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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를 빛낸 위대한 거인 마누트 볼 (Manute Bol) / 원문작성자..( 허슬 플레이어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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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7 19:51:56

2004년 6월 30일 밤, 코네티컷의 한 도로에서 끔찍한 교통사고가 일어났습니다.
Neville Robinson이라는 택시기사가 만취상태로 차를 몰다가,

그만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택시가 전복되버린 사고였죠.
이 사고로 운전자 로빈슨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동승한 승객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채 겨우 목숨만 건지고 맙니다.
7피트가 훌쩍 넘는 이 거구의 승객은 이 사고로 목뼈가 3개나 부러졌으며,

왼손은 거의 뭉개져버렸고, 좌측 슬개골이 부러졌으며,

머리와 가슴부위에도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기적... 맞습니다. 이 승객이 살아난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Manute Bol
...

전직 NBA선수였지만 이미 10여년전에 코트를 떠나

이제 팬들의 뇌리속에서 거의 사라져가던,

한때 코트 위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사내였던 그가,

실로 오래간만에 결코 반갑지 않은 소식과 함께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습니다.

꺽다리 딩카족 청년, NBA 무대를 밟다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 아프리카의 수단 남부 지역...
이곳은 예로부터 딩카(Dinka)족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소를 기르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민족이기도 하죠.
평균신장이 180cm를 훌쩍 넘기는 것은 물론이요,
2미터 이상 키가 자라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수단 남부의 평원에서는 소를 치는 7피트짜리
거인 목동을 목격하는 건 그리 놀라운 볼거리도 아니죠.
1962년 10월 16일, 딩카족의 한 마을의 추장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특별한 축복(Manute)"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아이는
키다리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키가 컸죠.
(참고로 볼의 할아버지인 Chol은 키가 무려 7'10"(239cm)에 달하는 슈퍼 거인이었으며,
부인이 4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인 Madut는 6'8", 어머니인 Okwok은 6'10"이었으며, 누이동생 역시 6'10"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거인 가족이죠...;;;)
꺽다리 매뉴트는 어려서부터 아프리카 평원에서 소를 치며 자랐습니다.
또한 그는 남달리 강한 전사이기도 했죠.
15살때는 소떼를 자주 습격하던 사자를 창으로 찔러 죽인 일화도 있습니다...;
이처럼 문명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던 18살의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Fairleigh Dickinson 대학의 한 스카우터가 그의 엄청난 키를 목도하고 만거죠.
이 낯선 미국인은 그에게 생전 듣도보도 못한 "Basketball"이란 걸 하자고 권유합니다.
결국 그는 아프리카 평원을 떠나 머나먼 미국땅으로 농구를 하기 위해 떠나게 되죠.
하지만 Basketball의 B자도 모르는 이 초짜배기 아프리카산 순수청년에게
농구와의 첫 만남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농구공을 잡고 처음 농구코트에 선 그는 림을 향해 맹렬히 돌진,
"Slam Dunk!!!"를 찍으고 했으나... 오히려 림에 얼굴을 들이박고
네트에 이빨이 걸리는 바람에 앞이빨이 몽창 부러져버리고 맙니다...;
(Kiss the Rim을 아주 제대로 했죠...;)
순탄치 못했던 농구와의 첫만남 만큼이나 그의 타지생활은 험난했습니다.
문명사회의 생활이라곤 전혀 해본적이 없는 그에겐
운동보다도 문화적 갭을 극복하는것부터가 더 큰 문제였죠.
게다가 영어라곤 전혀 할 줄 모르는 그에겐
대학 농구 무대에서 뛰는 것 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클리블랜드 주립 대학에 진학하긴 했지만
영어도 못하는 그는 졸지에 왕따(;;;)가 되었으며,
그의 입학의 적격성을 두고 벌어진 온갖 시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한편, 오로지 농구를 하기 위해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온 이 7'7"짜리 거인의 소식은
몇몇 NBA 스카우터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결국 그는 1983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며 꿈의 무대를 향한 첫 도전장을 내밀죠.
마침내 그는 5라운드 전체 97번으로
샌디에이고 클리퍼스(현 L.A 클리퍼스의 전신)에 지명됩니다.
당시만해도 볼은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NBA에 드래프트된 것이기에
그의 지명은 매우 의미가 깊었죠.
하지만 당시엔 외국인은 22살이후에나 드래프트 참가가 가능하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볼은 처음에는 나이를 속여 참가했지만 얼마 안가 들통이 났고,
결국 그의 조기 NBA 데뷔의 꿈은 무산되고 말죠. (당시 볼은 20살이었습니다.)
정식으로 도전할 나이가 되는 22살이전까지 그는
좀 더 부족한 농구기술과 경험을 연마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대학 농구 무대에서 뛰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1984년 미 대학농구 디비전II 소속의 Bridgeport 대학
처음 정식 농구 선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데뷔 경기에서 그는 상대편의 6'5"짜리 난쟁이(?) 센터를
안드로메다로 관광보내며 30득점, 10리바운드, 10블록슛을 기록하죠.
관중들은 이 엄청난 거인의 첫 공식 데뷔전을 지켜보며
조그만 대학 체육관이 떠나가라 환호했습니다.
아직까지 농구초짜에 불과했지만 그의 축복받은 엄청난 높이는
디비전II의 골밑쯤은 초토화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후로도 놀라운 활약을 이어간 그는 총 31경기에서
평균 22.5득점, 13.5리바운드, 7.0개의 블록슛에 6할이 넘는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하며
디비전II 올-아메리칸에도 뽑힙니다.
대학에서 1년을 뛴 후, 바로 USBL Rhode Island Gulls란 팀에서 첫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는 대학시절과 마찬가지로 하부리그의 골밑쯤은 우습게 평정했습니다.
그는 한 경기에서 18개의 블록슛을 찍기도 했고,
때로는 28개의 리바운드를 잡기도 하며 점점 NBA 스카우터들의 눈길을 끌죠.
결국 몇달 후 그는 1985년 NBA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31번으로
워싱턴 불렛츠에 지명되며 감격의 NBA 데뷔를 하게 됩니다.



The Oddiest Player in NBA History

스탠딩 덩크도 가능한 엄청난 키, 그리고 출산드라의 축복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삐쩍 꼴은 몸매, 200파운드에 겨우 턱걸이하는 키에 비해 심히 언발라스한 체중,

그리고 밤에는 자동 클로킹이 될 듯 한 새카만 피부...
그는 단지 특이한 겉모습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사실 그의 독특한 외모-큰 키, 마른 체구, 새카만 피부-는

딩카족 고유의 특징이라고합니다...^^;)


데뷔때부터 그는 독특한 외모만큼이나 독특한 플레이스타일을 선보이며

많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죠.
코트 위에서 그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거라곤

엄청난 키와 팔길이를 바탕으로 한 블록슛 밖에 없었지만,

그 '찍는 재주' 하나만으로도 그는 당당히 NBA 무대에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1986년 1월 25일, 애틀란타전에서는 프랜차이즈 레코드인 15개의 블록슛을 찍는 등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엽기적인 블록행진을 거듭합니다.
루키 시즌 총 80경기에서 평균 26.1분을 출장한 그는

비록 득점과 리바운드는 각기 3.7점, 6.0개에 그쳤지만,

블록슛은 총득점(298점)보다도 많은 무려 397개(평균 4.96개)를 기록하죠.
이 수치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NBA 루키시즌 최다 블록슛 기록입니다.

또한 블록대마왕 마크 이튼을 제치고 당당히 리그 블록슛 1위를 차지,

그 여세를 몰아 올 디펜시브 세컨드팀에도 드는 기염을 토합니다.

(당시 퍼스트팀은 이튼이었죠...)

이런 그의 활약에 힘입어 불렛츠는 이튼이 이끄는 유타를 제치고

리그 최고의 블록슛 군단(총 716개, 리그 1위)으로 거듭나게 되었죠.

(당시 불렛츠에는 볼 말고도 찰스 존스라는 6'9"짜리 언더사이즈 샷블로커가 역시 적잖은 활약을 해줬습니다. 당시 볼과 존스는 둘이서 팀 블록슛의 무려 74%를 책임졌죠. (볼-397개, 존스-133개))


이 해 불렛츠는 39승 43패를 기록, 동부지구 6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1라운드에서 찰스 바클리가 이끄는 강호 필라델피아를 만나 5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지만 아쉽게도 패배하고 맙니다.
루키때부터 플옵 무대를 밟게 된 볼은 평균 4.6득점, 7.6리바운드, 5.8블록슛으로 맹활약했죠.
이듬해인 86-87시즌, 불렛츠는 트레이드로 전설적인 센터 모이제스 말론까지 영입하며

전력보강을 했고, 팀 성적도 42승 40패로 약간 상승했습니다.
2년차인 볼은 말론의 존재때문에 출장시간이 조금 줄기는 했지만

꾸준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전경기에 꼬박 출장, 20분 미만의 출장시간에도 불구하고

3.68개의 블록슛을 기록하며 이튼에 이어 리그 2위에 오르죠.
87년 2월 26일 인디애나전에서는 15개의 블록슛을 기록하며

1년전 자신이 세운 프랜차이즈 기록과 타이를 이루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는 눈에 띄는 큰 한계를 가진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블록슛 하나만큼은 일품이었지만 선천적으로 빼빼마른 체격 탓에

여타 빅맨들과의 몸싸움에서는 한도끝도 없이 밀려야 했죠.

게다가 공격 기술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구요.
그와 비슷한 스타일의 마크 이튼 역시 공격력이 형편없었지만,

이튼과 볼 사이에는 엄연한 큰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이튼은 거구들과 맞서도 밀리지 않는 몸빵이 있었기 때문에

꾸준히 디펜시브 팀에 이름을 올렸지만, 반대로 볼은 빈약한 체구 때문에

힘이 센 매치업 상대에게 쭉쭉 밀리면서 1:1수비에서 결정적인 문제점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그가 디펜시브 팀에 이름을 올린 건 반짝했던 루키시즌 뿐이었죠.
한편 불렛츠는 이해 동부 6위로 다시금 플옵 무대를 밟지만

토마스가 이끄는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스'에게 1라운드에서 스윕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볼 역시 3경기에서 고작 5개의 블록슛에 그치며 제 몫을 못해줬구요.

이듬해인 1987년 드래프트에서 불렛츠는 키가 160cm밖에 안되는

리그 역사상 최단신타이론 "Muggsy" 보그스

1라운드에 지명하는 기발한 선택을 합니다.
160cm의 보그스와 231cm의 볼...

리그 최단신과 최장신이 나란히 서서 뛰는 모습은 관중들에게는 신기한 볼거리를,

사진기자들에겐 무한한 일거리를 제공해주었죠.

하지만 팀내에서 볼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기본적인 골밑슛과 박스아웃조차 못하는 그의 한계점은
점점 그의 출장시간을 제한하고 있었죠.
그는 77경기에서 평균 14.8분을 뛰며 2.7블록슛(리그 5위)을 기록했고,
그의 스탯은 데뷔 이후로 꾸준한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불렛츠는 시즌이 끝난 후,
워리어스의 백업 센터 Dave Feitl과 2라운드 픽을 받는 조건으로
그를 골든 스테이트로 트레이드합니다.
이로 인해 비록 NBA 데뷔의 꿈을 이룩한 정든 워싱턴을 떠나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농구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기회가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Manute Bol attempt three!!!


워리어스에서 그는 돈 넬슨이라는 훌륭한 코치를 만나게 됩니다.
또한 원체 붙임성있고 농담을 잘하는 볼은 크리스 멀린, 미치 리치몬드 등
팀 동료들과도 금방 친해지며 깊은 유대관계를 맺게 되죠.
그는 라커룸에서는 분위기메이커였습니다.
비록 생활환경이 다른 아프리카 태생이긴 했지만
그는 타고난 재치와 유머로 동료들을 즐겁게 해주었죠.
한편, 새로운 팀, 새로운 동료들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그를 보고
감독인 돈 넬슨은 기상천외한 생각을 해냅니다.
공격에선 전혀 도움이 안되는 볼에게,
바로 3점슛이라는 비밀 무기를 장착시키는 거였죠.
넬슨의 지도 아래 볼은 메인 웨폰 블록슛 이외에,
자신만의 깜짝 서브 웨폰을 시즌 개막까지 꾸준히 갈고 닦습니다.
부상으로 이미 망가진 랄프 샘슨 이외에는 변변한 센터조차 없던 워리어스에서 볼은
확실한 출장시간을 보장받으며 팀의 부족한 골밑수비에 믿음직한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80경기에서 평균 22분을 출장하며 3.9득점, 5.8리바운드, 그리고 무려 4.3개의 블록슛
기록한 그는 루키 시즌에 이어 생애 두번째 블록슛 타이틀을 따냅니다.
그의 멋진 블록 행진 이외에도, 넬슨이 장착시킨 3점슛이라는 새 무기는
경기장 안의 모든 관중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7'7"짜리 꺽다리가 던져대는 무지막지한 3점슛은 키작은 가드나 포워드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3점슛에 대한 고정관념을 일시에 깨버렸죠.
비록 성공률은 20%대에 그쳤고 시도도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총 91개 시도, 20개 성공, .220)
그저 그가 3점슛을 던지는 것 자체 만으로도
팬들에겐 화려한 덩크슛 못지않은 대단한 볼거리였습니다.
한편 신임 코치 넬슨의 지도력과 멀린, 리치몬드의 득점포를 앞세운 워리어스는
전년도보다 2배가 넘는 승수를 기록하는(20승>43승) 깜짝 돌풍을 일으키며
서부지구 7위로 플옵 진출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1라운드에서
미드웨스트 디비전 1위팀 유타 재즈를 3-0으로 스윕하는 파란을 일으키죠.
비록 2라운드에서 강호 피닉스의 벽을 넘지 못하고 1-4로 무너지긴 했지만요.
그러나 볼은 이번 플옵 시리즈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득점과 리바운드, 블록슛은 모두 시즌 평균을 밑돌았고
야투율은 2할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22개나 던져댄 3점슛은 고작 2개만 림을 갈랐죠.
하지만 정규 시즌의 인상적인 활약에 힘입어 그는
워리어스 구단과 4년간 약 500여만불의 장기계약을 맺는데 성공했습니다.
한갓 수단의 시골 촌뜨기였던 그가, 마침내 꿈의 무대에서
인기와 부를 한꺼번에 손에 넣게 된 것이죠.
그러나 이후 멀린-리치몬드-팀 하더웨이로 이어지는 빠른 농구를 지향하는 팀 칼라는
볼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비밀 무기였던 3점슛도 볼거리는 많이 제공해줬지만
낮은 성공률때문에 효과는 많이 떨어졌죠.
결국 이듬해인 89-90시즌, 볼의 출장시간은 전년도를 밑도는 17.5분에 그쳤습니다.
전매특허인 블록슛만 평균 3.17개(리그 4위)로 인상적이었을 뿐,
나머지 스탯은 모두 하향세를 그렸습니다.
간간히 시도하던 3점슛도 1할대의 빈곤한 성공률(.188, 9/48)에 허덕이며
이전보다 자주 볼 수 없게 되었고요.
워리어스에서도 입지가 줄어든 볼은 결국 시즌 종료 후
1라운드 드래프트 픽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필라델피아 76ers로 이적합니다.
여기서 그는 또다른 친구 찰스 바클리를 만나게 되죠.
장난기많은 바클리는 처음에는 그저 볼을 골탕먹이려고 짖궂게 농담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볼은 오히려 이를 재치있게 맞받아치며 역으로 바클리를 놀려먹였죠.
서로 농담이 오가는 가운데 한 입담한다는 바클리도
마침내 볼 앞에서는 두손 두발 다 들게 되었고,
결국 바클리와 볼은 둘도 없는 친구사이가 됩니다.
바클리는 그의 재간둥이 거인 친구를 두고,
"매뉴트는 내가 만난 이들중에 가장 영리한 사람이다.
"(the smartest person he ever met)라고 표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죠.
그와 바클리, 릭 마혼이 함께 한 필라델피아의 락커룸은 연일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코트 밖에서는 분위기메이커였던 볼은
코트 안에서는 슛블로커로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합니다.
팀의 주축 선수들이 부상에 허덕이는 와중에서도 부지런히 전경기에 출장,
평균 3.0개(리그 4위)의 블록슛을 기록하며 제 몫을 다했죠.
이듬해인 91-92시즌에도 그는 평균 2.9개의 블록슛(리그 6위)를 기록하며
팀에서 가장 확실한 슛블로커 역할을 톡톡히 해줬죠.
하지만 팀 성적은 바클리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지난 3년간 꾸준히 하향세를 거듭했고,
결국 이 해에는 그동안 익숙하던 플레이오프 열차마저 놓치고 말았죠.
(80년도의 필라델피아는 거의 매년 플옵에 진출하던 강팀이었습니다.)

결국 프랜차이즈 스타 바클리는 92-93시즌을 앞두고 선즈로 트레이드되고 말았고,
팀은 대대적인 리빌딩을 단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절친한 친구를 잃은 볼은 부상에 시달리며 58경기에 출장하는 데 그쳤습니다.
출장시간과 블록 수치(평균 2.05개, 리그 8위)도 약간 감소했죠.
하지만 비장의 무기 3점슛이 제대로 터지는 통에 평균득점은 오히려 살짝 오르기도 합니다.
이 시즌 10개의 3점슛을 성공시킨 그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30% 이상의 3점슛 성공률(.313, 10/32)을 기록하며 리그 역사상 최장신 3점슈터의 자존심(?)을 지키죠.
하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와 무릎 부상
그의 NBA 커리어의 마감을 서서히 알리고 있었습니다.
시즌 종료 후 그는 마이애미 히트와 FA 계약을 맺지만
고작 8게임만 뛰고 방출되고 맙니다.
얼마 후 친정팀 워싱턴, 필라델피아와 10일계약을 맺고 각각 2게임, 4게임을 뛴 그는
CBA와 NBA를 오가며 불안한 선수생활을 이어갔습니다.
94-95시즌을 앞두고 다시금 골든 스테이트와 FA계약을 맺었지만,
역시 5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치며 방출되고 맙니다.
NBA는 이제 더이상 그의 큰 키와 블록슛, 유머 센스를 필요로 하지 않았죠.
그는 NBA에서 총 10년간 624경기를 뛰며
평균 2.6득점, 4.2리바운드, 2086개의 블록슛(평균 3.34개)을 기록합니다.
그의 경기당 평균 블록슛은 마크 이튼에 이어 통산 2위에 올라있으며,
총 블록슛은 11위에 올라있습니다.
그가 뛴 경기수가 600여경기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치죠.
그가 하킴 올라주원과 통산 같은 경기(1238G)를 뛰었다고 가정하면
무려 4천개가 넘는 블록슛을 기록하는 셈입니다.
블록에 특화된 그의 스타일은 독특한 기록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의 개인 통산 블록슛 개수(2086개)는 그의 득점(1599), 수비 리바운드(2051), 필드골 시도(1635) 개수보다도 오히려 많습니다.
블록슛이 나머지보다 상대적으로 나오기 힘든 것임을 감안해본다면
가히 엽기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죠.
또한 그는 리그에서 1쿼터 최다 블록슛 기록(8개)과
1 half 최다 블록슛 기록(11개)도 갖고있죠.
그는 마크 이튼과 함께 리그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슛블로커였습니다.
NBA 무대를 떠난 후, 그는 이태리와 카타르의 프로팀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심한 류마티스와 관절염으로 인해 결국 얼마 안가 은퇴하고
고향인 수단으로 돌아가게 되죠.


끝나지 않은 그의 싸움


수단에서 태어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룩한 그는 NBA 선수생활을 하면서
수백만불의 돈을 벌었고 그 못지않은 명성도 얻었습니다.
그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수단인이 되었죠.
이제 그의 앞길에는 그동안 번 돈을 바탕으로 누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수단 동포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수단은 크게 이슬람계 세력이 사는 북부 지역과 딩카족을 비롯한
수단지역 원주민들이 사는 남부 지역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인구의 75%이상을 차지하는 이슬람계열은
남부의 토착 수단인들을 종교적인 이유로 끊임없이 탄압해왔죠.
(남부 수단인들은 대부분 기독교나 원시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서구 열강들에 의해 멋대로 분할된 아프리카 각 나라들간의 국경은
이후 끊임없는 내부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민족도, 종교도 서로 다른 북부 수단과 남부 수단은
애초에 한 나라로 묶여서는 안되는 사이였습니다.
이에 남부 수단인들은 분리 독립을 요구했지만
그 지역의 유전을 탐내는 이슬람정부는 결코 용인하지 않았고,
결국 정부군과 수단인민해방군(SPLA, Sudan People's Liberation Army)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전개되었습니다.
20여년간의 내전, 정부의 탄압, 그리고 계속된 가뭄 등으로
남부 수단인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2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피난민과 기아가 속출했죠.
남부 수단 출신인 볼이 이러한 동포들의 고통을 결코 묵과할 리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NBA 선수시절인 1991년부터 매년 여름마다 수단의 피난민 캠프를 방문하며
난민 구호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지들은 대부분 SPLA의 멤버들이었죠.
그는 친지들을 도와 그들의 독립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또한 그는 Ring True Foundation이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해
적극적으로 수단 난민을 기금 마련을 했습니다.
그 자신도 무려 350만달러가 넘는 거금을 기부했구요.
미국에서 번 돈의 거의 대부분을 동포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죠.
그리고 그는 미국에 있을때는 동지들과 함께 의회를 방문해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의 무자비한 탄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수단 대사관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는 등 수단인들의 고통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농구에서 은퇴한 후, 수단으로 돌아온 그에게 정부는 체육부 장관 자리를 제시하며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독실한 크리스챤이자, 동포를 몹시 사랑하는 그는
정부의 권고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한편 정부는 이러한 볼을 반동분자로 지목하고 출국을 억류하며 볼을 고립시킵니다.
볼은 또한 끊임없는 살해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는 치료를 요하는 만성 류마티즘 환자였지만
이슬람인들의 위협때문에 병원조차 제대로 갈 수 없는 신세였죠.
수년간 거의 연금상태로 지내던 볼은
가족과 함께 수단을 빠져나와 이집트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고국의 수단 동포들을 사랑하는 그의 불타오르는 심장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는 난민 구호에 전재산을 써버려 거의 파산상태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기금 마련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것도 불사하죠.
2002년 볼은 Fox TV에서 방송하는 유명인사들간의 복싱 이벤트에 참가합니다.
자신의 복싱경기시간동안 화면 자막으로
Ring True Foundation의 텔레폰 넘버가 나오는 것을 조건으로 하구요.
그의 상대는 전직 풋볼 선수이자 "Refrigerator(냉장고)"라는 별명이 붙은,
400파운드에 육박하는 거구의 William Perry였습니다.
뚱보씨와 갈비씨의 이 세기의 대결은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최종 3라운드 경기에서 볼은 자신의 세계 최고급 리치를 앞세워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둡니다.
그리고 동시에 3만달러라는 거액의 기금도 확보하게 되었구요.
고국의 수단 난민들을 돕기 위한 그의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Central Hockey League의 Indianapolis Ice
아이스하키팀과 깜짝 일일 계약을 맺기도 합니다.
세계 최장신 아이스하키 선수...
물론 그는 이전에 하키 스틱을 잡은 적도, 스케이트도 타 본적도 없었죠.
결국 경기에서 뛰지는 않았지만 7'7"짜리 아이스하키 선수가 벤취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팬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죠.
하지만 주위에선 우려와 비판이 잇다랐습니다.
관중동원과 팀 홍보를 위해 훌륭한 전직 NBA 선수를 동물원 원숭이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고통받는 수단 난민들을 위해 단 한푼이라도 보탤 수 있다면
대중들의 눈요깃감이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충분히 감수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역시 기금 마련을 위해 깜짝 승마 선수로도 변신하며
또 한번 대중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독특한 신체조건과 과거 NBA 스타라는 유명세덕에 그는
아무거나 해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죠.
볼은 자신의 이런 점을 이용해 고통받는 수단 동포들의 비참한 실상을 미국인들에게
좀 더 알리는 한편, 기금을 한푼이라도 더 모아 이들을 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세인들의 관심은 잠깐에 불과했고,
그의 끊임없는 투쟁은 너무나도 애처로왔습니다.
또한 동포들을 돕기 이전에 이미 그 자신부터 생활고에 시달려야했죠.
그리고 일어난 2004년 6월 30일의 끔찍한 사고는
그에게는 너무나도 큰 불행이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의사는 그가 만약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 아니었다면 현장에서 사망했을거라고 말했죠.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지만, 이번엔 또다른 고난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사고가 난 택시는 어처구니없이 보험처리도 제대로 안되있었고,
볼 자신도 가난에 시달리던 터라 의료보험조차 들지 못한 상태였죠.
결국 장기간 입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볼의 입원비는
도저히 감당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한때는 유명 NBA스타로 수백만불을 벌었던 그였지만,
난민 구호 활동과 SPLA 지원으로 이미 전재산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그만 입원비조차 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신세가 되고 만거죠.
하지만 그에게도 희망의 손길이 찾아왔습니다.
딱한 사정을 들은 절친한 친구 크리스 멀린
과거 워리어스 시절 동료였던 리치몬드, 팀 하더웨이와 함께 판타지 농구 캠프를 열어
볼의 병원비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친구들의 도움에 힘입어 볼은 용기를 얻었고 재활의 의지를 불태웁니다.
결국 그는 비록 지팡이 신세를 저야 하지만
자기 힘으로 걸을 수 있는 상태까지 몸이 회복되죠.
그리고 2005년 4월, 볼은 오래간만에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의 또다른 소중한 친구의 초대로요.


Uncle Bol's Cane


지금으로부터 13년전인 1992년 여름, 볼은
이집트의 카이로에 머물면서 농구 캠프를 열고 있었습니다.
이때 볼은 우연히 같은 딩카족 출신의 7살짜리 꼬마 소년을 만나 농구를 가르쳐주죠.
성직자인 꼬마의 아버지는 수단 정부의 탄압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 온 상태였습니다.
농구를 좋아하던 이 꼬마에게 볼은 첫 농구 선생이었죠.
이후 꼬마의 가족은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지만,
이후에도 그는 볼 아저씨처럼 훌륭한 NBA 선수가 되기 위해 농구에 전념합니다.
이후 꼬마는 미국으로 유학와서 열심히 농구에 전념했고,
명문 듀크대학에 입학해 NCAA 토너먼트 결승전 무대까지 서게 되죠.
그리고 과거 볼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대학을 1년만 마치고
바로 2004 NBA 드래프트에 참가,
마침내 전체 7순위시카고 불스에 지명되며 꿈을 이룹니다.
이쯤 되면 그 꼬마가 누군지 아실겁니다.
루올 뎅(Loul Deng)...

드래프트 데이 당일날, 이제는 어른이 된 꼬마는 그의 영웅인 볼 아저씨와 함께,
역사상 두번째로 수단 출신 NBA 선수가 탄생하는 걸 자축합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뎅과 볼 아저씨는 전혀 몰랐습니다.
바로 며칠 뒤에 찾아 올 비극을...
그 이후로 몇개월이 지난 2005년 4월, 시카고의 홈구장인 유나이티드 센터에
지팡이(cane)를 짚은 7풋이 훨씬 넘는 중년의 거인이 나타납니다.
이제는 어엿한 불스의 스타 플레이어가 된 뎅의 첫 농구 스승이자,
전 NBA 스타인 매뉴트 볼... 관객들은 끔찍한 사고를 극복하고 일어선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죠.
그는 식전 tip-off 행사에 참가하며 오래간만에 농구코트에 발을 우뚝 들여놨습니다.
앞으로 그는 건강한 두 발로 코트를 밟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더이상 사랑하는 수단 동포들을 도울만한 여력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고독한 전사는 이제 그 무거웠던 짐을,
자신이 가르쳤던 한 딩카족 꼬마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었습니다.
그의 커리어는 이미 끝났지만, 뎅의 커리어는 이제 시작입니다.
매뉴트 볼... 그는 훌륭한 농구선수이기에 앞서, 훌륭한 휴머니스트입니다.
사랑하는 동포들을 위해 자신이 평생 벌은 전재산을 아낌없이 내놓고,
역으로 자신은 의료보험료조차 못낼 정도로 가난에 시달리던 그...
고통받는 난민들에게 한푼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자신의 명예를 아낌없이 내버리며
동물원 원숭이 취급을 받는 것도 불사했던 그...
그는 거대한 키만큼이나 거대한 심장을 지닌, 한마디로
위대한 거인(Great Giant)입니다.


"God gave this to me."


자신의 엄청난 키를 두고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의 선물이라고...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God gave this to me, too"

고통받는 동포들을 돕는 그의 사명 역시, 신이 내린 또다른 선물이라고...
Manute... "신이 내린 특별한 축복"이라는 뜻의 그 이름처럼,
그는 너무나도 특별하고, 사랑의 축복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직도 수단 난민들은 이슬람 정부의 탄압과 국제적인 무관심속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원합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빠른 시일안에 평화가 찾아와 신이 그들에게 내린 "특별한 축복"이 언젠가 꼭 결실을 맺기를...

...............................................................................................................................................................................

당시 어렸기 때문에 그를 단지 과거 nba에 존제했던 거인선수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니 참 대단했던 선수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누트 볼... 부디 그가 몸건강히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원문작성자 / 허슬 플레이어회원님 )
24
Comments
2007-12-17 19:54:18

원문도 있었군요.

재밌었던 글

2007-12-17 20:04:46

이글은 매니아에 시리즈로 올라왔던 글인데요

WR
2007-12-17 20:07:50

앗!!! 정말인가요
죄송합니다... 곧 삭제하도록 할께여

2007-12-17 20:08:42

아마 제목 그대로 검색하시면 나올겁니다
마크 이튼 편도 있어요

WR
2007-12-17 20:11:04
TheBasket 님 정보 감사 합니다!!! 찾아볼께요..
2007-12-17 20:07:00

예전에 마크 이튼 편과 함께 시리즈로 칼럼(현 매니아진)에 올라왔던 글이군요
그때 봤었지만 다시보니 새롭네요

2007-12-17 20:10:17

이게 아마 허슬 플레이어 님이 쓰신글일겁니다..

WR
2007-12-17 20:12:42

아 허슬 플레이어 님께 죄송해서 어떻해요...

2007-12-17 20:17:28

아 정말 감명깊은 글입니다 와우..

2007-12-17 20:22:08

아. 감동적이네요 멋진 선수 입니다.

WR
2007-12-17 21:04:15

무톰보나 마누트 볼이나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분들 인것같습니다..

2007-12-17 21:27:28

이 글 전에 여기서 읽었는데...
다시 읽어도 감동적이네요.
마누트 볼...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받고 사는 사람이네요

2007-12-17 22:22:41

아, 참고로 이 글에 오타가 있습니다. 볼은 83년 드래프트 5라운드 120번이 아니라 97번입니다. 제가 글을 쓸 당시 간단한 계산을 착각하는 바람에 오타가 났죠...

지금 매니아진에 올라있는 원문은 뒤늦게 수정하긴 했는데 이건 그 전에 펌된 것 같군요.

그리고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볼의 몸상태는 정말 많이 좋아져서 이제는 지팡이 없이도 잘 걸어다닌다고 합니다. 그나마 참 다행이죠.

WR
2007-12-17 22:31:25

아... 이글의 최초작성자인 허슬 플레이어님...
허락없이 이렇게 마음대로 허슬 플레이어님의 글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마누트 볼선수가 많이 좋아 졌다니 너무 다행이네요..
더불어 이런 좋은글을 쓰셔서 읽을수있게 해주신 허슬 플레이어님께 감사드려요..

2007-12-17 22:45:18


정말 좋은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2007-12-17 22:48:07

제가 예전에 이 글을 보고 뎅을 관심있게 지켜보기 시작했죠..

2007-12-18 00:40:46

저는 매니아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기에 이글을 처음보는데요..

처음에는 스크롤이 너무 많기에 어떻게 읽나 걱정했었는데, 어느샌가 몰입되서 다 읽어버렸네요.

좋은글 써주신 허슬플레이어 님께도 감사드리고, 또 좋은글 소개해주신 unkle 님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인간을 사랑하며 사는 삶은 그자체로 축복 이라는걸 깨닫게 해준 위대한 선수 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WR
2007-12-18 04:47:01

진정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은 저런분들이 아닌가싶습니다...

물욕에 사로잡혀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애쓰는 많은이들이 진정 행복한 삻을 살고있는것인지

되묻게되네요... 저를 포함해서..

2007-12-18 09:56:41

허슬플레이어님 글이네요

예전에 감명깊게 읽었더랬죠~

2007-12-18 10:35:54

뮤레산 칼럼 읽다가 피씨방에서 울어버린 기억이 나네요

nba선수들에 관한 칼럼중 지구최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8-01-11 15:43:06

저도 NHK로 본적이 있었는데...

블록이 그렇게 강한 선수였군요...

94년쯤;; 중1.2때 본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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