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개봉맞이 병자호란(2)
1에 이어서 적어봅니다.
2에서는 개전 이전의 상황을 풀어보겠습니다.
1. 맵핵끼고 들어오는 후금
병자호란 개전에 앞서, 10년전에 있었던 정묘호란(1626)을 잠깐 적어보겠습니다. 이괄의 난으로 평안도
정예병이 초토화되었고, 이괄의 난이 진압된 이후 추격을 피해 도망친 이괄의 부하들, 특히 이괄 휘하에서
2인자 역활을 하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쳐 광해군이 부당하게 폐위당했다고 호소하면서
이괄의 난으로 인해 조선의 방어선이 대폭 약화되었음을 전달합니다.
당시 즉위한 홍타이지는 이에 솔깃했는데, 식량 부족으로 답이 없던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찾았을 뿐 아니라
뒤에 언급될, 가도에 주둔하며 시시각각 요동을 위협하던 모문룡의 일당에게 이골이 나있던 상황이었고 명을
치기 앞서 후방의 조선의 위협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던 터였는데 길잡이가 자발적으로 찾아온 셈이었습니다.
홍타이지는 그럼에도 선뜻 파병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만일 실패할 시 명나라 방면에 투자해야 할 병력을
날리는 동시에, 경제난이 닥친 상황에서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도 겹쳤기 때문이었는데, 이윽고
결심을 굳힌 그는 한윤을 길잡이로 삼는것과 동시에 또 한명의 길잡이를 붙이는데, 그 길잡이가 항상 광해군과
세트로 묶이는 강홍립이었습니다. 그리고는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공격합니다.
강홍립, 명나라가 후금 원정군을 보낼 당시, 조선에 원병 파병을 끊임없이 요구하였기에 정예병 13000명을
이끌고 지원을 갔던 군대의 수장. 1619년 사르후 전투 당시 패배한 후 청에 투항하여 병력의 상당수를 보전
한 인물이었는데, 사르후 전투 당시 명군이 전멸하자 평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싸우다 좌우군이 완전히
궤멸당하고 지휘관 상당수가 전사하자 항복하여, 5천명의 전사자를 낸 기록이 있는데, 보통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은 강홍립이 눈치를 보다 청에 항복하여 8천의 병력을 살린 것으로 기록합니다.
완전히 틀린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5천명의 전사자를 낸 전투가 의도적 투항이라 보기엔 신빙성이 전혀
없고, 정작 살아남은 8천 병력도 청의 병력이나 백성으로 들어가 조선으로 귀환한건 고작 1,500명.
정예병 13000명의 10분의 1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괄의 난 이전에도 정예병은 증발했던 것입니다.
사르후 전투와 이괄의 난으로 조선이 날린 병력은 26,000명. 3만에 이르는 병력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사라진 셈인데, 그 상황에서 아민이 이끄는 후금의 3만 병력이 공격해 옵니다.
후금군은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점령, 용천을 지나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는데 성공합니다.
당시 평안도의 군사책임자는 이괄의 난 진압의 일등공신이었던 남이흥이었는데, 남이흥은 후금의
군대에 맞서 안주를 방어거점으로 삼아 사수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던 이귀가
구성을 지켜야한다 주장했고 인조는 현지 책임자가 아닌 측근의 말을 들어주어 남이흥은 구성에
병력을 두고 지키게 됩니다. 그러나 길잡이를 앞세운 후금이 이를 모를리 없었고 안주성으로 곧장
진격해오자, 남이흥은 부랴부랴 안주성으로 향했지만 전투가 치러지기 하루 전에 입성, 고작 3천의
수비군으로 적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그는 항복을 권하는 후금의 제안을 일거에 뿌리치고
최선을 다해 항전했으나 워낙 중과부적이었던지라, 1627년 1월 21일, 안주성은 함락됩니다.
남이흥은 성 안의 화약고에 불을 붙이고 터트려 적군과 함께 불타 죽었고, 그는 유언으로 '군사훈련을
제대로 못한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말을 남긴 채 장렬히 산화합니다.
남이흥이 어이없고도 안타까운 최후을 맞이하자, 남은건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군대뿐이었습니다.
이괄의 난을 진압한 도원수 장만에게 모든 기대가 쏠렸지만, 장만은 기대와 다르게 평산에서부터
계속 밀리기 시작하면서 평양은 함락되고 황주마저 후금군의 손에 넘어가자, 인조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유구한 전통의 비기, 강화도로 튄다를 시전했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보내 분조 활동을
벌이게 합니다.
그러자 후금은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하여 화의를 제시하는데,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것이며 왕자를 인질로 보낼것, 교역을 확대할 것 등의 요구조건을 제시했고, 조선은 이에 후금의
철병을 요구하며 압록강을 다시 넘지 말것을, 후금과 형제국 관계를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워 정묘조약(1627)을 체결하고, 조선은 왕자대신 종실을 왕자로 속여 인질을 보냈으며
후금도 이에 맞추어 철군합니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후금은 하루 평균 100km에 달하는 진군거리를
찍을 정도로 북방을 무인지경으로 뚫고 들어왔는데, 이는 10년 뒤에 또다시 그대로 재연됩니다........
(1)에서 언급했듯 양측 모두 뒷맛이 썩 개운치 않은 조약이었지만, 후금의 입장에선 소기의 성과를
거뒀는데, 교역 재개로 숨통이 틔인데다, 후금은 조선이 인질을 속여 보냈듯 본인들도 압록강 너머로
철군하지 않고 압록강 이남에 군대를 주둔시켜 눈엣가시같던 것을 견제할 수단을 얻게 됩니다.
그 눈엣가시는 바로 명나라의 양아치 장군 모문룡이었습니다.
2. 양아치 총병 깡패 도독
모문룡은 원래 산해관을 지키던 별볼일없는 군인이었는데, 누르하치가 심양과 요양을 함락한 이후 도망쳐
압록강의 진강을 점령했고, 후금이 공격해오자 진강도 버리고 탈출한 이후 조선 서북지역으로 들어와 요동
지방에서 패주하고 조선으로 들어와 있던 명나라 유민과 패잔병들을 규합해 군대를 조직하고, 진강을 다시
공격해 후금군에게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자 후금은 아민을 보내 진강을 공격했고, 모문룡은 조선인 복장을
한 채 도망쳐야 했습니다.
모문룡은 평안도 일대에 머물렀는데, 광해군은 1622년 모문룡에게 평안도 철산 앞바다에 있는 가도라는
섬에 주둔할 것을 권유했고, 모문룡은 동강진을 설치한 이후 명에게 은자 20만냥을 지원받고, 유민과 병사
1만명을 이끌게 됩니다. 그러나 가도는 1만이나 되는 그들의 식량을 감당하기엔 너무 작았기에 군량미가
모자랐고, 그러자 모문룡은 조선 조정에 군량을 요구하여 식량을 충당합니다. 허나 임란의 피해도 완전히
수습되지 않은 상황에서 흉년이 겹치자 모문룡이 요구하는 양을 맞추긴 어려웠고, 그러자 모문룡은 예전
임란 당시 명군이 했던 패악질을 반복하는데, 조선 군민을 약탈하여 이를 해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것 치고 약탈이 너무 과하자, 당시 의주 부윤이던 이완이 모문룡의 군사를 잡아들여 곤장을
쳤고, 이에 노발대발한 모문룡은 황국의 군사를 다치게 했다며 조정에 항의합니다. 조정에서는 결국 이완의
벼슬을 강등시켰고, 이에 기세등등한 모문룡은 이후에도 이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조선 조정에선 이 날강도와 같은 인물과 그의 군대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는데, 저렇게 해이한 군대를 가지고
후금과의 싸움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문룡은 본국인 명나라로부터
1622년 총병직을 제수받고, 1629년에는 좌도독이 됩니다.
모문룡은 이와 같은 벼슬을 제수받으면서도 정작 후금과의 전투에서 변변찮은 공적을 전혀 세우지 못했는데
그러면서도 전과를 조작하여 본국에 과시하는 한편 자신들이 후금을 물리쳤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 조정에
과도한 공물과 자원을 요구했는데, 그 공물과 물자는 1만의 인원에게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유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였고, 모문룡은 그 공물을 자신의 영달과 명나라 고위층에 보내는 뇌물로 사용하면서 양이 모자라다며
조선 조정을 모함하고 협박하였으며, 약탈도 지속했는데 거기에 조선에서 명으로 보내는 조공 품목도 가로채는 등 엄청난 패악질을 부리면서 서북 지역의 경제, 군사 상황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암덩어리가 커져갑니다.
그는 조선과 명 양측에서 지원을 받으면서도 정작 후금과의 싸움은 그리 적극적이지 않아, 정묘호란 당시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고, 심지어 명 황제가 죽었을 때에도 풍악을 울리며 놀았을 만큼 본국에 대한 충성심
도 없었습니다. 1629년 가도의 군세를 살피러 갔던 특전관 이경직은 ' 명나라 백성들도 의지할 곳이 없어
붙어있을뿐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으며, 여자나 끼고 놀면서 군율도 개판, 병력도 물자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보고할만큼 최악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모문룡의 이름이 580번이나 기록될 정도로 엄청난 패악질을 부리고 있는데도 조선 조정은 부글부글 끓이는 속을 다스리기만 할뿐 전혀 이를 제재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모문룡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게 됩니다.(1629) 모문룡을 죽인 것은 언급되었던 영원성의 원숭환.
원숭환은 모문룡에게 군사회담을 제의했고, 쌍도에 도착한 모문룡을 전격 체포하여 그를 질책했는데,
'조선 국왕과 조정에게 많은 환대를 받아놓고도 시장을 열어 상시 후금과 내통하고, 약탈을 일삼았으며
양국의 지원을 수년간 엄청나게 받고도 한뼘의 땅도 못찾았으니 죽어 마땅하다' 라는 사이다 발언을
내뱉으며 모문룡을 처형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양아치 장군의 죽음은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는데, 모문룡 휘하에 있던 수군 장수들과
병력이 도망쳐 청에 항복하는데 1만 4천의 병력과 185척의 전함이 넘어간 건 둘째치고, 배에 실려있던
홍이포와, 그 대포를 관리하고 만드는 기술자들이 넘어가면서 청의 빈약한 화포기술은 엄청나게 발전,
거기에 인성은 쓰레기지만 모문룡 휘하에 있던 수군 장수, 경중명 상가희 공유덕은 수군 지휘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능력자였기에 청의 수군은 이후 명의 수군을 잡아먹고 명의 수군의 이점을 없애 버립니다.
공유덕의 딸은 청나라 황제의 양녀가 되고, 경중명 상가희는 후에 산해관을 청에 넘기는 오삼계와 함께
번왕이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죠. (훗날 삼번의 난 당시 먼치킨 강희제에게 쳐발린건 함정........)
거기에 모문룡이 아무리 양아치라도, 명 본국에는 반역을 꾀한것도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닌데 황명을 받은
장수를 원숭환이 임의로 처형한 것은 상당한 문제가 되었고, 원숭환은 그때문에 명의 황제 숭정제에게 의심
을 사게 됩니다. 그 때문에 이를 이용한 청의 반간계와 기사년의 변 사건이 겹치면서, 원숭환은 숭정제와
원당에 의해 능지형으로 처형당하면서, 명의 마지막 명장은 허무하게 죽게 되고, 요서 방어선은 이후
청의 놀이터가 되다시피하며 명의 충신이 죽는 걸 본 장군과 병사들의 사기는 완전히 바닥을 치게 됩니다.
모문룡은 부정적인 평가는 위에 써놓았듯 수많은 행패를 부리면서 정작 쌓은 전과가 전혀 없다는 것인데,
재평가의 움직임이 최근 많습니다. 명 본국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큰 폐해를 끼치지 않았고, 그의 군대가
가도에 어쨌든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산해관 방어선에선 후방의 가도군을 등에 업은 셈이었고 홍타이지는
항상 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넘어간 부하와 기술자들이 청의 통일에
엄청난 큰 공을 세웠고, 그 수군의 비약적 향상은 이후 병자호란때 조선에 치명타를 안겼다는 점........
거기에 모문룡의 약탈은 별개로 상업적 능력도 있었다고 하는데, 위충현 등 권신들에게 바쳤던 뇌물은
주로 조선의 상인들과 거래하여 얻은 수익이었다고 하며, 원숭환이 죽인 이유에서 보듯 시장을 통해
거래를 활발히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면에는 후금에 물자를 팔았다는 의심 역시 존재하고 있습니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이유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둘의 성격이 상극이었다는 것은 사료를
보면 드러나지만, 당장 죽여서 큰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을 한 원숭환 역시 명의 마지막 명장이라는 평가는
별개로, 모문룡을 죽인 일은 잘못한 일이라는 것이 중국 역사학자들의 평이고, 결국 그 선택이 도화선이
되어 자신을 태움으로써 명의 멸망이 사실상 확정되는 엄청난 스노우볼을 굴린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에겐 엄청난 패악질을 부린 양아치, 그러나 죽음 이후 엄청난 영향을 끼친 양아치.
모문룡의 죽음 이후 방해요소가 하나 더 사라지자, 홍타이지의 야망은 더더욱 가속화되기 시작합니다.
개전과 전개 과정은 (3)에서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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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으로 많은 군사를 잃은 건 맞지만 사실 이괄이 있었어도
청나라 군사를 막을 수 있었느냐 생각해보면 또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조선의 군제는 이미 임란 이전부터 망가져있었고, 임란 이후 변변히 복구할 기회조차 없었으니
그냥 문제 없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죠.
(총포병이 생기는 일도 있었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