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는 팀 성적과 크게 관련 없다는 걸 증명한 선수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컨버스(Converse)는 프로농구와 대학농구의 오피셜 브랜드로 미국의 농구화 시장을 독점했습니다. 70년대 중반부터 공인 브랜드의 지위를 잃었지만 여전히 농구화 시장에 절대 강자였습니다.
그런데 컨버스는 단 한 번도 스포츠화 시장의 일인자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미국 내 농구화 시장 규모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1970년대 초반에 출범한 후발주자 나이키가 불과 10년 만에 미국 스포츠화 시장의 1인자에 등극했습니다. 나이키는 미국에서 조깅화의 붐을 일으켰고, 국민들에게 자사의 값비싼 테니스화를 일상용 신발로 인식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영국 브랜드인 리복이 에어로빅화 시장을 새로이 창조함으로써 선풍을 일으켰고 4년 만에 나이키를 제치고 미국에서 최고 매출의 운동화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까지도 농구화는 농구할 때에만 필요한 신발이지 일상용으로는 불편해서 러닝화나 테니스화처럼 널리 보급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습니다. 농구화의 오랜 최강자 컨버스는 농구화 시장을 크게 넓히려는 시도 없이 기존의 점유율을 지키는 전략을 고수했습니다. 컨버스는 인기와 실력 모두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던 Dr. J, 래리 버드, 매직 존슨, 아이제이아 토머스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키 마이클 조던을 내세워 나이키가 1985년에 출시한 에어조던은 첫해에만 1억3천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농구화 마켓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뛰어넘었습니다. 에어조던에 대항하고, 거대해진 농구화 마켓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컨버스는 1985년에 그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래리 버드와 Dr. J 그리고 매직 존슨을 함께 출연시켜 광고를 찍었습니다. (아래 영상 참조)
스타들을 내세운 농구화 전쟁이 시작되었고, 마이클 조던이 부상에서 컴백한 1986년 초여름부터 그 전쟁은 확대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농구화는 캐주얼화로 정착되었고, 패션의 요소로 발전했습니다.
1986~87 시즌이 시작된 후 팬들의 가장 큰 관심은 우승을 놓고 다투는 매직과 버드의 라이벌 대결이 아니라 기껏해야 중위권 팀인 시카고 불스에서 마이클 조던의 활약상이었습니다. 불스는 홈경기뿐 아니라 원정경기까지 모두 매진시켰고, 마이클 조던은 확고부동 리그 최고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 시즌 경기당 104.8점으로 리그 최하위권의 득점력을 가진 불스에서 조던은 37.1의 평균득점을 올렸습니다. 2위인 도미닉 윌킨스보다 무려 평득 8.1점을 더 올린 것입니다.
조던의 활약과 더불어 나이키의 에어조던도 컨버스 농구화 '웨폰'의 인기를 크게 뛰어넘었습니다. 컨버스는 에어조던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톱스타 모델을 총 출동시켜 웨폰 CF를 찍었습니다. (아래 영상 참조)
자신의 오랜 텃밭이던 농구화 시장을 놓고 벌인 전쟁에서 나이키에 참패한 컨버스는 계속된 부진 끝에 2001년 파산 직전에 몰려 나이키에게 인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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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은 데뷔전 기대가 어땠나요? 르브론 데뷔전 수준이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