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를 빛낸 위대한 거인 마누트 볼 (Manute Bol) / 원문작성자..( 허슬 플레이어님 )
2004년 6월 30일 밤, 코네티컷의 한 도로에서 끔찍한 교통사고가 일어났습니다.
Neville Robinson이라는 택시기사가 만취상태로 차를 몰다가,
그만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택시가 전복되버린 사고였죠.
이 사고로 운전자 로빈슨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동승한 승객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채 겨우 목숨만 건지고 맙니다.
7피트가 훌쩍 넘는 이 거구의 승객은 이 사고로 목뼈가 3개나 부러졌으며,
왼손은 거의 뭉개져버렸고, 좌측 슬개골이 부러졌으며,
머리와 가슴부위에도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기적... 맞습니다. 이 승객이 살아난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Manute Bol...
전직 NBA선수였지만 이미 10여년전에 코트를 떠나
이제 팬들의 뇌리속에서 거의 사라져가던,
한때 코트 위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사내였던 그가,
실로 오래간만에 결코 반갑지 않은 소식과 함께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습니다.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 아프리카의 수단 남부 지역...
소를 기르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민족이기도 하죠.
평균신장이 180cm를 훌쩍 넘기는 것은 물론이요,
수단 남부의 평원에서는 소를 치는 7피트짜리
1962년 10월 16일, 딩카족의 한 마을의 추장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특별한 축복(Manute)"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아이는
(참고로 볼의 할아버지인 Chol은 키가 무려 7'10"(239cm)에 달하는 슈퍼 거인이었으며,
꺽다리 매뉴트는 어려서부터 아프리카 평원에서 소를 치며 자랐습니다.
또한 그는 남달리 강한 전사이기도 했죠.
이처럼 문명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던 18살의 그에게,
이 낯선 미국인은 그에게 생전 듣도보도 못한 "Basketball"이란 걸 하자고 권유합니다.
처음 농구공을 잡고 처음 농구코트에 선 그는 림을 향해 맹렬히 돌진,
순탄치 못했던 농구와의 첫만남 만큼이나 그의 타지생활은 험난했습니다.
문명사회의 생활이라곤 전혀 해본적이 없는 그에겐
어렵게 클리블랜드 주립 대학에 진학하긴 했지만
한편, 오로지 농구를 하기 위해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온 이 7'7"짜리 거인의 소식은
결국 그는 1983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며 꿈의 무대를 향한 첫 도전장을 내밀죠.
마침내 그는 5라운드 전체 97번으로
하지만 당시엔 외국인은 22살이후에나 드래프트 참가가 가능하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는 1984년 미 대학농구 디비전II 소속의 Bridgeport 대학에
데뷔 경기에서 그는 상대편의 6'5"짜리 난쟁이(?) 센터를
관중들은 이 엄청난 거인의 첫 공식 데뷔전을 지켜보며
아직까지 농구초짜에 불과했지만 그의 축복받은 엄청난 높이는
이후로도 놀라운 활약을 이어간 그는 총 31경기에서
대학에서 1년을 뛴 후, 바로 USBL의 Rhode Island Gulls란 팀에서 첫 프로 생활을
그는 한 경기에서 18개의 블록슛을 찍기도 했고,
결국 몇달 후 그는 1985년 NBA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전체 31번으로
The Oddiest Player in NBA History
스탠딩 덩크도 가능한 엄청난 키, 그리고 출산드라의 축복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삐쩍 꼴은 몸매, 200파운드에 겨우 턱걸이하는 키에 비해 심히 언발라스한 체중,
그리고 밤에는 자동 클로킹이 될 듯 한 새카만 피부...
그는 단지 특이한 겉모습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사실 그의 독특한 외모-큰 키, 마른 체구, 새카만 피부-는
딩카족 고유의 특징이라고합니다...^^;)
데뷔때부터 그는 독특한 외모만큼이나 독특한 플레이스타일을 선보이며
많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죠.
코트 위에서 그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거라곤
엄청난 키와 팔길이를 바탕으로 한 블록슛 밖에 없었지만,
그 '찍는 재주' 하나만으로도 그는 당당히 NBA 무대에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1986년 1월 25일, 애틀란타전에서는 프랜차이즈 레코드인 15개의 블록슛을 찍는 등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엽기적인 블록행진을 거듭합니다.
루키 시즌 총 80경기에서 평균 26.1분을 출장한 그는
비록 득점과 리바운드는 각기 3.7점, 6.0개에 그쳤지만,
블록슛은 총득점(298점)보다도 많은 무려 397개(평균 4.96개)를 기록하죠.
이 수치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NBA 루키시즌 최다 블록슛 기록입니다.
또한 블록대마왕 마크 이튼을 제치고 당당히 리그 블록슛 1위를 차지,
그 여세를 몰아 올 디펜시브 세컨드팀에도 드는 기염을 토합니다.
(당시 퍼스트팀은 이튼이었죠...)
이런 그의 활약에 힘입어 불렛츠는 이튼이 이끄는 유타를 제치고
리그 최고의 블록슛 군단(총 716개, 리그 1위)으로 거듭나게 되었죠.
(당시 불렛츠에는 볼 말고도 찰스 존스라는 6'9"짜리 언더사이즈 샷블로커가 역시 적잖은 활약을 해줬습니다. 당시 볼과 존스는 둘이서 팀 블록슛의 무려 74%를 책임졌죠. (볼-397개, 존스-133개))
이 해 불렛츠는 39승 43패를 기록, 동부지구 6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1라운드에서 찰스 바클리가 이끄는 강호 필라델피아를 만나 5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지만 아쉽게도 패배하고 맙니다.
루키때부터 플옵 무대를 밟게 된 볼은 평균 4.6득점, 7.6리바운드, 5.8블록슛으로 맹활약했죠.
이듬해인 86-87시즌, 불렛츠는 트레이드로 전설적인 센터 모이제스 말론까지 영입하며
전력보강을 했고, 팀 성적도 42승 40패로 약간 상승했습니다.
2년차인 볼은 말론의 존재때문에 출장시간이 조금 줄기는 했지만
꾸준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전경기에 꼬박 출장, 20분 미만의 출장시간에도 불구하고
3.68개의 블록슛을 기록하며 이튼에 이어 리그 2위에 오르죠.
87년 2월 26일 인디애나전에서는 15개의 블록슛을 기록하며
1년전 자신이 세운 프랜차이즈 기록과 타이를 이루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는 눈에 띄는 큰 한계를 가진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블록슛 하나만큼은 일품이었지만 선천적으로 빼빼마른 체격 탓에
여타 빅맨들과의 몸싸움에서는 한도끝도 없이 밀려야 했죠.
게다가 공격 기술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구요.
그와 비슷한 스타일의 마크 이튼 역시 공격력이 형편없었지만,
이튼과 볼 사이에는 엄연한 큰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이튼은 거구들과 맞서도 밀리지 않는 몸빵이 있었기 때문에
꾸준히 디펜시브 팀에 이름을 올렸지만, 반대로 볼은 빈약한 체구 때문에
힘이 센 매치업 상대에게 쭉쭉 밀리면서 1:1수비에서 결정적인 문제점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그가 디펜시브 팀에 이름을 올린 건 반짝했던 루키시즌 뿐이었죠.
한편 불렛츠는 이해 동부 6위로 다시금 플옵 무대를 밟지만
토마스가 이끄는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스'에게 1라운드에서 스윕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볼 역시 3경기에서 고작 5개의 블록슛에 그치며 제 몫을 못해줬구요.
이듬해인 1987년 드래프트에서 불렛츠는 키가 160cm밖에 안되는
리그 역사상 최단신인 타이론 "Muggsy" 보그스를
1라운드에 지명하는 기발한 선택을 합니다.
160cm의 보그스와 231cm의 볼...
리그 최단신과 최장신이 나란히 서서 뛰는 모습은 관중들에게는 신기한 볼거리를,
사진기자들에겐 무한한 일거리를 제공해주었죠.
그는 77경기에서 평균 14.8분을 뛰며 2.7블록슛(리그 5위)을 기록했고,
결국 불렛츠는 시즌이 끝난 후,
이로 인해 비록 NBA 데뷔의 꿈을 이룩한 정든 워싱턴을 떠나게 됐지만,
Manute Bol attempt three!!!
워리어스에서 그는 돈 넬슨이라는 훌륭한 코치를 만나게 됩니다.
공격에선 전혀 도움이 안되는 볼에게,
넬슨의 지도 아래 볼은 메인 웨폰 블록슛 이외에,
부상으로 이미 망가진 랄프 샘슨 이외에는 변변한 센터조차 없던 워리어스에서 볼은
80경기에서 평균 22분을 출장하며 3.9득점, 5.8리바운드, 그리고 무려 4.3개의 블록슛을
그의 멋진 블록 행진 이외에도, 넬슨이 장착시킨 3점슛이라는 새 무기는
7'7"짜리 꺽다리가 던져대는 무지막지한 3점슛은 키작은 가드나 포워드들만의 전유물로
비록 성공률은 20%대에 그쳤고 시도도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여세를 몰아 1라운드에서
그러나 볼은 이번 플옵 시리즈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득점과 리바운드, 블록슛은 모두 시즌 평균을 밑돌았고
하지만 정규 시즌의 인상적인 활약에 힘입어 그는
한갓 수단의 시골 촌뜨기였던 그가, 마침내 꿈의 무대에서
그러나 이후 멀린-리치몬드-팀 하더웨이로 이어지는 빠른 농구를 지향하는 팀 칼라는
결국 이듬해인 89-90시즌, 볼의 출장시간은 전년도를 밑도는 17.5분에 그쳤습니다.
전매특허인 블록슛만 평균 3.17개(리그 4위)로 인상적이었을 뿐,
간간히 시도하던 3점슛도 1할대의 빈곤한 성공률(.188, 9/48)에 허덕이며
워리어스에서도 입지가 줄어든 볼은 결국 시즌 종료 후
장난기많은 바클리는 처음에는 그저 볼을 골탕먹이려고 짖궂게 농담을 걸었습니다.
서로 농담이 오가는 가운데 한 입담한다는 바클리도
바클리는 그의 재간둥이 거인 친구를 두고,
그와 바클리, 릭 마혼이 함께 한 필라델피아의 락커룸은 연일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팀의 주축 선수들이 부상에 허덕이는 와중에서도 부지런히 전경기에 출장,
하지만 팀 성적은 바클리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지난 3년간 꾸준히 하향세를 거듭했고,
(80년도의 필라델피아는 거의 매년 플옵에 진출하던 강팀이었습니다.)
결국 프랜차이즈 스타 바클리는 92-93시즌을 앞두고 선즈로 트레이드되고 말았고,
한편 절친한 친구를 잃은 볼은 부상에 시달리며 58경기에 출장하는 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비장의 무기 3점슛이 제대로 터지는 통에 평균득점은 오히려 살짝 오르기도 합니다.
이 시즌 10개의 3점슛을 성공시킨 그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30% 이상의 3점슛 성공률(.313, 10/32)을 기록하며 리그 역사상 최장신 3점슈터의 자존심(?)을 지키죠.
하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와 무릎 부상은
시즌 종료 후 그는 마이애미 히트와 FA 계약을 맺지만
얼마 후 친정팀 워싱턴, 필라델피아와 10일계약을 맺고 각각 2게임, 4게임을 뛴 그는
94-95시즌을 앞두고 다시금 골든 스테이트와 FA계약을 맺었지만,
그는 NBA에서 총 10년간 624경기를 뛰며
그의 경기당 평균 블록슛은 마크 이튼에 이어 통산 2위에 올라있으며,
그가 뛴 경기수가 600여경기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치죠.
블록에 특화된 그의 스타일은 독특한 기록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의 개인 통산 블록슛 개수(2086개)는 그의 득점(1599), 수비 리바운드(2051), 필드골 시도(1635) 개수보다도 오히려 많습니다.
블록슛이 나머지보다 상대적으로 나오기 힘든 것임을 감안해본다면
또한 그는 리그에서 1쿼터 최다 블록슛 기록(8개)과
그는 마크 이튼과 함께 리그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슛블로커였습니다.
NBA 무대를 떠난 후, 그는 이태리와 카타르의 프로팀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심한 류마티스와 관절염으로 인해 결국 얼마 안가 은퇴하고
끝나지 않은 그의 싸움
수단에서 태어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룩한 그는 NBA 선수생활을 하면서
그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수단인이 되었죠.
이제 그의 앞길에는 그동안 번 돈을 바탕으로 누릴
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인구의 75%이상을 차지하는 이슬람계열은
민족도, 종교도 서로 다른 북부 수단과 남부 수단은
이에 남부 수단인들은 분리 독립을 요구했지만
20여년간의 내전, 정부의 탄압, 그리고 계속된 가뭄 등으로
2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피난민과 기아가 속출했죠.
남부 수단 출신인 볼이 이러한 동포들의 고통을 결코 묵과할 리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NBA 선수시절인 1991년부터 매년 여름마다 수단의 피난민 캠프를 방문하며
그리고 그의 친지들은 대부분 SPLA의 멤버들이었죠.
또한 그는 Ring True Foundation이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해
미국에서 번 돈의 거의 대부분을 동포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죠.
그리고 그는 미국에 있을때는 동지들과 함께 의회를 방문해
농구에서 은퇴한 후, 수단으로 돌아온 그에게 정부는 체육부 장관 자리를 제시하며
하지만 독실한 크리스챤이자, 동포를 몹시 사랑하는 그는
한편 정부는 이러한 볼을 반동분자로 지목하고 출국을 억류하며 볼을 고립시킵니다.
볼은 또한 끊임없는 살해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수년간 거의 연금상태로 지내던 볼은
하지만 고국의 수단 동포들을 사랑하는 그의 불타오르는 심장은
이미 그는 난민 구호에 전재산을 써버려 거의 파산상태였습니다.
2002년 볼은 Fox TV에서 방송하는 유명인사들간의 복싱 이벤트에 참가합니다.
그의 상대는 전직 풋볼 선수이자 "Refrigerator(냉장고)"라는 별명이 붙은,
고국의 수단 난민들을 돕기 위한 그의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Central Hockey League의 Indianapolis Ice란
결국 경기에서 뛰지는 않았지만 7'7"짜리 아이스하키 선수가 벤취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역시 기금 마련을 위해 깜짝 승마 선수로도 변신하며
볼은 자신의 이런 점을 이용해 고통받는 수단 동포들의 비참한 실상을 미국인들에게
하지만 세인들의 관심은 잠깐에 불과했고,
그리고 일어난 2004년 6월 30일의 끔찍한 사고는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지만, 이번엔 또다른 고난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사고가 난 택시는 어처구니없이 보험처리도 제대로 안되있었고,
결국 장기간 입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볼의 입원비는
한때는 유명 NBA스타로 수백만불을 벌었던 그였지만,
하지만 그에게도 희망의 손길이 찾아왔습니다.
친구들의 도움에 힘입어 볼은 용기를 얻었고 재활의 의지를 불태웁니다.
결국 그는 비록 지팡이 신세를 저야 하지만
그리고 2005년 4월, 볼은 오래간만에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나타냅니다.
Uncle Bol's Cane
지금으로부터 13년전인 1992년 여름, 볼은
이후 꼬마의 가족은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지만,
이후 꼬마는 미국으로 유학와서 열심히 농구에 전념했고,
그리고 과거 볼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대학을 1년만 마치고
이쯤 되면 그 꼬마가 누군지 아실겁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뎅과 볼 아저씨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 이후로 몇개월이 지난 2005년 4월, 시카고의 홈구장인 유나이티드 센터에
이제는 어엿한 불스의 스타 플레이어가 된 뎅의 첫 농구 스승이자,
그는 식전 tip-off 행사에 참가하며 오래간만에 농구코트에 발을 우뚝 들여놨습니다.
앞으로 그는 건강한 두 발로 코트를 밟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이 고독한 전사는 이제 그 무거웠던 짐을,
그의 커리어는 이미 끝났지만, 뎅의 커리어는 이제 시작입니다.
매뉴트 볼... 그는 훌륭한 농구선수이기에 앞서, 훌륭한 휴머니스트입니다.
사랑하는 동포들을 위해 자신이 평생 벌은 전재산을 아낌없이 내놓고,
고통받는 난민들에게 한푼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자신의 명예를 아낌없이 내버리며
그는 거대한 키만큼이나 거대한 심장을 지닌, 한마디로
"God gave this to me."
자신의 엄청난 키를 두고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의 선물이라고...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고통받는 동포들을 돕는 그의 사명 역시, 신이 내린 또다른 선물이라고...
Manute... "신이 내린 특별한 축복"이라는 뜻의 그 이름처럼,
아직도 수단 난민들은 이슬람 정부의 탄압과 국제적인 무관심속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원합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빠른 시일안에 평화가 찾아와 신이 그들에게 내린 "특별한 축복"이 언젠가 꼭 결실을 맺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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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어렸기 때문에 그를 단지 과거 nba에 존제했던 거인선수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니 참 대단했던 선수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누트 볼... 부디 그가 몸건강히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원문작성자 / 허슬 플레이어회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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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도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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