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자동
NBA-Talk
/ / / /
Xpert

L.A 레이커스 프랜차이즈 포지션별 랭킹 Top 28 - PF편 (ver.2020.)

 
24
  5364
Updated at 2021-01-04 01:36:29

Prologue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PF편으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앞서 연재한 PG편, SG편, SF편은 아래 링크해두었습니다. 본 시리즈의 범례 및 프랜차이즈 간단 역사에 대해서는 PG편에 수록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PG편 : 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211639

 

SG편 : 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211732

 

SF편 : 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211789

 

C편 : 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nbatalk&wr_id=7793097

 

본격적인 랭킹 소개에 앞서 28위 밖 선수들 중에서 나름대로 소개해줄 만한 선수들을 5명을 추려서 "Honorable Mention"이란 타이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28위 밖 선수들에게도 각각 잠정적인 랭킹은 있지만 여기에서 소개하는 순서는 그 순위와는 무관하며, 그냥 시대순으로 정렬했습니다.)


 

 

Honorable Mention

 

Jim Barnes

 

 

64 드래프트 1픽 출신의 짐 반스는 66-67시즌을 앞두고 르로이 엘리스와 맞트레이드 되어 합류했으며, 한 시즌 반 동안 벤치에서 평균 6.7득점, 5.4리바운드를 올려주었습니다.

 

Bill Hewitt

 

68 드래프트에서 전체 11번으로 지명된 빌 휴이트는 평균 7.2득점, 4.4리바운드를 올리며 올-루키 퍼스트 팀에도 뽑혔으나, 이듬해 초에 해피 헤어스턴을 영입하는 카드로 쓰였습니다.

 

Cornell Warner

 

 

밀워키 벅스 시절에도 카림 압둘-자바와 골밑 파트너를 이룬 바 있는 코넬 워너는 75-76시즌에 주전 4번으로 자바를 보좌하며 평균 7.3득점, 8.9리바운드를 올려주었습니다.

 

Kenny Carr

 

 

6-7의 단신이었지만 운동능력이 출중했던 케니 카는 77 드래프트에서 전체 6번으로 지명되어 평범한 활약을 펼치다가 3년차 시즌 초반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Spencer Haywood

 

 

왕년에 대스타였으나 급격한 기량 하락을 보인 스펜서 헤이우드는 79-80시즌 우승 멤버기도 했으나, 파이널 도중 폴 웨스트헤드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이탈하는 등 진통을 겪었습니다.

 


 

Minor Ranking

 

 

PF 28th : #_35  Mark Madsen

 

 

6-9, 240lbs PF/C / 3시즌(01-03), 183경기

 

2.6득점, 2.6리바운드, 0.6어시스트, 0.2블록슛

 

스탠포드 대학 출신의 마크 매드슨은 00 드래프트에서 전체 29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소위 “매드 독(Mad Dog)”이라 불렸는데, 허슬이 뛰어나다 못해 너무 지나치다 보니 때로는 “미친개” 같다 하여 붙은 별명이었죠. 그는 레이커스에서 주로 벤치를 지키며 미미한 출장에 그쳤으나, 코트에 나설 때마다 넘치는 활력으로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벤치에서도 적극적인 리액션으로 팀원들을 응원했습니다. 그는 공격 리바운드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간혹 풋-백 등으로 득점을 올려주었으며, 박스-아웃, 스크린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죠. 그는 코트 위에서 몸을 날리는 것을 꺼리지 않는 열정의 화신이었으나, 워낙 피지컬하게 플레이하다 보니 잔 부상이 좀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는 밀레니엄 레이커스의 일원이었던 덕에 1, 2년차 시즌에 연달아 우승을 맛보는 행운을 차지했는데, 02년도 우승 퍼레이드 때에는 신나는 축하 댄스로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죠. 이렇듯 허슬 넘치고 열정적인 모습 덕에 그는 기량은 다소 평범했지만 레이커스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02-03시즌 후반에는 사마키 워커를 대신해 더러 주전 4번으로 기용되기도 하였으며, 플레이오프 1라운드 첫 두 경기에도 깜짝 선발로 출전했죠. 하지만 레이커스 구단은 오프시즌에 그의 루키-스케일 4년차 계약을 옵트-아웃하여 FA로 풀어버렸고, 결국 그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와 미니멈으로 계약하며 레이커스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09년에 은퇴한 후 곧바로 지도자의 길을 걸었으며, 레이커스에서 여러 해 동안 어시스턴트 코치를 지냈죠. 그는 현재는 유타 밸리 대학의 감독으로 재임 중입니다.


 

 

PF 27th : #_40  Travis Knight

 

 

7-0, 235lbs PF/C / 3시즌(97, 99-00), 171경기

 

3.5득점, 3.4리바운드, 0.5어시스트, 0.6블록슛

 

코네티컷 대학 출신의 트래비스 나이트는 96 드래프트에서 전체 29번으로 시카고 불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시카고는 샐러리 사정으로 그와 곧바로 계약하기를 꺼려했고, 마침내 그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이에 그는 L.A 레이커스와 1년 미니멈 계약을 맺으며 가까스로 프로 데뷔를 했죠. 그는 시즌 초반에는 미미한 출전에 그쳤으나 점차 기량을 인정받으며 출장 시간을 늘려갔습니다. 급기야 1~2월에는 평균 7.4득점, 6.2리바운드의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으며, 샤킬 오닐이 잠시 부상으로 빠졌을 때에는 주전으로 기용되기도 했죠. 그는 본 포지션이 센터였으나, 루키 시즌에는 레이커스에 워낙 센터 자원이 많다 보니(오닐, 션 룩스, 코리 블런트) 종종 4번으로도 기용되었습니다.

 

그는 별다른 공격 기술은 없었지만 제법 깔끔한 중거리 점프슛을 지니고 있었죠. 또한 신장 대비 제법 잘 달리는 편이었으며, 림 프로텍팅과 보드 장악력도 준수했습니다. 그는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올스타 주간에 루키 챌린지에도 출전하는 등 유망주로 주목받았고, 올-루키 세컨드 팀에도 이름을 올렸죠. 한편 오프시즌에 FA가 된 그에게 보스턴 셀틱스가 7년 22mil이라는 파격적인 계약을 제시했는데, 평소 레이커스 잔류를 강하게 바라던 그로서도 거부하기 어려운 거액이었습니다. 그는 보스턴에서 1시즌을 뛴 뒤 98-99시즌을 앞두고 토니 바티와 맞트레이드 되어 다시 레이커스로 복귀했죠. 하지만 그는 기대만큼의 성장세를 보이지 못했으며, 플레이오프 경기에서는 6분만에 폭풍 6파울을 범하고 퇴장당해 플레이오프 기록을 세우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줬습니다. 99-00시즌에는 팀의 우승으로 행운의 반지를 손에 넣기도 한 그는 오프시즌에 복잡한 4각딜에 끼어 뉴욕 닉스로 이적했고, 뉴욕에서 세 시즌을 더 뛴 뒤에 커리어를 마감했습니다.

 


 

 

PF 26th : #_35  Larry Spriggs

 

 

6-7, 230lbs PF/SF / 3시즌(84-86), 156경기

 

5.4득점, 2.4리바운드, 1.4어시스트, 0.5스틸, 51.9% 야투율

 

하부리그인 CBA 출신의 래리 스프릭스는 휴스턴 로케츠, 시카고 불스에서 10일 계약 등으로 2시즌 간 불과 13경기에 출전한 무명의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83-84시즌을 앞두고 L.A 레이커스가 그에게 떡하니 정식 계약을 제시했고, FA인 그를 데려오기 위해 전 소속팀인 시카고에 보상으로 3라운드 픽까지 내주었죠. 그는 83-84시즌에는 벤치에서 미미한 출전시간만 받은 채 가비지 멤버로 뛰었지만, 84-85시즌 들어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마침 레이커스는 시즌 개막 후 8경기 동안 3승 5패의 부진에 빠져 있었는데, 팻 라일리 감독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과감하게 베테랑 자말 윌크스를 벤치로 내리고 스프릭스를 전격 스타팅 포워드로 기용했죠.

 

스프릭스는 전반적인 기량은 다소 미숙했지만 에너지와 허슬만큼은 넘쳐나는 스타일이었기에, 그가 스타팅으로 뛰게 되자 가라앉았던 팀 분위기가 점점 활력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발로 나와도 출전시간은 20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적극적인 수비와 활발한 속공 가담으로 스탯 이상의 기여를 해주었죠. 그가 주전으로 올라선 뒤 레이커스는 폭풍 7연승을 거두며 기세를 올렸고, 이후 또 9연승을 질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시즌 도중에 결국 커트 램비스에게 스타팅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레이커스는 그가 주전으로 출전한 32경기에서 23승 9패의 호성적을 거두며 초반 부진을 온전히 만회했죠. 그는 플레이오프에서도 벤치에서 간간이 활약해주었으며, 그해 레이커스가 파이널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꺾음에 따라 우승 반지도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85-86시즌에 루키 A.C. 그린이 가세함에 따라 그는 다시 벤치 끝자락으로 밀리고 말았고, 결국 이듬해 오프시즌에 레이커스를 떠나 스페인 리그의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했죠. 이후로도 그는 해외의 여러 리그를 전전하며 96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으며, 현재는 개인 농구 트레이너로 활동 중입니다.

 


 

PF 25th : #_11  Karl Malone

 

 

6-9, 250lbs PF / 1시즌(04), 42경기

 

13.2득점, 8.7리바운드, 3.9어시스트, 1.2스틸

 

리그 역사상 최고의 파워포워드 중 한 명으로 거론되던 칼 말론은 유타 재즈에서만 18시즌을 뛰었으나 아쉽게도 우승 반지는 얻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마흔 살의 나이에 접어든 그는 02-03시즌을 마치고 FA가 되자 우승을 위해 과감하게 친정팀 유타를 떠나 새로운 도전에 나섰죠. 한편 당시 L.A 레이커스는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를 앞세워 2000년대 초에 3연패를 이룩한 당대 최강 팀 중 하나였는데, 오프시즌에 두 명의 대형 스타를 추가로 영입하며 세간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레이커스는 이미 샐러리-캡이 꽉 찼기에 스타급 선수를 데려올 여력이 없었는데, 고작 평범한 샐러리 예외조항을 이용해 말론과 게리 페이튼을 헐값에 데려왔죠. (말론은 BAE/2년 3.1mil, 페이튼은 MLE/2년 10.3mil) 두 선수 모두 나이는 많았지만 전년도에 평균 20득점 이상을 기록했을 정도로 기량이 녹슬지 않았는데, 오로지 우승 하나에 목말라 엄청난 페이-컷을 감수하고 레이커스에 합류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국내 팬들은 명예의 전당을 이미 예약한 스타 넷이 뭉쳤다며 이들을 “전당포” 라인업이라 불렀고, 레이커스는 단연 우승 1순위 후보 꼽히게 되었죠.

 

말론은 여전히 뛰어난 스코어러였으나, 레이커스에서는 득점 욕심을 줄이고 철저하게 수비와 궂은일에 주력하며 팀플레이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커리어 내내 부상이라곤 당해본 적 없는 철인이었던 그가 시즌 초반에 그만 예기치 못한 큰 무릎 부상을 당하며 39경기나 결장하게 되었죠. 이 때문에 레이커스는 정규 시즌에 56승에 그치며 다소 삐걱거렸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풀-전력을 앞세워 승승장구에 나섰습니다.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는 디펜딩 챔피언이자 전년도 플레이오프에서 패배를 안겨줬던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상대로 리벤지에 성공했는데, 이 시리즈에서 말론은 팀 던컨을 필사적으로 수비해내며 승리에 혁혁히 공헌했죠. 레이커스는 파죽지세로 파이널까지 진출했으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상대로 예상외의 고전을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3차전에 말론이 또다시 무릎 부상을 당하는 악재를 만났습니다. 말론은 억지로 4차전에 출전했지만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고, 결국 5차전은 결장하며 팀이 1-4로 패배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죠. 이후 오프시즌에 무릎 수술을 받은 말론은 1년 남은 계약을 옵트-아웃하며 레이커스를 떠났고, 이후 끝내 코트로 복귀하지 않은 채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커리어 통산 36,928득점을 올리며 카림 압둘-자바에 이어 역대 2위에 랭크되어 있고, 2010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습니다.

 


 

 

PF 24th : #_20  Maurice Lucas

 

 

                

6-9, 215lbs PF/C / 1시즌(86), 77경기

 

10.2득점, 7.4리바운드, 1.1어시스트, 0.6스틸

 

7~80년대 리그를 대표하는 터프가이로, ABA와 NBA를 오가며 총 5차례 올스타 경력에 빛나는 모리스 루카스는 85-86시즌을 앞두고 디펜딩 챔피언인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습니다. 레이커스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그의 소속팀 피닉스 선즈에 2장의 2라운드 픽을 내주었죠. 노장 밥 맥아두가 그간 맡았던 백업 빅맨 롤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전성기가 지나 기량이 하향세를 걷고 있었지만, 나름 관록을 보이며 벤치에서 가장 높은 득점(평균 10.4득점)을 올렸고 평균 리바운드(7.4개)는 팀 내 최고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올드 스쿨 스타일의 상남자였던 그는 수틀리면 언제든 주먹을 퍼부을 수 있었기에 상대 선수에게는 공포의 존재였죠. 그는 골밑에서 열정 넘치는 리바운더였으며, 두 차례 디펜시브 팀 경력이 있는 끈기 있는 수비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정교한 중거리 슛을 바탕으로 득점에서도 종종 기여를 해줄 수 있었죠. 한편 레이커스는 62승으로 서부지구 1위를 차지하며 연속 우승에 도전했으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휴스턴 로케츠의 트윈 타워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오프시즌에 레이커스는 골밑 자원의 세대교체를 위해 그를 방출하였는데, 마침 시애틀 슈퍼소닉스가 웨이버 클레임을 걸며 그를 데려갔죠. 두 시즌 더 프로로 활동한 뒤 은퇴한 그는 친정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방광암으로 고생하다가 2010년에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PF 23th : #_7  Larry Nance Jr.

 

                

6-8, 245lbs PF/C / 3시즌(16-18), 168경기

 

6.9득점, 5.7리바운드, 1.2어시스트, 1.2스틸, 54.7% 야투율(통산 8위)

 

80년대에 올스타 포워드로 활약한 래리 낸스의 아들인 래리 낸스 주니어는 와이오밍 대학을 졸업하고 15 드래프트에서 전체 27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시즌 도중에 줄리어스 랜들을 벤치로 밀어내고 20경기를 스타팅으로 출전해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주다가, 도중에 무릎 부상을 당해 잠시 빠진 뒤에는 다시 벤치로 돌아갔죠. 이듬해인 16-17시즌에 주로 벤치에서 출전한 그는 더러 스몰 라인업의 센터 역할도 수행하곤 했습니다. 슬램덩크로 이름을 날렸던 부친으로부터 탄력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물려받은 그는 종종 어메이징한 덩크로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하곤 하죠. 그는 필드골의 20% 가량을 확률 높은 덩크로 마무리해주며, 중장거리에서도 종종 슛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득점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다소 서툴지만 컷-인, 속공 가담 등 받아먹기 득점에 능해 필드골 성공률이 높은 편이죠. 그는 수비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블락슛 능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빅맨 치고 손이 빨라 스틸을 잘 합니다.

 

17-18시즌 초반에는 랜들 대신 주전으로 기용되던 그는 랜들이 워낙 핫한 활약을 펼치자 다시 벤치로 돌아갔다가 트레이드 데드-라인 때 아이재이아 토마스 영입 딜에 끼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이적했죠. (낸스+조던 클락슨 ⇔ 토마스+채닝 프라이+1라운드 픽) 클리블랜드에서는 영구 결번된 부친의 #_22 저지를 물려받은 그는 클리블랜드와 4년 44.8mil의 연장계약을 체결하며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 중입니다.


 

 

PF 22th : #_52  Samaki Walker

 

                

6-9, 240lbs PF/C / 2시즌(02-03), 136경기

 

5.6득점, 6.2리바운드, 0.9어시스트, 1.1블록슛(통산 12위)

 

달라스 매버릭스,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백업 빅맨으로 활약한 바 있는 사마키 워커는 01-02시즌을 앞두고 2년 연속 우승팀인 L.A 레이커스에 합류했습니다. (바이-애뉴얼 익셉션 계약 / 2년 2.7mil) 당시 레이커스의 주전 4번이었던 호레이스 그랜트가 오프시즌에 올란도 매직으로 이적함에 따라, 워커는 그 뒤를 이어 곧바로 주전 4번으로 기용될 수 있었죠. 시즌 평균 6.7득점, 7리바운드를 올린 그는 비록 주전이었지만 출전시간(평균 24분)이 백업 4번이었던 로버트 오리(평균 26.4분)보다 더 적었습니다. 그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블루-칼라 워커 스타일의 빅맨으로 리바운드와 골밑 수비 능력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죠. 다만 득점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는데, 주로 림 근처에서 받아먹기나 훅 슛 등으로 득점을 올리곤 했습니다.

 

한편 플레이오프에서 그는 초반 5경기에서는 주전으로 나오다가 이후 오리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제한된 활약에 그쳤지만, (평균 12.6분 출전, 3.3득점, 4.1리바운드) 레이커스의 쓰리-핏 성공으로 행운의 반지를 손에 넣었죠. 이듬해인 02-03시즌 초반에는 발가락 부상으로 빠진 샤킬 오닐을 대신해 주전 센터로 기용되기도 했던 그는, 오닐 복귀 후 다시 주전 4번으로 돌아갔다가 시즌 중반 이후로는 마크 매드슨 등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벤치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플레이오프에서도 거의 로테이션에서 제외된 채 제대로 뛰지 못했으며, 결국 시즌을 마치고 마이애미 히트와 1년 미니멈 계약을 맺으며 레이커스와 결별했죠. 이후 그는 05-06시즌까지 리그에서 뛰다가 이후 러시아, 시리아, 중국 등 해외를 전전했으며, 09-10시즌에는 KBL의 서울 SK 나이츠에 합류해 1시즌 간 뛰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는 프로 및 아마추어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육성 코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PF 21th : #_54  Horace Grant

 

 

6-10, 215lbs PF/C / 2시즌(01, 04), 132경기

 

6.7득점, 5.9리바운드, 1.5어시스트, 0.6블락슛

 

90년대 초반에 시카고 불스가 3연패를 할 때 핵심 멤버기도 했던 호레이스 그랜트는 00-01시즌을 앞두고 복잡한 4각 딜을 통해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습니다. 당시 레이커스 및 뉴욕 닉스, 시애틀 슈퍼소닉스, 피닉스 선즈, 이렇게 네 팀이 낀 이 딜의 골자는 뉴욕의 패트릭 유잉이 시애틀로, 레이커스의 글렌 라이스+트레비스 나이트+1라운드 픽과 피닉스의 룩 롱리가 뉴욕으로, 그리고 당시 시애틀 소속이었던 그랜트가 다른 여러 선수들(그렉 포스터, 척 퍼슨, 임마뉴엘 데이비스)과 함께 레이커스로 가는 것 등이었죠. 전년도 챔피언이었던 레이커스는 주전 4번이었던 A.C. 그린과 재계약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 영입한 그랜트를 주전 4번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는 35살의 노장으로 전성기는 다소 지났지만 이미 시카고 시절부터 익숙한 필 잭슨 감독의 트라이앵글 오펜스 하에서 관록을 보여주며 평균 8.5득점, 7.1리바운드를 올려주었죠.

 

그는 디펜시브 팀을 4차례나 차지했을 정도로 탁월한 대인 수비 능력으로 이름 높았으며, 특히 공격 리바운드를 잘 잡아냈습니다. 또한 빅맨이면서도 슛터치가 좋아 주로 중거리 슛으로 많은 득점을 올리곤 했죠. 00-01시즌의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에서 단 1패만 하는 압도적인 포스로 쉽사리 우승을 차지했고, 그랜트는 4번째 우승 반지를 추가했습니다. 오프시즌에 그는 친정팀인 올란도 매직과 3년 계약을 맺으며 레이커스를 떠났는데, 02-03시즌 초반에 닥 리버스 감독과 불화를 벌이다가 그만 방출되고 말았죠. 그는 이듬해인 03-04시즌에 다시 레이커스로 복귀(1년 미니멈 계약)하여 백업 4번으로 뛰었으나 엉덩이 부상으로 55경기 만에 시즌-아웃되었으며 이후 곧바로 은퇴했습니다. 현재 그는 시카고 불스에서 고문(顧問)으로 활동 중이죠. 그의 쌍둥이 동생인 하비 그랜트도 리그에서 오랜 시즌 베테랑으로 활약했으며, 그의 조카이자 하비의 아들인 제리언 그랜트와 제라미 그랜트도 각각 현역으로 뛰고 있습니다.


 

 

PF 20th : #_54  Mark Landsberger

 

 

6-8, 215lbs PF / 4시즌(80-83), 206경기

 

4.7득점, 5.2리바운드, 0.4어시스트, 46.6% 야투율

 

79-80시즌에 시카고 불스 소속으로 뛰고 있던 마크 랜즈버거는 시즌 도중 올리 맥 + 2라운드 픽 2개와 맞트레이드 되어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습니다. 시카고 시절부터 전문 리바운더로 두각을 보였던 그는 레이커스 합류 후 23경기에서 평균 7득점, 7.1리바운드를 올리며 팀의 보드 장악력 강화에 한몫했죠. 그리고 그해 레이커스가 카림 압둘-자바와 슈퍼 루키 매직 존슨을 앞세워 우승을 차지함에 따라, 그는 이적하자마자 행운의 반지를 손에 넣었습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다부진 체격을 지녔던 그는 운동능력도 부족하고 공격력도 보잘 것 없었으나 리바운드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강한 열정과 집념을 자랑했죠. 그는 보드를 사수하기 위해 코트 위에 몸을 날리는 것을 꺼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어였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벤치에서 백업 4번으로 꾸준히 활약했으며, 82년에 레이커스가 한 번 더 우승함에 따라 반지를 하나 더 추가했죠. 그런데 그와 비슷한 스타일의 신예 커트 램비스가 등장해 점차 두각을 보이게 되자, 그는 램비스에게 밀려나 입지가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82-83시즌부터 가비지 멤버로 전락했으며, 이듬해에는 개막한 뒤에도 경기에 나오지 못하다가 방출되고 말았죠. 이후 애틀란타 호크스와 계약하며 시즌을 마친 그는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리그 등지에서 활약하면서 1993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PF 19th : #_43 / #_7  Brian Cook

 

 

6-9, 234lbs PF/C / 5시즌(04-08), 259경기

 

6.6득점, 3.2리바운드, 0.8어시스트, 0.4블록슛, 39.2% 3점슛률(통산 2위)

 

일리노이 대학 출신의 브라이언 쿡은 03 드래프트에서 전체 24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루키 시즌에는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벤치에서 35경기에 출장하는 데 그친 그는 2년차 때부터 3점슛을 공격 옵션에 추가하며 스트레치 빅맨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죠. 그는 05-06시즌에 스타팅으로도 46경기에 출전하며 평균 7.9득점(커리어-하이)을 올려주었고, 중장거리에서 정교한 슈팅 능력을 뽐냈습니다. (42.9%의 3점슛률 / 52.5%의 롱-투(16~23피트 존) 성공률) 오프시즌에는 레이커스와 3년 10.5mil에 연장계약을 체결한 그는 이듬해인 06-07시즌에도 40%의 확률로 3점슛을 꽂아 넣으며 외곽에서 제 몫을 해줬죠.

 

그는 포지션은 4-5번을 오가는 빅맨이었지만 중장거리 슈팅력이 준수해 주로 외곽에서 순도 높은 득점을 올려주었습니다. 다만 그는 기본적인 보드 장악력이나 높이는 다소 부족한 편이었으며, 발이 느려서 종종 수비에서 문제점을 노출하곤 했죠. 한편 그는 07-08시즌 초반 6경기 만에 트레버 아리자 영입 딜에 끼어 올란도 매직으로 이적하면서 레이커스를 떠났습니다. (쿡 + 모리스 에반스 ⇔ 아리자) 이후 그는 여러 팀을 떠돌며 저니맨의 커리어를 걸었으며, 2013년 이후로는 해외를 떠돌며 레바논, 우루과이, 일본 등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현역에서 은퇴한 후 근래에는 3 : 3 농구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죠. 한편 그의 부친 놈 쿡도 70년대에 리그에서 두 시즌 동안 뛴 바 있습니다.

 


 

 

PF 18h : #_24  Kermit Washington

 

 

6-8, 230lbs PF/C / 5시즌(74-78), 214경기

 

6.3득점, 6.7리바운드, 0.9어시스트, 0.7블록슛

 

어메리칸 대학 시절 평균 20득점-20리바운드를 기록한 바 있는 커밋 워싱턴은 73 드래프트에서 전체 5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리그 3년차 때까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며 백업을 전전했고, DNP로 시합에 못 나오는 일도 잦았죠. 그러다가 그는 4년차인 76-77시즌부터는 한층 나아진 기량을 선보이며 백업 4-5번으로 중용되었습니다. 이전까지 3년간 커리어 평균 4득점, 5리바운드 정도에 그쳤던 그는 4년차에 평균 9.7득점, 9.3리바운드로 깜짝 활약을 펼쳐줬으나, 아쉽게도 무릎 부상으로 53경기만에 시즌-아웃되고 말았죠. 그는 득점력은 다소 부족했으나 출중한 리바운드 능력을 자랑했고 터프함과 투지가 철철 넘쳤습니다. 70년대 당시만 해도 리그에는 골밑에서 거친 파울이 난무했고, 이 때문에 종종 선수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일도 잦았죠. 그래서 유사시에는 전면에 나서서 기선을 제압하고 아군의 에이스 플레이어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터프가이들이 팀마다 있었는데, 레이커스에서는 바로 워싱턴이 에이스인 카림 압둘-자바의 보디가드 롤을 자처했습니다.

 

77-78시즌 들어 워싱턴은 평균 11.5득점, 11.2리바운드로 더블-더블을 기록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갑자기 벌어진 큰 사건이 그의 레이커스 커리어를 끝내버리고 말았죠. 12월 9일 대 휴스턴 로케츠 전에서 시합 도중 자바와 워싱턴, 휴스턴의 케빈 커너트 간에 시비가 벌어졌고, 휴스턴의 루디 톰자노비치가 싸움을 말리기 위해 황급히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톰자노비치가 자바를 공격하러 오는 것으로 착각한 워싱턴이 그만 그에게 주먹을 날려버렸고, 무방비 상태에서 불의의 가격을 당한 톰자노비치는 그대로 쓰러졌죠. 코트 위는 그가 흘린 피로 흥건해졌고, 얼굴뼈 골절에 뇌까지 충격을 입으며 자칫 생명이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The Punch”로 불리게 된 이 사건은 당시 코트 위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던 선수 간의 폭력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로 리그에서는 거친 파울과 싸움을 적극적으로 제지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워싱턴에게는 당시로선 역대 최고인 26경기 출장 정지의 중징계가 내려졌습니다. 사건이 벌어지자 워싱턴은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받았고, 심지어는 인종차별적인 협박 편지가 그의 우편으로 쏟아지기도 했죠.

 

이에 레이커스 구단은 실추된 팀의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사건이 벌어진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그를 보스턴 셀틱스로 트레이드해 버렸습니다. (워싱턴 + 돈 체이니 + 1라운드 픽 ⇔ 찰리 스캇) 이후로도 그는 더블-더블급 빅맨으로 견실한 활약을 이어갔고 올스타와 올-디펜시브 팀에 선정되기도 했으나, 고질적인 허리와 무릎 통증으로 서른 살의 나이에 조기 은퇴했죠. 그는 5년 뒤에 다시 코트로 복귀했지만 이내 방출되었으며, 이후로는 레스토랑 경영과 대학팀 코칭 등에 종사했습니다. 그는 각종 자선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자선단체를 운영하면서 저지른 비리가 적발되는 바람에 2018년에 6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입니다.

 


 

 

PF 17th : #_32 / #_35  Bill Bridges

 

 

                

6-6, 228lbs PF/SF / 3시즌(73-75), 154경기

 

8.5득점, 8.9리바운드(통산 16위), 2.4어시스트, 0.8스틸

 

※ 스틸은 73-74시즌부터 집계되어 총 82경기로 평균값을 산출함

 

10시즌 동안 호크스 프랜차이즈(세인트루이스 호크스 & 애틀란타 호크스)에서 정상급 수비수로 활약한 빌 브리지스는 71-72시즌 도중 필라델피아 76ers로 트레이드 되었고, 72-73시즌 초반에는 2 : 2 트레이드(브리지스+멜 카운츠 ⇔ 르로이 엘리스+존 트랩)를 통해 디펜딩 챔피언인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습니다. 그는 신장이 2m도 채 되지 않는 언더사이즈였지만 탄탄한 웨이트와 파워, 근성을 바탕으로 한 리바운드 능력이 일품이었고, 두 차례 디펜시브 팀 경력도 있는 출중한 수비수였죠. 다만 레이커스에 합류했을 때에는 33살의 노장으로 전성기가 다소 지난 상태였습니다. 당시 레이커스에는 주전 4번 자리에 해피 헤어스턴이 있었기에 그는 처음에는 주로 벤치에서 출전했다가, 헤어스턴이 무릎 부상으로 조기에 시즌-아웃되자 주전 롤을 맡으며 평균 9.8득점, 10.9리바운드를 기록하였죠. 그해 레이커스가 2년 연속 결승에 진출함에 따라 그는 생애 첫 파이널 무대를 밟게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레이커스가 1-4로 뉴욕 닉스에게 무릎을 꿇으며 우승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73-74시즌에 헤어스턴이 건강히 복귀하자 다시 벤치로 돌아간 그는 3-4번을 두루 백업하며 평균 8.4득점, 7.7리바운드를 올려주었죠. 한편 레이커스는 윌트 체임벌린, 제리 웨스트의 잇단 은퇴로 리빌딩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결국 35살의 노장인 그도 정리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74-75시즌 초반에 그는 17경기만 뛴 채 방출되고 말았고, 이대로 커리어를 접나 싶었다가 시즌 말미에 간신히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합류했죠. 그리고 워리어스가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릭 배리를 앞세워 깜짝 우승을 차지함에 따라, 커리어 막판에 행운의 반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은퇴 후 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한 그는 말년에 암으로 투병하다가 2015년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PF 16th : #_9  Jim Chones

 

 

6-11, 220lbs PF/C / 2시즌(80-81), 164경기

 

10.7득점, 7.4리바운드, 1.9어시스트, 1.0블록슛(통산 15위), 49.6%야투율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여러 시즌 동안 주전 빅맨으로 활약한 짐 촌스는 79-80시즌을 앞두고 데이브 로비쉬 + 3라운드 픽과 맞트레이드 되어 L.A 레이커스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습니다. 당시 레이커스는 오프시즌에 카림 압둘-자바를 보좌할 파트너 빅맨들을 잇달아 영입했는데, 바로 왕년의 올스타 스펜서 헤이우드와 베테랑 촌스였죠. 촌스는 처음에는 자바의 백업으로 출전했으나, 이내 헤이우드를 밀어내고 주전 4번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이즈 상으로는 센터에 가까웠으나, 신장 대비 빠른 발을 지녔고 중거리 슛도 능숙하게 던질 수 있었기에 4번 포지션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죠. 또한 그는 리바운드와 궂은일에도 능한 견실한 롤 플레이어였으며, 워낙 강골이라 좀처럼 부상도 당하지 않았습니다. (커리어 10시즌 동안 8시즌을 전경기 출장)

 

촌스의 가세로 자바의 골밑 부담을 한결 덜게 된 레이커스는 자바와 슈퍼 루키 매직 존슨을 앞세워 그해 우승까지 차지하였고, 덕분에 촌스도 생애 첫 반지를 손에 넣게 되었죠. 이듬해인 80-81시즌에도 그는 변함없이 주전 4번으로 꾸준히 활약했으나,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모제스 말론의 휴스턴 로케츠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연속 우승에는 실패했습니다. 한편 오프시즌에 레이커스 구단은 워싱턴 불레츠의 제한적 FA인 미치 컵책에게 과감하게 7년 계약을 오퍼했고, 워싱턴은 이 오퍼에 매치하지 않는 대신에 촌스와 브래드 홀랜드, 1라운드 픽과 2라운드 픽 각각 1개씩을 레이커스로부터 보상으로 얻어냈죠. (FA 제도 초기에는 이처럼 타 팀의 FA 영입 시 보상해주는 제도가 있었음) 그는 워싱턴에서 한 시즌을 보내고는 유럽으로 건너가 이탈리아 리그에서 1년 더 뛴 뒤에 커리어를 마쳤습니다. 그는 은퇴 후 친정팀 클리블랜드에서 오랫동안 방송 해설가로 활동 중이며, 현재는 클리블랜드 지역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고 있죠. 한편 그의 딸 칼라 촌스는 WNBA에서 뛴 바 있으며, 현재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프런트로 재임 중입니다.

 


 

 

PF 15th : #_35  Don Ford

 

 

6-9, 215lbs PF/SF / 5시즌(76-80), 368경기

 

7.1득점, 3.8리바운드, 1.4어시스트, 0.7스틸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 대학 출신의 돈 포드는 75 드래프트에서 6라운드 전체 92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레이커스가 1라운드에서 뽑은 두 명의 루키(2픽 : 데이브 마이어스, 8픽 : 주니어 브릿지맨)를 모두 오프시즌에 카림 압둘-자바를 영입하는 카드로 써버렸기에, 낮은 픽으로 지명된 포드에게 로스터에서 살아남는 행운이 주어졌죠. 시즌 초반부터 베테랑 캐지 러셀을 벤치로 밀어내고 깜짝 주전 3번으로 기용된 그는 평균 9.6득점, 4.4리바운드의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는 이듬해인 76-77시즌에는 주전 4번으로 포지션을 옮겼는데, 스탯 자체는 그리 돋보이지 않았지만 팀의 살림꾼으로서 묵묵히 제 몫을 다했죠.

 

3-4번을 두루 오갈 수 있는 멀티 포워드인 그는 체격 대비 빠른 발을 바탕으로 속공에서 트레일러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또한 그는 중거리 슈팅력도 제법 준수했으며, 부지런한 수비수이기도 했죠. 77-78시즌부터는 벤치로 내려간 그는 간혹 주전 포워드들이 부상으로 결장할 때마다 땜빵 스타팅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한편 79-80시즌 도중에 레이커스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서로 1라운드 픽+선수를 맞바꾸는 딜을 했는데, 이때 레이커스에서는 포드와 80 드래프트 1라운드 픽을 내주고 대신 부치 리와 82 드래프트 1라운드 픽을 얻어왔죠. 팀을 옮긴 포드는 공교롭게도 그해 레이커스가 바로 우승하는 바람에 반지를 획득할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레이커스가 포드 딜 때 클리블랜드로부터 얻어온 1라운드 픽은 나중에 82 드래프트에서 1픽으로 둔갑해 제임스 워디를 지명하는 데 쓰였죠. 당시 클리블랜드 구단주였던 테드 스테피언이 벌인 어이없는 픽 장사 때문에 전년도 우승팀인 레이커스가 1픽을 거머쥐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고, 결국 리그에서는 재발 방지를 위해 2년 연속 1라운드픽을 팔 수 없도록 하는 새로운 룰을 도입했습니다. (속칭 “테드 스테피언 룰”) 클리블랜드에서 두 시즌 남짓을 보낸 그는 이후 이탈리아 리그에서 뛴 뒤 선수 생활을 마감했죠. 이후 고향인 산타 바바라로 돌아간 그는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면서 모교인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 대학의 방송 해설자로도 활동했습니다.

 


 

Major Ranking

 

 

PF 14th : #_3  Anthony Davis

 

 

 

뉴올리언즈 펠리컨즈의 간판스타였던 앤써니 데이비스는 FA 시점을 1년여 앞둔 18-19시즌 도중에 뉴올리언즈와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트레이드를 요청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뉴올리언즈 팬들이 큰 실의에 빠진 가운데, 그가 차기 행선지로 L.A 레이커스를 가장 선호한다는 설이 나돌았죠. 그는 시즌 도중에는 트레이드되지 않았으나, 결국 오프시즌에 레이커스로 전격 트레이드되었습니다. 그를 영입하기 위해 레이커스는 팀의 핵심 유망주인 브랜든 잉그램, 론조 볼을 비롯해 조쉬 하트+디안드레 헌터(19년 드래프트 4픽 지명자)+두 개의 미래 1라운드 픽(21년, 23년)을 뉴올리언즈에 내주었죠.

 

레이커스에 합류해 르브론 제임스와 호흡을 맞추게 된 그는 19-20시즌에 주전 4번으로 출전하며 명불허전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강력한 수비수인 그의 가세로 레이커스의 수비 지표는 전년 대비 눈에 띄는 향상을 보였고, (디펜시브 레이팅 109.5→106.3) 팀 성적도 서부지구 1위 자리를 질주했죠. 그는 대 멤피스 그리즐리즈 전(10/29)에서는 40득점 2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2003년 샤킬 오닐 이후 16년 만에 레이커스 선수로서 40득점 20리바운드 이상 기록을 달성하게 되었고, 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전(12/8)에서는 50득점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시즌 평균 26.1득점, 9.3리바운드, 2.3블록슛(리그 3위)을 기록한 그는 올-NBA 퍼스트팀과 올-디펜시브 퍼스트팀에 등극했죠.

 

그는 플레이오프에서는 중장거리슛이 대거 폭발하며 효율적으로 팀 공격에 기여했습니다. 근 몇 년간 그는 16피트 너머에서 던지는 중거리슛의 기복이 심해지고 성공률도 30%대 초반에 머물며 다소 아쉬움을 보였었죠. 올 정규 시즌에도 그런 경향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으나, (성공률 32.2%) 플레이오프에서는 오히려 해당 존에서 55.2%의 고감도 슈팅 감각을 뽐냈습니다. 특히 덴버 너기츠와 맞붙은 서부 컨퍼런스 결승 2차전에서는 2점차로 뒤지던 경기 종료 직전에 짜릿한 버저비터 역전 3점슛을 성공시키기도 했죠. 또한 플레이오프를 진행하며 주전 센터 저베일 맥기의 경기력이 다소 한계를 보이자, 센터로도 많은 시간을 소화하며 골밑을 수호했습니다. 파이널까지 그 활약을 이어간 그는 이적 첫해에 감격의 우승을 누리게 되었죠. 한편 오프시즌에 플레이어 옵션을 써서 FA가 된 그는 레이커스와 5년 190mil의 맥시멈 계약을 체결하며 잔류했습니다.

 


 

 

PF 13th : #_0  Kyle Kuzma

 

 

 

17년 드래프트 데이를 앞두고 L.A 레이커스는 티모페이 모즈코프의 악성 계약을 처리하기 위해 유망주 디안젤로 러셀을 모즈코프와 묶어서 브루클린 네츠로 보내는 딜을 추진했습니다. 결국 드래프트 데이 때 러셀 + 모즈코프 ⇔ 브룩 로페즈 + 17년도 27픽의 스왑 딜이 성사되었고, 레이커스는 이 27픽으로 유타 대학 출신의 카일 쿠즈마를 영입했죠. 서머리그 때부터 두각을 보인 쿠즈마는 론조 볼과 함께 레이커스 서머리그 팀을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챔피언쉽 게임 MVP도 차지했습니다. 루키 시즌 초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11월 한 달 동안에만 평균 18.2득점, 6.7리바운드를 올리며 서부지구 11월의 루키로 뽑히기도 했죠. 루키 시즌에 주전과 벤치를 두루 오가며 스코어러로서 역량을 뽐낸 그는 시즌 평균 16.1득점, 6.3리바운드를 올리며 올-루키 퍼스트 팀에도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내외곽을 가리지 않는 전천후 공격수로 3점슛 뿐만 아니라 페이스-업 돌파, 골밑 훅 슛까지 다양한 공격 루트를 지니고 있으며, 컷-인 플레이도 능하죠. 다만 다소 슛에 기복이 심하며 3점슛을 던지는 횟수에 비해 성공률은 아쉬운 편입니다. 그는 수비에서도 다소 약점이 있는데, 3번을 막기엔 느리고 4번을 막기엔 파워가 부족하죠. 18-19시즌에 그는 주전 4번으로 꾸준히 나오며 평균 18.7득점, 5.5리바운드를 올려주었고, 올스타 주간에 열린 라이징 스타 챌린지에서는 35득점으로 팀 USA를 승리로 이끌며 게임 MVP로도 뽑혔습니다. 한편 19-20시즌을 앞두고 레이커스는 뉴올리언즈 펠리컨즈의 간판스타 앤써니 데이비스를 트레이드로 영입하기 위해 브랜든 잉그램, 론조 볼 등 여러 유망주들을 내놓아야 했는데, 프런트에서 쿠즈마만은 트레이드 카드에 포함시키지 않고 끝까지 지켰죠. 19-20시즌에 데이비스의 가세로 다시 벤치로 돌아간 그는 출장 시간이 줄어들면서 활약도 조금 주춤했지만, (평균 12.8득점, 4.5리바운드) 올란도 버블에서 열린 플레이오프에서는 약점이던 수비에서 열심히 제 몫을 해주며 팀 우승에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루키 계약이 얼마 안 남은 탓에 이번 오프시즌에 종종 트레이드 루머에 오르기도 했으나, 시즌 개막을 앞두고 3년 40mil의 연장계약을 맺으며 팀에 더 오래 남게 되었습니다.

 


 

 

PF 12th : #_14 / #_25  Leroy Ellis

 

 

 

세인트 존스 대학 출신의 르로이 엘리스는 62 드래프트에서 전체 6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레이커스에서 첫 네 시즌 동안 그는 4-5번 포지션을 두루 오가며 핵심 벤치 요원으로 활약했으며, 세 차례나 파이널을 경험했죠. (63년, 65년, 66년 / 모두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배) 그는 메인 포지션은 센터에 가까웠으나 당시 레이커스 로스터에는 진 와일리, 짐 크렙스, 대럴 임호프 등 고만고만한 센터들이 포진하고 있었기에 4번 포지션을 더 많이 소화했습니다. 그는 키에 비해 웨이트가 가벼운 편이어서 빅맨 치고 우수한 기동력을 자랑했으며, 중거리 슛 능력도 제법 준수했죠. 또한 체격은 다소 말랐어도 운동능력이 뛰어나 골밑에서 리바운드를 잘 잡아주었으며, 좀처럼 부상을 잘 당하지 않는 철인이기도 했습니다.

 

64-65시즌에 평균 10.3득점, 8.2리바운드를 기록한 그는 플레이오프에서는 주전 4번으로 기용되어 평균 14.4득점, 12.1리바운드로 활약했고, 특히 그해 파이널에서 레이커스가 유일하게 승리를 가져간 3차전에서는 29득점, 16리바운드로 분전해주었죠. 이듬해인 65-66시즌에 그는 초중반까지 벤치 식스맨으로 활약하다가 후반 이후 붙박이 주전 센터로 자리 잡았으며, 평균 12.2득점, 9.2리바운드를 올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잇따른 파이널 패배에 초조해진 레이커스는 시즌을 마치고 그를 볼티모어 불레츠에 내주는 대신에 64 드래프트 1픽 출신 빅맨인 짐 반스를 데려왔죠.

 

이후 볼티모어, 포틀랜드에서 뛴 그는 71-72시즌을 앞두고 2라운드 픽과 맞트레이드 되어 친정팀 레이커스로 복귀했습니다. 벤치에서 윌트 체임벌린의 백업 롤을 수행한 그는 그해 레이커스가 우승을 차지함에 따라 행운의 반지도 손에 넣었죠. 그는 72-73시즌 초반에 2 : 2 트레이드(엘리스+존 트랩 ⇔ 빌 브리지스+멜 카운츠)를 통해 필라델피아 76ers로 이적해서 네 시즌을 뛰었으며, 말년에는 무릎 부상으로 은퇴했습니다. 이후 그는 타이어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농구공을 손에 놓지 않고 꾸준히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했으며, 2012년에 전립선암으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죠. 한편 그의 아들 르론 엘리스도 91년에 드래프트 지명을 받아 리그에서 세 시즌 동안 뛴 바 있습니다.

 


 

PF 11th : #_30  Julius Randle

 

 

                

켄터키 대학 출신의 줄리어스 랜들은 14 드래프트에서 전체 7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안타깝게도 데뷔 첫 경기인 리그 개막전에서 14분 만에 불의의 정강이뼈 골절상을 입고 시즌-아웃되는 불행을 맛보게 되었죠. 루키 시즌을 허망하게 날린 그는 이듬해인 15-16시즌에 건강한 모습으로 복귀해 주전 4번으로 주로 기용되며 평균 11.3득점에 10.2리바운드로 인상적인 보드 장악력을 선보였습니다. 16-17시즌에 그는 득점력과 코트 비전에서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며 평균 13.2득점, 8.6리바운드를 기록했죠. 그는 탁월한 힘과 저돌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페인트 존을 공략하며, 리바운드 능력도 준수합니다. 또한 그는 빅맨 치고 볼을 잘 다루고 패싱 감각도 있는 편이나, 중장거리 슈팅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죠. 그는 1 : 1 수비 능력은 그럭저럭 괜찮은데 다소 기복이 있으며, 빅맨 치고 세로 수비 능력은 부족합니다.

 

17-18시즌에 그는 시즌 초반 벤치에서 나오다가 중반 이후로 다시 스타팅으로 복귀했는데, 주전으로 출장한 49경기에서 평균 18.6득점, 9.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엘리트 빅맨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죠. 오프시즌에 제한적 FA가 된 그는 레이커스와의 계약 협상이 난항을 겪었고 얼어붙은 이적 시장 때문에 적절한 오퍼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레이커스 구단이 슈퍼스타 르브론 제임스를 FA로 영입하게 되자, 팀의 미래 플랜에서 제외되며 비제한적 FA로 풀리고 말았죠. 이후 뉴올리언즈 펠리컨즈와 2년 18mil(2년차 플레이어 옵션)로 계약한 그는 18-19시즌에 좋은 활약을 보여준 뒤 다시 FA가 되어 뉴욕 닉스와 3년 62.1mil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현재 그는 뉴욕의 주전 4번으로 활약 중입니다.

           


 

 

PF 10th : #_14  Sam Perkins

           

 

 

달라스 매버릭스에서 여러 시즌 동안 주전 파워포워드로 활약한 샘 퍼킨스는 89-90시즌을 마치고 FA가 되자 L.A 레이커스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6년 19mil의 계약을 맺었는데, 당시는 샐러리캡이 12mil 가량이었기에 평균 3mil이 넘는 그의 연봉은 지금으로 따지면 거의 맥시멈에 맞먹는 수준이었죠. 그는 90-91시즌에 기존의 주전 4번이었던 A.C. 그린을 벤치로 밀어내고 평균 13.5득점, 7.4리바운드를 올려주었습니다. 그는 “Big Smooth”라는 별명답게 유연한 포스트 무브를 지녔으며, 중장거리 슈팅 터치도 부드러웠죠. 덕분에 그는 중거리 슛뿐만 아니라 간혹 3점 슛도 던져줄 수 있었으며, 자유투도 정확한 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긴 팔을 바탕으로 한 대인 수비가 일품이었고, 팀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이타적인 팀 플레이어였죠.

 

91 플레이오프에서 그는 정규 시즌 때 보다 높은 평균 17.7득점, 8.3리바운드를 올려주며 소속 팀의 파이널 진출에 한 몫 했습니다. 특히 시카고 불스와 맞붙은 파이널 1차전에서 그는 경기 막판에 짜릿한 결승 3점슛을 터뜨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죠. 하지만 레이커스는 안타깝게도 마이클 조던이 이끈 시카고에게 내리 4연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한편 시즌을 마치고 매직 존슨이 HIV 바이러스 양성 판정 사실을 공표하며 충격적인 은퇴를 선언함에 따라, 레이커스의 전력도 하향 곡선을 그릴 수 밖에 없었죠. 91-92시즌에 퍼킨스는 좀 더 공격 일선으로 나서며 평균 16.5득점, 8.8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시즌 막판에 어깨 부상을 당하며 플레이오프까지 통째로 결장해야 했습니다. 이듬해인 92-93시즌에도 그는 주전 빅맨으로 꾸준한 활약했지만, 리빌딩에 나선 레이커스 구단은 결국 시즌 도중 고액 연봉자인 그를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팔아버리고 말았죠. (퍼킨스 ⇔ 베노잇 벤자민 + 덕 크리스티의 딜) 이후 그는 시애틀에서 3점슛 쏘는 센터로 이름을 날렸으며,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마지막 커리어를 보냈습니다. 은퇴 후 그는 인디애나에서 프런트로 일했으며, 하부 리그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PF 9th : #_20 / #_33  Tom Hawkins

 

 

 

노틀담 대학 출신의 톰 호킨스는 59 드래프트에서 전체 3번으로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 이듬해에 레이커스가 연고지를 L.A로 옮김에 따라, 그는 미네아폴리스 시절 마지막으로 지명한 1라운더가 되었죠. 그는 루키 시즌에 백업으로 3-4번을 두루 오가며 평균 7.9득점, 6.2리바운드를 잡아주었고, 이후로도 주로 백업 포워드로 뛰며 평균 9득점, 6리바운드 가량을 올려주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까지는 센터를 봤지만 키가 6-5에 불과했기에 프로에서는 주로 포워드 롤을 수행해야 했죠. 그는 센터 출신이라 중거리 슛도 없었고 오로지 림 아래에서만 플레이했지만, 대신 사이즈 대비 훌륭한 리바운더였고 인사이드 수비력도 준수했습니다. 다만 사이즈의 한계로 인해 대학 시절 엘리트 빅맨의 포스(대학 때 평균 23득점, 16.7리바운드 기록)는 보여주지 못한 채 롤 플레이어급 활약에 그쳐야만 했죠.

 

61-62시즌을 마치고 미래의 2라운드 픽과 트레이드되어 신시내티 로얄즈로 이적한 그는 레이커스 시절과 비슷한 역할을 맡으며 4시즌을 보냈습니다. 66-67시즌을 앞두고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다시 친정팀 레이커스로 복귀한 그는 시즌 도중에 주전 4번이던 루디 라루소가 이적함에 따라 스타팅으로 자리 잡게 되었죠. 그는 이듬해인 67-68시즌에는 풀-타임 주전 4번으로 뛰며 평균 11.6득점, 5.9리바운드를 기록했고, 68-69시즌까지 현역으로 뛰었습니다. 그는 레이커스에서 마지막으로 뛴 세 시즌 동안에는 49.3%로 당시로선 준수한 야투율을 기록하기도 했죠. 그는 레이커스 시절에 3차례나 파이널 무대를 밟기도 했으나, 아쉽게도 우승은 맛보지 못했습니다. 초창기 선수협의 임원으로서 선수들의 권익 보장을 위해 앞장섰던 그는 은퇴 후에는 방송 해설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MLB의 L.A 다저스에서 프런트로 재직하기도 했죠. 그는 2017년에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PF 8th : #_31  Kurt Rambis

 

 

 

산타 클라라 대학 출신의 커트 램비스는 80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전체 58번으로 뉴욕 닉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개막 로스터에 들지 못하고 방출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그리스 리그에서 뛴 그는 80-81시즌 도중 뉴욕과 10일 계약을 맺었으나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다시 방출되고 말았죠. 이후 81-82시즌을 앞두고 그는 L.A 레이커스와 계약하며 어렵게 리그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주전 4번이었던 미치 컵책이 무릎 부상으로 시즌-아웃되는 바람에 그는 루키 시즌부터 땜빵 스타팅으로 기용되기 시작했으며, 그해 레이커스의 우승으로 반지도 획득할 수 있었죠. 이듬해인 82-83시즌에 그는 풀-타임 주전으로 기용되며 평균 7.5득점, 6.8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이후로도 그는 주전과 벤치를 두루 오가며 팀의 살림꾼으로서 제 몫을 다했습니다.

 

그는 고글 대신에 검은 뿔테 안경을 즐겨 썼고 멋드러진 콧수염까지 길렀는데, 레이커스의 전설적인 캐스터 칙 헌은 그의 외모가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인 클락 켄트를 연상시킨다며 “슈퍼맨”이란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죠. 전형적인 블루-칼라 워커였던 그는 넘치는 투지와 허슬을 바탕으로 팀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고, 덕분에 레이커스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골밑에서 거친 몸싸움도 꺼리지 않으며 리바운드와 수비에 전념했고, 받아먹기 위주로 득점을 올렸기에 필드골 성공률도 높은 편이었죠. 85년에 레이커스가 우승할 때에도 주전 4번으로 일익을 담당한 그는 이후 A.C. 그린이 등장하자 주전 자리를 내주고 벤치로 돌아갔으며, 87년과 88년에도 우승 멤버로 활약했습니다.

 

88-89시즌을 앞두고 FA가 되자 샬럿 호네츠와 계약하며 레이커스를 떠난 그는 이후 여러 팀을 전전하다가 93-94시즌을 앞두고 다시 친정팀 레이커스로 돌아와 벤치에서 뛰었죠. 그는 94-95시즌에 레이커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부임했다가 시즌 도중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잠시 뛰었고, 이후 다시 레이커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돌아갔습니다. 레이커스에서 13년간 어시스턴트 코치로 재임한 그는 98-99시즌 도중 델 해리스 감독이 경질되자 임시 감독을 맡아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죠. 그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 2년간 감독직을 맡기도 했으며, 2014년에는 필 잭슨을 따라 뉴욕 닉스에 합류해 5년간 수석 어시스턴트 코치로 재임했습니다. 현재 그는 레이커스 프런트의 일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PF 7th : #_5  Robert Horry

 

 

 

90년대 초중반 휴스턴 로케츠에서 주전 포워드로 뛰며 백-투-백 우승에 기여한 로버트 오리는 96-97시즌에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되었으나, 경기 도중 대니 에인지 감독과 언쟁을 벌이다가 그의 얼굴에 수건을 던지는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피닉스 구단은 부랴부랴 그를 트레이드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마침 세드릭 세발로스와의 불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L.A 레이커스가 딜에 응했죠. 이에 두 구단은 오리+조 클라인 ⇔ 세발로스+루밀 로빈슨의 딜을 성사시키며 두 문제아를 서로 맞바꿨습니다. 레이커스 합류 후에는 얌전히 뛰며 주전급 포워드로 기용된 그는 오프시즌에 레이커스와 7년 약 35mil의 장기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죠. 그는 그동안은 주로 3번 포지션을 소화해 왔으나, 97-98시즌에 엘든 캠벨을 밀어내고 주전 4번으로 자리를 잡으며 본격적으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휴스턴 시절부터 탄탄한 수비력으로 주목받은 그는 레이커스 합류 후에 공격 비중은 줄이고 수비와 리바운드 쪽에 전념하기 시작했죠. 그는 다소 기복 있는 3점 슈터였으나, 워낙에 강심장이라 플레이오프같은 중요한 무대에서 여러 차례 결정적인 클러치 샷을 날리며, “빅 샷 랍(Big Shot Rob)”이란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다만 타고난 재능과 포텐셜은 충만했으나 노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타입이었던 그는 오프시즌에 관리를 제대로 안 해 무거운 몸 상태로 시즌을 시작했다가 서서히 몸이 풀려 플레이오프 쯤 되면 물 만난 듯 활약하곤 했죠.

 

98-99시즌 이후 그는 주로 벤치에서 출격했으나 플레이오프가 되면 오히려 주전보다 더 많은 출장시간을 부여받으며 밀레니엄 레이커스의 3연패에 혁혁한 공헌을 했습니다. 특히 02 플레이오프에서는 아예 주전 4번인 사마키 워커를 제치고 스타팅으로 중용되었는데, 새크라멘토 킹스와 맞붙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클러치 샷을 터뜨리기도 했죠. 시리즈 전적 1승 2패로 열세이던 4차전 종료 직전에 레이커스가 2점차로 뒤지고 있었는데, 리바운드 다툼 과정에서 킹스의 블라디 디바치가 쳐낸 볼이 공교롭게 3점 라인 밖에 서 있던 그의 손으로 흘러 들어가 짜릿한 버저-비터 역전 3점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시리즈가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이었기에 4차전을 승리로 이끌며 시리즈 타이를 만든 그의 클러치 샷은 시리즈 향방에 키-포인트나 다름없었고, 결국 킹스를 물리치고 파이널에 오른 레이커스는 3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죠. 다만 그는 이듬해인 03 플레이오프 때에는 반대로 극심한 슛팅 난조(3점슛 5.3%)에 시달렸는데,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맞붙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는 결정적인 클러치 샷을 포함해 18개의 3점슛을 모두 놓치며 시리즈 패배의 원흉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오프시즌에 레이커스가 팀-옵션을 실행하지 않아 FA가 된 그는 레이커스와 재계약 협상이 틀어지면서 결국 라이벌인 샌안토니오에 합류했죠. 그는 샌안토니오에서도 클러치 슈터로 이름을 날리며 두 차례 더 우승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3개 팀에서 총 7차례의 우승(휴스턴 2번, 레이커스 3번, 샌안토니오 2번)을 경험했는데, 이처럼 3개 팀 소속으로 두 차례 이상씩 우승을 한 건 역대 유일한 사례죠. 그는 또한 16년의 커리어 동안 내내 플레이오프를 개근하며 총 244경기의 플레이오프 출전 경력(역대 3위)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그는 스펙트럼 스포츠넷에서 레이커스 경기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PF 6th : #_41  Elden Campbell

 

 

 

클렘슨 대학을 졸업한 엘든 캠벨은 90 드래프트에서 전체 27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루키 시즌에는 가비지 멤버에 불과했으나, 91-92시즌에 주전 센터 블라디 디바치가 허리 부상으로 장기 결장한 틈을 타 땜빵 주전으로 기용된 후로 로테이션 플레이어로 자리 잡게 되었죠. 한편 93-94시즌을 앞두고 팀의 터줏대감 A.C. 그린이 FA로 팀을 떠나자, 캠벨은 그 바통을 이어받아 주전 4번으로 기용되며 평균 13득점, 7리바운드 안팎의 성적을 꾸준히 올려주었습니다.

 

그는 센터 포지션에 적합한 사이즈와 플레이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으나, 레이커스에는 디바치, 샤킬 오닐 등 확실한 주전 5번들이 계속 있었기에 주로 4번 롤을 맡았죠. 그는 커리어 초창기엔 큰 키에 제법 날렵한 체형이라 4번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기동력도 괜찮았지만, 이후 점차 살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는 힘과 사이즈를 앞세운 포스트-업 능력으로 골밑에서 득점을 올려주곤 했고, 15피트 안팎에서 턴-어라운드 점퍼도 던질 수 있었죠. 특히 그는 수준급의 샷 블로커였으며, 1 : 1 포스트 수비 능력도 준수했습니다. 다만 타고난 재능과 신체 조건에 비해 근성과 노력이 다소 부족한 편이어서 포텐셜을 제대로 터뜨리지 못했으며, 코트 위에서 롤 플레이어 역할에만 안주하곤 했죠.

 

그는 95-96시즌에 전 경기에 출장해 평균 13.9득점, 7.6리바운드, 2.6블록슛(커리어-하이)을 기록하였으며, 오프시즌에 레이커스와 7년 49mil 규모(샤이닝 보너스 포함)에 달하는 장기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96-97시즌에 새로 합류한 샤킬 오닐과 호흡을 맞춘 그는 평균 14.9득점, 8리바운드를 올려주며 나름대로 제 몫을 다했죠. 하지만 그는 오닐과 활동 반경이 겹치는 문제 때문에 이듬해인 97-98시즌에 로버트 오리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며 입지가 줄어들었습니다. 한편 98-99시즌에 유망주 코비 브라이언트가 급성장하면서 기존의 주전 2번인 에디 존스와 포지션이 겹치는 문제가 불거졌죠. 그러자 레이커스 구단은 포지션 간 발란스를 위해 샬럿 호네츠의 올스타 3번인 글렌 라이스 영입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캠벨 역시 딜에 포함되며 샬럿으로 이적했습니다. (캠벨+존스 ⇔ 라이스+B.J. 암스트롱+J.R. 리드) 이후 샬럿에서 주전급 빅맨으로 활약한 그는 03-04시즌에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소속으로 우승을 맛보기도 했으며, 04-05시즌까지 선수 생활을 하다가 은퇴했습니다.

 


 

PF 5th : #_52  Harold “Happy” Hairston

 

        

                

※ 블락슛과 스틸은 73-74시즌부터 집계되어 총 151경기로 그 값을 산출함

 

69-70시즌 초반에 윌트 체임벌린의 무릎 부상으로 비상이 걸린 레이커스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2년차 유망주 빌 휴이트와 3라운드 픽을 내주는 조건으로 베테랑 포워드 해피 헤어스턴을 영입했습니다. 레이커스에서 곧바로 주전 4번으로 자리 잡은 그는 남은 55경기에서 평균 20.6득점, 12.5리바운드의 깜짝 활약을 펼쳤으며, 이듬해인 70-71시즌에도 평균 18.6득점, 10리바운드를 올리며 공격 쪽에서 두각을 보여주었죠.

 

한편 71-72시즌에 새로 부임한 빌 샤먼 감독은 헤어스턴에게 공격 비중은 다소 줄이는 대신에 리바운드와 수비에 집중하도록 특단의 주문을 내렸고, 이를 성실하게 수행한 그는 평균 13.1득점, 13.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리바운드 머신으로 거듭났습니다. 레이커스는 그와 체임벌린(평균 19.2리바운드)의 강력한 보드 장악력을 앞세워 경기를 지배해 나갔고, 33연승 신기록에 이어 정규 시즌 69승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죠. 플레이오프에서도 레이커스의 질주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파이널에서 2년 전 패배의 수모를 안겼던 뉴욕 닉스와 다시 만나 리벤지에 성공하며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파워포워드로는 다소 언더사이즈(6-7)였으나, 탁월한 운동능력과 넘치는 투지를 바탕으로 자신보다 더 큰 선수들을 상대로 거뜬히 리바운드를 따내곤 했죠. 또한 빅맨임에도 발이 매우 빨라 속공 시에 제일 먼저 앞장서서 달리곤 했으며, 나름 정교한 중거리 슈팅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평균 18득점 이상 올릴 수 있는 득점력이 있었지만, 팀을 위해 득점 가담을 줄이는 대신 철저히 리바운드, 수비 등 궂은일에 전력했죠. 그는 골밑 파트너인 체임벌린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위력적인 리바운드 듀오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막강 보드 장악력은 72년에 레이커스가 우승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듬해인 72-73시즌에도 평균 16.3득점, 13.2리바운드를 올리며 상승세를 이어갔으나, 그만 불의의 무릎 부상으로 28경기 만에 시즌-아웃되고 말았죠. 그는 플레이오프 때 겨우 복귀했지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어서 제대로 뛰지 못했고, 결국 레이커스는 백-투-백 우승에는 실패했습니다. 이후로도 두 시즌 더 팀의 주전 4번으로 활약한 그는 74-75시즌에 대 필라델피아 76ers전에서 한 쿼터에 13개의 수비 리바운드를 잡으며 리그 기록을 세우기도 했죠. 한편 75-76시즌을 앞두고 레이커스 구단은 카림 압둘-자바를 영입하는 등 대대적인 팀 개편에 나섰는데, 그 와중에 노장 헤어스턴은 그만 팀에서 방출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곧바로 은퇴를 선언한 그는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운영해 불우한 청소년들을 도왔으며, 단역 배우로 TV와 영화에 종종 모습을 보이기도 했죠. 그는 2001년에 전립선암으로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PF 4th : #_7  Lamar Odom

 

 

 

L.A 클리퍼스에서 뛰다가 03-04시즌에 마이애미 히트에 합류한 라마 오덤은 04-05시즌을 앞두고 샤킬 오닐 트레이드에 패키지로 포함되어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습니다. 당시 레이커스는 오닐을 보내는 대가로 그와 커론 버틀러, 브라이언 그랜트, 1라운드 픽과 2라운드 픽 각각 1개씩을 마이애미로부터 받아왔죠. 레이커스에서 곧바로 주전 4번 자리를 꿰찬 그는 시즌 평균 15득점에 10리바운드, 4~5개 가량의 어시스트를 꾸준히 기록하며 전방위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토탈 패키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다재다능했는데, 득점과 리바운드는 물론이요 간혹 포인트가드 못지않은 코트 비전과 패싱 센스를 자랑했죠. 그는 탁월한 볼 핸들링 능력을 바탕으로 수비수를 제치고 골밑으로 돌진해 왼손 레이업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또한 다소 기복은 있지만 나름 3점슛도 던져줄 수 있는 긴 슈팅 레인지를 갖추었으며, 포스트-업을 통해 페인트 존에서 영리하게 득점할 수도 있었죠. 그는 보드 장악력도 제법 괜찮은 편이었는데 특히 수비 리바운드를 잘 단속해 주었습니다. 다만 타고난 재능에 비해 멘탈과 근성이 다소 부족했으며, 경기 도중 집중력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죠. 그는 오프시즌에 제대로 몸 관리를 안 해서 시즌 개막 때는 컨디션이 엉망이었다가 시즌을 진행하면서 점차 컨디션을 끌어올리기를 반복하곤 했습니다.

 

한편 07-08시즌 도중에 레이커스가 파우 가솔을 영입하자, 오덤은 그와 나란히 골밑을 지키며 팀의 파이널 진출에 공헌했죠. 이듬해인 08-09시즌, 레이커스가 가솔과 앤드류 바이넘을 주전 4, 5번으로 확정함에 따라 그는 커리어 처음으로 식스맨으로 출전했는데, 시즌 도중 바이넘이 무릎 부상으로 장기 결장했을 때에는 잠시 스타팅으로 복귀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그는 주로 식스맨으로 활약하며 51.4%의 고감도 외곽슛을 뽐냈고, 팀의 우승으로 생애 첫 반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죠. 오프시즌에 FA가 된 그는 마이애미 히트 이적설이 돌기도 했으나 결국 레이커스와 4년 33mil에 재계약하며 잔류했고, 레이커스의 연속 우승에도 식스맨으로서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10-11시즌 초반에 바이넘이 무릎 부상으로 빠졌을 때 스타팅으로 활약하다가 바이넘의 복귀로 다시 벤치로 돌아갔으며, 평균 14.4득점, 8.7리바운드의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죠. 그는 총 82경기 중 35경기에 주전으로 출전해 주전 출장 비율이 절반을 넘지 않은 덕분에 “올해의 식스맨” 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오프시즌에 레이커스가 뉴올리언즈 호네츠의 크리스 폴 영입에 나섰다가 트레이드가 무산되는 해프닝이 일어났었는데, 이때 오덤은 자신이 트레이드 카드로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실망감을 표하며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했죠. 결국 레이커스는 미래의 1라운드 픽을 받는 조건으로 그를 디펜딩 챔피언인 달라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레이커스를 떠난 후 멘탈이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며 경기력이 급하락했고, 결국 2014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고 말았죠. 유명 셀럽인 클로이 카다시안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기도 한 그는 2015년에 코카인 과다 복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메다가 겨우 소생했으며, 이후 약물과 알콜 중독 치료를 받으며 현재는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PF 3rd : #_45  A.C. Green

 

 

 

1,192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NBA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철인” A.C. 그린은 오레건 주립대를 졸업하고 85 드래프트에 참가해 전체 23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루키 시즌에는 커트 램비스의 백업으로 뛰었으나, 2년차인 86-87시즌부터 램비스를 벤치로 밀어내고 주전 4번으로 기용되기 시작했죠. 그는 레이커스가 87년과 88년에 연속 우승을 차지할 때 수비, 박스-아웃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으며 묵묵히 제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소위 “블루-칼라 워커”의 표본과 같은 스타일로, 코트 위에서 늘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자세로 팀 플레이에 집중했죠. 탁월한 대인 수비수였던 그는 기동력이 좋아 3번 포지션도 수비할 수 있었으며, 속공 시에도 종종 트레일러로 가담하곤 했습니다. 또한 종종 공격 리바운드를 따내 쏠쏠히 풋백 득점을 올려주곤 했으며, 15피트 내외에서 중거리 슛도 던져줄 수 있었죠.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던 그는 철저히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는데, 여러 NBA 선수들이 문란하고 개방적인 성생활을 즐겼던 데 반해 그는 선수 생활 내내 순결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철저한 자기 관리 능력은 1,192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으며, 2년차인 86-87시즌에 3경기를 빠진 것 외에 커리어 내내 전 경기에 출장했습니다.

 

그는 88-89시즌에는 평균 13.3득점, 9리바운드를 기록하고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선정이 되었으며, 89-90시즌에는 생애 첫 올스타에도 선발되는 영광을 안았죠. 하지만 90-91시즌에 FA로 샘 퍼킨스가 합류하자 그는 스타팅 자리를 내주고 벤치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는 91-92시즌에는 선발과 벤치를 두루 오가며 평균 13.6득점, 9.3리바운드를 올려주었고, 제임스 워디가 무릎 부상으로 시즌-아웃되자 스타팅 3번 롤을 맡기도 했죠.

 

한편 92-93시즌을 마치고 FA가 된 그는 전년도 준우승팀인 피닉스 선즈에 합류하며 8년간 몸담은 레이커스를 떠났습니다. 이후 그는 피닉스, 달라스를 거쳐 커리어를 이어가다가 99-00시즌을 앞두고 사인 & 트레이드의 형식(그린 ⇔ 션 룩스+2라운드 픽 / 3년의 계약 중 1년만 보장된 조건)으로 친정팀 레이커스에 복귀했죠. 99-00시즌에 전경기에 선발 출장한 그는 레이커스의 우승으로 커리어 세 번째 반지 획득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즌을 마치고 방출되고 말았으며, 이후 마이애미 히트에서 1년을 더 뛴 뒤 선수 생활을 마감했죠. 그는 은퇴 후 자신의 이름을 딴 유소년 재단을 운영하며 사회 복지 사업에 헌신했고, 현재는 인도 리그인 UBA 인디아의 임원으로 재직 중입니다.

 


 

 

PF 2nd : #_35  Rudy LaRusso

 

 

 

아이비 리그의 다트머스 대학 출신인 루디 라루소는 59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10번으로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노장 번 미켈슨의 은퇴로 루키 시즌부터 주전 4번으로 자리 잡았고, 평균 13.7득점, 9.6리바운드의 수준급 활약을 펼쳤죠. 그는 대선배인 미켈슨과는 사이즈와 기량, 터프한 플레이까지 꼭 닮은 안성맞춤 후계자였습니다. 3년차 때인 61-62시즌에 그는 엘진 베일러가 군복무로 48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자 전보다 많은 공격 롤을 부여받으며 평균 17.2득점, 10.4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올스타에도 선발되었죠. 또한 대 세인트루이스 호크스 전에서는 무려 50득점을 퍼부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해 레이커스는 그를 비롯해 베일러, 제리 웨스트, 프랭크 셀비까지 4명의 선수가 올스타에 선발되며 강력한 컨텐더로 떠올랐지만, 파이널에서 보스턴 셀틱스와 7차전 접전 끝에 아쉽게 패하고 말았죠. 이듬해인 62-63시즌에 베일러가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는 공격 롤이 줄어들며 평균 12.3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는 데 그쳤지만, 수비력과 꾸준함을 인정받으며 2년 연속 올스타에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사이즈와 운동능력은 평범한 편이었지만 타고난 근성과 터프함을 앞세워 레이커스의 골밑을 든든히 지켜줬죠. 특히 그의 수비는 매우 거칠고 끈끈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때로는 터프함을 넘어서 더티하기까지 했으므로 매치-업 상대와 시비가 붙어 주먹을 주고받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는 골밑에서 바디 컨택을 즐기며 악착같이 상대를 마크하고 리바운드를 따냈으며, 오펜스 파울 유도 등 지능적인 플레이에도 능했죠. 그는 또한 페인트 존에서 능숙하게 훅 슛을 구사할 수 있었고 빅맨이면서도 깔끔한 슈팅 터치로 종종 중거리에서도 득점을 올려주곤 했습니다. 다만 그는 뛰어난 득점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동료들을 돕는 가자미 역할을 자처하며 수비와 리바운드 등 궂은일에 주로 전념했죠.

 

한편 레이커스는 62년에 이어 63년과 65년에도 잇달아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보스턴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습니다. 65-66시즌에는 베일러가 전 시즌에 당한 무릎 부상의 여파로 슬럼프에 허덕이자, 라루소는 좀 더 공격 일면에 나서며 평균 15.4득점, 8.7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다시금 올스타에도 선발되었죠. 레이커스는 베일러가 시즌 말미에 기량을 회복한 덕에 플레이오프에서 전력을 추스르며 재차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숙적 보스턴에게 또 한 번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계속해서 보스턴과 빌 러셀의 벽을 넘지 못하자 초조해진 레이커스 구단은 66-67시즌 도중에 삼각 딜을 통해 볼티모어 불리츠의 7푸터 멜 카운츠를 영입했고, 딜에 휘말린 라루소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로 트레이드되고 말았죠. 그런데 당시 그는 은퇴 후 삶을 준비하기 위해 친구와 L.A에서 스포츠 에이전트 사업을 막 시작했던 터라 L.A를 떠나 동부로 옮기는 것에 크게 반발했고, 급기야는 디트로이트 팀에 합류하는 것을 전면 거부하였습니다. 리그에서는 그에게 잔여 시즌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지만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고, 결국 디트로이트는 그의 권리를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 팔고 말았죠. (그의 딜 거부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디트로이트는 레이커스로부터 추가로 1라운드 픽을 받았음) 사업장인 L.A에서 가까운 샌프란시스코로 이적하자 마음을 돌린 그는 워리어스에서 평균 20득점 이상의 맹활약을 펼치며 2년 연속 올스타에 선발되었으나, 본인의 사업에 더 집중하기 위해 아직 기량이 펄펄했음에도 68-69시즌을 마치고 전격 은퇴했습니다. 그는 마이클 조던, 폴 아리진, 조지 야들리, 밥 페팃과 함께 은퇴 시즌에 평균 20득점을 넘긴 5명 중 한 명이기도 하죠. 이후 그는 금융 투자 및 스포츠 에이전트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말년에는 파킨슨 병으로 투병하다가 2004년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PF 1st : #_19  Vern Mikkelsen

 

 

 

※ 리바운드는 50-51시즌부터 집계되어 총 631경기, 출전시간 및 PER는 51-52시즌부터 집계되어 총 567경기로 그 값을 산출함

 

미네소타 주에 소재한 햄린(Hamline) 대학 출신의 번 미켈슨은 49 드래프트에서 지역 연고픽을 통해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에 입단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에는 센터를 보았지만 당시 레이커스에는 당대 최고의 센터 조지 마이칸이 있었기에 파워포워드로 포지션을 옮겨야 했죠. 미켈슨의 가세로 마이칸-미켈슨-짐 폴라드로 이어지는 강력한 프론트 코트를 구축하게 된 레이커스는 49-50시즌을 제패하며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이듬해인 50-51시즌, 그는 평균 14.1득점, 10.2리바운드를 올리며 올스타와 올-NBA 세컨드 팀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죠. 하지만 그해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에서 로체스터 로얄즈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리그 3연패에는 실패했습니다.

 

한편 당시 레이커스의 독주를 고깝게 보던 리그 사무국은 마이칸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51-52시즌부터 파울 레인의 폭을 6피트에서 12피트로 크게 늘렸는데, 이 때문에 마이칸의 골밑 활동 반경이 큰 제한을 받게 되었죠. 이에 존 쿤들라 감독은 마이칸을 하이-포스트로 끌어올리고 대신 미켈슨과 폴라드가 골밑으로 활발히 컷-인하는 작전을 썼고, 두 포워드들은 마이칸의 패스를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골밑을 공략했습니다. 이처럼 룰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데 성공한 레이커스는 그해 우승을 탈환하며 다시금 정상의 자리에 올랐죠. 이후로도 미켈슨은 마이칸의 골밑 파트너로서 솔리드한 활약을 펼치며 팀의 3년 연속 우승(52년 ~ 54년)에 혁혁히 공헌했고, 올스타와 올-NBA 세컨드 팀에도 꾸준히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현대 농구에서 이른바 정통 파워포워드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였죠. 그는 피지컬과 힘을 앞세워 골밑에서 리바운드를 사수하고 동료들에게 스크린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그는 탄탄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상대편의 에이스 포워드들을 끈덕지게 따라다니며 전담 마크하곤 했죠. 그는 워낙 플레이 스타일이 거칠고 몸을 사리지 않다 보니 자연히 파울이 많고 퇴장도 자주 당했는데, 커리어 통산 127회의 6반칙 퇴장을 기록하며 이 부문 역대 1위에 올라있습니다. 이는 불과 631경기만에 달성한 기록으로, 5경기 중에 1경기 꼴로 퇴장을 당하는 셈이었죠. (6반칙 퇴장은 그가 2년차인 50-51시즌부터 집계하였음) 그는 본래 센터 출신인지라 페인트 존에서 훅 슛으로 능숙하게 득점을 올려줄 수 있었으며, 프로에서 포워드로 포지션을 옮긴 뒤부터는 차츰 슛을 연마해 중거리에서도 쏠쏠하게 세트 슛을 넣어주곤 했습니다. 또한 그는 골밑에서 늘 치열하게 몸싸움을 하면서도 좀처럼 부상을 당하지 않는 강골이었는데, 10년의 커리어 동안 결장한 경기 수가 7번에 불과했죠.

 

한편 54-55시즌을 앞두고 마이칸이 은퇴하자 그는 공격에서 좀 더 많은 롤을 부여받으며 평균 18.7득점(커리어-하이), 10.2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마이칸의 공백을 여실히 느낀 레이커스는 끝내 우승에 실패하고 말았고, 4~50년대를 주름잡은 무적 신화도 차츰 저물어가게 되었죠. 이에 레이커스 구단은 55-56시즌 도중에 이미 은퇴한 마이칸을 다시 복귀시켜가며 안간힘을 썼지만 성적은 그리 신통치 못했고, 급기야 시즌 도중 미켈슨을 보스턴 셀틱스로 보내는 딜까지 추진했다가 불발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영광을 함께 한 동료들이 은퇴하거나 팀을 옮기는 와중에도 홀로 레이커스에 남아 최고참으로서 팀을 지탱했죠. 한편 58-59시즌에 레이커스는 슈퍼 루키 엘진 베일러의 가세에 힘입어 간만에 파이널까지 진출해서 보스턴 셀틱스와 맞붙었는데, 10년차 노장 미켈슨이 파이널 평균 21득점, 12.3리바운드로 분전했음에도 스윕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파이널에서 커리어 마지막 불꽃을 태운 뒤 은퇴했죠.

 

한편 레이커스 구단은 1년 뒤에 연고지를 미네아폴리스에서 L.A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구단측에서 미켈슨에게 감독직 및 구단 지분의 25%를 주겠다는 파격 대우를 제시했습니다. 당시 마이칸을 위시한 미네아폴리스의 원로들이 모두 연고지 이전을 반대하는 와중에, 구단에서는 그나마 미켈슨이라도 포섭해 인심을 사려는 시도였죠.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면서 다른 미네아폴리스 동지들과의 의리를 지켰습니다. 이후 60년대 후반에 ABA 리그가 출범하자, 그는 미네소타 파이퍼스(Minnesota Pipers)의 단장 겸 감독으로 잠시 재임하기도 했죠. 그는 레이커스에서만 10년을 뛰며 총 4번의 우승을 맛보았고, 6차례 올스타 및 4차례 올-NBA 세컨드 팀을 지냈습니다. 그는 1995년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2013년에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죠. 그의 등번호 #19는 2002년에 마이칸, 폴라드 등 다른 미네아폴리스 시절 레전드의 등번호와 함께 결번보다 한 단계 낮은 아너드 넘버(Honored Numder)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Epilogue

 

이번 PF 랭킹을 보면서 아마도 다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드실 겁니다. 아니 왜 내가 1위라고 생각했던 이 선수가 아예 랭킹에도 없지? 하는... 바로 파우 가솔의 이름이 그 어디에도 없는 것에 대해 의문 가진 분들이 많으실 것 같네요.

 

사실 레이커스의 4번 포지션은 레전드들이 즐비한 타 포지션에 비하면 정말 취약하다 싶을 정도로 최상위권 층의 뎁쓰가 얇기 그지없습니다. 적어도 명전 멤버들이 3명 이상씩은 수위권에 자리잡고 있는 2번, 3번, 5번은 물론이요, 비교적 수위권 뎁쓰가 빈약한 1번마저도 매직 존슨이라는 절대 강자가 존재해서 그나마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는데, 4번 포지션에는 그렇게 딱 떠오르는 탑 랭커가 없죠. 그래서 그간 레이커스 역대 Best 5 멤버를 꼽을 때 보면, 4번 자리에는 따로 4번 포지션의 선수를 뽑지 않고 으레 카림 압둘-자바와 샤킬 오닐, 두 센터를 나란히 Best 5로 꼽곤 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4번 중에 손꼽는다 치면,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두 차례 우승을 이끌고 명예의 전당 입성도 확실해 보이는 파우 가솔이 제격이다 싶죠. 사실 저 역시 이 시리즈를 본격 준비하기 전에는 막연하게 레이커스의 최고 4번은 가솔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었고요. 근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가솔은 레이커스에서 센터로 더 많은 출장시간을 소화했고, 그 격차도 생각보다 컸습니다. 분석 결과 파워포워드로는 6,239분, 센터로는 9,087분을 뛴 것으로 나오며, 센터로 무려 2,848분이나 더 뛰었죠.

 

두 포지션 간의 출장시간 격차가 얼마 안 되면, “가솔은 파워포워드”라는 이미지를 덧씌워서 뭔가 예외라도 적용해 볼 텐데, 거의 한 시즌의 출장시간이나 다름없는 2,848분의 격차를 예외로 둘 여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솔은 레이커스 파워포워드 랭킹이 아닌, 다음편인 센터 랭킹에서 소개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네요.

 

가솔이 이처럼 센터로 더 많이 출장하게 된 건, 동기간의 주전 센터였던 앤드류 바이넘이 허구헌날 부상으로 드러누운 덕이 컸습니다. 그러면서 덩달아 라마 오덤 역시 4번 포지션에서 높은 공헌을 하게 되었고요. 어쩌면 주전 센터가 부상으로 누워도 주전 파포가 이를 충분히 메워줄 수 있고, 식스맨이 주전 4번 자리를 무리 없이 메꿀 수 있다는 게, 당시 레이커스 로스터의 저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근데 이렇게 전체 출장시간이 아니라 선발 출장 횟수로만 따져보면 확실히 파포 쪽이 더 높긴 합니다. 가솔이 선발 출장한 422경기 중에, 주전 파포로 나온 게 258경기이고 주전 센터로 나온 게 164경기죠. 즉 선발 출장으로만 따지면 60% 넘게 4번으로 출장한 셈입니다. 게다가 바이넘이 정규 시즌에는 부상으로 많이 빠졌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그래도 어떻게든 복귀한 경우들이 많기에, 플레이오프까지 따져보면 가솔의 선발 4번 출장 비중은 더욱더 높아지죠.

 

그럼 본 시리즈의 기준으로 따지지 말고 잘 알려진 인식에 따라 가솔을 4번으로 임의 배치를 하면 과연 레이커스 역대 파워포워드 중에 몇 위에 랭크될까? 가정해보는 것도 흥미롭죠. 많은 분들은 그러면 가솔이 단연 1위 아닐까? 라고 생각하실텐데, 의외로 번 미켈슨이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기도 합니다. 누적은 물론이요 우승 횟수, 올스타와 올-NBA 팀 선발 등 여러 경력에서도 미켈슨이 살짝 앞서는 모습이고요. 다만 거의 60년 가까이 차이 나는 두 선수의 시대적 간극도 고려해야 하고, 순수 실력 등으로 따지고 보면 가솔이 결코 꿀릴 것도 없어 보이죠.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굉장히 치열한 랭킹 경쟁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리그 초창기에 흔히들 각 포지션마다 그 포지션의 정체성을 확립한 선구자를 하나씩 꼽곤 하는데, (이를테면 포가는 밥 쿠지, 슈가는 빌 샤먼, 센터는 조지 마이칸, 하는 식으로...) 파워포워드 포지션의 선구자로는 단연 미켈슨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센터의 옆에서 골밑을 지키며 리바운드에 치중하고 파워와 터프함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흔히들 생각하는 그런 정통 파워포워드의 향기가 물씬 넘치는 선수죠. 레이커스가 연고지를 L.A로 옮기는 과정에서 감독직과 함께 구단 지분 공동 소유라는 파격적인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끝까지 미네아폴리스에 대한 의리를 지킨 사나이기도 하고요. (연고지 이전을 둘러싼 미네아폴리스 레전드들의 강력한 반발과 안티 L.A 정서는 나중에는 NBA와 ABA의 대립으로까지 확산이 되고, 미네아폴리스 레전드들이 NBL 시절 포함 프랜차이즈 6회 우승이라는 대업을 세웠음에도 끝내 레이커스에서 영구결번되지 못하는 빌미가 되버리고 말았죠.)

 

파워포워드 포지션은 비록 최상위권 뎁쓰는 타 포지션에 비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나름 개성있는 선수들이 넘쳐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원조 빌 레임비어인 루디 라루소, 철인이자 대마법사급의 금욕주의자였던 A.C 그린, 비운의 천재 라마 오덤, 우승 청부사 로버트 오리, 허슬 넘치는 슈퍼맨 커트 램비스 등등... 그 면면이 화려하죠.

 

다른 포지션과 마찬가지로 파워포워드 역시 포지션 규명이 애매한 케이스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 시리즈의 초반 준비 작업 때, 톰 호킨스의 경우엔 막연히 3번으로 포지션 배치를 했다가 세밀한 분석 결과 나중에 4번으로 포지션을 옮겼고, 르로이 엘리스 역시 처음엔 5번에 배치되었다가 나중에 4번으로 자리를 옮겼죠. 엘리스의 경우 본래 스타일은 센터에 더 가깝지만 팀 내에 고만고만한 센터들이 많다 보니 사정상 4번 롤을 많이 맡게 된 케이스죠. 짐 촌스 역시 본 스타일은 영락없이 센터에 가까우나, 카림 압둘-자바의 파트너로 뛴 덕에 레이커스 한정으로 파포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밖에 커밋 워싱턴이나 트래비스 나이트의 경우도 파포와 센터로 뛴 시간이 거의 엇비슷한데 근소한 차이로 파포로 분류되었죠.

 

현역 중에는 앤써니 데이비스가 단 한 시즌 뛰었음에도 놀라운 포스를 보여주며 단숨에 메이저 랭킹에 진입했는데요, 제아무리 누적에서 좀 뒤진다 해도 평범한 롤 플레이어로 5시즌을 보낸 돈 포드의 밑으로는 결코 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장기 계약도 맺었겠다, 데이비스의 거침 없는 질주는 앞으로도 계속될 듯 싶은데요, 아마도 파우 가솔이 채 이루지 못한(?) 파포 랭킹 1위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보가 아닐까 싶습니다.

 

카일 쿠즈마도 세 시즌 동안 인상적인 활약으로 무난히 메이저 랭킹에 입성했고, 이번에 또 연장계약까지 했으니 별일 없는 한 계속 순위 상승이 기대가 됩니다. 근래에는 윙 역할을 많이 맡으면서 3번으로도 곧잘 출전할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그간 4번으로 워낙 벌어둔 출장시간이 있어서 웬간해서는 포지션 이동까진 없을 것 같네요. 데이비스 만큼의 고속 행진은 아니더라도 나름 차츰 랭킹을 올려서, 수년 내 오리나 램비스 같은 선배들 자리도 충분히 위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랭킹에 없지만 1년 더 잔류하게 된 마키프 모리스, 그리고 새로 합류한 몬트레즈 해럴 역시 향후 활약에 따라 랭킹에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해럴의 경우엔 클리퍼스에선 센터로 자주 출전했기에, 레이커스에서는 과연 4번, 5번 중에 어느 쪽으로 더 많이 기용되느냐를 지켜봐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이것으로 PF편을 마무리를 하고 다음에는 마지막 C편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 게시물은 아스카님에 의해 2020-12-23 11:52:13'NBA-Talk' 게시판으로 부터 이동되었습니다.
20
Comments
2020-12-22 02:24:13

감사합니다~! 저는 왜 가솔은 당연히 센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WR
Updated at 2020-12-22 03:00:30

네 가솔이 멤피스에선 주로 파포로 뛰다가 레이커스 온 뒤로 센터 포지션을 많이 소화하게 되었고, 레이커스에서 마지막 시즌은 거의 풀-타임 센터나 다름없었죠. 이후 타 팀으로 이적해서도 거의 센터로 굳어졌는데, 더이상 4번을 보기 힘들어질 정도로 느려진 발도 한 몫 했죠.

 

근데 레이커스 역대 4번 포지션 중에 워낙 탑급 선수가 없다보니... 미켈슨은 너무 예전 선수고요. 그래서 가솔이 레이커스 역대 최고 4번이다라는 주장과 인식이 꽤 있긴 합니다.

2020-12-22 03:05:27

캠벨 인생 경기가 유잉 상대로 40-10을 기록한 날이었죠. 닉스에게 패하긴 했지만 리그 최고의 수비팀을 상대로 거둔 경기라 본인도 가장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하네요..

WR
2020-12-22 03:42:59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캠벨이 좀 더 치열하게 노력하는 선수였으면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을텐데, 그 점은 아쉽죠. 레이커스 파포 중에는 유달리 이렇게 가진 재능에 비해 노력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름 족적을 남긴 선수들이 더러 눈에 띄네요. 캠벨, 오리, 라마 오덤까지...

2020-12-22 03:38:22

근데 가솔 AD가 센터진으로 가게 되면, 다음 게시글에서는 정말 어마무시한 리스트를 보게 되겠군요. 카림 샤크 윌트 마이칸 갈매기 가솔..

WR
2020-12-22 03:41:19

네 진짜 센터편은 어마무시한 별들의 전쟁입니다.

 

근데 갈매기는 이번 파워포워드 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향후 갈매기의 포지션, 역할 등에 따라 센터 편으로 옮겨갈 수도 있는데, 이왕이면 갈매기는 파워포워드에서 탑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네요.

Updated at 2020-12-22 03:51:19

시간잡고 본격적으로 읽어야 하는 수준의 분량과 퀄리티라 미처 못보고 지나쳤네요. 확실히 말씀하신 포지션 출장시간 기준으로 가솔이 센터로 간다면, AD는 일단 파포로 오는게 맞겠군요.

2020-12-22 08:31:28

오리 부분에서 시리즈 2-1로 킹스가 앞서있었고 오리샷으로 2-2 타이를 이뤘습니다

WR
2020-12-22 09:48:06

앗 네 지적 감사드립니다. 제가 스퍼스 시절 오리샷이랑 기억이 겹쳐서 혼동이 일어났던 것 같네요.

 

맞습니다. 킹스와의 시리즈에서는 오리샷으로 2-2 타이를 이루고, 5차전을 새크가 잡아서 일리미네이션 게임이 되었는데 레이커스가 6, 7차전을 따내며 신승을 거두었었죠.

 

오류가 없도록 나름 퇴고를 몇 번씩 하는데도 이런 실수들이 있네요. 덕분에 바로잡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WR
Updated at 2020-12-28 14:46:36

매니아진에는 추천수가 30개 이상인 글이 기본적으로 수록되게 되어 있는데, 이번 PF편은 그 자격 요건에 한참 못 미치는 글인데도 다른 연재물과 함께 엮여서 운 좋게 매니아진에 함께 수록되었네요.


특별히 신경써주신 운영자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드립니다.


이 글이 잠시 매니아진에 있다가 다시 n톡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매니아진의 추천수 요건 미달인데 글이 미리 옮겨져 있어서 찜찜한 마음도 있었기에 제가 따로 요청을 드렸고 운영진에서 수락해주셨습니다.

 

이미 보실 분들은 거의 보셨고 매니아진에 다른 연재글을 통해 계속 링크되어 있으니 위치는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시리즈 물이라고 몰려서 위치한 게 아니므로 이를 계기로 매년 랭킹이 바뀔 때 마다 그때그때 업데이트를 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20-12-24 09:33:31

재밌는데 길고 이게 이어읽기 같은게 있는 플랫폼이 아니다보니 ㅠ 아래 유명한 선수만 읽게 되네요 3~4등분 해도 충분한 글일 것 같은데

WR
2020-12-24 10:10:56

아 네 분량 문제는 저도 늘 고민되는 사항이긴 합니다. 그래서 몇몇 관심 있는 선수들만 스크롤 내려가며 보신는 분들도 더러 있을 것 같고요. 역사가 길고 랭킹이 많은 프랜차이즈같은 경우엔 나눠서 올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한데, 이번 레이커스 편은 업로드 조차 개막 일정에 쫓겨서 엄두를 못 내었네요.

 

이 시리즈의 주 목적은 랭킹을 따진다기보다 개별 선수들에 대한 정보 제공 목적이 더 커서, 필요하거나 관심있는 선수들 위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글 내에서 위치 이동할 수 있는 기능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쉽기도 하네요.

2020-12-24 14:50:31

그나저나 센터편 언제나오죠 현기증 나는데

WR
2020-12-24 15:57:52

앗 센터편은 어젯밤에 업로드했는데 개막전의 열기에 묻혀버렸네요. 그래서 따로 찾아가실 수 있게 위에 링크 해두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Updated at 2020-12-24 16:03:59

감사합니다. 저녁에 시간도 많으니 찬찬히 읽어봐야겠네요.(일하면서 짬짬히 읽기에는 무서운 분량이라)

2020-12-24 22:48:26

AD바로위에 쿠즈마가 잇는게 재밋네요

2020-12-28 01:52:40

이 글 왜 매니아진이 아니라 NBA토크란으로 옮겨진 건가요?

2020-12-28 05:35:00

이전에 센터편도 그렇고 추천수 30이 안되서 그런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혹여 일종의 특혜로 비춰지지 않을까 운영진분들이 우려하신 듯 합니다. 다들 투표하셔서 이 연재물은 매니아진으로 갔으면 합니다

WR
Updated at 2020-12-28 14:57:40

매니아진이 추천수 30이상의 글이 수록된다는 자격 요건이 있는데, PG편과 SG편 외에는 자격 요건이 안 됨에도 매니아진에 미리 옮겨져 있어 저 스스로도 좀 찜찜하긴 했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규정상 시리즈물이 모두 함께 위치하지 못하는 이상에는 차라리 매니아진의 규정을 준수하는 쪽이 낫겠다 싶어, 제가 따로 추천 30 미만 글들은 다시 n게로 옮겨달라고 운영진에게 요청했습니다. (이게 또 특혜 우려도 있고 해서요.) 그래서 운영진께서 받아주셨는데, n게로 옮길 때 원래 위치가 아니라 다시 최근 날짜로 옮겨지다보니 최근 글이랑 나란히 위치하게 되었네요.

 

그로 인한 반사이득(?)으로, SF편은 n게로 옮겨진 후 추천수 30이 넘어서 다시 매니아진으로 당당하게 옮겨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각 시리즈들은 글 내에 서로 링크가 되어 있어서, 어디든 찾아가 조회할 수 있으니 게시판 위치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센터편을 개막 이후에 올리는 바람에 조회수가 상대적으로 떨어져서 그것 하나는 아쉽긴 하네요. 밤을 새더라도 개막전에 업로드를 다 마쳤어야 했는데... 

 

기본 텍스트를 미리 다 작성해서 붙여넣고 올리는 것임에도 삽입하는 이미지가 많고 글이 길어서 올리는 데 물리적으로 시간이 걸리다보니 (매냐 게시판에서는 바로 올리려다간 계속 사이트가 다운되어서,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가 이미지까지 함께 퍼와서 붙어넣어야 해서...) 그만 신속하게 업로드를 못 했네요.

2020-12-28 15:01:19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빨리 추천수 30 넘어서 매니아진으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정말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