보장번호를 받아 떠나게 되었다.
"이곳까지 도달하기까지 그리고 실제로 드래프트 되기까지 캐디는 정말 노력했습니다. 당시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아서
거의 알아채기 힘들지만 캐디가 아이티로 가야했을땐 그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코치 허드의 말이다.
유매스 대학에 복귀했을 때 릴레인은 에어볼을 날려댔다. 농구를 너무 오래 쉬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너무 급하게, 너무 많은 훈련을 했고 결국 발이 부러졌다.
두번의 수술을 포함해 일 년이 지난 후 마침내 그는 NCAA 한 시즌을 온전히 뛸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만의 일이었다.
대학 코치 켈로그에 따르면 그는 즉각 팀내 최고 인기인이 되었다. 선수들이 유소년 클리닉, 교회, 병원 등을 방문할 때 캐디는 가장 작은 아이를 찾아 들어올려 덩크를 시켜주곤 했다.
"그는 금새 사람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성품은 두말 할 것 없고 훈련에도 열심을 다하고 경청할 줄도 아는 선수입니다. 캐디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그가 성공하도록 돕고싶어하죠."
릴레인은 사회학 학위와 함께 유매스 역대 최고 선수중 하나가 되어 졸업을 했다.
그러나 졸업반 최고 선수 64명이 참가하는 4월 포츠머스 초청 대회에서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하기 전까지는 프로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는 5월 19일과 6월 23일 사이에 16팀과 워크아웃을 했는데 스퍼스는 그 중 마지막이었다.
아직 농구 경력이 짧은 릴레인은 드래프트되고 서머리그팀에 합류한 후 본인이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서 상당한 잠재력을 봤습니다. 여느 신인들처럼 시스템과 게임의 흐름을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걸릴겁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일곱 경기를 치렀고 잘 하고 있습니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며 발전하고 있습니다."
"릴레인은 긴 팔과 빅맨으로서 탄탄하고 훌륭한 몸을 가졌어요. 페인트존에서의 몸싸움을 피하지 않습니다.
유매스에서는 슈팅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적절한 훈련을 한다면 좋은 슈터가 될거라 생각합니다."
스퍼스의 스카우팅 담당자이자 오스틴 스퍼스의 단장 브라이언 포거가 말했다.
"칩 잉글런드 코치와 오스틴의 코치들이 전체 슈팅과정을 교정해줬습니다. 전에는 다리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지만
지금을 무릎을 굽히고 팔로쓰루를 유지하고 제대로 된 메커니즘을 사용합니다. 매일 자신감이 늘어나요."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릴레인은 그를 미국에 실어다 준 보트를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 생각은 그가 주어지는 모든 기회에 최선을 다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준다.
오스틴 스퍼스의 코치 켄 맥도널드는 말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그가 계속 발전하고 또 발전할 거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진국인 사내가 성장하고 싶어 하니까요."
https://twitter.com/spurs/status/753604918674456580
캐디 라랜 키가 208로 나오네요. 저 키에 슈팅 상향과 스킬셋 상향에 따라 상당히 재미있는 선수가 될 소질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