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패전이 만든 오늘날 일본 초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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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4 17:04:45
프리톡에 올릴만한 정보
일본의 대표음식 초밥보기에는 만들기 간단해보이지만 이 초밥을 더욱 맛있게 만들기 위해 장인들은 항상 손의 온도를 30도정도로 하고 밥알개수마저 300개를 딱맞추며 초밥을 제작한다고 한다.
그런데 초밥을 먹다보면 문득드는 의문이 있다.
보통 초밥집에선 한접시에 초밥 10개를 내놓는데,이는 세계 어느나라의 초밥집을 가든 같다.
솔직히 접시에 담긴 초밥개수를 더 줄이거나 늘일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1접시에 10개만의 초밥을 담는것일까?
사실,여기에는 2차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인들의 사정이 담겨있다.
과연 어떻게 된것일까?
이것이 당신의 쌀값입니다
뭐야 X발 돌려줘요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45년,일본은 극심한 쌀값의 폭등을 겪는다.
전쟁 직후 아시아 각지에 퍼져있던 일본인들과 군인들이 귀향해 입이 늘어난 데다가, 조선/만주로부터의 쌀 수탈이 불가능해져 쌀 생산량이 급락했기때문이었다.
게다가 전쟁으로 어획량도 반타작났고,해안은 그나마 간에 기별이 갈만큼은 먹었지만 내륙지역은 심각한 빈곤을 겪었다.
궭 배고파 죽는데스
이때문에 쌀과 생선이 주식이던 일본인들은 극심한 기아를 겪었고,1949년까지 최대 1천만이 기아로사망했다는 통계가 존재할만큼 아사자가 즐비했다.
우효!꼬들꼬들한 쌀 겟또다제!
이제 나의뱃속에서 얌전히 소화되라구!
그리고 배고픔을 못참고 생계형범죄가 크게 늘어났다.
" 앞으로 외식은 금지한다! "
결국 이사태를 보다못한 가타야마 데쓰 총리가 '음식점 영업 긴급조치'를 포고한다.
내용은 간단했다.
'정부허가가 없으면 음식점 영업은 금지'된다는 것이었다.
그럼 우리는 어떡하라고?
이 조치로 음식의 낭비가 줄어들었지만,음식점주들은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영업이 중지되서 돈을 못벌게 된 것이었다.
어 잠만! 초밥집은 제재대상 아닐수도 있겠는데?
?? 뭔소리여 니네도 제재대상임
ㄴㄴ 손님이 밥가져오면 우리가 그걸로 초밥만들어 돌려주면됨
그러면 이건 요식업이 아니라 재료를 받은다음 요리만 해서 인건비받고 돌려주는거니 괜찮지않음?
이때,도쿄의 한 초밥집에서 '손님에게 재료를 받고 우리가 그걸로 초밥만들어 돌려주면 음식판매 아니지않음?'이라는 주장을 하고 이에 많은 초밥집이 이에 동조했다.
이에 음식점 점주들의 생계를 고려하던 도쿄시청은 얼씨구나하고 이에 동조해 초밥집은 제한을 해제해주었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있었다.
1인당 쌀 한홉까지만 교환가능
제한이 없으면 또 초밥먹으려고 사람들이 쌀을 사재기해서 가격이 폭등할걸 우려한 도쿄시청은 손님 1인당 밥 한공기정도의 쌀,즉 1홉까지를 초밥으로 만들수있다고 제한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초밥 10개를 만들수있는 분량이였다.
그래서 점주들은 초밥을 1접시에 10개씩 내놓기 시작했고 이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생선의 부족으로 같은 종류의 초밥을 1판당 1개에서 2개로 늘려 땜빵했다.
그리고 이것이 회전초밥에서 같은종류의 초밥이 1그릇당 2개담는것의 유래가 되었다.
모양이 각양각색이던 초밥도 이때 재료부족으로 최대한 미니멀리즘화가 되며 현재의 모양과 비슷한 초밥이 되었다.
그리고 그 패전으로 인한 임기응변들이 지금까지 내려오며 초밥의 기준이 된 것이다.
이렇듯,초밥은 패전을 겪은 일본인들의 애환을 담은 음식이다.
일본인들이 그냥 평범한음식인 초밥을 소울푸드로 여기는것은 어쩌면 이런 어려운 시대의 고난을 함께한 음식이라는 정서가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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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으로 쌀 유출은 수탈보다는 수출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