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임벌린이 배구 명예전당에 입성한 것은 사실일까
1. 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쓰리핏을 노리던 1988-89 LA 레이커스는 NBA 역사에서 플레이오프 1라운드부터 파이널까지 모든 시리즈를 스윕(sweep)으로 마무리한 유일한 팀입니다.
2. 윌트 체임벌린은 NBA 14년 선수생활 동안 단 한 번도 6반칙 퇴장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체임벌린이 속한 팀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기록 연장에 집착한 체임벌린은 커리어 중반 이후 파울 트러블에 걸릴 때마다 수비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3. NBA 역사에서 가장 오랜 출전시간동안 파울을 범하지 않는 선수는 르브론 제임스입니다. 르브론 제임스는 2012년 12월 9일 뉴올리언스 호네츠와의 경기 1쿼터 9분30초에 공격자 반칙을 저지른 이후 5경기에서 무려 211분 동안 반칙을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즌 르브론은 수비 퍼스트팀에 선정되었고, 팀 우승, 시즌 MVP와 파이널 MVP까지 휩쓸었습니다.
4. 1960년대 중반 NBA 선수들의 평균연봉은 미국 전체 근로자 평균연봉의 약 2배였습니다. 그런데 2019년 NBA 선수들의 평균연봉은 미국 전체 근로자 평균연봉의 약 150배입니다. 평균소득을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집니다.
5. NBA에서 시즌 MVP를 가장 늦게 배출한 포지션은 슈팅가드입니다. 마이클 조던은 (1988년) 시즌 MVP로 선정된 최초의 슈팅가드입니다.
6. 1989년부터 1993년까지 5년 동안 NBA 파이널에서 서부 컨퍼런스 팀의 홈경기 전적은 1승 13패입니다. 구체적으로 89년 레이커스 0승 2패, 90년 포틀랜드 0승 3패, 91년 레이커스 0승 3패, 92년 포틀랜드 1승 2패, 93년 피닉스 0승 3패입니다.
7. 앞으로 도저히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은 1968-69 시즌에 월트 벨라미(Walt Bellamy)가 기록한 정규리그 88경기 출전입니다. 훗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벨라미는 그 시즌 뉴욕 닉스 소속으로 35경기에 출전했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소속으로 53경기에 출전했습니다.
8. 앞으로 도저히 깨지기 힘든 또 하나의 기록은 1997-98 시즌 댈러스의 부바 웰스(Bubba Wells)가 세운 최단시간 6반칙 퇴장 기록입니다. 웰스는 1997년 12월 19일 투타임 디펜딩 챔피언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에서 경기시작 2분 43초만에 6반칙으로 퇴장당했습니다.
9. 마이클 조던이 루키로 합류한 시카고 불스는 그 이전 시즌에 비해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시카고에서 NBA에 대한 관심은 다른 스포츠에 비해서 매우 약했습니다. 그 당시 불스의 홈구장은 18,700명이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시카고 스태디움입니다. 조던이 합류하기 직전인 83-84 시즌 불스의 평균 홈경기 관객 수는 고작 6,365명입니다. 조던의 루키 시즌인 84-85 시즌 평균 홈경기 관객 수는 크게 늘어서 11,887명이고, 그가 부상으로 많이 결장한 이듬해 평균 관객 수는 전년보다 약간 줄어든 11,445명입니다. 덕 콜린스가 감독으로 부임하고 조던이 첫 득점왕에 오른 86-87 시즌 평균 홈 관객수는 15,871명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조던이 첫 MVP에 선정된 87-88 시즌 초반부터 무려 13년에 걸쳐 시카고 스태디움과 유타이티드 센터에서 610게임을 치르는 동안 시카고 불스의 모든 홈경기가 매진되었습니다.
10. NBA에서 홈경기 연속 매진 기록을 갖고 있는 팀은 댈러스 매버릭스입니다. 댈러스는 코로나로 시즌이 중단되기 직전인 올해 2월에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를 합쳐 815 연속 홈경기 매진기록을 세워 종전에 포틀랜드가 가지고 있던 814경기 연속 매진기록을 경신했습니다. 댈러스의 연속경기 기록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포틀랜드는 1977년부터 1995년까지 18년 동안 모든 홈경기 매진기록을 수립했는데, 그 당시 홈구장이던 메모리얼 콜리시엄은 12,666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1995년 2만명을 넘게 수용할 수 있는 모다 센터로 옮긴 후 홈경기 연속 매진기록이 중단되었습니다. 댈러스와 포틀랜드 다음 연속 홈경기 매진 기록은 보스턴 셀틱스의 662경기 그리고 시카고 불스의 610경기 순입니다.
11. 윌트 체임벌린이 NBA에서 은퇴한 후 배구로 전향해서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그 이후 배구 명예전당에 입성했다는 이야기는 신화처럼 전해지는 도시전설입니다. 저는 위키피디아와 각종 뉴스 그리고 커뮤니티 게시물 등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해 전 국제심판을 역임하셨던 원로 배구인에게 제가 그 말을 꺼냈다가 망신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은퇴한 교수님인 그분은 배구 명예의 전당이 구기 종목 중에서 가장 입성하기 어려운 곳이라고 주장하셨고, 저는 윌트 체임벌린의 예를 들며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면서 저와 함께 체육관장실을 찾아가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그분 말씀대로 배구 명예전당에는 헌액된 선수가 별로 없었고, 체임벌린의 이름은 더더욱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위키피디아를 보여드리자 그분은 엉터리 뉴스라고 일침했습니다. 그 이후 시간이 지나 저는 윌트 체임벌린이 배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는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략 제 주장이 30% 정도 맞고 그 원로 배구인의 주장이 70% 정도 맞았습니다.
체임벌린은 LA 레이커스에서 뛰던 1969년에 무릎 수술을 받고 나서 32살의 나이에 재활 운동으로 배구를 선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체임벌린은 배구에 푹 빠졌고, 농구에서 은퇴한 이후 아예 프로배구 리그인 국제배구협회(IVA) 창설에 나섰습니다. 체임벌린은 1975년에 IVA 회장에 당선되었고, 시애틀 연고 팀의 구단주를 겸했습니다. 당시 선수겸 회장겸 구단주였던 체임벌린은 실력과 무관하게 IVA의 간판스타였습니다. 1977년 IVA 올스타 게임에서 체임벌린이 출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CBS에서 전국에 그 경기를 중계했습니다. 그리고 체임벌린은 올스타 MVP로 뽑혔습니다. IVA는 5년 동안 지속되다가 체임벌린이 은퇴한 후 리그가 폐지되었습니다. 체임벌린은 IVA 명예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헌액자가 있던 유일한 배구 명예전당이었습니다. 그런데 IVA 명예전당 헌액자의 명단은 어디를 찾아봐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배구 명예전당은 1985년에 최초의 입성자를 배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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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11가지 모두 새롭고,
지금은 82경기 전경기를 뛰는 선수도 적은데 88경기는 무슨 저세상 리그같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