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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선수들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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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1-28 01:36:29

 
밑에 NBA 레젠드들은 왜 대학을 4년간 다녔냐는 질문이 있네요. 답변으로 달다가 길어져서 글로 옮겼습니다. 사실 이 이슈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어서 하나로 정의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1. 재학생의 NBA진출은 원래 규제로 인해 막혀있었습니다

60년대 까지만 해도 NBA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이 지난 선수만 드래프트 대상이 된다고 규정을 해 놓아서, 졸업한 다음에나 지원이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 스타들은 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온 선수들입니다. 이게 바뀐게 1970년인데, 당시 NBA의 경쟁리그인 ABA가 창립되면서 변화가 몰아치던 때였습니다. 아무래도 후발주자로 살아남기 위해 ABA는 흥행에 도움이 된다면 규정을 느슨하게 적용했는데 (이래서 3점 슛 도입도 ABA에서 먼저 일어납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재학생도 스카웃을 하기 시작한겁니다. 그리고 이 여파가 당장 NBA에도 밀려오게 됩니다. 

1968년 올림픽 메달리스트이자 디트로이트에서 32-21를 기록한 스펜서 헤이우드가 2학년 끝나고 ABA의 덴버 로켓츠에 입단 하자마자 첫해 30-19를 기록하며 스타로 떠오릅니다. 무려 신인상, 득점왕, 리바운드왕, MVP, 올스타 MVP를 동시에 수상하죠. 이런 스타를 내버려둘 NBA가 아니어서 당시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구단주였던 샘 슐만이 당시로는 초고액이었던 6년 1.5M으로 계약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NBA에서는 이 계약이 규정을 어긴 불법이라고 철퇴를 내렸으나, 구단주와 선수가 함께 반독점 법 위반으로 NBA에게 소송을 걸어버립니다. 이 소송은 대법원까지 올라가서 9-0으로 선수가 이기면서 NBA가 저 규제를 철폐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덕분에 71년도에 처음으로 재학생이 드래프트에 참석이 가능하게 되는데, NBA는 그 대신 '가정문제나 재정문제로 불가피하게 학교를 떠날수 밖에 없다'는 증명을 내야 참석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걸 Hardship case라고 이름을 걸고 71년 드래프트 이후에 별개로 돌렸고, 여기서 선수를 선택하는 팀은  72년 드래프트에서 선택권을 포기하게 되는 구조였습니다. 17명이 지원했으나 11명은 중간에 취소했고, 6명중에 5명이 드래프트 되서 역사가 시작됩니다. 3학년이 4명, 2학년이 1명이었고, 여기에 고등학교 중퇴였던 뉴욕 스트리트 볼의 레젠드 조 해먼드 (The Destroyer)도 드래프트가 되었습니다. 

72년부터 별개 드래프트가 아니라 일반 드래프트와 통합된 Hardship Draft는 75년까지 계속 되다가 그 이후 76년 부터는 굳이 저 증명이 필요 없는 것으로 규제개혁이 되면서 재학생이 자유롭게 드래프트에 지원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이 되는 학생들은 일년에 너댓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졸업한 다음에야 NBA에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2. 대학 농구 (NCAA)의 인기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요즘에야 NCAA가 NBA를 가기 위해 1년쯤 들렀다 가는 곳으로 인식되지만, 예전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근 몇년간 스타들의 유출로 많이 죽었지만 미국에서 대학 농구는 대학 풋볼과 더불어 가장 인기 많은 대학 스포츠리그로, '3월의 광란'이라 불리는 NCAA 토너먼트가 열릴 때는 미국내 거의 모든 사무실에서 어느 학교가 4강에 들어갈 것인지 예상을 놓고 직원들간에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80년대 전까지 대학농구의 인기는 같은 시대 고교야구가 한국의 국민 스포츠였을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실 대학농구 토너먼트는 NBA보다 10년 전에 시작했고 (1930년대에 이미 NIT와 NCAA리그가 있었습니다) 자기 모교를 응원하는 기본 베이스의 팬들이 있기 때문에 항상 인기가 많았습니다. 또 60년대 존 우든 감독이 이끄는 무적함대 UCLA의 8연패를 제외하고는 연패조차 딱 두번 (듀크, 플로리다)일 정도로 전력분산이 되어 있고, 단판 토너먼트의 특성상 워낙 업셋이 많이 나오기도 하기 때문에 신데렐라 스토리를 꿈꾸면서 모두가 꿈을 버리지 않고 도전하는 장점도 있지요. (1983년 NC State가 이 분야 끝판왕입니다) 이에 비해 NBA Playoff는 7차전 토너먼트의 특성상 업셋이 정말 어렵습니다.

실제로 이걸 증명해 주는 것이 TV Rating인데, NBA는 빌러셀과 윌트 챔벌레인이라는 쌍벽의 스타가 은퇴한 70년대에 엄청난 인기 침체를 겪게 됩니다. (카림 압둘자바가 당시 최고의 스타였지만 워낙 조용한 성격에 재미와는 거리가 먼 분이라..) 여기에 커밋 워싱턴의 폭력사태에 인종문제까지 엮어들어가면서 TV 시청률이 확 떨어집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 닥터 제이가 뛰었던 1980년 NBA Final이 생방송이 아니라 녹화방송이었으니 말 다했죠. 이에 비해 대학농구 토너먼트는 어느팀이 나오던 시청률은 보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생방이었습니다. NBA가 지금의 인기를 누리게 된건 80년대 매직 존슨과 레리 버드의 라이벌 전 이후이지요. 

이러다 보니 자기 동네 학교에서 스타로 뛰다가 NCAA 토너먼트에서 신데렐라 스토리 쓰면서 4강 정도 들어갈 경우에는 죽을때 까지 그 동네에서는 레젠드로 남기 때문에 꿈많은 농구 소년들이 대학에서 죽어라 뛰었습니다. 72년 까지 1학년은 Varsity Squad에 끼워주지도 않았으니 (대학농구 역대 최고 선수인 압둘자바 조차도 1학년 때는 학교 대표로 못뛰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상 2,3,4학년의 세번의 도전만 있는 상태였고, 이 한번 한번의 기회가 엄청나게 소중하다보니 4학년까지 다 다니고 NBA로 나오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3. NBA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팀 숫자가 지금보다 적었기 때문에 로스터 스팟이 적어서 뛸 수 있는 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지금이야 NBA에 30개 팀이 있지만 1970년에는 14개 팀 뿐이었습니다. 이 말은 현재 각 팀에서 스타팅 멤버 정도 뛰는 실력이 아니면 당시에는 벤치에도 못앉아 있었다는 이야기죠. 70년대 중반에 ABA가 생기면서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매년 졸업생들이 나가며 자리가 나는 대학팀과는 달리 NBA는 루키들이 살아남는 비율이 지금도 매우 낮은 곳입니다. 매년 드래프트에서 살아남는 선수가 10여명 언저리고, 84/95/03같이 특출난 해가 아니면 잘 해봐야 일년에 2-3명 정도 올스타급 선수들이 나오는 곳이죠.  

4년 꽉 채우고 어느정도 준비가 된 루키에게 주어지는 기회도 그다지 많지 않다는걸 고려하면, 대학농구에서 더 이상 입증할 것이 없을 만큼 보여준 것이 많은 선수가 아닌 이상 일찍 나가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다른 4학년들이랑 경쟁을 해야 하니 애시당초에 팀들이 뽑아주지를 않고, 뽑더라도 별로 기회가 안주어지면 2-3년 내에 바로 저니맨 되거나 유럽으로 튕겨 나가는거니까요. 이러다보니 1-2학년때 우승이나 4강 (Final Four) 정도 성적을 내서 이미 대학 농구에서 이룰건 다 이루었거나 아니면 20-10 정도 에버리지 해서 다른 4학년들보다 나은 성적을 몸으로 입증한 경우가 아니면 NBA 드래프트에 등록하는건 상당히 모험이었습니다. 

NBA와 NCAA둘다 이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치기 어린 도전 후에 후회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어느 정도 세이프가드 방식을 열어 놓았습니다. 대학 재학생이 드래프트 참가를 신청하더라도 에이전트와 사인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드래프트 일정 몇주 전까지는 신청을 철회할 수 있는 기회를 초기 부터 제공했고, 지금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젠 거의 의미가 없지만) 이러다보니 대학농구 탑 플레이어들이 일단 신청을 해서 구단들이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지 좀 둘러본 다음에 1라운드에 선택이 안될것 같으면 취소 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예를 들면 위에 이야기한 71년도 Hardship Draft만 해도 17명이 지원했다 11명이 취소하는데, 이중에서 재미있는 경우가 두명 있습니다. 나중에 MVP까지 올라간 빌 월튼과 밥 맥아두가 둘다 신청했다가 취소하고 각각 74년, 72년 드래프트에서 뽑히게 됩니다.  

4. 변화의 시작 - 80년대

70년대 재학생 드래프트를 통해 뽑힌 선수들 중에 성공 케이스도 은근히 있습니다. 위에 말한 72년 밥 맥아두 외에도 75년 대럴 도킨스, 76년 아드리안 덴틀리, 77년도 버나드 킹 등이 1라운드 한자리 수 픽으로 뽑혀서 성공적인 캐리어를 이룬 선수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외적인 경우였고, 전원 다 대학 최고 수준 선수들이 3학년 끝나고 나온거라 구단들이 1년 먼저 입도 선매 하는 마음으로 잡아 놓은 느낌이 강했습니다

확실한 변화는 79년 드래프트였는데, 무려 1픽으로 2학년이 뽑히게 되는 초유의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그 선수가 무려 매직 존슨이었기 때문입니다. 들어오자마자 루키 센세이션을 보여주며 NBA Final MVP까지 가져가는 성공 케이스가 구단들을 자극하면서 그전까지는 말도 안되는 짓으로 여겼던 1픽으로 재학생을 뽑는 일이 연속으로 벌어집니다. 당장 81년 드래프트의 마크 어과이어, 82년 제임스 워디, 84년 하킴 올라주원등이 대표적인 예지요. 이외에도 같은 기간 Top 5픽에 81년 아이제이아 토마스 (2학년), 82년 테리 커밍스, 도미니크 윌킨스, 라살 톰슨, 83년 바이런 스캇, 84년 마이클 조단, 찰스 바클리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매직 존슨과 아이제이아 토마스 정도 제외하고는 다 3학년이었고, 흥분이 가라앉은 다음에는 Top 5픽은 대부분 졸업생 위주로 뽑았습니다. 드물게 뽑은 선수들도 그렇게 성공을 보여주지 못했지요. 이 기조가 바뀌게 된건 92년 샤킬오닐이 1픽, 93년 크리스 웨버가 2학년으로 1픽, 94년 글랜 로빈슨이 1픽, 제이슨 키드가 2학년으로 2픽 뽑히면서 다시 재학생 드래프트 시장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이후입니다.

5. Rookie Scale 이 가져온 의도치 않은 결과 

94년도 글랜 로빈슨이 '조던의 재림'이라는 지금 보면 택도 없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1픽으로 데뷔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만 해도 루키 스케일 제도가 없어서 루키도 선수와 구단이 네고친 금액으로 샐러리 캡에 반영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루키들이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같이 연봉 사인 안하고 트레이닝 캠프 시작때까지 질질 끄는게 일상이었는데 글랜 로빈슨이 좀 심했지요. 당시 기준으로 말도 안되는 10년 100Mil을 달라고 트레이닝 캠프 직전까지 드러누웠고, 결국 스타가 필요했던 밀워키 구단이 져서 10년 68Mil에 계약을 하게 되면서 다른 구단주들이 폭발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대학때 잘한 선수라고 해도 NBA에서 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데, 당시 팀의 스타였던 빈 베이커 연봉의 3배!!!를 루키에게 줘버렸다가 실패라도 하면 10년간 저 샐러리 지불하다 팀 망할거라는 타당한 지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샐러리 캡에 룸이 부족한 팀은 선수에게 돈을 챙겨주지 못한다는 문제도 있었는데, 당장 저 94년 드래프트에서 5픽이었던 주안 하워드는 워싱턴의 샐러리 캡 이슈로 6픽이었던 샤론 라이트보다 35% 낮은 연봉으로 사인해야 했습니다. 

이런 이슈를 방지하기 위해 95년부터 '루키 스케일'이란 제도가 도입이 됩니다. 루키들이 받을 연봉의 수준을 샐러리캡에 비례해서 미리 정해놓는 것인데, 픽된 순서대로 기준연봉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여기서 +-20% 수준으로 계약하라고 강제한거죠. 구단 입장에서야 리스크를 제한하는 장점이 있어서 매우 반겼던 선택이었는데, 이 제도가 기폭제가 되어 의도하지 않은 트렌드가 시작이 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리스크가 제한되면 제한될수록 모험적인 선택을 하는 경향이 높아집니다. 하루 알바비로 5만원을 받기로 되어있는 사람에게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10만원, 뒷면이 나오면 0원을 받는 조건을 제시한다면 동전 던질 사람들이 많을겁니다. 근데 만약 일년 연봉을 걸고 동전을 던지라면 할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루키 스케일이 구단에게 리스크를 제한해 준 것은 구단들이 모험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게 된겁니다. 예를 들어 2004년 드래프트에서 고졸 드와이트 하워드와 대졸 에메카 오카포가 1픽을 두고 경쟁을 했었는데, 만약 루키 스케일이 없었다면 올란도는 무조건 에메카 오카포를 찍었을겁니다. 하지만 루키 스케일 덕분에 올란도는 드와이트 하워드를 찍었고, 그 도박이 성공하지요. 

역시나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루키 스케일은 재학생들에게도 일찍 드래프트에 신청할 이유를 주게됩니다. 그 전까지는 4학년을 채우고 높은 드래프트 픽으로 나올경우 대학 성적을 바탕으로 구단과 네고를 쳐서 더 높은 금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학시절이 결코 버리는 시간이 아니었죠. 하지만 루키 스케일로 인해 첫 3-4년의 연봉이 정해져 버리면 선수가 아무리 잘하더라도 연봉이 올라갈수가 없고, 루키 스케일이 끝날때나 되어야 비로소 연봉 협상에 들어갈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1년이라도 NBA에 빨리 들어가서 루키 스케일에서 나오는 시간을 앞당기는 것이 중요하지요. 1라운드에 뽑히기만 하면 첫 2년 동안 벤치만 달구고 있어도 연봉은 보장되어 있으니까요. 이러다 보니 그 전까지였으면 학교에 4학년까지 남았을 수많은 선수들이 주저하지 않고 드래프트에 신청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95년 드래프트부터 바로 나오게 됩니다. 

6. 재학생들의 시대  

95년 드래프트는 위에서 설명 드렸듯이 루키 스케일 이라는 기폭제 때문에 엄청난 결과가 나오게 되는데, 무려 Top 5픽 전원이 2학년 이하로 구성되게 됩니다. 조스미스 (2학년) - 안토니오 맥다이스 (2학년) - 제리 스택하우스 (2학년) - 라시드 월레스 (2학년) - 케빈 가넷 (고졸!!!!) 이었고, 드래프트가 시작되고 첫번째 뽑힌 4학년은 6번픽의 브라이언 리브스였을 정도였습니다. 

96년도는 더 심해서 앨런 아이버슨 (2학년) - 마커스 캠비 (3학년) - 샤리프 압둘라힘 (1학년!) - 스태폰 마버리 (1학년!) - 레이 알렌 (3학년) - 안트완 워커 (2학년) - 로렌젠 라이트 (2학년) - 한명 쉬고 (케리 키틀스) - 사마키 워커 (2학년) - 에릭 뎀피어 (3학년) - 한명 쉬고 (토드 풀러) - 비탈리 포타팽코 (3학년) - 코비 브라이언트 (고졸!!!) 까지 첫 13명 중에 4학년이 2명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심지어 대학때는 팀 던컨을 제압하던 당대 최고 센터였던 마커스 캠비는 그해 4강에서 탈락한 토너먼트를 우승하기 위해 4학년때 학교로 돌아오겠다고 의사를 밝혔는데 코치였던 존 칼리파리 (지금 켄터키 코치 맞습니다)가 좋은 기회니 그냥 NBA 가라고 설득했을 정도였지요. 

이런 경향이 너무 심해지고, 특히나 준비 안된 고졸들이 가넷과 코비를 보고 지원했다가 망하는 일이 NBA와 NCAA 둘 다에게 문제를 일으킨 덕분에 2005년부터는 고졸 이후 1년이 지나야 드래프트에 신청할 수 있도록 제도가 보완이 되었지만, 이미 트렌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지금 우리가 아는 NBA 드래프트가 되어 버렸습니다. 

4학년이 1픽으로 뽑힌 마지막은 2000년 드래프트의 키넌 마틴이니 벌써 20년이 넘었고, 이젠 2학년만 되도 드래프트에서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네요. 프로야구의 고졸 선호 때문에 대학야구가 망해가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아 대학 농구의 팬으로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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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021-01-28 03:55:28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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