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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레이커스 프랜차이즈 포지션별 랭킹 Top 28 - C편 (ver.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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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1-04 01:37:08

Prologue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마지막 시리즈인 C편으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본래는 시즌 개막 전에 전편을 다 올리려는 계획이었으나, 그만 하루를 넘기고 말았네요.

 

앞서 연재한 PG편, SG편, SF편, PF편은 아래 링크해두었습니다. 본 시리즈의 범례 및 프랜차이즈 간단 역사에 대해서는 PG편에 수록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PG편 : 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211639

 

SG편 : 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211732

 

SF편 : 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211789

 

PF편 : 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nbatalk&wr_id=7802838&sca=&sfl=wr_name%2C1&stx=%ED%97%88%EC%8A%AC+%ED%94%8C%EB%A0%88%EC%9D%B4%EC%96%B4&sop=and&scrap_mode=&gi_mode=&gi_team_home=&gi_team_away=

 

본격적인 랭킹 소개에 앞서 28위 밖 선수들 중에서 나름대로 소개해줄 만한 선수들을 5명을 추려서 "Honorable Mention"이란 타이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28위 밖 선수들에게도 각각 잠정적인 랭킹은 있지만 여기에서 소개하는 순서는 그 순위와는 무관하며, 그냥 시대순으로 정렬했습니다.)

 


 

Honorable Mention

 

 

Walter Dukes

 

                

리그 초창기에 희귀했던 7풋 센터로 리바운드가 발군이었던 월터 듀크스는 2년차 때인 56-57시즌에 트레이드로 합류해 더블-더블 시즌(평균 10.1득점, 11.2리바운드)을 보냈습니다.

 

Jim Brewer

 

 

수비형 빅맨으로 디펜시브 팀 경력도 있는 짐 브루어는 80년대 초반에 두 시즌 동안 카림 압둘-자바의 백업 노릇을 했고, 82년에는 우승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Sean Rooks

 

 

부지런하고 리더쉽이 좋았던 션 룩스는 90년대 후반에 샤킬 오닐의 백업으로 세 시즌 동안 묵묵히 활약했습니다.

 

Robert Sacre

 

 

로버트 사크레는 12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60번으로 지명되어 네 시즌 동안 백업 센터로 뛰었으며, 벤치에서 펼치는 적극적인 리액션 덕에 응원단장으로 불리곤 했습니다.

 

Ivica Zubac

 

 

크로아티아 국적으로 16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32번으로 지명된 이비차 주바치는 제법 가능성을 보여준 18-19시즌 도중에 L.A 클리퍼스로 트레이드 되고 말았습니다.


 

Minor Ranking

 

 

C 28th : #_43  Corie Blount

 

 

6-9, 240lbs C/PF / 4시즌(96-99), 199경기

 

3.6득점, 4.0리바운드, 0.6어시스트, 0.5블록슛, 51.4% 야투율

 

시카고 불스에서 백업 빅맨으로 활약하던 코리 블런트는 94-95시즌을 마치고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L.A 레이커스에 합류했습니다. 레이커스에서도 묵묵히 백업 빅맨 롤을 수행한 그는 96-97시즌 후반에 샤킬 오닐이 무릎 부상으로 두 달 넘게 빠져있는 동안 종종 스타팅 4번으로 기용되기도 했죠. 그는 그 기간에 주전 출전한 16경기에서 평균 8.4득점, 9.1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대 L.A 클리퍼스 전(3/14)에서는 무려 12개의 공격 리바운드를 따내기도 했습니다.

 

4-5번을 두루 볼 수 있는 빅맨인 그는 운동능력이 제법 괜찮은 편이었으며, 특히 리바운드 능력이 뛰어났죠. 그는 스스로 득점하는 능력은 떨어졌지만, 간간이 중거리 슛을 던져줄 수 있었습니다. 다만 파울을 자주 범해 일찍 벤치로 들어가는 일이 잦았고, 이런저런 잔 부상도 많은 편이었죠. 이후로도 그는 레이커스에서 4-5번을 두루 보았으나 출장 시간은 차츰 줄어들었고, 결국 98-99시즌 도중에 방출되었다가 이윽고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합류했습니다. 이후 그는 저니맨으로 이 팀 저 팀을 전전하면서 03-04시즌까지 현역으로 뛰었죠. 그는 현재 모교인 신시내티 대학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C 27th : #_54  Kwame Brown

 

 

6-11, 270lbs C/PF / 3시즌(06-08), 136경기

 

7.4득점, 6.2리바운드, 1.3어시스트, 0.8블록슛, 54.6% 야투율

 

01 드래프트에서 전체 1픽으로 워싱턴 위저즈에 지명되었던 콰미 브라운은 워싱턴에서 4시즌 동안 1픽 다운 모습을 별로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1픽 출신이기에 아직 그에 대한 기대감은 다소 남아있었습니다. 마침 04-05시즌을 마치고 FA가 된 그에게 L.A 레이커스가 접근했고, 그를 영입하기 위해 워싱턴과 사인 & 트레이드를 단행했죠. 레이커스는 워싱턴에 커론 버틀러 쳐키 앳킨스를 보내는 대신에, 브라운과 3년 25mil에 계약하고 라론 프로핏을 덤으로 받았습니다. 05-06시즌에 주전과 벤치를 오가며 시즌 중반까지 다소 범범한 활약(6득점 6리바운드 정도)에 그쳤던 그는 시즌 말에 주전 센터 크리스 밈이 부상으로 빠지자 주전 센터로 발탁된 후로는 제법 쏠쏠한 활약(18경기 평균 12.4득점, 8.6리바운드)을 펼쳐줬죠. 그리고 피닉스 선즈와 7차전까지 가는 공방을 펼친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도 평균 12.9득점, 6.6리바운드를 올리며 그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원체 좋은 사이즈와 운동능력을 타고났으며,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대인 수비 능력이 준수했죠. 다만 집중력과 BQ가 떨어졌고, 자유투는 데뷔 이래 계속 퇴보하여 레이커스 시절에는 채 50%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49.2% 성공률) 그래도 그는 레이커스에서 센터로 자리 잡은 후 어느 정도 반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잠깐 기대를 모으기도 했죠. 하지만 06-07시즌에 그는 발목 부상 등으로 신음하며 시즌 절반을 날리다시피 했고, (41경기 출전) 2년차 애송이 센터인 앤드류 바이넘과도 버겁게 경쟁했습니다.

 

07-08시즌에도 그는 무릎 부상으로 한 달 넘게 빠지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시즌 중반에 파우 가솔 영입 딜에 끼어 멤피스 그리즐리스로 이적했죠. 당시 멤피스가 가솔을 내주고 받아온 게 브라운 등 고만고만한 선수들과 낮은 순번이 유력한 1라운드 픽 2장, 그리고 2라운드 픽 지명자의 권리(당시까지는 검증 안 된 마크 가솔) 정도에 불과했기에 역대급 사기 트레이드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여러 팀을 오가며 저니맨 커리어를 보내다가 12-13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죠. 그는 2017년에는 3 : 3 농구 선수로 다시 코트에 서기도 했습니다.

 


 

C 26th : #_21  Ronny Turiaf

 

 

6-10, 249lbs C/PF / 3시즌(06-08), 173경기

 

5.5득점, 3.5리바운드, 1.2어시스트, 1.1블록슛(통산 11위), 50.4% 야투율

 

프랑스 출신의 로니 튜리아프는 곤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05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37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드래프트 후 팀 닥터에게 신체검사를 받는 도중에 그의 심장에 큰 이상이 있음이 발견되었고, 결국 수술까지 받아야 했죠. 그는 수술 후 예상보다 빨리 회복한 덕에 루키 시즌 말미에 겨우 데뷔해 23경기를 뛰었습니다. 이듬해인 06-07시즌에 팀의 백업 센터로 자리 잡은 그는 15분 남짓의 짧은 출전시간에도 경기당 1개 이상의 블록슛을 해냈죠. 그는 센터로서 그리 큰 사이즈는 아니었지만 탁월한 운동능력과 동물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위력적인 샷 블록킹 능력을 자랑했습니다. 또한 워낙에 투지와 열정으로 똘똘 뭉친 플레이를 보여주었기에 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죠. 그는 뛰어난 득점원은 아니었지만 중거리에서는 제법 좋은 슛 터치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다만 보드 장악력은 다소 떨어졌으며 블락슛에 집착하다 보니 파울 트러블에도 자주 시달렸죠.

 

그는 07-08시즌에 주전 빅맨들의 부상을 틈타 가끔 스타팅으로 기용되기도 했으며, 파이널 무대까지 밟아보았지만 아쉽게도 준우승에 그쳤습니다. 한편 오프시즌에 그가 제한적 FA가 되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4년 17mil의 오퍼를 했고, 레이커스가 이를 매치하지 않음에 따라 그는 워리어스로 이적하게 되었죠. 이후 이 팀 저 팀을 떠돌며 저니맨의 커리어를 보내던 그는 11-12시즌에 마이애미 히트의 멤버로 행운을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습니다. 그는 말년에는 엉덩이 부상으로 고생하다가 2016년에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C 25th : #_35  Rick Roberson

 

 

6-9, 231lbs C/PF / 2시즌(70-71), 139경기

 

7.1득점, 7.0리바운드, 1.0어시스트, 21분 출전

 

신시내티 대학을 졸업한 릭 로버슨은 69 드래프트에서 전체 15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한편 주전 센터인 윌트 체임벌린이 불의의 무릎 부상으로 시즌 초반부터 장기 결장하게 되면서 루키인 그에게 주전 센터라는 중책이 맡겨졌죠. 그는 평균 8.7득점, 9.1리바운드로 분전하며 시즌 말미에 윌트가 다시 복귀할 때까지 골밑을 지켜주었습니다. 다만 체임벌린 복귀 후에는 벤치로 밀려나 출장 시간이 크게 줄어들며 플레이오프에서는 거의 활약하지 못했죠. 그는 6-9의 신장으로 센터 치고는 다소 언더사이즈였으나 타고난 힘과 넘치는 열정을 바탕으로 더 큰 선수들을 상대로 리바운드를 따내고 철벽 수비를 해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여러 센터들도 그를 상대로 득점을 하거나 리바운드 다툼을 하는 것을 버거워할 정도였죠. 또한 센터치고 민첩성과 기동력이 훌륭해서 간혹 가드와 스위치가 되더라도 훌륭하게 상대를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한편 70-71시즌에 체임벌린이 건강하게 풀-시즌을 소화함에 따라 그는 전년 대비 출전시간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며 (27.1분 → 14분) 묵묵히 백업 빅맨 롤을 수행했죠. 그런데 오프 시즌에 창단 1년 차인 신생 구단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로스터 보강을 위해 그의 영입을 노렸고, 결국 레이커스에 다수의 픽을 내주면서 그를 데려갔습니다. (72 드래프트 2라운드 픽, 73드래프트 1라운드 픽과 2라운드 픽) 이후 그는 클리블랜드와 포틀랜드에서 짧은 전성기를 보낸 뒤에 부상으로 고생하다가 75-76시즌을 끝으로 커리어를 마쳤죠. 은퇴 후 특수학교 교사 등으로 활동한 그는 올해 3월에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C 24th : #_14  Stanislav Medvedenko

 

 

6-10, 250lbs C/PF / 6시즌(01-06), 249경기

 

5.4득점, 2.9리바운드, 0.5어시스트, 0.4스틸

 

우크라이나 태생의 스태니슬라브 메드베덴코는 NBA에 드래프트되지 않고 고국 우크라이나 리그에서 뛰다가 00-01시즌을 앞두고 L.A 레이커스와 2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는 루키 시즌에는 거의 출전하지 못했으나 2년 차인 01-02시즌부터 백업 빅맨으로 로테이션에 들었죠. 그는 밀레니엄 레이커스 왕조에 합류한 덕에 2년 연속 행운의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으며, 01-02시즌을 마치고 다시 레이커스와 2년 재계약했습니다. 그는 빅맨이지만 미드-레인지에서 정교한 슈팅 터치를 자랑했으며, 골밑보다는 중거리에서 슛 던지기를 즐겼죠. 다만 슈팅력 외에 빅맨으로서 수비력이나 보드 장악력은 많이 부족한 편이었으며, 3점슛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필 잭슨 감독은 나름 그를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걸맞는 빅맨으로 간주하여 꾸준히 출전 기회를 주었죠.

 

한편 03-04시즌 도중에 칼 말론이 불의의 무릎 부상으로 장기간 결장하게 되자, 그는 말론을 대신해 땜빵 선발 4번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는 1월 한 달 동안에는 평균 14.3득점, 7.3리바운드의 깜짝 활약을 펼쳤으며, 4경기에서 20득점 이상을 넣기도 했죠. 그해 그는 말론 대신 선발 출장한 38경기에서 평균 10.4득점, 6리바운드를 올리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고, 덕분에 오프시즌에 레이커스와 2년 6mil에 다시 재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로는 다소 미미한 활약에 그쳤으며, 급기야 05-06시즌에는 허리디스크로 2경기만 뛰고서 내내 부상자 명단에 있다가 시즌 후반에 방출되었죠. 그는 애틀란타 호크스에서 1년을 더 뛴 뒤 결국 허리 부상으로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고국 우크라이나에서 유소년을 지도하는 코치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정계로 진출해 키예프 시의 시의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C 23th : #_14  Ray Felix

 

                            

6-11, 220lbs C / 3시즌(60-62), 189경기

 

6.4득점, 6.7리바운드, 0.6어시스트, 19.5분 출전

 

흑인 센터 중 역대 최초로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었던 레이 펠릭스는 50년대 중후반에 뉴욕 닉스에서 오랫동안 주전 센터로 활약했으나, 59-60시즌 들어 찰리 타이라에게 밀리며 벤치 플레이어로 전락했습니다. 한편 골밑 보강을 노리던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가 올스타 가드인 딕 가메이커까지 동원해가며 그의 영입에 나섰고, 결국 시즌 도중 두 팀 간에 가메이커+2라운드 픽과 펠릭스+4라운드 픽을 맞교환하는 딜이 일어났죠. 이윽고 팀의 주전 센터인 래리 포우스트마저 트레이드되자 대신 주전으로 발탁된 그는 남은 31경기에서 평균 8.3득점, 8.4리바운드를 올렸으나 파울-트러블로 많은 시간을 뛰지는 못했습니다. (평균 22.5분 출전, 4.3파울) 그는 당시로는 매우 큰 신장(6-11)을 바탕으로 높이를 앞세운 플레이에 능했으며, 강력한 리바운더였죠. 하지만 BQ가 낮고 워낙에 파울을 자주 범하는 바람에 스타팅으로 나와도 정작 20분 안팎으로 출전하는 데 그치곤 했습니다.

 

그는 월터 듀크스와 함께 빌 러셀 등장 이전에 먼저 주목받았던 장신 흑인 센터였으나, 사이즈는 좋았어도 러셀만한 운동능력과 재능은 없었기에 다소 기대치에 못 미쳤다는 평을 받았죠. 한번은 그가 러셀과 매치-업된 경기에서 자꾸 러셀에게 블락슛을 당하자, 나중에는 공을 아무렇게나 휙 던진 뒤 “이건 블락 못 하겠지!”라고 하며 실소를 터뜨린 일화도 있습니다. 60-61시즌에 그는 정규 시즌에 평균 6.6득점, 6.9리바운드의 평범한 활약에 그쳤으나, 플레이오프에서는 평균 10.2득점, 10.4리바운드로 분전하였죠. 그는 보스턴 셀틱스와 맞붙은 62 파이널에서 지긋지긋하던 러셀과 마지막으로 대결을 벌였으며, 시즌을 마치고 방출되자 그대로 은퇴했습니다. 이후 그는 뉴욕시 관할 레크레이션 센터 등에서 일했으며, 1991년에 60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C 22th : #_31  Chris Mihm

 

 

7-0, 265lbs C / 4시즌(05-06, 08-09), 175경기

 

8.3득점, 5.6리바운드, 0.8어시스트, 1.1블록슛(통산 10위)

 

클리블랜드, 보스턴에서 그저 그런 커리어를 보내던 7풋 센터 크리스 밈은 03-04시즌을 마치고 보스턴이 게리 페이튼을 영입하는 딜에 끼어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습니다. (밈+쳐키 앳킨스+쥬메인 존스 ⇔ 페이튼+릭 팍스+1라운드 픽) 당시 레이커스는 앞서 샤킬 오닐을 트레이드로 떠나보낸 터라 새로운 주전 센터의 자리가 그에게로 돌아갔죠. 04-05시즌에 그는 풀-타임 주전 센터로 활약하며 평균 9.8득점, 6.7리바운드, 1.4블록슛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사이즈에 센터로서 괜찮은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고, 종종 중거리에서도 슛을 던져줄 수 있었죠. 수비에서도 그는 샷 블로커로서 어느 정도 존재감을 보여주었으나, 파울 관리를 잘 못하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그는 대체적으로 공수에서 무난한 편이었으나 딱히 특출난 면은 없는 작은 오각형 스타일의 빅맨이었죠.

 

그는 05-06시즌에도 비슷한 활약을 이어갔으나 시즌 말미에 발목 부상으로 고생했으며, 플레이오프에도 뛰지 못했습니다. 또한 06-07시즌을 앞두고 발목 부상이 재발하는 바람에 결국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리고 말았죠. 그는 07-08시즌을 앞두고 레이커스와 다시 2년 5mil에 재계약했으나, 아킬레스 건과 발목 부상 등으로 신음하며 많은 경기를 결장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전력 외로 분류된 그는 08-09시즌 후반에 보호 조항이 잔뜩 걸린 2라운드 픽(55픽 이내 보호)과 맞트레이드 되어 멤피스 그리즐리스로 이적했는데, 사실상 선수 처리나 다름없었죠. 안타깝게도 그가 떠난 해에 레이커스는 파이널에서 올란도 매직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고 말았고, 그는 이후로도 끝내 발목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커리어를 접고 말았습니다.

 


 

C 21th : #_25 / #_41  Mitch Kupchak

 

 

6-9, 230lbs C/PF / 4시즌(82, 84-86), 173경기

 

6.4득점, 3.9리바운드, 0.5어시스트, 50.3% 야투율

 

워싱턴 불레츠의 78년 우승 멤버이자 핵심 식스맨이었던 미치 컵책은 80-81시즌을 마치고 제한적 FA가 되자 L.A 레이커스의 오퍼를 받았습니다. 그를 카림 압둘-자바의 골밑 파트너로 낙점한 레이커스는 당시로선 거액인 7년 5.6mil에 FA 보상으로 짐 촌스+브래드 홀랜드+2개의 픽(82년 2라운드 픽, 83년 1라운드 픽)까지 통 크게 제시했고, 결국 워싱턴은 매치를 포기했죠. 그는 81-82시즌에 주전 4번으로 기용되며 평균 14.3득점, 8.1리바운드의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나, 안타깝게도 26경기만에 무릎 ACL이 파열되며 시즌-아웃되고 말았습니다. 레이커스는 주전 4번을 초반에 부상으로 잃었음에도 분전을 펼치며 그해 우승을 일궈내는 기염을 토했죠. 하지만 그의 무릎 부상은 상태가 심각했고, 결국 그는 이듬해인 82-83시즌까지 통째로 결장해야 했습니다.

 

한창때 그는 센터부터 스몰포워드까지 소화가 가능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였죠. 그는 인사이드 뿐만 아니라 아웃사이드에서도 뛰어난 슈팅력으로 꾸준히 득점을 올릴 수 있었으며, 사이즈 대비 기동력도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무릎 부상은 그의 운동능력을 앗아가 버렸고, 이후 그는 다시는 부상 이전의 폼을 회복하지 못했죠. 부상 이후 주로 자바의 백업으로 기용된 그는 84-85시즌에 팀의 우승으로 인해 세 번째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85-86시즌 후반에 다시 무릎을 다치면서 결국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죠.

 

이후 레이커스의 프런트에 합류한 그는 제리 웨스트 단장 밑에서 착실하게 경영 능력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2002년에 웨스트가 단장직에서 물러나자 그 후임자로 바통을 이어받아 2000년대 후반에 팀을 2연패로 이끄는 수완을 보여주었죠. 03-04시즌 레이커스의 전당포 멤버 결성, 07-08시즌의 파우 가솔 트레이드 영입 등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는 15년 가까이 단장으로서 레이커스를 이끌다가 2017년에 물러났으며, 현재는 샬럿 호네츠의 단장 겸 농구단 사장으로서 팀 운영을 전적으로 도맡고 있습니다.

 


 

C 20th : #_27  Jordan Hill

 

 

6-10, 235lbs C/PF / 4시즌(12-15), 178경기

 

9.9득점, 7.2리바운드, 1.0어시스트, 0.8블락슛, 야투율 49.5%, PER 17.7

 

09 드래프트에서 상위 픽(7픽인 스테판 커리에 이은 8픽)에 뽑혔으나 뉴욕, 휴스턴을 거치며 기대 이하의 활약에 그쳤던 조던 힐은 11-12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 때 데릭 피셔+1라운드 픽과 맞트레이드 되어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습니다. 그는 레이커스 합류 후 무릎이 좋지 않아 정규 시즌에 7경기만 뛰었으나, 플레이오프에서는 백업 빅맨으로 꾸준히 출전해주었죠. 오프시즌에 레이커스와 2년 8mil에 재계약을 체결한 그는 12-13시즌에는 엉덩이 부상으로 수술까지 받으며 29경기를 뛰는 데 그쳤습니다. 지난 2년간 부상으로 신음했던 그는 13-14시즌은 비교적 건강히 소화하며 평균 9.7득점, 7.4리바운드를 올려주었고, 주전으로 나온 32경기에서는 평균 13득점, 8.9리바운드로 분전했죠. 그는 코트 위에서 궂은일을 도맡는 블루-칼라 워커로 리바운드 능력이 돋보였으며, 간간이 중거리 슛이나 훅 슛으로 득점도 올려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집중력과 BQ가 다소 떨어졌으며, 유리 몸이라 부상 결장도 잦은 편이었죠.

 

13-14시즌을 마치고 다시 FA가 되자 레이커스와 다시 2년 18mil(1년 후 팀옵션)에 재계약한 그는 14-15시즌에는 이적한 파우 가솔을 대신해 주전 센터 롤을 맡아 평균 12득점, 7.9리바운드(득점, 리바운드 모두 커리어-하이)를 기록했습니다. 한편 오프시즌에 인디애나 페이서스로부터 로이 히버트를 영입한 레이커스 구단은 힐에게 2년차 팀 옵션을 쓰지 않고 FA로 풀어주었으며, 그는 곧바로 히버트가 떠난 인디애나에 합류했죠. 16-17시즌을 끝으로 리그를 떠난 그는 이후에는 하부리그를 전전했습니다. 한편 그는 17-18시즌까지 리그에서 뛴 바 있는 트레버 부커와 사촌지간이기도 합니다.

 


 

C 19th : #_11  Lew Hitch

 

 

6-8, 200lbs C/PF / 4시즌(52-53, 55-56), 217경기

 

4.0득점, 4.0리바운드, 1.0어시스트, 13.3 PER

 

※ 54-55시즌에 뛴 17경기의 개별 스탯 정보가 득점, 자유투만 정확하게 제공되어 있어, 그 나머지 스탯은 200경기의 값으로만 산출함

 

캔자스 주립대 시절인 1951년에 팀을 NCAA 토너먼트 준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던 루 힛치는 51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19번으로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레이커스는 명실상부 리그 최고의 팀이었으며, 당대 최고의 센터인 조지 마이칸을 보유하고 있었죠. 마이칸의 백업으로 두 시즌을 보낸 그는 레이커스가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함에 따라 두 개의 반지를 덤으로 손에 넣었습니다. 그는 득점력은 그리 신통치 않았으나 리바운드는 제법 잘 잡아주는 수비형 빅맨이었죠.

 

한편 레이커스는 53-54시즌을 앞두고 52 드래프트에서 자신들이 지명했지만 1년 간 아마추어 리그에서 뛰었던 센터 클라이드 로벨렛과 정식 계약했습니다. 이로 인해 힛치는 갑자기 입지를 잃게 되었고, 결국 밀워키 호크스로 현금 트레이드 되었죠. 그는 54-55시즌 도중에 바비 왓슨과 맞트레이드 되어 친정팀인 레이커스로 복귀했으며, 로체스터 로얄스와 맞붙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 3차전에서는 깜짝 23득점을 올리며 팀의 시리즈 승리에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이듬해인 55-56시즌에도 팀의 백업 빅맨으로 활약한 그는 이후 로체스터, 필라델피아를 전전하며 1년 더 뛴 뒤에 현역 생활을 마쳤죠. 은퇴 후에는 고등학교 농구 코치, 경찰관으로 활동한 그는 2012년에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C 18th : #_7  JaVale McGee

 

 

7-0, 270lbs C / 2시즌(19-20), 143경기

 

9.4득점, 6.7리바운드, 0.6어시스트, 1.7블록슛(통산 5위), 62.8% 야투율(통산 1위), 20.8 PER(통산 11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백업 센터로 뛰며 두 개의 반지를 추가한 자베일 맥기는 18-19시즌을 앞두고 FA가 되자 르브론 제임스가 합류한 L.A 레이커스와 1년 미니멈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레이커스는 전년도 주전 센터였던 브룩 로페즈가 밀워키 벅스로 이적하자 마땅한 주전 센터 감이 없었기에 맥기를 새로운 주전 센터로 내정했죠. 7풋의 신장에 놀라운 운동능력까지 겸비한 그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빅맨으로 기대를 모았었으나, 낮은 BQ와 부족한 근성 등으로 포텐셜을 제대로 터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종종 선수들의 실수를 모아 방영하는 “샥틴어풀”이란 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하죠. 그는 골밑에서 받아먹기 덩크 등으로 손쉽게 득점할 수 있으며 높이를 바탕으로 한 리바운드와 블록슛도 발군이나, 수비 이해도가 좀 떨어져 오히려 수비에서 허점을 드러내곤 합니다. 특히 상대편 가드들이 스위치로 공략하면 전혀 대처를 못 하고 헤메곤 하죠.

 

그는 평균 10분도 채 출전하지 못하던 골든스테이트 시절과 달리, 18-19시즌에 레이커스에서는 나름대로 충분한 출전시간(평균 22.3분)을 보장받으며 평균 12득점, 7.5리바운드, 2블록슛(리그 5위), 62.4% 야투율(리그 3위)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대 브루클린 네츠 전(3/22)에서는 커리어-하이인 33득점, 20리바운드에 75%의 야투율(15/20)과 6블록슛을 기록하며 인생 경기를 펼치기도 했죠. 이렇듯 인상적인 활약 덕에 그는 오프시즌에 레이커스와 2년 8.2mil(2년차 플레이어 옵션)에 재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20시즌에도 꾸준히 주전 센터로 출전했으나, 백업인 드와잇 하워드가 워낙 솔리드한 활약을 보여준 탓에 다소 밀리며 전년보다 저조한 성적(평균 6.6득점, 5.7리바운드)에 그쳤죠. 또한 플레이오프에서는 고질적인 수비 문제 때문에 점점 제한적으로 기용되다가 급기야 마이애미 히트와 맞붙은 파이널에서는 단 1분도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만 지켜야 했습니다. 이는 스몰라인업을 주로 쓰는 마이애미 전에 그를 기용했다가는 자칫 수비 라인업에 구멍이 날 것을 우려한 조치였고, 결국 그는 다소 씁쓸하게 커리어 세 번째 우승 경력을 추가했죠. 이번 오프시즌에 4.2mil의 플레이어-옵션을 발동한 그는 트레이드를 통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이적했습니다. (맥기+26년 2라운드 픽 ⇔ 알폰조 맥키니+조던 벨)

 


 

C 17th : #_3  Elmore Smith

 

 

7-0, 250lbs C / 2시즌(74-75), 155경기

 

11.7득점, 11.1리바운드(통산 7위), 1.9어시스트, 3.9블록슛(통산 1위), 총 609 블록슛(통산 8위), 34분 출전(통산 20위)

 

버팔로 브레이브스에서 주전 센터로 활약하던 엘모어 스미스는 73-74시즌을 앞두고 짐 맥밀리언과 맞트레이드 되어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습니다. 당시 레이커스는 ABA 진출을 위해 팀을 떠난 윌트 체임벌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를 영입했죠. 7풋의 신장에 무시무시한 샷 블로커였던 그는 마침 73-74시즌부터 리그에서 블락슛을 정식으로 집계함에 따라 놀라운 기록들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전에서 무려 17개의 블락슛을 기록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한 경기 최다 블락슛 기록으로 남아있죠. (12득점, 16리바운드, 17블록슛으로 트리플-더블도 기록) 그는 그해에만 7차례나 두 자릿 수 블락슛을 해냈으며, 그 중 6번은 트리플-더블(득점-리바운드-블락슛)로 이어졌습니다. 시즌 평균 12.5득점, 11.2리바운드에 무려 4.9블락슛을 기록한 그는 리그 첫 블락슛왕 타이틀도 차지하게 되었죠. 이처럼 그는 강력한 림 프로텍터였으며 리바운드 능력도 발군이었지만, 지나치게 블락슛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샷블로커이긴 했어도 최고의 수비수는 아니었으며, 파울 트러블에도 자주 시달렸죠.

 

그해 밀워키 벅스와 맞붙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 3차전에서 그는 카림 압둘-자바를 상대로 30득점, 1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으나, 레이커스는 결국 1-4로 패하며 탈락했습니다. 이듬해인 74-75시즌, 그는 블락슛 행진이 약간 기세가 꺾이며(평균 2.9개, 리그 2위) 카림 압둘-자바(평균 3.3개)에게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죠. 한편 레이커스는 오프시즌에 리그 최고의 스타인 압둘-자바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는데, 대신 그 댓가로 스미스와 브라이언 윈터스, 2명의 상위픽 신인(데이브 마이어, 주니어 브릿지먼)을 떠나보냈습니다. 이후 그는 다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이적하여 세 시즌 간 활약하다가 무릎 부상으로 다소 이른 은퇴를 했죠. 이후 그는 바비큐 소스를 개발하여 요식업에 뛰어들었으며, 현재 클리블랜드의 홈구장(로켓 모기지 필드하우스)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C 16th : #_12  Gene Wiley

 

 

6-10, 210lbs C / 4시즌(63-66), 300경기

 

4.2득점, 7.3리바운드, 0.8어시스트, 47.1% 야투율

 

위치타 주립대 출신의 진 와일리는 62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15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루키 시즌에는 주로 벤치에서 나오며 평균 3.2득점, 6.7리바운드를 기록한 그는 플레이오프에서는 수비력을 인정받아 주전으로 중용되며 평균 10.8리바운드를 올려주었죠. 그는 공격력은 형편없었지만 림 프로텍팅과 보드 장악력이 일품이었던 전형적인 수비형 센터였습니다. 그는 당시만 해도 블락슛을 아직 정식 기록으로 집계하지 않았던 시절임에도 출중한 샷 블로커로 명성을 떨쳤죠. 그는 수비력 덕분에 자주 스타팅 센터로 기용되곤 하였으나, 공격력에 한계가 워낙 뚜렷하다 보니 출전시간은 20분 안팎 정도로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는 64-65시즌에 평균 5.1득점, 8.6리바운드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으며, 플레이오프에서는 이보다 더 훌륭한 평균 7득점, 14.4리바운드를 올려주었죠. 특히 보스턴 셀틱스와 맞붙은 파이널 3차전에서는 빌 러셀을 상대로 28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분전을 펼치며 팀의 시리즈 유일한 1승을 이끌었습니다. 이듬해인 65-66시즌에 그는 시즌 초중반까지는 붙박이 주전으로 기용되다가 후반부터는 르로이 엘리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어야 했죠. 이후 그는 무릎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66-67시즌을 앞두고 잠정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레이커스에서 뛴 4시즌 동안 3번이나 파이널을 맛보았는데, 모두 빌 러셀의 보스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죠. 한편 그는 NBA를 떠난 후 68년에 새로 출범한 ABA 리그에 도전을 해보았으나, 무릎이 성치 않은 관계로 9경기만 뛰는 데 그쳤습니다. 이후 완전히 코트를 떠난 그는 공예품 회사인 하비 로비 등에서 근무하였습니다.

 


 

C 15th : #_14  Larry Foust

 

                            

6-9, 215lbs C / 3시즌(58-60), 191경기

 

14.2득점, 10.4리바운드(통산 8위), 1.4어시스트, 18.2 PER(통산 19위)

 

※ 59-60시즌에 뛴 47경기의 개별 스탯 정보가 득점, 자유투만 정확하게 제공되어 있어, 그 나머지 스탯은 144경기의 값으로만 산출함

 

포트웨인 피스톤즈의 주전 센터로 무려 6번이나 올스타에 뽑힌 바 있는 래리 포우스트는 56-57시즌을 마치고 월터 듀크스와 맞트레이드 되어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로 이적했습니다. 당시 레이커스는 57 드래프트 1픽을 얻어오기 위해 주전 센터 클라이드 로벨렛을 트레이드 하는 등 팀 재편에 한창이었죠. 듀크스 역시 당시 드문 7풋의 신장을 지닌 전도유망한 빅맨이었으나, 레이커스 구단은 좀 더 경험 있는 베테랑인 포우스트를 선택했습니다. 57-58시즌에 그는 평균 16.8득점, 12.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나름 클래스를 보여주었고, 올스타에도 선발되었죠. 50년대를 대표하는 정통 빅맨 중 한 명이었던 그는 탁월한 보드 장악력과 터프한 수비력을 자랑했으며, 로 포스트에서 꾸준히 득점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신장이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특유의 힘과 근성을 앞세워 페인트 존에서 상대를 제압해가며 매우 거칠게 플레이했는데, 이 때문에 간혹 파울 트러블에 시달리기도 했죠.

 

이듬해인 58-59시즌에 그는 평균 12.3득점, 8.7리바운드로 전년 대비 다소 활약이 주춤했으나, 2년 연속으로 올스타에는 선발되었습니다. 그해 레이커스 구단은 정규 시즌에 33승 39패에 그쳤으나, 슈퍼 루키 엘진 베일러를 앞세워 플레이오프에서 당시 서부 최강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를 업셋하며 파이널에 깜짝 진출했죠. 상대가 워낙 강력한 보스턴 셀틱스였기에 언더독 레이커스는 스윕 패배를 면하지 못했지만, 포우스트는 3차전에서 빌 러셀을 상대로 26득점, 22리바운드를 해내며 분전하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31살의 노장이 된 그는 59-60시즌에도 계속 주전 센터 롤을 수행했으나, 레이커스는 시즌 도중 뉴욕 닉스에서 6-11의 센터 레이 펠릭스를 영입하더니 이윽고 3 : 1 트레이드를 통해 그를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로 보내버렸죠. (포우스트 ⇔ 척 쉐어+닉 맨티스+윌리 메리웨더) 이후 그는 호크스에서 두 시즌 더 백업 빅맨으로 활약하다가 은퇴했습니다. 그는 나름 준수한 커리어를 보냈지만 우승복이 없었는데, 피스톤즈(2회), 레이커스(1회), 호크스(2회)에서 골고루 파이널을 맛보았지만 모두 준우승에 그쳤죠. 은퇴 후 인조잔디 제조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1984년에 심장마비로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직 명예의 전당에는 입성하지 못하고 있는데, 명예의 전당 미입성자 중 최다 올스타 경력(8회)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Major Ranking

 

 

C 14th : #_12  Dwight Howard

 

 

 

올란도 매직 시절 6번의 올스타, 3번의 수비왕에 빛나는 드와이트 하워드는 올란도를 대표하는 간판스타였으나, 11-12시즌을 앞두고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하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11-12시즌을 마치고 플레이어 옵션을 써서 FA가 될 것으로 보였지만, 도리어 옵트-인을 하며 FA를 1년 뒤로 미뤘죠. 그러자 그가 선호하는 행선지로 알려진 L.A 레이커스가 그의 영입에 손을 뻗쳤고, 결국 그는 복잡한 4각 딜을 통해 레이커스로 합류했습니다. (딜의 골자는 레이커스가 앤드류 바이넘을 필라델피아 76ers로 보내고, 올란도가 하워드를 내주는 대신 복수의 픽들과 필라델피아의 유망주(니콜라 부세비치, 모 하클리스) 등을 받는 것임.) 당시 레이커스는 오프시즌에 하워드 뿐만 아니라 피닉스 선즈의 스티브 내쉬까지 영입함으로써 코비 브라이언트-파우 가솔-하워드-내쉬로 이어지는 호화 라인업을 갖추며 강력한 우승 후보로 떠올랐죠.

 

하지만 12-13시즌에 레이커스는 가솔과 내쉬가 부상에 시달리고 선수들 간의 손발도 잘 맞지 않으면서 예상외의 부진에 허덕였습니다. 그해 하워드는 평균 17.1득점, 12.4리바운드(리그 1위), 2.4블록슛(리그 5위), 57.8% 야투율(리그 2위)의 성적을 냈는데, 이는 허리 부상 여파 등으로 인해 올란도 시절에 비하면 다소 감소한 활약이었죠. 한편 평소 자유투가 좋지 못해(그해 49.2%) 자주 파울 작전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던 그는 친정팀인 대 올란도 전(3/12)에서는 39개의 자유투를 시도하며(25개 성공) 이 부문 역대 최다 타이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전 기록도 그가 올란도 시절에 기록한 39개) 한편 레이커스는 우여곡절 끝에 7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스윕패를 당하며 씁쓸하게 시즌을 마감했죠. 그리고 이전까지 5년 연속으로 올-NBA 퍼스트 팀에 올랐던 하워드는 그해에는 아쉽게도 서드 팀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오프시즌에 FA가 된 그에게 레이커스는 5년 118mil의 맥시멈 계약을 오퍼했으나, 그는 오히려 4년 88mil을 제시한 휴스턴 로케츠 행을 선택했죠.

 

이후 완연한 하락세를 보인 그는 휴스턴, 애틀란타, 샬럿 등을 전전했으며, 18-19시즌에는 허리 부상 악화로 9경기밖에 뛰지 못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농구 커리어가 이제 끝나가는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는 19-20시즌에 L.A 레이커스와 비보장 미니멈 계약까지 맺어가며 재기를 위해 발버둥 쳤죠. 그간 자기중심적인 성향으로 궂은일을 멀리해왔던 그는 레이커스에서는 골밑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180도 달라진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그는 전성기 때 기량은 거의 잃어버렸으나 평균 7.5득점, 7.3리바운드를 올리며 레이커스의 벤치를 든든히 지켰고, 비보장이던 계약도 보장 전환되는 데 성공했죠. 또한 그는 마이애미 히트와 맞붙은 이번 파이널에서 6경기 중 5경기를 선발 출전하며 팀의 우승에 일조했고, 생애 첫 반지를 획득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오프시즌에 분명한 재계약 오퍼를 받지 못한 그는 필라델피아 76ers와 1년 미니멈 계약을 맺으며 레이커스를 떠났습니다.

 


 

C 13th : #_11  Bob McAdoo

 

 

 

70년대에 득점왕 세 차례에 시즌 MVP 경력도 있었던 슈퍼스타 밥 맥아두는 잦은 트레이드와 부상을 겪으며 80년대 들어서는 위상이 급격히 추락했습니다. 급기야 그는 80-81시즌에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6경기만 뛰고 방출되는 수모를 겪었으며, 이윽고 뉴저지 네츠에 합류했으나 벤치에서 10경기를 뛰는 데 그쳤죠. 81-82시즌에 그는 네츠와 계약 문제로 분쟁을 벌이며 시즌 개막 후에도 팀에 합류하지 않았고, 이대로 묻히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주전 4번 미치 컵책의 시즌-아웃 무릎 부상으로 비상이 걸린 L.A 레이커스가 네츠에 2라운드 픽 하나와 약간의 현금을 내주고 거의 거저나 다름없이 그를 영입했죠. 그간 리그의 간판스타로서 중압감에 시달려 왔던 그는 레이커스에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순순히 벤치 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해 정규 시즌에 평균 9.3득점을 올리는 데 그쳤던 그는 플레이오프에서는 평균 16.7득점으로 다크호스 노릇을 톡톡히 해주며 레이커스의 우승에 일익을 담당했죠.

 

그는 빅맨임에도 득점의 절반 이상을 퍼리미터 슛으로 해낸 타고난 슈터로, 센터는 골밑에서 득점한다는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4번 포지션에서 외곽슛을 많이 던지던 선수들(돌프 쉐이즈, 톰 하인슨 등)이 더러 있었으나, 아예 센터가 외곽슛 위주로 득점하며 50%를 넘나드는 높은 야투율까지 보여준 건 그가 최초였죠. 다만 그는 탁월한 득점력에 비해 수비력이 다소 부족했으며, 원만치 못한 성격 탓에 트러블-메이커 이미지도 있었습니다. 82-83시즌에 그는 발가락 부상으로 47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평균 21.7분만 뛰고도 15득점을 올리는 높은 생산성을 보여주었고, 이듬해인 83-84시즌에는 리그에서 선발 출전 없이 벤치로만 뛴 선수 중 가장 높은 평균 득점(13.1득점)을 기록하기도 했죠.

 

한편 82년에 우승한 뒤로 2년 연속 파이널에서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에게 발목이 잡혔던 레이커스는 85 파이널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꺾으며 리벤지에 성공했고, 맥아두는 두 번째 반지를 손에 넣었습니다. 전성기 때는 팀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는 에이스라는 비난에 시달렸던 그는 레이커스에서 비록 롤 플레이어 역할이지만 두 번의 우승을 맛보며 예전의 부정적 이미지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었죠. 하지만 향후 젊은 빅맨들을 육성하기 바랐던 레이커스 구단은 84-85시즌을 마치고 팀 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며 그를 FA로 풀어버렸습니다. 이후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한 시즌을 더 뛴 뒤 유럽으로 건너가 이탈리아 리그에서 7년을 더 뛰며 남은 커리어를 마감했죠.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은 그는 팻 라일리 사단의 일원으로 마이애미 히트에서만 20년 넘게 어시스턴트 코치 및 스카우터를 지냈고, 2000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습니다. 한편 그의 먼 친적뻘인 제임스 맥아두도 2010년도에 리그에서 네 시즌을 뛴 바 있습니다.

 


 

C 12th : #_31  Mel Counts

 

 

 

※ 블락슛, 스틸은 73-74시즌부터 집계되어 총 45경기로 평균값을 산출함

 

60년대 중반에 보스턴 왕조에서 백업 빅맨으로 뛰며 두 개의 반지를 획득한 멜 카운츠는 볼티모어 불레츠 소속이던 66-67시즌 도중에 3각 딜을 통해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습니다. 당시 레이커스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주전 4번인 루디 라루소까지 내줄 정도였죠. 그는 7풋의 큰 키에 어울리지 않는 정교한 슈팅 터치를 지녔으며, 주로 골밑보다는 외곽에서 중거리 슛으로 득점을 올리곤 했습니다. 그는 슈팅 레인지 덕분에 그 키로 더러 4번 포지션까지 소화할 수 있었으며, 높이를 바탕으로 한 리바운드 능력도 수준급이었죠. 다만 수비 시에 파울관리 능력이 떨어져 자주 파울 트러블에 시달렸기 때문에, 분당 생산성은 훌륭해도 출장 시간에 다소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외곽슛을 많이 던지다 보니 빅맨 치고 야투율이 저조한 편이었죠.

 

그는 레이커스에서 첫 두 시즌 동안은 대럴 임호프의 백업으로 출전했는데, 67-68시즌에는 경기당 21분 남짓 뛰며 평균 11.7득점, 8.9리바운드의 높은 효율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레이커스는 68-69시즌에 특급 센터 윌트 체임벌린을 영입했는데, 체임벌린이 경기당 45분 이상을 소화했기에 카운츠는 백업 센터보다는 4번으로 출전하는 일이 잦아졌죠. 루키 포워드 빌 휴이트와 주전 4번 경쟁을 벌인 그는 평균 24분 남짓 뛰며 12.4득점, 7.8리바운드를 올려주었습니다. 한편 그해 파이널에서 레이커스는 숙명의 라이벌 보스턴 셀틱스와 맞붙었는데, 7차전에서 보스턴에 내내 끌려다니다가 설상가상으로 체임벌린이 무릎 부상까지 당하고 말았죠. 결국 카운츠가 체임벌린을 대신해 출전했는데, 오히려 레이커스가 흐름을 타고 맹추격에 성공했습니다. 이때 레이커스의 부치 밴 브레다 코프 감독은 체임벌린의 무릎 상태를 확신할 수 없다며 체임벌린의 출전 요청을 뿌리치고 계속 카운츠를 기용했죠. 경기 막판에 레이커스는 1점 차까지 바짝 추격했지만, 끝내 역전하지는 못하며 우승에 실패했습니다.

 

이듬해인 69-70시즌에 체임벌린이 무릎 부상으로 12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자, 카운츠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많은 시간을 출장하며(27.1분/커리어-하이) 평균 12.6득점, 8.4리바운드를 올려주었죠. 오프시즌에 그는 피닉스 선즈의 게일 굿리치와 맞트레이드 되어 레이커스를 떠났다가 2년 후인 72-73시즌에 다시 트레이드를 통해 친정팀 레이커스로 복귀했습니다. (필라델피아 76ers와의 딜 : 카운츠+빌 브리지스 ⇔ 르로이 엘리스+존 트랩) 이후 그는 두 시즌 동안 벤치 빅맨으로 활약하다가 74-75시즌을 앞두고 뉴올리언즈 재즈로 트레이드되었죠. 75-76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그는 이후 부동산 중개업자로 활동했습니다. 한편 UFC 등지에서 이종격투기 선수로 활약한 차엘 소넨이 그의 조카기도 합니다.

 

 


 

 

C 11th : #_14  Darrall Imhoff

 

 

 

60 드래프트에서 전체 3픽으로 뽑혔으나 프로에선 평범한 커리어를 이어가던 수비형 센터 대럴 임호프는 63-64시즌을 마치고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L.A 레이커스로 이적했습니다. 그는 레이커스에서 첫 두 시즌 동안 백업 센터로 활약하면서 2년 연속 파이널 무대를 맛보았으나 연이어 보스턴 셀틱스 앞에 무릎 꿇고 말았죠. 한편 65-66시즌을 마치고 그의 포지션 경쟁자들이 잇달아 팀을 떠나게 되자(진 와일리는 은퇴, 르로이 엘리스는 트레이드), 그는 일약 주전 센터로 발탁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66-67시즌에 그는 평균 10.7득점, 13.3리바운드를 올리며 데뷔 이래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올스타에도 선발되는 영예를 안았죠. 다만 레이커스 팀은 정규 시즌에서 36승으로 부진했으며, 플레이오프에서도 제리 웨스트의 부상 공백으로 인해 1라운드에서 스윕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워낙 피지컬한 플레이를 즐겨서 “도끼(Ax)”라는 살벌한 별명을 지녔던 그는 득점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리바운드 능력과 골밑 수비력만큼은 탁월했죠. 그는 당시 블록슛을 집계하던 시대가 아니었지만 뛰어난 샷블로커로도 정평이 났습니다. 이듬해인 67-68시즌에도 그는 주전 센터로 활약했으나 뛰어난 벤치 빅맨이었던 멜 카운츠에게 출장시간을 다소 내주며 전년보다 성적이 약간 하락했죠. (평균 9.3득점, 10.9리바운드) 레이커스는 그 해에도 파이널에 진출해 지긋지긋한 보스턴과 또 맞붙었으나, 센터 포지션에서 빌 러셀을 상대로 뚜렷한 열세를 보이며 다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결국 센터진을 보강하지 않으면 보스턴을 넘기 어렵다고 판단한 구단은 오프시즌에 슈퍼스타 윌트 체임벌린을 데려오는 특급 딜을 성사시키면서 임호프를 비롯해 아치 클락, 제리 챔버스를 필라델피아 76ers에 넘겨주었죠. 그는 필라델피아에서도 두 시즌 간 솔리드한 활약을 펼쳤으나 이후 무릎 부상으로 커리어가 꺾이고 말았으며, 결국은 무릎 문제로 코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은퇴 후 방송 해설자 및 농구 아카데미 회사의 영업 담당 등을 지낸 그는 2017년에 심장마비로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C 10th : #_32  Jim Krebs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 출신의 짐 크렙스는 57 드래프트에서 전체 3번으로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레이커스의 골밑에는 번 미켈슨, 래리 포우스트라는 올스타급 노장 듀오가 있었기에 그는 주로 벤치에서 백업 빅맨으로서 팀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역할을 맡았죠. 60-61시즌에 그는 팀의 백업 센터이면서도 스타팅 센터인 레이 펠릭스보다 더 많은 출장시간(크렙스: 22.1분, 펠릭스: 19.4분)을 가져가며 골밑을 든든히 지켰습니다.

 

그는 6-8의 그리 크지 않은 신장에 운동능력도 평범했으나, 페인트 존에서 훅 슛으로 줄기차게 득점을 올려줄 수 있었죠. 매우 전투적이고 터프한 수비로 악명을 떨친 그는 때로는 과격한 파울도 서슴지 않아 매치-업 상대와 종종 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빌 러셀이나 밥 페팃처럼 점잖아서 웬만하면 싸움을 꺼리는 선수들과도 주먹다짐을 벌인 전력이 있었습니다. 다만 플레이스타일이 워낙 거칠다 보니 파울-트러블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63 파이널 5차전에서는 한 쿼터에 5개의 파울을 범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죠. 그는 코트 위에서는 난폭한 야수와도 같았지만, 코트 밖에서는 넘치는 유머 감각으로 동료들을 즐겁게 해주던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했습니다.

 

61-62시즌에 평균 10득점, 7.9리바운드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낸 그는 보스턴 셀틱스와 맞붙은 파이널에서는 주전 센터로 기용되어 평균 34분 출전에 10.1리바운드를 잡아내며 분전하기도 했죠. 그는 커리어 동안 세 차례 파이널 무대를 경험했지만, (59년, 62년, 63년) 그때마다 보스턴에게 덜미를 잡혀서 우승을 맛보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는 레이커스에서만 7시즌을 보낸 뒤 63-64시즌을 마치고 다소 이른 은퇴를 했으며, 이후 은행의 여신담당자로 일했죠. 그는 안타깝게도 1965년에 태풍으로 이웃집 지붕을 덮친 나무를 제거해주는 작업을 하다가 큰 나뭇가지에 부딪혀 지붕 아래로 추락하는 바람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C 9th : #_43  Mychal Thompson

 

                    

                            

바하마 출신의 마이클 탐슨은 78 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으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지명을 받아 수년간 솔리드한 커리어를 보내다가, 86-87시즌을 앞두고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둥지를 옮겼습니다. 한편 당시 강력한 컨텐더였던 L.A 레이커스가 시즌 도중에 프론트 코트 강화를 위해 1라운드 픽, 2라운드 픽 각각 하나에 선수 두 명(프랭크 브릭코우스키, 피터 구드먼슨)과 현금까지 내주며 탐슨을 영입했죠. 포틀랜드 시절에는 주로 주전으로 활약했던 그는 레이커스에서는 벤치 롤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카림 압둘-자바의 백업 노릇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는 골밑에서 마무리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정교한 중거리 슛까지 갖춘 전천후 득점원이었으며, 1 : 1 수비 능력도 탁월했죠. 특히 그는 보스턴 셀틱스의 케빈 맥헤일을 기가 막히게 잘 수비하여 소위 “맥헤일 스토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맥헤일은 당대 최고의 포스트-무브를 자랑하는 테크니션이었지만, 미네소타 대학 시절부터 맥헤일과 한솥밥을 먹었던 그가 맥헤일의 공격 패턴을 훤히 꿰뚫고 있었던 덕분이었죠. 87 파이널에서 레이커스가 보스턴과 격돌했을 때 그는 명성에 걸맞게 맥헤일을 효율적으로 잘 막아주며 레이커스가 보스턴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이듬해인 87-88시즌에 주전 센터인 압둘-자바가 뚜렷한 노쇠화를 보이며 커리어 처음으로 출전시간이 30분 미만으로 내려감에 따라, 그만큼 백업 센터인 탐슨의 역할도 늘어났죠. 그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맞붙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평균 20.7득점, 13리바운드의 깜짝 활약을 하기도 했으며, 레이커스가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함에 따라 반지 하나를 더 추가했습니다. 한편 88-89시즌을 끝으로 자바가 은퇴함에 따라 그는 89-90시즌에는 주전 센터로 활약했으나, 이듬해인 90-91시즌에는 36살의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급격한 노쇠화를 보이며 2년차 유망주 블라디 디바치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죠.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선언한 그는 이후 방송계에 몸담아 해설자로 활동했는데, 처음에는 포틀랜드 지역 방송에서 활동하다가 2003년부터는 레이커스로 무대를 옮겨 지금까지 활동 중입니다. 그의 세 아들들도 모두 프로 스포츠 선수인데, 둘째가 바로 그 유명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클레이 탐슨이죠. 첫째인 마이클(Mychel)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잠시 뛴 경력이 있으며, 야구 선수인 셋째 트레이스는 MLB에서 외야수로 활약 중입니다.

 


 

C 8th : #_17  Andrew Bynum

 

 

 

세인트 조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05 드래프트에 고졸로 참가한 앤드류 바이넘은 전체 10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리그 역사상 최연소(17세 244일)로 데뷔한 선수가 되었는데, 이 기록은 06년부터 고졸의 드래프트 참가가 제한되면서 아직까지 경신되지 않고 있죠. 루키 시즌에 그는 가비지 타임에나 나오곤 했지만, 당대 최고의 센터 샤킬 오닐과 덩크를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이는 등 심상치 않은 깡다구를 보여주었습니다. 2년 차인 06-07시즌에 그는 주전 센터 콰미 브라운의 부상 공백을 틈타 제법 출장시간을 얻더니, 07-08시즌에는 브라운을 밀어내고 팀의 주전 센터로 자리 잡았죠. 그는 35경기에서 평균 13.1득점, 10.2리바운드, 2.1블록슛, 야투율 63.6%을 기록하며 레이커스의 초반 상승세를 이끌었으나, 안타깝게도 무릎 부상을 당해 시즌-아웃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레이커스는 멤피스 그리즐리즈에서 파우 가솔을 데려오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며 파이널까지 진출했지만 보스턴 셀틱스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죠. 한편 그는 오프시즌에 4년 58mil의 연장 계약을 체결하며 향후 레이커스의 골밑을 책임질 특급 유망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는 08-09시즌에는 무릎 부상(MCL 파열)로 50경기, 09-10시즌에는 아킬레스 건 부상으로 65경기 출전에 그쳤고 플레이오프에서도 부상 여파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레이커스의 연속 우승으로 두 개의 반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죠.

 

7풋의 신장에 285파운드의 탄탄한 웨이트를 자랑했던 그는 페인트 존에서 주로 활동하는 정통파 센터였습니다. 그는 출중한 사이즈와 힘, 유연성을 바탕으로 포스트에 적극적으로 침투해 주로 훅 슛이나 덩크로 득점을 올리곤 했는데, 이처럼 확률 높은 골밑 공략을 위주로 펼쳤기에 야투율이 높았죠. 또한 수준급의 보드 장악력과 림 프로텍팅 능력을 앞세워 수비에서도 제법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간혹 수비 집중력이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는 타고난 신체 조건과 재능에 비해 멘탈이 많이 부족했던 문제아로, 때로는 과도한 플래그런트 파울을 범해 비난을 사기도 했죠. 그는 08-09시즌에 샬럿 밥캐츠의 제럴드 월러스를 팔꿈치로 가격해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부상을 입힌 바 있고, 11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는 팀이 달라스 매버릭스에게 참패를 당하게 되는 상황에서 골밑으로 돌진하던 J.J. 바레아에게 고의적으로 팔꿈치를 휘둘러 퇴장당하고 4경기 출장 정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자주 부상에 시달리는 인저리 프론이었는데, 특히 무릎 부상으로 고생을 많이 했죠.

 

11-12시즌에 그는 만개한 기량을 선보이며 평균 18.7득점, 11.8리바운드(리그 3위), 1.9블록슛을 기록했고, 올스타 및 올-NBA 세컨드 팀에도 선발되었습니다. 또한 그해 플레이오프 첫 경기에서는 10득점, 13리바운드, 10블록슛(플레이오프 타이 기록)으로 트리플-더블을 기록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의 지속적인 건강 문제 및 멘탈 이슈를 우려한 레이커스 구단은 오프시즌에 복잡한 4각딜을 통해 그를 필라델피아 76ers로 보내는 대신에 올란도 매직으로부터 드와잇 하워드를 데려오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그는 필라델피아 합류 후 다시 심각한 무릎 부상을 당하며 12-13시즌을 통째로 빠져야 했고, 이때 이후로 기량도 많이 상실하고 말았죠. 이후로도 무릎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그는 13-14시즌을 끝으로 코트를 떠났는데, 그때 나이가 불과 26살이었습니다. 그는 잠정적으로 은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가끔 리그에 복귀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합니다.

 


 

C 7th : #_34 / #_89  Clyde Lovellette

 

 

 

캔자스 대학을 52년에 NCAA 타이틀로 이끈 바 있는 클라이드 로벨럿은 52 드래프트에서 전체 9번으로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곧바로 프로로 진출하지 않고 앞서 AAU(아마추어 경기 연맹) 소속의 필립스(Phillips) 66ers 팀에 입단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프로 리그의 위상이 그리 높지 못했기에 드래프트 상위 지명자들 중에서도 더러 프로행 대신에 AAU 진출을 선택하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특히 당대 최강의 아마추어팀이었던 필립스 66ers는 대학 스타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스카우팅을 펼쳤죠. 로벨럿은 52-53시즌에 필립스를 NIBL 리그 우승으로 이끈 뒤, 새로운 도전을 위해 이듬해 프로 리그에도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당시 레이커스는 이미 40년대 말~50년대 초에 4번이나 NBA 우승을 차지한 초강팀이었으며, 당대 최고의 센터 조지 마이칸을 보유하고 있었죠. 53-54시즌에 레이커스에 합류한 로벨럿은 마이칸의 백업으로 고작 17분 정도만 뛰고서 평균 8.2득점, 5.8리바운드의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팀의 우승으로 반지도 손에 넣었습니다. 한편 누적된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마이칸은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선언했고, 그 후계자의 바통은 자연스레 로벨럿에게 돌아가게 되었죠. 54-55시즌에 그는 평균 18.7득점, 11.5리바운드(리그 5위)를 올리며 마이칸의 공백을 훌륭히 메워졌으나, 레이커스는 서부 디비전 파이널에서 포트웨인 피스톤즈에게 무릎을 꿇으며 연속 우승 행진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는 빅맨임에도 부드러운 슈팅 터치와 긴 슛 레인지를 바탕으로 상대 센터를 외곽으로 끌어낼 수 있었으며, 그 덕분에 종종 포워드 포지션까지 능숙히 소화가 가능했죠. 그의 주무기는 독특한 폼의 훅 슛이었는데, 거의 원-핸드 세트슛과 비슷한 매커니즘으로 구사했기에 레인지가 훅 슛 치고 길어서 종종 18피트 너머 중거리에서도 꽂아 넣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신장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타고난 장사같은 힘과 전투적인 근성을 바탕으로 걸출한 보드 장악력을 뽐냈죠. 그는 거친 파울도 서슴지 않는 더티 플레이로 악명을 떨쳤는데, 코트 위에서 좀처럼 폭력을 자제하던 윌트 체임벌린이 결국 참지 못하고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은 일화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는 탁월한 득점력과 높은 생산성에 비해 수비력은 다소 허술한 편이었고, 워낙에 성질이 고약해 상대편은 물론 동료들도 쩔쩔맬 정도였죠.

 

55-56시즌에 그는 평균 21.5득점(리그 4위), 14리바운드(리그 3위)를 기록하며 리그 탑클래스 센터로 자리매김했고, 올스타 및 올-NBA 세컨드 팀에 선발되었습니다. 이듬해인 56-57시즌에는 정통 센터인 월터 듀크스가 팀에 합류함에 따라 종종 4번 포지션도 소화한 그는 평균 20.8득점, 13.5리바운드(리그 5위)를 올리며 2년 연속 올스타에 뽑혔죠. 하지만 그의 화려한 스탯과 별개로 레이커스의 성적은 과거 주축 선수들의 은퇴 및 노쇠화 등으로 인해 추락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에 레이커스 구단은 좀 더 확실한 리빌딩을 위해 57 드래프트 데이 때 팀의 간판스타인 로벨럿을 매물로 내놓은 결단을 내렸죠. 결국 로벨럿은 레이커스가 57년 전체 1픽(핫 로드 헌들리 지명)을 얻는 골자로 벌인 2 : 5의 대형 딜에 끼어 로체스터 로얄스로 이적했습니다. (로벨렛+짐 팩슨 ⇔ 헌들리+밥 버로우+에드 플레밍+몽크 마이니키+아트 스포엘스트라) 이후 로벨럿은 로얄즈를 거쳐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에서 올스타급 커리어를 보냈고, 말년에는 보스턴 셀틱스에 합류해 빌 러셀의 백업으로 뛰며 2개의 반지를 추가하기도 했죠. (역대 최초로 레이커스와 보스턴 소속으로 모두 우승을 맛본 사례) 그는 은퇴 후에 고향인 인디애나 주에서 보안관으로 활동하다가 이후 불우 청소년을 돕는 교육 사업에 헌신했으며, 2016년에 86세를 일기로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1988년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훗날 샤킬 오닐이 달기도 했던 그의 등번호 #_34는 2002년에 마이칸 등 다른 미네아폴리스 시절 레전드들의 번호와 함께 영구 결번에 준하는 “아너드 넘버”로 지정되었습니다.

 


 

C 6th : #_12  Vlade Divac

 

 

 

구 유고슬라비아 (현 세르비아) 출신의 블라디 디바치는 89 드래프트에서 전체 26번으로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레이커스 역사상 최초로 미국 대학을 거치지 않은 외국인 드래프티가 된 그는 향후 NBA에 유럽 선수들이 진출하는 데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한 선구자였죠. 루키 시즌에는 마이클 탐슨의 백업으로 활약하며 평균 8.5득점, 6.2리바운드를 기록한 그는 올-루키 퍼스트 팀에도 선정되었습니다. 그는 2년차인 90-91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팀의 주전 센터로 자리 잡았고, 그해 레이커스가 파이널에 진출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했죠. 그는 시카고 불스와 맞붙은 파이널 시리즈에서 평균 18.2득점, 8.8리바운드의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으나, 레이커스는 아쉽게도 시카고에게 1-4로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는 91-92시즌에는 허리 부상으로 36경기 출전에 그치며 잠시 주춤하기도 했으나, 이후 계속 성장을 거듭하며 90년대 초중반 레이커스의 확고부동한 주전 센터로 자리매김했죠.

 

그는 공격 시에 7-1의 큰 신장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골밑에서 안정적으로 득점을 올려줄 수 있었으며, 정교한 중거리 점프슛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BQ와 센스가 워낙 뛰어나 하이-포스트에서 경기를 조율하며 넓은 코트 비전으로 동료들에게 양질의 패스를 제공해 줄 수 있었죠. 또한 수준급의 보드 장악력과 림 프로텍팅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공격자 파울 유도 등 영리한 수비에 능했습니다. 그는 작은 컨택에도 감쪽같은 헐리우드 액션으로 심판의 눈을 속여가며 공격자 파울을 얻어내는 플라핑의 대가였죠.

 

94-95시즌에 그는 평균 16득점, 10.4리바운드, 4.1어시스트, 2.2블락슛으로 전방위 활약을 펼쳤으며, 3월 4째 주에는 3경기에서 평균 24.3득점, 13.7리바운드를 올리며 “이 주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한편 96 드래프트에서 고졸 유망주 코비 브라이언트를 눈여겨본 제리 웨스트 단장은 샬럿 호네츠가 13픽으로 뽑은 코비를 데려오는 대신에 주전 센터인 디바치를 샬럿에 넘겨주는 트레이드를 단행했죠. (정식 딜은 드래프트 이후에 일어났으나, 실상은 샬럿이 레이커스와 합의하여 일부러 드래프트에서 코비를 지명한 상황이었음) 그는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나서 자신이 겨우 고졸 애송이의 트레이드 상대가 되었다는 것에 몹시 자존심 상해하기도 했습니다. 레이커스는 이어 FA 시장에서 거물급 센터 샤킬 오닐을 영입함으로써 그가 떠난 공백을 완벽히 메웠죠.

 

이후 샬럿과 새크라멘토에서 솔리드한 커리어를 보낸 그는 04-05시즌을 앞두고 레이커스와 2년 10.3mil에 FA 계약을 하며 친정팀으로 컴백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심각한 허리통증에 시달리며 고작 15경기 출전에 그쳤고, 결국 1년 후에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죠. 이후 그는 레이커스에서 해외 스카우트 관련 업무를 담당했으며, 고국 세르비아의 올림픽 위원장 직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2015년부터는 새크라멘토 킹스의 단장으로 부임하여 팀을 운영하다가 19-20시즌 도중에 사임했죠. 그는 2019년에 농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이보다 앞선 2010년에는 FIBA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한 바 있습니다.

 


 

C 5th : #_16  Pau Gasol

 

 

 

스페인 출신의 파우 가솔은 2000년대 초중반에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간판스타로 활약했으나, 06-07시즌 이후 팀 성적이 추락하며 리빌딩 모드에 돌입하게 되자 불만을 품고 트레이드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멤피스 구단은 07-08시즌에 그의 트레이드를 본격 추진하게 되었고, 마침 주전 센터 앤드류 바이넘의 시즌-아웃 부상으로 비상이 걸린 L.A 레이커스가 트레이드 상대로 나섰죠. 결국 레이커스는 시즌 도중 멤피스에 콰미 브라운+자바리스 크리텐튼+애런 맥키+마크 가솔의 지명권+1라운드 픽 2개를 내주고 가솔과 2라운드 픽 하나를 받아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멤피스가 받아오는 카드들이 가솔의 가치에 비해 너무 형편없어 보여서 역대급 불균형 트레이드라고 말들이 많았는데, 그나마 나중에 2라운드 출신인 파우의 동생 마크 가솔이 알짜배기로 판명 나며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춰지게 되었죠. 멤피스에서는 주로 4번으로 뛰었던 가솔은 바이넘이 빠진 5번 자리를 대신 메워주며 후반기 레이커스를 상승세로 이끌었습니다. 덕분에 정규 리그에서 서부 컨퍼런스 1위를 차지한 레이커스는 여세를 몰아 파이널까지 진출했지만, “빅3”가 버티는 보스턴 셀틱스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죠.

 

08-09시즌에 바이넘이 부상에서 복귀함에 따라 가솔은 4번 포지션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시즌 후반에 바이넘이 무릎 부상으로 두 달간 빠지자 32경기를 선발 센터로 뛰었습니다. 시즌 평균 18.9득점, 9.6리바운드에 56.7%의 야투율(리그 5위)을 기록한 그는 올스타에 뽑히고 올-NBA 서드 팀에도 이름을 올렸죠. 또한 2월에는 레이커스를 11승 2패로 이끌고 평균 20-10 이상을 해내며 (20.8득점, 10.9리바운드) 서부지구 “이달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레이커스가 플레이오프에서 올란도 매직을 꺾고 우승을 차지함에 따라, 그는 생애 첫 반지를 손에 넣게 되었죠. 그는 오프시즌에 레이커스와 2년 남은 계약에다가 3년 57mil의 연장 계약을 추가로 체결했습니다. 09-10시즌에 그는 리바운드에서 향상된 모습(평균 9.6개→11.3개)을 보여주며 2년 연속으로 올스타와 올-NBA 서드팀에 선발되었고, 레이커스의 백-투-백 우승에도 혁혁히 공헌했죠. 그는 10-11시즌 초반에는 무릎 부상으로 빠진 바이넘을 대신해 주전 5번으로도 더러 출전했으며, 시즌 평균 18.8득점, 10.2리바운드의 활약으로 3년 연속 올스타로 뽑히고 올-NBA 세컨드 팀에 등극하는 등 커리어 최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달라스 매버릭스에게 덜미가 잡히며 3연패에는 실패하고 말았죠.

 

내외곽 플레이에 모두 능한 전천후 빅맨인 그는 골밑에서 포스트-업 후 확률 높은 훅 슛으로 꾸준히 득점을 올려줄 수 있었고, 정교한 중거리 슈팅력도 갖추었습니다. 그는 BQ가 높아 하이-포스트에서 컨트롤 타워 역할을 영리하게 해내며, 젊었을 적에는 신장 대비 빠른 발과 수준급 운동능력을 자랑했죠. 그는 멤피스 시절에는 리바운드 가담이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레이커스에서는 궂은일에 몰두하며 보드 장악력도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는 림 프로텍팅 능력은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전반적인 수비력은 평범한 편이었으며, 득점원으로서 꾸준했지만 폭발력은 다소 부족했죠. 한편 레이커스는 우승 실패 후 오프시즌에 과감하게 가솔을 트레이드 칩으로 내놓으면서까지 뉴올리언즈 호네츠의 크리스 폴 영입을 추진했지만, 뉴올리언스 구단주 대행을 맡았던 데이빗 스턴 총재의 비토로 끝내 딜은 성사되진 못했습니다. 이후 레이커스는 컨텐더 자리에서 내려오며 전력이 하강 곡선을 그렸고, 가솔 역시 서서히 하락세를 걷게 되었죠.

 

그는 12-13시즌에는 무릎과 발 부상 등으로 49경기에 출전하여 평균 13.7득점 8.6리바운드의 부진을 보였고, 눈에 띄게 느려진 발로 수비에서 약점을 노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3-14시즌에는 아예 풀-타임 센터로 전업한 그는 시즌을 마치고 FA가 되자 시카고 불스와 3년 22mil에 계약하며 레이커스를 떠났죠. 이후 그는 시카고, 샌안토니오 스퍼스 등을 거쳐 18-19시즌까지 리그에서 활약했으며, 현재는 거의 현역에서 은퇴한 상태입니다. 한편 그의 동생 마크 가솔은 멤피스 그리즐리스에서 오랫동안 간판선수로 활약하며 형 못지않은 업적을 남겼고, 지난 시즌까지 토론토 랩터스에서 뛰었다가 이번 시즌에 2년 미니멈 계약으로 레이커스에 합류했습니다.

 


 

C 4th : #_13  Wilt Chamberlain

 

 

 

60년대에 그야말로 최고의 개인 기량을 뽐내며 한 경기 100득점, 시즌 평균 50득점 등 숱한 신화를 쌓은 윌트 체임벌린은 고향팀인 필라델피아 76ers를 67년에 우승으로 이끌고 3년 연속(66년~68년) 시즌 MVP에도 등극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하던 지도자인 알렉스 해넘 감독이 ABA로 떠난데다가 구단주 어브 코슬로프와의 불화로 불만에 찬 그는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트레이드 시켜주지 않으면 ABA로 가버리겠다는 엄포에 필라델피아는 결국 굴복할 수 밖에 없었죠. 그러자 L.A 레이커스가 주전 1번인 아치 클락, 주전 5번인 대럴 임호프, 그리고 2년차 포워드인 제리 챔버스를 내주며 그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년도 준우승팀 레이커스는 근 7년 동안 5번이나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센터 포지션이 취약해 번번이 빌 러셀이 버틴 보스턴의 벽을 넘지 못했는데, 이번에 체임벌린의 영입으로 우승의 마지막 퍼즐을 채운 듯 보였죠.

 

68-69시즌에 그는 평균 20.5득점, 21.1리바운드(리그 1위), 4.5어시스트, 야투율 58.3%(리그 1위)를 기록했는데, 부치 밴 브레다 코프 감독과의 불화 속에 다소 어수선한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는 어떤 경기에선 득점을 몰아넣으며 66득점을 올리기도 하고 어떤 경기에선 경기 내내 3개의 슛만 시도하며 2득점에 그치는 등, 경기력이 들쭉날쭉했죠. 한편 레이커스는 그해 파이널에 진출해 보스턴과 다시 맞붙었는데, 당시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이제 오히려 레이커스가 앞선다는 평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리즈는 7차전 접전까지 갔고, 체임벌린은 러셀의 수비에 틀어막혀 시리즈 평균 11.7득점의 부진에 그쳤죠. 홈에서 치러진 7차전에서 3쿼터까지 15점 뒤지며 힘든 경기를 하던 레이커스는 설상가상으로 체임벌린이 무릎 부상까지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레이커스는 오히려 체임벌린이 빠진 상황에서 상승세를 타며 맹추격을 벌였고, 4쿼터 후반이 되자 체임벌린은 자신을 투입해 줄 것을 요구했죠. 하지만 그의 무릎이 성치 않다고 판단한 데다가 좋은 흐름을 끊기 싫었던 밴 브레다 코프 감독은 끝내 그의 출전을 막았습니다. 결국 제리 웨스트의 트리플-더블 투혼에도 불구하고 보스턴이 2점차 신승을 거둠에 따라 레이커스는 다시금 우승 문턱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죠. 이날 경기 후 러셀은 체임벌린의 부상 사실을 잘 모르고 그가 끝까지 벤치를 지킨 것을 비난했는데, 이 때문에 오해가 불거져 절친이던 두 사람이 20년 넘게 의절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7-1에 275파운드의 엄청난 체격에다가 거의 초인급의 어마어마한 운동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죠. 특히 그는 리바운드에 대한 열정과 집착이 대단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역대 최고 수준의 보드 장악력을 커리어 내내 유지했습니다. 힘과 높이, 기술을 두루 갖춘 그의 포스트 공격력은 워낙 위력적이어서 리그에서는 그를 견제하기 위해 페인트 존의 폭을 12피트에서 18피트로 늘리기까지 했으나, 그는 고급 기술인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 점퍼를 구사하며 맞대응했죠. 또 당시는 아직 블락슛을 공식 기록으로 카운트하지 않았는데, 그는 워낙 압도적인 높이를 바탕으로 경기 당 평균 7~8개 이상의 비공인 블락슛을 해댔다고 합니다. 그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시절에는 다소 독불장군처럼 자신의 득점만 신경 쓰다가 필라델피아 76ers 시절에는 패스에 눈을 뜨며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거듭났고 센터로서 리그 어시스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죠. 다만 자유투 하나만큼은 영 젬병이었으며, (통산 자유투율 51.1%)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성격이라 늘 코치들과 늘 충돌을 일삼았습니다. 또 개인 스탯에 대한 집착은 강했으나 팀을 승리로 이끄는 열정은 다소 부족했고, 이 때문에 안팎의 비난을 자주 듣기도 했죠.

 

이듬해인 69-70시즌, 체임벌린은 9경기만에 무릎 슬개건이 완전 파열되는 부상을 입어 4개월 이상 결장하고 말았는데, 이는 그가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당한 큰 부상이었으며 이 때문에 그의 괴물같던 운동능력을 약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정규 시즌 3경기를 남겨두고 다시 컴백한 그는 레이커스를 재차 파이널까지 이끌며 윌리스 리드의 뉴욕 닉스와 맞붙게 되었죠. 그는 6차전에 무려 45득점, 2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승부를 최종 7차전까지 끌고 갔지만, 7차전에서 보여준 리드의 역대급 부상 투혼 앞에 또다시 쓰라린 패배를 맛보고 말았습니다. 70-71시즌에 그는 웨스트, 베일러 등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신음하는 와중에도 레이커스를 플레이오프 2라운드까지 올려 밀워키 벅스의 신성 카림 압둘-자바와 맞대결을 펼쳤는데, 자신보다 11살 어린 팔팔한 자바를 상대로 거의 대등한 승부를 펼쳤지만 팀의 1-4 시리즈 패배를 막지는 못했죠.

 

이듬해인 71-72시즌에 레이커스에는 신임 감독으로 ABA의 유타 스타스를 전년도 우승으로 이끈 빌 샤먼이 부임했는데, 그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체임벌린마저 굴복시키며 팀 분위기를 완전히 다잡았습니다. 그는 체임벌린에게 득점 가담을 줄이고 마치 빌 러셀처럼 철저하게 수비 위주로 플레이할 것을 요구했죠. 이에 부응한 그는 시즌 평균 14.8득점, 19.2리바운드(리그 1위), 야투율 64.9%(리그 1위)를 기록했고, 전성기 러셀 못지않은 수비 퍼포먼스를 펼쳐줬습니다. 정규 시즌에 69승에 33연승 신기록까지 세운 레이커스는 파이널에서 뉴욕과 리벤지 매치를 가졌죠. 하지만 윌리스 리드가 부상으로 빠진 뉴욕 골밑은 도무지 체임벌린을 저지할 길이 없었습니다.

 

한편 레이커스가 2-1로 앞선 채 맞이한 4차전에서 체임벌린은 경기 막판 5파울에 몰리게 되었는데, 커리어 내내 단 한 번도 6반칙 퇴장을 당한 적이 없던 그는 파울-아웃에 극도로 민감했기에 그전에는 혹시라도 5파울에 걸리면 소극적인 플레이로 일관하곤 했죠. 하지만 그는 코치진의 교체 제안도 뿌리쳐가며 파울-아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수비했으며, 심지어 연장전에서는 제리 루카스를 두 차례나 블락하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는 그간 고집불통 체임벌린에게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이었죠. 심지어 그는 4차전에서 손에 골절상을 입었음에도 5차전에 출전을 감행했는데, 손에 보호대를 끼고 출전하는 그에게 팀 닥터가 진통제 주사라도 맞기를 권했으나, 주사 때문에 손끝 감각이 둔해질까봐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는 부상 입은 몸으로도 24득점 29리바운드라는 초인적인 활약을 펼치며 끝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시리즈 평균 19.4득점, 23.2리바운드에 빛나는 부상 투혼까지 더해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죠. 이듬해인 72-73시즌에 평균 13.2득점, 18.6리바운드(리그 1위), 야투율 72.7%(리그 1위이자 역대 단일시즌 1위)을 기록한 그는 파이널에서 다시 뉴욕과 3년 연속 맞붙었지만 이번에는 건강한 리드 앞에 1-4로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시즌을 마치고 ABA 진출을 선언한 그는 샌디에이고 콘퀴스타도스(San Diego Conquistadors)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아직 체임벌린과 계약 관계가 남아있던 레이커스 구단은 법정 소송까지 걸어가며 그가 ABA에서 선수로 뛰는 걸 막았죠. 하는 수 없이 샌디에이고에서 감독직만 수행한 그는 37승 47패의 부진한 성적만 남겼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농구 코트를 완전히 떠났습니다. 이후 배구에 심취한 그는 70년대에 프로 배구 리그인 IVA가 출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IVA 총재 및 홍보대사 역할을 맡으면서 흥행을 위해 종종 선수로 뛰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죠. 그는 마흔을 훌쩍 넘긴 80년대까지도 NBA 여러 팀들로부터 복귀하라는 구애를 받기도 했으나, 끝내 거절했습니다. 숱한 여성 편력으로도 이름났던 그는 말년에는 심장 질환으로 고생하다가 1999년에 심부전으로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죠. 그는 1979년에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그의 등번호 #_13은 1983년에 레이커스로부터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C 3rd : #_99  George Mikan

 

 

 

※ NBL 시절(56경기)의 어시스트, 야투 성공/시도 개수, 윈쉐어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관련 값은 NBA에서 뛴 439경기만으로 산출함. 또한 리바운드는 50-51시즌부터 집계되어 총 311경기, 출전시간 및 PER는 51-52시즌부터 집계되어 총 243경기로 그 값을 산출함.

 

조지 마이칸은 리그 초창기에 이른바 빅맨의 표본으로 불리며 센터 중심 농구의 시대를 연 선구자적 레전드입니다. 그는 당시만 해도 압도적인 신체 조건인 6-10의 신장에 245파운드의 웨이트를 자랑했는데, 키가 그만큼 큰 빅맨은 그때도 더러 있었지만 그처럼 피지컬과 힘, 운동능력까지 두루 갖춘 빅맨은 거의 없었죠. 1940년대에는 대학 무대에 지금의 센터급의 사이즈를 지닌 여러 장신 빅맨들이 등장했는데, 드폴 대학의 마이칸을 비롯해 오클라호마 주립대의 밥 컬란드(7-0), 볼링 그린 대학의 돈 오튼(6-11), 세인트존스 대학의 해리 보이코프(6-10)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마이칸을 비롯한 이 장신 센터들은 림 위로 손을 뻗쳐 상대편의 슛을 쳐내는 플레이가 가능했기에, 이들 때문에 1944년에 비로소 골텐딩 룰이 생겨나게 되었죠.

 

마이칸은 1946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NBL의 시카고 어메리칸 기어스(Chicago American Gears)에 입단해 루키 시즌에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이듬해에 구단주 모리스 화이트가 무리하게 PBLA이란 리그를 창설하려다 그만 실패로 돌아가 어메리칸 기어스 팀은 공중분해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나머지 11개 팀들이 마이칸의 소유권을 놓고 공평하게 제비뽑기를 했는데, 9.1%의 확률을 뚫고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가 당첨이 되었죠. 당시 이제 막 연고지를 미네아폴리스로 옮겨 재창단한 레이커스 구단 입장에서 당대 최고 센터 마이칸의 가세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나 다름없었습니다. 마이칸은 47-48시즌에 평균 21.3득점을 올리며 레이커스를 NBL 우승으로 이끌었고, 시즌 MVP도 차지했죠.

 

이듬해인 48-49시즌에 레이커스는 BAA로 소속을 옮겼는데, 새로운 리그에서도 마이칸의 지배력은 여전했습니다. 그는 평균 28.3득점(리그 1위)을 올리며 올-BAA 퍼스트 팀에 선발되었고, 레이커스를 새 리그의 우승자로 만들었죠. 49-50시즌에 BAA는 NBL을 완전히 흡수해 NBA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범했지만, 마이칸의 골밑 지배는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시즌 평균 27.4득점(리그 1위)을 올린 그는 시라큐즈 내셔널즈와 맞붙은 파이널에서는 평균 32.2득점을 퍼부으며 레이커스를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죠. 50-51시즌 들어 리그에서는 처음으로 올스타전을 치르고 리바운드를 스탯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는데, 마이칸은 올스타에 뽑힌 것은 물론이요 평균 28.4득점(리그 1위), 14.1리바운드(리그 2위)의 압도적인 스탯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로체스터 로얄즈와 맞붙은 플레이오프 서부 디비전 파이널을 앞두고 다리 골절상을 입게 되었고, 레이커스의 3연패에도 적신호가 걸렸죠. 그는 다리에 부목을 대고 한 발로 점프해가며 안간힘으로 뛰면서도 평균 23.8득점을 넣는 눈물겨운 투혼을 보여줬으나, 레이커스는 결국 로체스터에게 1-3으로 패배하며 3연속 우승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압도적인 피지컬을 바탕으로 매치-업 상대를 밀어붙여 골밑으로 최대한 접근한 뒤 위력적인 양손 훅 슛으로 가볍게 득점을 올려놓곤 했죠. 이러한 그의 기본적인 포스트 무브와 연계 동작, 골밑슛, 훅 슛은 이른바 “마이칸 드릴”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빅맨들이 농구를 배울 때 가장 기초적으로 익히는 골밑 스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높이로든 힘으로든 그를 대적할 수 있는 빅맨이 드물었는데, 그 포스로 따지면 90년대~2000년대 리그를 주름잡았던 샤킬 오닐 급과 다름이 없었죠. 그는 피지컬한 스타일상 골밑에서 파울도 많이 얻어냈는데, 자유투도 70%대 후반으로 정확해서 더욱 위력적이었습니다. 그는 득점력 뿐만 아니라 보드 장악력도 당대 최고였고, 수비에서도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죠. 또한 높은 BQ를 바탕으로 한 피딩 능력도 훌륭해서 자신이 집중 견제를 당할 때 동료들에게 양질의 패스를 제공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선수들이 실력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다 보니 그에게 온갖 거친 파울과 더티 플레이를 저지르곤 했는데, 그는 이럴 때마다 물러서지 않고 당한 만큼 그대로 갚아주던 터프가이였죠. 하지만 그는 이러한 과도한 견제 때문에 온갖 부상을 당해야 했는데, 시대 특성상 웬만한 부상은 그냥 참고 뛰는 바람에 나중에는 선수 생명까지 다소 단축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한편 마이칸과 레이커스가 우승을 거의 싹쓸이하며 리그를 지배하는 것에 대해 리그 안팎에서 여러 불만들이 터져나왔고, 결국 리그 사무국이 나서서 룰까지 바꿔가며 마이칸의 독주를 견제했죠. 리그에서는 51-52시즌부터 페인트존의 폭을 기존의 6피트에서 12피트로 넓혔는데, 이러면 3초룰이 적용되는 범위가 넓어지기에 마이칸의 골밑 공격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 룰은 사실상 마이칸 한 사람을 견제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기에, 소위 “마이칸-룰”로 불리게 되었죠. 이로 인해 마이칸의 평균 득점이 5점 가까이 하락(28.4득점→23.8득점)하며 룰 개정이 나름 효과를 보는 듯 했으나, 영리한 마이칸은 대신 종종 하이-포스트로 나와 컷-인하는 포워드들(짐 폴라드, 번 미켈슨)에게 양질의 패스를 찔러주는 플레이로 대응했습니다. 그 결과 마이칸의 하락한 득점은 고스란히 폴라드, 미켈슨의 늘어난 득점으로 돌아갔고, 레이커스는 여전히 리그 수위권에 군림했죠. 또 마이칸은 대 로체스터 로얄즈 전(1/20)에서 무려 61득점, 3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여전히 그가 골밑의 지배자임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레이커스는 52 파이널에서 뉴욕 닉스와 맞붙어 7차전 접전 끝에 값진 승리를 따냈고, 마이칸은 파이널 평균 21.7득점, 17.4리바운드로 우승에 혁혁히 공헌했죠. 이후 마이칸은 득점력은 조금씩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으나 리바운드와 수비에서는 여전한 포스를 자랑하며 레이커스를 두 시즌 더 우승으로 이끌었고, 레이커스는 리그 역사상 첫 3연패를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간 쌓인 부상 누적으로 인해 그의 몸은 많이 망가진 상태였고, 결국 그는 53-54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선언했죠.

 

코트를 떠난 후 그는 레이커스의 단장직을 맡아 팀을 이끌었으나, 그 없는 레이커스는 더이상 컨텐더의 레벨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55-56시즌 초반에 팀이 14승 21패의 부진에 빠지자, 주변에서 단장인 그가 현역으로 복귀해줄 것을 간청했죠. 이에 그는 코트로 돌아왔지만 이미 한 번 은퇴한 몸이라 예년처럼 뛰긴 어려웠기에 레이커스의 구세주가 되어주진 못했습니다. 남은 37경기에서 평균 10.5득점, 8.3리바운드를 올린 그는 가까스로 레이커스를 플레이오프로 올리긴 했지만 1라운드 탈락을 막지는 못했고, 시즌을 마친 후 다시 코트를 떠나 단장직으로 돌아왔죠. 한편 57-58시즌에 레이커스는 감독인 존 쿤들라를 단장직에 앉히고 대신 마이칸에게 감독직을 맡겼으나, 마이칸은 9승 30패의 부진한 성적만 남긴 채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쿤들라가 다시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이후 그는 잠시 농구계를 떠났다가 1967년에 ABA 리그가 출범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ABA의 초대 총재를 역임하기도 했죠. 그는 NBA와의 차별성을 위해 기존의 갈색 공 대신 칼라볼(현재 3점슛 컨테스트에서 쓰이는 머니볼)을 사용하고 3점슛 제도를 도입하는 등 혁신적인 운영을 했습니다. 또한 1980년대 중반부터는 미네소타 주에 새로운 구단을 창설하는 데에도 앞장서서 1989년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출범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죠. 그는 말년에 당뇨병으로 고생하다가 2005년에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59년에 일찌감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그는 레이커스를 6차례(NBA 5회/NBL 1회) 우승으로 이끌며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미네아폴리스 시절 레전드라는 이유로 L.A 레이커스에서는 그의 번호를 영구 결번하지 않았죠. 대신 그의 등번호 #_99는 2002년에 미켈슨, 폴라드 등 다른 동료들의 번호와 함께 영구 결번에 준하는 “아너드 넘버”로 지정되었습니다. 한편 그의 동생인 에드 마이칸도 형과 함께 리그에서 센터로 활약했으며, 아들인 래리 마이칸도 70년대에 잠깐 리그에서 뛴 바 있습니다.

 


 

C 2nd : #_34  Shaquille O’Neal

 

 

 

리그 데뷔 때부터 엄청난 체구와 압도적인 골밑 파워로 만인을 놀라게 했던 올란도 매직의 샤킬 오닐은 95-96시즌을 마치고 FA가 되었지만, 올란도 구단과의 재계약 협상이 난항을 거듭했습니다. 오닐은 올란도 측에 최고의 대우(연 20mil급)를 요구했지만 올란도는 주저했고, 올란도 현지 여론도 오닐을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섰죠. 그러자 L.A 레이커스가 여러 베테랑 선수들(앤서니 필러, 조지 린치)을 트레이드하면서까지 캡을 확보해가며 오닐 영입전에 뛰어들었고, 결국 7년 120mil이라는 특단의 오퍼를 통해 그를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96-97시즌에 그는 무릎 부상으로 51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평균 26.2득점, 12.5리바운드를 올려주었으며, 레이커스에서 치른 첫 플레이오프 경기인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의 1라운드 1차전에서는 46득점을 퍼붓기도 하였죠. 이듬해인 97-98시즌, 평균 28.3득점(리그 2위), 11.4리바운드, 야투율 58.4%(리그 1위)를 기록하며 올-NBA 퍼스트 팀에 뽑힌 그는 팀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이끌었지만, 유타 재즈의 칼 말론 & 존 스탁턴 픽 앤 롤 콤비 앞에 스윕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98-99시즌에 레이커스는 슈터가 필요하다는 오닐의 적극적 요구를 받아들여 시즌 도중 글렌 라이스까지 영입했지만, 이번엔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벽에 막히고 말았죠.

 

한편 99-00시즌에 과거 시카고를 6번 우승으로 이끈 명장 필 잭슨 감독이 새로 부임하며 레이커스는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잭슨 감독의 트라이-앵글 오펜스 하에서 날개 돋친 듯 활약한 오닐은 평균 29.7득점(리그 1위), 13.6리바운드(리그 2위), 3블록슛(리그 3위), 야투율 57.4%(리그 1위)의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줬으며, 대 L.A 클리퍼스 전(3/6)에서는 무려 61득점 23리바운드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죠. 당시 레이커스의 팀 성적(67승) 또한 부동의 리그 탑이었기에, 그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득표(1위표 121개 중 120개 획득)로 시즌 MVP를 차지했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그 기세를 이어간 그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맞붙은 파이널에서 평균 38득점, 16.7리바운드로 골밑을 지배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파이널 MVP까지 거머쥐었죠. 그리고 오프시즌에 그는 기존의 7년 계약에 3년을 더 연장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3년 88.5mil)

 

이듬해인 00-01시즌에 레이커스는 정규 시즌에는 조금 주춤했으나(56승), 플레이오프에서는 전년도보다 더 막강한 위력을 뽐내며 서부 팀들을 모조리 스윕하고 파이널에서 앨런 아이버슨의 필라델피아 76ers와 맞붙었죠. 필라델피아는 당대 최고의 수비형 센터 디켐베 무톰보를 앞세워 오닐을 저지하려 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평균 33득점, 15.8리바운드로 팀의 4-1 승리를 이끈 그는 두 번째 파이널 MVP를 차지했습니다. 01-02시즌에 레이커스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새크라멘토 킹스와 혈투 끝에 가까스로 파이널에 진출해 뉴저지 네츠를 누르고 3연패를 달성했으며, 파이널 평균 36.3득점, 12.3리바운드로 네츠 골밑을 유린한 오닐은 3년 연속 파이널 MVP에 등극했죠.

 

7-1의 신장에 320파운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웨이트를 지닌 오닐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파워를 앞세워 골밑을 지배했습니다. 이렇게 체중이 많이 나가게 되면 일반적으로 동작이 둔하거나 스피드가 떨어질 수 밖에 없는데, 오닐은 놀랍게도 체중 대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민첩성과 유연성을 자랑했죠. 그는 강력한 피지컬과 힘을 앞세운 포스트-업으로 매치-업 상대를 림 주변까지 밀어붙인 뒤 스핀무브 또는 드롭 스텝 후 베이비 훅 샷을 던지거나 또는 거리가 가까우면 무지막지한 파워 슬램을 내리꽂았습니다. 또 수비가 간신히 그의 공격을 미스샷으로 막아내더라도 종종 날렵하게 공격 리바운드를 걷어내 풋-백 덩크를 꽂아 넣곤 했죠. 그는 포스트-업 외에 별다른 공격 루트는 없었지만, 워낙에 포스트 무브 자체가 강력해서 상대방은 어떻게 공격해 올지 뻔히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주로 림 주변에서 대부분의 득점을 올렸기에 그는 야투율이 매우 높은 편이었으며, (통산 58.2%) 무려 10차례나 리그 야투율 1위를 차지한 바 있죠.

 

또한 그는 코트 비전도 좋아서 자신에게 더블-팀이 붙으면 외곽의 슈터들에게 적절하게 킥-아웃 패스를 찔러주곤 했습니다. 그는 그리 성실한 수비수는 아니었고 2 : 2 수비에서도 다소 약점을 드러냈지만, 위력적인 샷블로커인데다가 그저 골밑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기에 3차례 올-디펜시브-세컨드 팀을 수상하기도 했죠. 그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부정확한 자유투였는데, (통산 자유투율 52.7%) 본인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했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상대팀 감독들은 그의 약한 자유투를 역이용해 일부러 그에게 파울을 하는 이른바 “핵-어-샥” 작전을 애용했고, 이 때문에 그는 정작 4쿼터 클러치 타임에 벤치에 앉아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죠. 또한 그는 워낙 큰 체격 탓인지 잔부상을 많이 당하는 편이었는데, 그러다보니 건강하게 풀-시즌을 치른 적이 많지 않아서 시즌 MVP 수상 횟수가 명성에 비해 다소 아쉬운 1회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02-03시즌에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발목을 잡히며 연속 우승 행진을 마감했죠. 이에 레이커스는 03-04시즌에 칼 말론, 게리 페이튼까지 영입해가며 기존의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에 더해 이른바 “전당포 라인업”이라는 초호화 군단을 완성했습니다. 이들은 파이널에서 래리 브라운 감독이 이끄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맞붙었는데, 브라운 감독은 오닐에게 줄건 주더라도 더블-팀을 가지 않은 채 벤 월러스가 단독으로 오닐을 막는 작전을 펼쳤죠. 오닐은 홀로 분전했지만 동료들의 도움은 이에 미치지 못했고 말론의 부상까지 겹치며, 결국 전당포 레이커스는 디트로이트에게 1-4로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간 오닐은 코비 브라이언트와 에이스 자리를 놓고 불편한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둘의 불화는 파이널 패배 이후 더 극으로 치닫게 되었죠. 이에 오닐은 코비와 더이상 함께 뛰기 싫다며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마침 코비 역시 FA를 맞이한 상황이었기에 레이커스 구단은 두 슈퍼스타 중에 단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습니다. 결국 코비를 택한 레이커스 구단은 라마 오덤+커론 버틀러+브라이언 그랜트+1라운드 픽+2라운드 픽을 받는 조건으로 오닐을 마이애미 히트로 트레이드하고 말았죠. 이후 오닐은 06년에 드웨인 웨이드와 함께 마이애미를 우승으로 이끌기도 하였으며, 말년에는 피닉스, 클리블랜드, 보스턴을 전전하며 저니맨 생활을 하다가 10-11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평소 엔터테인먼트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현역 시절부터 다수의 영화나 TV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비쳤으며, 현재도 TNT에서 방송 해설자로 활동 중이죠. 그는 2016년에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그의 등번호 #_34는 2013년에 레이커스로부터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C 1st : #_33  Kareem Abdul-Jabbar

 

 

 

카림 압둘-자바는 71년에 밀워키 벅스를 우승으로 이끌고 데뷔 5년차 만에 세 차례나 시즌 MVP를 차지하는 등 명실상부 당대 최고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몰 타운인 밀워키를 벗어나 대도시(고향인 뉴욕 또는 대학 시절을 보낸 L.A)로 이적하길 바랐기에, 74-75시즌을 앞두고 밀워키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했죠. 밀워키는 1년간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75-76시즌을 앞두고 그를 L.A 레이커스로 트레이드했습니다. 레이커스는 자바를 영입하기 위해 주전 센터 엘모어 스미스, 2년차 유망주 가드 브라이언 윈터스에 75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자 2명(2픽 데이브 마이어스, 8픽 주니어 브릿지먼)을 내주었죠. 75-76시즌에 자바는 평균 27.7득점(리그 2위), 16.9리바운드(리그 1위), 5어시스트, 4.1블록슛(리그 1위)의 압도적인 개인 성적을 기록하며 시즌 MVP를 차지했지만, 레이커스는 40승 42패의 성적에 그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플레이오프 탈락 팀에서 시즌 MVP가 나온 유일한 사례) 이듬해인 76-77시즌에도 그는 평균 26.2득점(리그 3위), 13.3리바운드(리그 2위), 야투율 57.9%(리그 1위)의 개인 기록에, 레이커스를 정규 시즌 1위로 이끌며 2년 연속 MVP를 차지했죠.

 

하지만 77-78시즌 개막전에서 그는 밀워키 벅스의 루키 켄트 벤슨에게 더티 플레이를 당하자 발끈해 주먹을 휘둘렀다가 그만 손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시즌 초반 20경기를 결장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많은 비난을 받았고, 그해 올스타에도 선발되지 못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죠. (자바의 20년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올스타에 뽑히지 못한 시즌) 한편 레이커스는 자바라는 최고의 선수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플레이오프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못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79-80시즌에 슈퍼 루키 매직 존슨의 합류로 전력을 강화하며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죠. 그해 레이커스는 60승을 거두며 서부지구 1위를 차지했고, 자바는 커리어 6번째 시즌 MVP를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승승장구한 레이커스는 파이널까지 진출해 줄리어스 어빙의 필라델피아 76ers와 맞붙었죠. 자바는 시리즈 평균 33.4득점, 13.6리바운드, 4.6블락슛의 엄청난 퍼포먼스로 5차전까지 시리즈를 3-2로 리드하는데 지대하게 공헌했지만, 5차전에서 당한 발목 부상 때문에 6차전 출전이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루키 존슨이 6차전에 그를 대신해 선발 센터로 출전하여 놀라운 활약을 펼치며 레이커스를 끝내 우승으로 이끌었고, 파이널 MVP도 차지하게 되었죠.

 

7-2의 출중한 신장에 최상급 운동능력까지 겸비했던 자바는 전성기 때에는 공격과 수비 양쪽에서 모두 리그 최고의 포스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스카이-훅”이라는 고유의 필살기를 지니고 있었는데, 팔을 쭉 뻗은 채 온몸을 이용해 큰 동작으로 던지는 그의 스카이-훅은 다른 훅 슛보다 높은 궤적과 긴 레인지를 자랑했기에 종종 15피트 바깥의 미드-레인지에서도 거침없이 시도하곤 했죠. 상대 수비수가 그의 타점 높은 스카이-훅을 블락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그나마 윌트 체임벌린, 네이트 써몬드 등 리그 최상위급 수비수들이 어쩌다가 한, 두 번 블락한 적은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처럼 위력적이었지만 워낙에 고난이도 기술이었기에 다른 선수들은 이 슛을 제대로 흉내조차 못 냈는데, 자바는 이를 양손으로 능숙하게 구사하며 50%를 넘나드는 높은 성공률로 꽂아주곤 했죠.

 

또한 스카이-훅 뿐만 아니라 포스트-업 후 턴-어라운드 점퍼도 그가 즐겨 쓰던 무기 중 하나였으며, 페인트 존에서는 높이를 활용해 손쉽게 림으로 올려놓거나 그대로 호쾌하게 덩크를 찍어대곤 했습니다. 전성기 때에는 보드 장악력도 리그 탑 클래스였고 특히 수비 리바운드 장악에 능했는데, 다만 커리어 후반부터 보드 장악력이 유독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기도 했죠. 높이를 바탕으로 한 림 프로텍팅 능력도 발군이었던 그는 한창때 꾸준히 평균 3~4개의 블락슛을 기록했으며, 통산 11차례나 디펜시브 팀(퍼스트 5회, 세컨드 6회)에 선정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평소 요가, 무술 연마 등을 통해 꾸준히 신체를 단련했는데, 이러한 자기 관리 능력은 그가 42살까지 큰 부상 없이 현역으로 뛸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죠. 다만 그는 몸싸움과 컨택을 그리 즐기지 않은 편이었기에 피지컬로 거칠게 밀어붙이는 상대에게는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득점력만큼은 여전히 훌륭했으나, 나이는 속일 수 없었던지 보드 장악력과 수비 부문에서는 완연한 하락세를 걷게 되었죠. 그러면서 여태껏 그가 맡아왔던 팀의 에이스 롤도 점차 매직 존슨에게로 옮겨갔습니다. 한편 82 파이널에서 레이커스는 2년 만에 다시 필라델피아와 격돌했는데, 두 팀의 전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센터 포지션에서 자바가 대럴 도킨스를 상대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우승은 레이커스에게 돌아갔죠. 이듬해에 자바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평균 28.4득점을 몰아넣는 등 모처럼 전성기 시절 포스를 뽐내며 팀을 파이널로 이끌었으나, 모제스 말론까지 영입해가며 절치부심한 필라델피아에게 리벤지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84년에도 파이널에 진출했으나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무릎을 꿇었던 레이커스는 85 파이널에서 다시 보스턴과 파이널 리매치를 가지게 되었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매직 존슨 VS 래리 버드의 에이스 대결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고, 전성기가 지난 노장인 자바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레이커스가 1차전에서 굴욕적인 34점차 패배를 당한 후 맞이한 2차전에서 자바는 30득점 17리바운드 8어시스트의 놀라운 활약을 선보이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에도 알토란같은 득점력으로 팀 공격을 주도했죠. 결국 레이커스는 4-2로 보스턴을 꺾으며 리벤지를 달성했고, 시리즈 평균 25.7득점, 9리바운드, 5.2어시스트를 기록한 자바는 파이널 MVP에 뽑혔습니다. 자바는 이미 밀워키 시절 파이널 MVP를 차지한 바 있지만, 레이커스에 온 뒤로는 죽 파이널 MVP와 인연이 없다가 전성기가 지나고 나서 따낸 것이라 그 의미가 더욱 남달랐죠. 그는 39살이던 85-86시즌에도 평균 23.4득점을 올리며 올-NBA 퍼스트팀에 뽑히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마흔 줄에 접어든 이듬해부터는 평균 득점이 20득점 아래로 떨어지는 등 하락세를 거듭했죠. 하지만 플레이오프 등 중요한 무대에서는 나름 제 역할을 해내면서 이후 두 번의 우승(87년, 88년)에 공헌했으며, 88-89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그는 커리어 통산 38,387득점, 57,446분 출전으로 두 부문에서 역대 1위에 올라있죠. 또한 20년의 커리어 동안 총 6회의 시즌 MVP(역대 최다/레이커스에서는 3회)와 6회의 우승(레이커스에서는 5회), 19회의 올스타 선발(레이커스에서는 13회), 15회의 올-NBA팀 선정(레이커스에서는 10회), 11회의 올-디펜시브 팀 선정(레이커스에서는 7회) 등 화려한 업적들을 세웠으며, 마이클 조던 등장 전까지 역대 최고의 선수로 가장 먼저 손꼽히곤 했습니다. 평소 글쓰기에 흥미가 많았던 그는 은퇴 후 작가로 활동하며 여러 편의 책을 출간했고, 시사에도 관심이 많아 타임(Time)지 등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죠. 또한 세계 곳곳을 다니며 농구 홍보대사 노릇을 해오고 있으며, 어린 빅맨들을 가르치는 코치 역할도 가끔 수행하곤 합니다. 그는 1995년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그의 등번호 #_33은 그가 은퇴하던 1989년에 레이커스로부터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Epilogue

 

다들 짐작하셨듯이, 레이커스 역대 포지션 중에서 가장 많은 레전드들이 몰려 있고, 그래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곳이 바로 센터 포지션이죠. 이른바 “Battle of Giants”라는 수식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죠.

 

최상위권에서 약간 고민했던 부분은 바로 샤킬 오닐과 조지 마이칸의 대결이었습니다. 두 선수 모두 당대 최고의 센터로 군림하며 수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 시대적 간극이 참 커서 우열 비교가 간단치 않죠. 우승은 마이칸이 더 많이 했지만 아무래도 마이칸 시대가 우승하기 더 쉬운 환경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시대적 격차를 감안하더라도 더 치열한 경쟁의 무대에서 성과를 쌓은 오닐 쪽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사실 역대 센터를 평가할 때 마이칸 입장에서 좀 억울한 게, 하필이면 시즌 MVP가 없던 시절에 뛴 것이죠. 만약 마이칸 시절에 시즌 MVP를 시상했다면 48-49시즌부터 50-51시즌까지 세 시즌은 압도적으로 MVP를 따냈을 겁니다. 그 이후에는 룰 변경으로 마이칸의 득점력이 다소 하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기에 추가 MVP 수상도 가능했겠죠. 즉 3회 + @의 시즌 MVP 경력이 그에게 더해진다면 그래도 현재보다는 그의 가치가 조금은 더 높게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흑인 선수들도 거의 없던 좁은 인프라 내에서 느슨하게 경쟁하며 따낸 MVP들을, 근래의 MVP와 동일한 가치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요.

 

파우 가솔은 PF로 경쟁했으면 번 미켈슨과 치열하게 1, 2위를 다투었을텐데, 센터로 분류되다 보니 워낙에 쟁쟁한 레전드들에게 밀려 5위에 그쳤네요. 하지만 레이커스 센터 랭킹에서 5위라는 건 다른 포지션의 3~4위급에 못지않은 위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가솔의 가세로 안그래도 화려한 역대 레이커스 센터진에는 또 하나의 레전드가 추가된 셈이고요.

 

클라이드 로벨럿(7위)과 앤드류 바이넘(8위) 간에도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는데, 시대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로벨럿의 임팩트가 그래도 바이넘보다는 좀 더 낫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선수는 다소 트러블 있는 커리어를 보냈다는 공통점도 있는데, 로벨럿은 스탯은 좋았으나 팀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고약한 성격 탓에 라커룸에서도 트러블메이커였죠. 바이넘도 재능을 못 따라간 멘탈과 잦은 부상이 아쉬웠고요. 그래도 두 선수 모두 레이커스의 골밑에서 인상적인 업적을 남기긴 했습니다.

 

쟁쟁한 경쟁이 이어지다가 9위 마이클 탐슨(클레이 아빠)부터는 뭔가 클래스가 훅 떨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최소 올스타급 멤버라고 볼 수 있는데, 탐슨부터는 뭔가 준수한 롤 플레이어급 정도라는 느낌이 확 들죠. 하긴 상위권의 여러 쟁쟁한 선수들이 웬만한 업적을 다 휩쓸고 갔으니, 어느 순번부터는 뎁쓰가 하향평준 되는 걸 피할 수 없겠죠.

 

메이저 랭킹과 마이너 랭킹이 갈리는 14위 드와이트 하워드와 15위 래리 포우스트 역시 끝까지 고민스러운 순번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별다른 의미는 없다 해도 메이저/마이너가 딱 갈리는 지점이다 보니... 둘이 스탯은 엇비슷하고 누적은 포우스트가 조금 앞서며 효율은 하워드의 우위인데, 12-13시즌에 하워드가 보여준 서드팀 퍼포먼스와 지난 시즌 레이커스의 우승 등이 하워드 쪽에 좀 더 가산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네요.

 

센터에 랭크된 선수들 중에서도 4~5번을 두루 오가다 보니 스타일상은 4번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간발의 차이로 5번으로 분류된 케이스가 있습니다. 바로 미치 컵책과 스태니슬라브 메드베덴코인데요, 두 선수는 레이커스에서 가장 좋은 퍼포먼스를 펼쳤을 때는 주로 4번으로 활약했는데, 이후에 팀 사정상 센터로 많이 출전하게 되면서 결국 근소한 차이로 센터로 분류되었습니다.

 

현역 중에는 자베일 맥기와 드와잇 하워드가 이번 오프시즌에 팀을 떠난 게 좀 아쉽네요. 다만 이제는 마크 가솔, 몬트레즈 해럴 같은 뉴페이스들이 새로운 랭커로 등장하겠지만요.

 

가장 관건은 아마도 앤써니 데이비스일 것입니다. 일단 지난해에는 4번 출장이 더 많아서 현재는 PF 쪽에 랭크되어 있으나, C로도 워낙 자주 출장하는 선수인지라 향후 팀 사정에 따라 포지션이 어느 쪽으로 정해질지 당장은 확정하기 어렵죠. 만약 데이비스가 PF로 자리 잡아 현 계약 기간 + @ 동안 레이커스에서 꾸준한 활약을 보여준다면 레이커스 역대 최고의 PF 자리도 충분히 노려볼 만하겠죠. 다만 결국 C로 자리 잡게 된다면 가솔과 마찬가지로 선배 레전드들과 힘겨운 경쟁을 해야만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써 레이커스 편의 연재를 모두 마치게 되었습니다. 개인 사정으로 준비 기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더더욱 기나긴 여정이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앞으로 이런 형식의 연재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솔직히 현재로서는 뭐라고 확답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2015년에 처음 연재를 시작했을 때와는 여러 여건과 환경이 달라지면서 절대 시간을 내기가 너무 빠듯해진 탓도 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연재를 중단한다는 선언을 당장은 하고싶지 않습니다. 힘들더라도 틈틈이 어찌어찌 하다보면 가늘고 길게 계속 이어갈 수도 있는 거고, 정말 벽에 부딪혀 진짜 내려놓아야 할 날이 올 수도 있겠죠. 일단 현재 후속으로는 덴버 너게츠 편을 준비 중입니다. 아직 초기 데이터 수집 작업 중이고 그나마 레이커스 편 마무리한다고 오랫동안 진행이 중단된 상태인데, 조만간 다시 심기일전해서 리스타트 해보려 합니다. 덴버 편을 다음 오프시즌까지는 완성해서 연재하는 게 최선의 방안이긴 한데, 또 어떻게 될런지 장담은 못 드리겠네요.

 

이미 진행했던 과거 연재편의 리뉴얼도 늘 마음만 앞서지 제대로 시도를 못 하고 있는데, 이것도 틈틈이 준비를 해보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미 5년마다 리뉴얼한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긴 했는데... 이왕 이리 된 김에 10년에 한 번 리뉴얼 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생각입니다.

 

끝으로 이번 레이커스 편에 성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지난 6년 동안 시리즈를 진행해오면서 이번 레이커스 편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는데, 덕분에 처음으로 매니아진에서 은장도 하나 달 수 있게 되었네요. 레이커스가 워낙 인기 프랜차이즈라 이번에는 타 시리즈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겠지란 생각은 막연히 했었는데, 이렇게 기대 이상의 큰 성원으로 보답해주셔서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좋은 글로 좀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해 늘 아쉬움이 있지만, 성원해주시는 분들이 있는 한 앞으로도 이 시리즈를 꾸역꾸역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애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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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12-24 00:55:18

이 시리즈가 지속됨에 감사드립니다.

해박한 지식에 항상 감탄중입니다.

 

2020-12-24 01:08:26

먼저 허슬 플레이어님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영광입니다.
부동의 센터 1, 2위.. NBA 센터 역사를 봤습니다. 저 두 센터를 넘는 것이 릅이 조던을 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 보여지네요. 특히 현 트렌드에서는...

2020-12-24 01:16:24

 잘 읽었습니다~!! 작성하시는 플레이가 정말 허슬입니다!

2020-12-24 21:19:02

벌써 완결이라니 아쉽습니다. 이런 양질의 글에 그저 추천 밖에 할 수 없단 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음 덴버 편도 꼭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12-26 20:09:43

좋은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2020-12-28 15:02:35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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