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외전: 역사적 의의가 큰 인물 - 1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보통
조조, 유비 두 명을 뽑고, 그 뒤에 보통
관우, 장비, 조운, 주유, 제갈량, 장료, 육손 등
본인이 선호하는 인물이거나 인기 인물들이
뽑히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 역사에서는 그냥 일개
지방 군사 군벌들이거나 지휘관들로, 역사적
의의는 그닥 크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의가
크게 남은 것은 <삼국지>란 소설이 널리
퍼지며 베스트셀러가 되어, 후대의 인물들이
이 삼국지 시대의 인물을 놓고 논평하는 등의
사례를 만들었다는 점일까.
실제적으로 역사적 의의가 큰 인물은 누가 있는가,
구품관인법을 만든 진군,
오두미교의 교주였던 장로,
베트남이 중화문명권에 포함되게 만든 사섭,
강남 개발의 스타트를 끊은 손오 정권,
그리고 관구검.

응? 관구검?
걔가 누구야?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아 그놈 수춘에서 반란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저세상 간 놈 아니야로 알고 계신 분도 계실거고
이 인물이 한반도 역사와 연결된,
삼국지가 한국사와 연계되는 구절에 해당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는 분들도 있겠죠.
관구검은 왜 중요한가?
그가 고구려를 침공했던 위나라 군대의
사령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적어볼 이야기는
관구검과 고구려 이야기.
관구검은 사례 하동군 출생으로, 장작대장이던
아버지 관구흥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 사후에
작위를 세습 받았습니다. 그는 친구 덕을 많이
본 인물이었는데 태자 시절 조비와 친했기 때문에
조비는 그를 후하게 대했고, 홍농태수에 봉한 뒤
아들인 조예의 태자문학을 맡도록 했습니다.
관구검은 조예를 잘 가르쳐 조비가 그를 더더욱
예우하고 신임했으며, 조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조예 역시 스승인 관구검을 잘 대우했습니다.
관구검은 조예가 사치와 향락을 벌이려는 기미가
보이면 이를 자제할 것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리며
스승으로의 본을 보이려 애썼고, 형주/유주/예주
등 위나라 각 지역의 지방 관직을 역임하면서
군공 커리어를 함께 쌓아 올렸습니다.
관구검은 요동 지역에 있던 공손연을 크게
경계했던 인물로, 유주에 있던 선비족과 오환족
선우와 교섭, 국교를 맺는데 성공하면서 혹여
공손연과 그들이 연합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
직후 공손연에 대한 적극적인 토벌을 주장하며
본인의 임지를 옮겨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형주자사에서 유주자사로 보직을
옮겨, 남방에서 북방으로 부임지를 옮겼습니다.
237년, 그는 다시금 공손연을 토벌할 것을 주청,
조정에서는 요동 공손씨 일족이 3대에 걸쳐 40년간
일대를 지배해 기반이 튼튼하고 지배력이 확고하며,
요동 지역을 공격해 들어가기엔 지형이 쉽지 않아
원정이 어렵다며 대다수 신료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황제 조예는 관구검의 뜻을 받아들여,
동맹을 맺은 선비&오환족의 병력을 지원받아
공손연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관구검은 군대를
이끌고 공손연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공손연은 재빠르게 대응해 요하를 틀어막고
강을 도하하지 못하도록 관구검의 병력을 견제,
장마철이 되어 물이 불어나자 도통 방법이 없던
관구검이 회군을 결정하며 원정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서
원정을 갔다 실패했기에 책망을 당할 법도 했으나
자연재해가 원인이기도 하고, 황제 조예와 연이
깊었던 탓에 추궁을 당하지 않고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관구검의 군대를 한번 물리치자 공손연은
자신감이 붙었는지, 본인을 연왕이라 칭하면서
위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포, 적대했습니다.
이에 238년, 조위에서는 4만의 병력을 파병해서
공손연을 다시 토벌할 것을 지시하는데 공손연
요동 정벌군의 사령관은 사마의 중달.
사마의는 원정군을 이끌고 유주까지 간 뒤에,
누구보다 요동과 공손연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을
휘하 병력에 편제합니다. 원정에 실패한 뒤에
우북평으로 물러나 이를 갈고 있던 관구검이었죠.
그리고 여기에 외부 지원 병력이 합세했습니다.
압록강 근처에 위치한 나라에서 보내온
지원병이었는데, 중국에서는 동이(東夷)라고
부르던 이민족 국가의 병력이었습니다.
고구려에서 파병했던 1,000여명의 지원병력.
고구려,
이 시기 고구려의 왕은 11대 국왕 동천왕.
잠깐 사마의의 요동 정벌 전 시기로 가보면,
동천왕은 치세 초기 위와 우호 관계였습니다.
동오의 손권이 공손연과 동맹을 맺고 함께
위를 타도하자며 사신을 보내자, 그 당시엔
위에 종속 상태였던 공손연은 손권의 사신을
죽이고 사절단을 모조리 잡아들이라 명했습니다.
혼비백산한 손권의 사신단은 달아났는데,
그 중 일부가 고구려로 도망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동천왕은 그들을
잘 대접한 뒤에 보물과 호위병을 딸려서 다시
동오로 보내 주었습니다. 요동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듣고 전부 죽었다 생각했던 사신들 중에
일부가 돌아오자 손권은 크게 기뻐했고, 돌아온
사신들이 고구려에 대한 소식을 전하자 손권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동천왕을 '흉노선우'로
책봉하면서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234년,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세력도 더 강한 위와 다시 화친을 맺고 236년엔
손권이 파견한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 유주로
보내면서 본인들은 위나라의 편이라는 것을
확실히 할 것을 증빙하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동천왕은 조위가 요동을 정벌하려 원정군을
파병하자, 지원병을 파병해 더욱 우호를 돈독히
하면서, 요동 공손씨 정권이 멸망할 경우 들어올
뽀찌(?)를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동천왕은 병력을
조위 원정군에 보내게 되었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현장 사정을 잘 아는 길잡이(관구검)가 붙고,
정예병력을 데려왔으며 사령관이 사마의였기
때문에 공손연은 결코 적수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공손연의 난은 손쉽게 진압되었고, 요동 일대는
위나라의 영역권으로 다시 넘어갔습니다.
관구검은 공손연 정벌을 줄기차게 주장했던 점과
정벌에 공훈이 있는 것을 인정받아 안읍후로 승진.
그런데 위나라는 뽀찌를 기대하고 원정군에
지원병을 파병했던 고구려에 기대했던 보상을
주지 않았고, 동천왕은 이에 큰 불만을 품었습니다.
당장 국경을 맞대게 되었는데 고구려로서는
전혀 좋을 것이 없었고, 원정군 사령관이었던
사마의도 의례적인 감사 인사가 딱히 없었습니다.
오히려 위는 고구려의 지원병을 보고 이 나라의
군대는 그닥 별로기에 조위의 국력이면 고구려가
위치한 요동 너머,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수중에
넣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동천왕은 먼저 선제타격을 결심해서
위나라를 침공할 것을 결의했고 내부에서
득래라는 신하가 이에 결사반대하며 단식을
결행했음에도 실행에 옮겼습니다. 득래가
끝까지 버텨도 동천왕은 요지부동이었고,
득래는 결국 굶어서 죽었습니다.......
242년, 동천왕은 고구려군을 동원해서
요동 서안평을 공격했습니다. 서안평이
어딘가 하니 지금의 단둥입니다. 항구가
필요했던 고구려 입장에서 동천왕은 위가
보상을 하지 않으니 점령해서 빼앗겠다는
생각으로 군대를 일으켜 서안평을 점령,
이곳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는데 이는
위나라 조정에도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위나라는 이 시기, 촉과 벌인 낙곡대전에서 서북의
병력을 죄다 한중 정벌에 투입했다 꼬라박하며
막대한 병력과 물자 손실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 때가 244년 3월~5월의 일이었는데,
사마의는 당시 조위 정권의 실권자로 있던
조상에게 밀려 실각,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
있던 상황이었는데 촉을 정벌하려다가
대패하여 망신거리가 된 조상은, 사마의와의
내부 권력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꼭
군사적 성과가 필요하다 생각했고 때마침
북방에서 고구려가 침공해오자 고구려군을
물리쳐서 패전을 만회하고 분위기를 반전시켜
장기 집권을 꾀하려던 상황.
그렇게 위나라는 244년, 북방 사정에 밝은 자를
지휘관으로 삼아 병력 1만명을 파병하기로 결정,
이 1만 위군의 지휘관으로 관구검이 임명됩니다.
관구검은 그렇게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어
동북 지방으로 향했고, 고구려군과 조우하게 되는데.....
-후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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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과서 수준으로 중국사 초 압축하면 저시기에 나올 인물은
구품관인법을 만든 진군 그리고 종교를 통한 농민 반란 시초 장각 이 둘이라 봅니다.
관구검은 한국 사람 입장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엮여 있으니 관심이 가는 인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