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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과 야후의 성장과 몰락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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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8 04:47:02

 새벽까지 일을 하다가 매니아에 들어와보니 야후와 구글에 대한 글이 보여서, 제가 예전에 매니아에 올렸던 내용에서 발췌하고 첨언해서 조금 자세한 설명의 글을 올립니다.

 

https://youtu.be/sWIdq--nc-8


《프리퀀시》는 2000년에 개봉되어 크게 히트한 SF영화입니다. 1999년의 아들과 1969년의 아버지가 무선 라디오를 통해 연결되는 것을 계기로, 시공간을 뛰어넘는 감동과 서스펜스를 펼칩니다.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해결 된 이 영화 끝 부분에 '야후(yahoo!)'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30년년 과거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린시절 친구에게 이런 말을 전해줍니다. 위에 첨부한 영상에서 2분 30초 경부터 나오는 장면입니다.

 "너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마. 마법의 단어를 알려줄게 오래 기억해야 돼. 그것은 바로 야후(Yahoo!)야, 이 단어를 절대 잊지 마".

그 말을 기억한 꼬마 친구가 나중에 주식투자로 큰 부자가 되는 게 영화 마지막 장면에 설명으로 나옵니다.

 

1993년 4월 미국 일리노이대학 NCSA에 근무하던 몇 명의 연구원들은 ‘모자이크(Mosaic)’라는 최초의 웹 브라우저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모자이크 등장은 인터넷의 역사를 새롭게 연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될 정도로 인터넷 환경을 획기적으로 바꿨습니다.

 

1994년 봄 스탠퍼드 전자공학과 대학원생이던 25살의 제리 양과 28살의 데이비드 파일로는 지도교수가 안식년으로 유럽에 가 있는 동안 순식간에 모자이크 브라우저에 빠져들었습니다. 제리 양(Jerry Yang)은 대만에서 태어난 미국인으로 ‘제리의 빠른 모자이크 여행’이라는 홈페이지를 통해 여타 웹 사이트를 안내하기 위해 여러 단계의 서브 카테고리를 이어나가는 계층적 구조로 각종 하이퍼링크 리스트를 공개했습니다. ‘제리의 빠른 모자이크 여행’은 급속도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기술의 귀재 데이비드 파일로의 도움을 받아 해당 사이트를 더욱 체계적으로 확장하는 동시에 그 사이트의 이름을 ‘야후!’라고 지었습니다.

 

1994년 6월 야후 방문객은 하루 만명 정도였으나 그해 말에는 하루 1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양과 파일로는 단순히 재미삼아 야후를 만들었지만 야후의 인기가 많아지고 그들이 야후에 매달리는 시간이 많아지자 그 일을 사업으로 전환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검색에 대한 서비스 요금을 징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우선은 사이트에 많은 사용자를 모아놓고 광고를 통해 수입을 올리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그 사이트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는 사용자가 많아지면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를 원하는 업체가 생겨나게 됩니다. 양과 파일로는 야후가 정보와 광고가 가득한 사이트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달이 걸릴 것으로 생각하고 벤처 캐피탈리스트들을 접촉했습니다.


주식 25%의 지분을 벤처 캐피털에 양도하고 100만 달러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한 양과 파일로는 1995년 봄에 스탠포드 박사과정을 자퇴했습니다. 야후는 당시 최고의 인기 브라우저였던 넷스케이프와 거래를 통해 넷스케이프를 처음 클릭하면 곧바로 야후 사이트로 이동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넷스케이프 브라우저와 야후 모두 고객에서 더 많은 신뢰를 받았습니다.


1996년 4월 야후의 나스닥 상장을 앞둔 양과 파일로에게 수많은 투자자들이 비싼 값으로 일정 지분을 넘기라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양과 파일로는 유혹에 흔들렸으나 자신들이 회사를 저버린 창업자로 평가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소프트뱅크에게 일부를 넘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주식을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양과 파일로는 그 대가로 손정의에게 각각 1250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부자가 되었지만 계속 임대아파트에 머물며 모든 관심을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당시 소프트뱅크의 손정의가 2천 5백만달러를 지불하고 사들인 야후 지분은 불과 3년 반 후 160배가 올라 40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스닥 상장이 대박의 성공으로 양과 파일로는 큰 부자가 되었지만 본인들이 커진 회사의 경영을 맡을 자질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스탠포드 출신의 베테랑 엔지니어는 팀 쿠글(Tim Koogle)을 사장으로 영입했습니다. CEO에 오른 팀 쿠글은 새로 포털 영역에 진입한 메이저급 사이트인 알타비스타, 라이코스 등을 노련하게 제압했습니다. 하지만 야후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위협에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음만 먹으면 성공할 때까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시도해서 상대를 끝장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습니다. 팀 쿠글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극도로 몸을 사렸지만 몇 년 후 MSN이 야후를 압도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채 회사를 이끌었습니다. 1997년 야후의 주가는 다섯배가 상승했고 그 다음해는 또 다시 여섯배가 상승했습니다. 1999년 후반 절정기에는 시가총액이 800억 달러에 이르렀고 양과 파일로의 서류상 재산은 1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그 당시까지 어느 기업의 주가도 야후처럼 급속도로 증가한 예가 없었습니다.


주가가 그렇게 오른 이유는 야후 사이트가 최고의 신뢰성을 지닌 포털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후는 대부분의 네티즌이 방문하는 첫 번째 사이트였고 사용자가 만족감을 느끼며 오래 머물게 하는 콘텐츠는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1998년 말에 야후의 일일 방문객 수는 1억 7천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야후는 처음 출발할 때부터 편집자들이 웹 서핑을 위한 수많은 웹사이트를 선별해 리스트를 만들고 이를 카테고리 별로 정리함으로써 사용자들이 검색을 시도하는 경우 가장 권위 있는 정보를 찾아줄 수 있었습니다. 즉 야후가 다른 포털과 다른 점은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 검색자가 찾을만한 사이트를 가장 우선순위에 올려놓은 것이었습니다.

 

1998년이 되자 야후는 아무리 많은 디렉터리 편집 인력을 동원하더라도 웹이 증가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로 인해 1998년부터 사용자가 모르는 사이 야후의 검색은 내부에서 두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사용자가 검색어를 입력하면 야후는 편집자들이 구축해놓은 디렉터리에서 해당 주제를 찾았고 검색어가 디렉터리 주제와 일치하면 해당 디렉터리를 보여줬습니다. 이는 예전부터 야후의 고유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웹 사이트의 폭증 등으로 인해 첫 번째 단계에서 일치하는 검색결과가 없거나 모호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야후가 계약한 검색엔진 업체로 검색어를 넘겨서 그 검색엔진 업체에서 해당 검색어를 찾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단계는 업체별로 서비스 차이가 별로 없어서 야후는 비용 최적화를 위해 수시로 검색엔진 서비스 업체를 바꾸었습니다.

 

2000년이 되자 웹 사이트는 더욱 폭증해서 야후는 두 번째 단계를 위한 서비스 제공업체를 고르는 것에도 신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잉크토미 같은 우수 검색 엔진을 보유한 회사는 야후와 계약에서 그에 걸맞은 값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2000년은 IT 버블이 꺼져가는 해였고 야후는 좋은 검색엔진 서비스 업체와 낮은 가격으로 계약해야 하는 난관을 앉고 있었습니다. 이때 창업한지 2년도 되지 않은 어느 검색엔진 업체가 야후에 접근했습니다. 그 업체의 창업자 두 사람은 양과 파일로의 스탠포드 후배였고, 독자적인 검색 알고리듬과 더불어 독자적인 포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금상첨화 격으로 그 회사는 야후가 지불하고자 하는 최저가보다도 더 낮은 금액을 야후에게 제시했습니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그 회사의 이름은 야후의 CEO의 이름과 너무도 비슷했습니다.


2000년에 야후는 두 번째 단계의 검색서비스를 그 신생회사에게 맡기기로 계약했습니다. 그 신생업체의 검색서비스 품질은 탁월했고 야후는 그에 만족하면서 포털사이트의 선두주자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생회사는 2년 만에 야후를 위협했고, 2년이 더 지난 2004년에 야후는 그들과의 계약이 큰 실수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래리 페이지(Larry Page)와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이 몇해 전에 창업한 그 신생회사의 이름은 구글(Google)입니다.

  


래리 페이지는 인공지능의 선구자 중의 한명인 미시건 주립대 교수 칼 페이지와 유대인 컴퓨터 프로그래머 글로리아의 아들로 1973년에 태어났고 일찍부터 컴퓨터에 둘러싸여 지냈습니다. 미시건 대학교 공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1995년 가을 래리 페이지는 스탠포드 대학교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에 합격한 후 오리엔테이션에서 자신과 동갑이지만 박사과정 2년 선배인 세르게이 브린에게 캠퍼스 안내를 받게 되었습니다.

브린은 러시아의 엘리트 유대인 학자집안에서 태어났고 그가 여섯 살 때 그의 부모는 유대인 차별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브린은 어릴적부터 수학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고 스탠포드에서도 동료들 사이에서 천재로 통하던 공학도였습니다. 첫 만남에서 페이지와 브린의 강한 자아가 충돌했지만 그들은 이내 서로의 재능을 인정했고 캠퍼스에서 늘 함께 다녔습니다.


페이지는 몇 달 후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월드와이드웹의 연결구조에 대한 것으로 정했습니다. 4년 전에 출범한 월드와이드웹은 당시 50만개의 사이트를 갖고 있었고 매달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고, 엄청나게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터넷의 노드와 링크들의 배열은 수많은 학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1996년 초에 페이지는 나날이 거대해지는 월드와이드웹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그 방법으로 자기진화방식의 검색 기술을 설계할 수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페이지는 논문을 쓰는 대신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할 생각으로 그 프로젝트를 백럽(BackRub)이라 불렀고 친구인 세르게이 브린을 백럽 프로젝트에 영입했습니다. 브린은 페이지의 아이디어가 향후 웹사이트의 가치를 분석하는데 결정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즉시 파악했습니다.


페이지와 브린이 학자 또는 사업가의 길을 놓고 지도교수인 테리 위노그라드에게 상의했을 때 그는 두 사람에게 학위에 연연하지 말고 대학을 떠날 것을 권유했습니다. 덧붙여서 성공하지 못하면 언제든 학교로 돌아오라는 말도 함께 했습니다. 실리콘밸리 중앙에 위치한 스탠포드 대학교는 능력 있는 대학원생들에게 창업을 독려하는 것으로 예전부터 유명했고, 그런 이유로 스탠포드 대학교 컴퓨터공학과는 실리콘밸리 벤처 기업의 산실 역할을 했왔습니다.


페이지와 브린이 전도유망한 학자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사업의 길을 택한 것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야후 등 웹 검색을 제공하는 선도기업이 있었지만 편집자들이 작업하는 야후의 방식으로는 계속 만들어지는 수억개의 웹페이지를 따라잡을 수 있을만큼 편집자들을 충분히 고용하지 못할 것임을 페이지와 브린은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페이지의 아이디어가 제대로 구현되면 그들의 검색방식은 웹사이트의 성장속도를 충분히 따라잡을 뿐 아니라 웹이 성장하고 더 많은 정보가 입력될수록 검색결과는 더욱 정확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래리 페이지의 아이디어 자체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는 학자의 꿈을 갖고 있었기에 여러 논문들 중에서 어떤 논문이 더 우수하다고 평가받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수한 논문은 두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우수한 논문의 첫 번째 특징은 다른 학자들에게 많이 인용되는 점입니다. 즉 인용이 많이 된 논문일수록 학계에서는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 인용회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 논문을 인용한 사람들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내 논문의 가치는 높아집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용이 평등한 것이 아니라 이미 권위를 갖춘 학자의 인용이 그 논문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즉 우수한 논문의 두가지 특징은 수적으로는 많은 인용이 있어야 하고 질적으로는 권위 있는 학자의 인용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래리 페이지는 어떤 웹 페이지가 중요함을 인정받는 방식도 논문의 경우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논문의 중요성이 인용회수로 평가되듯이 웹 페이지의 중요성은 다른 웹으로부터 링크를 통한 방문 회수로 측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래리 페이지는 논문의 인용과 마찬가지로 모든 웹의 링크가 평등하지 않다는 점도 간파했습니다. 내 웹 페이지를 링크한 사이트의 권위가 높을수록 그 링크의 가치가 커지고 따라서 내 웹 페이지의 중요성도 올라간다는 겁니다.


그 방법을 우리에게 익숙한 라리가 추구팀의 순위를 매기는데 새롭게 사용한다면 강한 팀을 이겼을 때는 약한 팀을 이겼을 때보다 더 높은 승점을 받는 경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팀의 승패가 같더라도 그중 한 팀이  바르셀로나 등 강팀에게 승리를 거둔 적이 있다면 더 높은 승점을 받아 결국 두 팀중에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래리 페이지의 아이디어는 두 팀의 경기 결과 대신에 두 주제 사이에 존재하는 웹 연결의 개수를 성분으로 삼는 행렬을 다룹니다. 사용자가 어떤 항목을 검색하면 구글의 알고리듬은 점수 행렬을 만들고 행렬방정식을 풀어 고유벡터를 찾아냅니다. 그리하여 관련성이 높은 순서대로 검색결과들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이 알고리듬은 래리 페이지이 이름을 따서 페이지랭크(PageRanK)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알고리듬을 현실에 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컴퓨터와 수학의 천재가 바로 세르게이 브린입니다.

 

페이지랭크 검색 알고리듬이 완전히 갖추어진 1997년에 페이지와 브린은 자신들의 검색시스템이 미래의 웹에 축적되는 정보량의 엄청난 증가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웹 검색을 사람들이 절대 편집하지 않고 소프트웨에의 수학적인 방법으로만 도출한다면 웹 페이지의 급증 같은 여건변화는 자신들의 시스템을 훨씬 더 정교하게 만들어주는 긍정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검색엔진 분야는 단연 선두주자이던 야후를 비롯해서 알타비스타, 라이코스, MSN, 고투 등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후발주자에게는 레드오션 중에 레드오션이었습니다.


페이지랭크 알고리듬은 갖춰졌지만 이들에게는 웹의 링크들이 구축된 데이터베이스도 없었고 시스템을 돌릴 수 있는 하드웨어도 없었습니다. 1998년 8월 야후와 마아크로소프트 등이 새로 출범하는 페이지와 브린의 스타트업에 대해 관심을 주지 않았을 때, 실리콘밸리의 투자자 앤디 벡톨샤임(Andy Bechtolsheim)이 일정 지분을 받는 대가로 그들에게 10만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페이지와 브린은 그 돈으로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와 하드웨어를 구비하고 9월에 구글(Google)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렸습니다. 만일 벡톨샤임이 그 10만 달러의 지분을 현재까지 보유했다면 단연코 세계 제 1의 부자 자리에 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벡톨샤임은 그러지 않은 것에 크게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는 각종 유혹을 뿌리치고 구글 지분을 꽤 오래 보유했고, 그 때문에 현재 그의 재산은 60억 달러가 넘습니다. 벡톨샤임의 구글 투자는 실리콘밸리에서 개인의 신생기업에 대한 투자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1998년 말에 페이지와 브린은 약 6천만개의 웹페이지를 수집했고 구글의 홈페이지를 오픈했습니다. 스탠포드 대학교 주변을 중심으로 구글의 검색이 유용한 웹페이지를 많이 찾아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구글의 트래픽은 하루 1만 건에서 1999년 초에는 하루 10만건으로 증가했고 웹 페이지 데이터베이스도 3억개를 돌파했습니다. 페이지와 브린의 검색 시스템은 정보가 많아지면서 점점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하드웨어를 높은 사양으로 교체해야 했고, 페이지와 브린은 여전히 그 트래픽을 수익으로 연결시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검색엔진의 수학적 완벽함이 손상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웹 페이지에 배너 광고는 커녕 검색창을 제외한 아무 링크도 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운영한다면 트래픽이 증가할수록 비용만 쌓이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페이지와 브린은 그 시점에 자신의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99년초 벤처캐피털리스트 비노드 코슬라는 페이지와 브린으로부터 자신들의 구글 지분의 80%를 익사이트(Excite)에 100만 달러에 매각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익사이트의 CEO 조지 벨이 인수제안을 거부하자 코슬라는 다시 페이지와 브린에게 달려가 재협상을 통해 인수가격을 75만달러까지 깎았지만 벨은 막판에 마음을 바꿔 인수를 거부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가장 처참한 인수합병 실패사례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익사이트는 얼마 후 검색엔진 업체인 애스크닷컴(ask.com)에 팔렸으며 그 이후에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직후에 구글의 창업자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습니다. 자신들의 웹사이트 트래픽을 수익으로 전환시킬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웹 검색은 사용자가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정보인 것을 감안해서, 그 순간에 텍스트 광고를 통해 광고주와 고객을 일대일로 연결시켜주는 방식을 택하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MSN 같은 대형 사이트들은 하루 방문객이 엄청나지만 관심도 없는 사용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비효율적인 광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광고 사업 아이템을 통해 구글은 IT거품이 한창이던 1999년 말 두 개의 벤처 케피털로부터 2000만 달러의 투자를 받았습니다. 익사이트에 매각하려는 지분의 사분의 일만 넘겨주고도 스무배 이상의 현금이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2000년 구글이 선보인 '애드워즈'는 사용자가 원하는 검색어에 가장 근접한 문자광고를 노출하되, 검색 결과를 볼 수 있도록 광고는 우측에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광고하는 웹사이트의 품질까지 자동 알고리즘으로 평가했습니다.


그 무렵에 당시 세계 제일의 웹사이트 야후가 자신들에게 검색엔진을 공급할 업체를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야후가 미국은 물론 세계 제1의 사이트가 되었던 이유는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 검색자가 찾을만한 사이트를 가장 우선순위에 올려놓아 고객 맞춤형의 서비스를 제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998년이 되자 페이지아 브린이 예측한 것처럼 야후는 아무리 많은 디렉터리 편집 인력을 동원하더라도 웹이 증가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로 인해 1998년부터 사용자가 모르는 사이 야후의 검색은 내부에서 두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사용자가 검색어를 입력하면 야후는 편집자들이 구축해놓은 디렉터리에서 해당 주제를 찾았고 검색어가 디렉터리 주제와 일치하면 해당 디렉터리를 보여줬습니다. 이는 예전부터 야후의 고유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웹 사이트의 폭증 등으로 인해 첫 번째 단계에서 일치하는 검색결과가 없거나 모호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야후가 계약한 검색엔진 업체로 검색어를 넘겨서 그 검색엔진 업체에서 해당 검색어를 찾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단계는 업체별로 서비스 차이가 별로 없어서 야후는 비용 최적화를 위해 수시로 검색엔진 서비스 업체를 바꾸었습니다.

 

2000년이 되자 웹 사이트는 더욱 폭증해서 야후는 두 번째 단계를 위한 서비스 제공업체를 고르는 것에도 신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구글이 야후에 접근해서 야후가 고려했던 것보다도 낮은 가격으로 자신들이 야후의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고 야후와 그렇게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계약은 구글에서 아무런 재정적 이득을 주지 않았고 브랜드를 고객에게 알리는 데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실제 검색서비스 제공자가 구글이라는 사실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야후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구글 창업자들의 다른 속셈입니다.  실제로 페이지와 브린이 원하던 것은 바로 야후를 통해 자신들에게 전달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검색요청 데이터였습니다. 신생기업인 그들이 야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정도의 데이터를 받으려면 10년이 걸릴지 그 이상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야후를 통해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검색요청은 구글 엔진의 기술력 향상으로 바로 이어졌습니다.

 

구글과 계약전에 야후는 잠재적 라이벌을 견제하려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구글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고서는 마음을 놓았습니다. 메일 서비스나 뉴스 서비스 등의 부가 서비스가 전혀 없는 구글 사이트의 미래는 야후가 볼때는 잘 되어봐야 자기들에게 인수합병 당하는 정도까지라고 야후는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야후나 마이크로소프트의 MSN이나 자신들의 홈페이지로 사람들들을 모으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지, 사용자들이 자신의 검색서비스를 이용하는지의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검색이 가장 효율적인 광고의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구글이 야후에게 검색서비스를 제공한지 2년만에 미국 검색시장에서 구글의 점유율은 야후에 거의 근접했고, 방문객이 자신보다 훨씬 많은 MSN을 크게 앞질렀습니다. 그리고 야후를 통해 검색하는 것들도 가면 갈수록 대부분 구글에서 처리되었습니다. 야후는 위협을 느껴 구글을 자신의 자회사로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이미 구글의 가치는 야후가 지불할 수 있는 액수보다 훨씬 올라간 상태였습니다. 자신들이 자체 검색엔진을 갖추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2004년까지 구글의 검색서비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4년에 야후는 구글의 검색엔진을 자체 검색엔진으로 대체했으나 이미 검색시장에서 구글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상태였습니다. 구글링이라는 신조어가 인터넷 검색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야후는 차츰 몰락의 길에 빠져들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합병이 무산된 후 야후는 2012년 구글의 여성임원 출신 마리사 마이어를 CEO로 영입했습니다. 마이어의 지휘 아래 구조조정과 공격적인 인수합병이 이어지며 조직 개편이 진행되었지만 페이스북 등 SNS 시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적자가 누적되었습니다. 2016년 7월, 알리바바와 야후 재팬 지분을 제외한 야후의 모든 인터넷 사업부 전체가 고작 46억 달러에 버라이즌에게 인수되었습니다.

 

야후의 몰락과 반대로 구글은 2004년 이후 무려 200번이 넘는 인수합병으로 회사의 몸집을 급격히 키워나갔습니다. 여태까지 구글의 가장 성공적인 인수합병은 2005년에 고작 5천만 달러에 인수한 안드로이드와 2006년에 과감하게 16억 달러를 들여 인수한 유튜브 입니다. 반면에 가장 확실히 실패한 인수합병은 2011년에 무려 125억 달러를 들여 인수한 모토롤라입니다. 구글은 2014년에 회사 현금보유량의 극히 일부인 6억 달러를 주고 인공지능회사 딥마인드를 인수했는데, 알파고를 통해 딥마인드는 구글의 첨단 기술력을 세계에 각인시키는 첨병 역할을 했습니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는 현재 세계의 모든 기업들 중에서 시가총액 1,3,4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아마존이 2위) 그런데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는 애플과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다른 면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를 말하면, 애플은 시작부터 최고를 지향하고 상품을 출시하지만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최저한의 스펙이 갖춰지면 일단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사용자의 클레임이나 요망을 반영하여 계속 개량하는 점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구글이 내놓은 상품들 중에서 얼마 후 아예 서비스를 철수한 것들도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구글 웨이브, 구글 노트북 그리고 구글 비디오 등입니다.

 

구글 비디오는 미국에 초고속인터넷이 충분히 보급되었던 2005년 1월에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구글 비디오는 전문 제작자들이 만든 동영상을 유료로 제공하는 한편 일반 사용자들도 동영상을 업로드 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구글 비디오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올라오는 동영상을 일반에게 공개하기 전에 저작권 침해 여부 등을 검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직접 제공하는 전문 동영상에 집착하면서 구글 비디오를 대중의 동영상 공유 커뮤니티로 만드는 데는 소홀했습니다. 구글 비디오는 출범당시 예견대로 여러 경쟁자들과 맞닥뜨렸습니다. 당시 구글은 기술력과 자금력 그리고 인력 모두에서 누구와 상대해도 우위에 있었기에 구글은 어떤 경쟁 회사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구글 비디오의 호적수는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페이팔을 퇴사한 프로그래머 세 명이 그동안 모아 놓은 자금으로 2005년 2월에 유튜브를 설립하고 4월에 서비스를 시작한 것입니다. 2005년 4월 23일 유튜브에 업로드 된 역사적인 1호 동영상은 공동 창업자인 25살의 조드 카림(Jawed Karim)이 동물원에서 코끼리에 대해 설명하는 18초짜리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NQXAC9IVRw

 

유튜브의 창업자들은 구글 비디오의 전략과는 달리 아마추어 동영상 제공자들을 끌어들이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특히 매력적인 여성들이 자신의 동영상을 올리도록 각종 유인책을 썼습니다. 유튜브는 사용자들이 재미있는 영상을 올리면 그걸 친구들에게 추천하고 소문내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습니다. 소문이 마케팅을 대신해서 불과 두세달 만에 가장 인기 높은 온라인 비디오 사이트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유튜브의 지배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시청자와 업로드자 모두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으로 몰려들었고 그 때문에 보다 더 많은 시청자와 업로드자가 몰려드는 선순환이 이어졌습니다.

 

2006년이 되자 구글 본부도 구글 비디오가 유튜브의 인기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구글의 행운은 다른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1년 매출이 16억 달러에 달하는 거대 미디어 그룹인 비아콤이 유튜브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걸었던 것입니다. 유튜브는 사용자가 티비 프로그램의 일부분을 업로드 하는 것을 그의 개인적 표현으로 여겼기 때문에 제지하지 않고 있었는데, 비아콤 측에서 자신의 콘텐츠가 허락 없이 업로드 됨으로 인해 인터넷에 빠져나가는 것의 책임을 유튜브에 물은 것입니다. 당시 유튜브는 출범한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직원은 7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유튜브가 곤경에 빠진 것을 알아차린 구글은 16억 5천만 달러를 들여 유튜브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그 정도를 제안하지 않는다면 야후 등 다른 곳에 유튜브를 빼앗길 수 있다는 다급함에 도저히 그들이 거부할 수 없는 금액을 제시해서 구글은 유튜브를 사들였고, 곧바로 구글 비디오 서비스를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구글은 소송을 감수하더라도 기존에 유튜브가 운영되던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13년이 지난 지금 유튜브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도 엄청나지만, 유튜브로 인해 구글의 인지도와 브랜드 가치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올라갔습니다.


구글은 승승장구해서 2018년 한때 시가총액 세계 1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2019년 6월 18일 현재 시가총액 7600억 달러로 세계 4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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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9-06-18 06:44:09

중간에 같은 내용이 한 번 더 반복되네요. 검토 부탁드립니다. 늘 잘 읽고 있습니다.

WR
2
2019-06-18 07:54:19

제가 3~4년 전에 올렸던 세 개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같은 상황을 야후의 입장과 구글의 입장에서 쓴 것이 중복될 수도 있습니다.

2019-06-18 14:10:58

중복이라서 오히려 더 재미있는 글이 된것 같습니다.
옴니버스 영화에서 두개의 다른 에피소드가 하나의 이야기로 만날때 오는 쾌감같은걸 느꼈어요

2019-06-18 06:49:37

학부 2학년 때 강의중에 참고할만한 내용이라고 한시간 남짓 수업을 들었었네요. 구글의 성공은 서치엔진의 '서칭' 능력 때문이 아니라 독보적인 '랭킹' 능력 덕이라는 사실보다도, 그런 질문을 던질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참 놀라웠었네요. 더하여 페이지랭크 논문이 참.. 뭐랄까 불성실하게(?) 쓰여졌던게 기억이 납니다.
참 잘 읽었습니다.

WR
2019-06-18 07:55:59

아이디어를 만들고 그것을 구현한 것 그리고 알고리듬을 꾸준히 향상시켜 웹 서치를 장악한 것 모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페이지랭크 논문은 해설판이 아주 어려개 출판되었습니다.

2019-06-18 07:46:46

편집 실수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WR
2019-06-18 07:58:15

말씀 감사합니다. 예전에 올린 글을 편집한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피곤한 상태에서 편집한 거라 실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밤을 세고 작업을 해서 찾으려고 해도 잘 안보이네요. 혹시라도 어느 부분인지 지적해주시면 고마울 거 같습니다.

Updated at 2019-06-18 14:14:24

맨 처음 동영상 밑에 9번째 문단 '1998년이 되자 야후는~'이랑

페이지 & 브린 사진 밑에 13번째 문단 '그 무렵에 당시~'랑 내용이 중복되네요. 글의 흐름상 엉뚱한 내용이 아니라서 읽는데 무리는 없지만 거의 중복되는 느낌이라 아마 이 부분 지적하신 듯 합니다.

 

별개로, 내용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영화 한편 보는 것 같은, 몰랐던 스토리가 있었네요,

2019-06-18 08:33:47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9-06-18 09:05:02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여담으로 야후는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무례하고 더러운, 인간의 형상을 한 종족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어떻게 이 단어를 웹페이지의 이름으로 썼을까 참 의아했었습니다^^;;

2019-06-18 10:14:20

정신없이 빠져서 읽었네요. 저 대학교 새내기때만 해도 다음과 야후가 최고였는데 둘다 네이버와 구글에게 탑자리를 빼앗긴..

2019-06-18 14:12:51

라리가 추구팀 -> 라리가 축구팀이요 ^^;

쓰신 글 중 유일하게 제가 전부 아는 내용인 듯 싶네요

Updated at 2019-06-18 14:17:04

기구한 야후와 구글의 생존전략과 방향이 오늘의 성공과 몰락을 가져다 주는군요. 야후가 구글의 가치가 쌀때 사들였다면 지금의 야후는 어쩌면 성공가도를 달릴수있는 또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겠죠. 이런면을 봤을때 야후의 생존전략과 일대기를 보면 물들어왔을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사실을 세삼 떠올리게 하는군요.

2019-06-19 00:14:28

재밌게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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