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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빙자한 요약] 아틀란타 호크스의 인종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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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9 15:59:08

원문은 이 곳: http://www.ledger-enquirer.com/2013/11/07/2784868/columbus-state-atlanta-hawks.html

발도스타 대학의 토마스 에일레오라는 역사 및 흑인 연구 분야의 교수가 콜럼버스 주립대학에서 한 강의입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어서 전문 번역…은 아니고 요약만 합니다만…남부 흑인 연구 쪽은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분야이기도 하거니와 응원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옛날 야그이기도 해서, 원문 작성자의 허락 안 받고 걍 대충 적습니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오진 않겠죠. 문제가 되면 당연히 삭제함다.  아, 뭐 제 영어 실력이 메롱이기도 한게 근본 문제이기도 합니다.

헌데 요약하기 전에 남부 쪽 상황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그래서 딥 사우스에 대해 끄적거려보는데요. (아시는 분은 스킵하셔도 됩니다)

글 읽다보면 딥 사우스(Deep South)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원래 사우스면 남쪽에 있는 주들을 두루 말합니다만 딥 사우스면 조금 얘기가 달라집니다. 주 경계를 완전하게 일치는 하지 않기 때문에 딱 이 주가 딥 사우스라고 이야기하긴 뭣합니다만, 대개 동부에서 인종 차별이 심하고 농업 위주였던 남부주들을 이야기한다고 보시면 맞을 듯 합니다. 어떤 주가 딥 사우스에 속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갈립니다만 대충 조지아를 필두로 알라배마,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사우스 캐롤라이나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플로리다나 텍사스 이런 주까지는 잘 안 넣는데요 플로리다는 남부 주라고 하기엔 북부에서 은퇴하고 요양하신 분들이 주로 사는 이미지이고 (물론 최근엔 라틴계 이민자들이 좀 많아졌지만요), 텍사스 쪽은 미묘하게 문화가 좀 다릅니다. 어쨌든 딥 사우스라면 대충 과거 인종 차별이 심했더라로 보시면 되고 지금도 좀 그런 문화가 남아있긴 합니다. 예를 들어 조지아 쪽 도시들을 주욱 살펴보면 아직까지 푸른색 엑스자가 그려진 남부 연합 깃발이 휘날리는 곳이 많습니다. 흑인들이 꼬박꼬박 Sir나 Ma’am을 써가며 백인들에게 알아서 기어야 하는 (…) 뭐, 그런 걸 기대하는 문화도 은근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남부 사람들, 특히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남부 백인들은 은근히 북부에 대한 피해 의식도 있더라고요 , 뭐랄까, 과거 남북 전쟁 때 발린—특히나 아틀란타가 깡그리 밀려버린—역사도 있거니와 남부 백인들에 대한 편견이 트랙터나 끄는 깡촌의 뇌가 청순한 분들. 괴랄한 […] 남부 사투리 때문에 무시당하는 경향도 좀 있고요.

때문에 나름의 차별과 무시에 대항하여 남부 분들이 흑인이고 백인이고 할 것 없이 ‘우리끼리 노는거다’하고 각자의 인종-지역 공동체 안에서 열라 동료 의식 발휘하는 면도 좀 있습니다.

이런 특성을 염두에 두시고 아래 글을 읽으시면 좀 이해하시기 편할 겁니다.
편의상 경어는 생략합니다.


By MARK RICE — mrice@ledger-enquirer.com
(해당 강의를 취재한 해당 학교 학내 기자인 듯 하네요)
레니 윌킨스부터 다미닉 윌킨스까지, “백인의 희망” 슬로건과 인종 문제가 뜨거운 감자였던 조지아 주지사 선거운동 사이에서, 토마스 아옐로 교수는 목요일, 콜럼버스 주립 대학에서 조지아의 프로 농구 팀인 호크스가 스포츠 영역을넘어서 미친 영향에 대해 60분간 강의한 내용의 요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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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를 떠나 아틀란타로 간 호크스의 행보는 당시의 시대나 옮겨간 장소를 고려했을 때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호크스는 1967년-1968년 시즌, 세인트루이스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에서NBA 서부 디비전 파이널까지 올라갔다 (팀은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게 졌다). 그러나 당시 호크스 소유주는 세인트루이스 시가 새 농구장 건설 제안을 거절해버리자 팀을 팔아버렸다.

이 팀을 1968년 5월 3일, 아틀란타의 부동산 개발업자 탐 커슨즈와 아틀란타의 전 시장, 칼 샌더스가 공동으로 구매했다. 헌데 그 때는 하필 (이 지역에서 활동 중이었던) 마틴 루터 킹 쥬니어의 암살이 있었던 때로부터 한 달 후 였다. 게다가 당시 미 전역의 100여 군데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던 중이었다. 이런 상황은  백인들에게 위험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백인들은 어반 지역에서의 소요 사태들과 비폭력적 지도자의 죽음을 함께 결부시켜 시대 상황을 대단히 심각하면서도 두려운 문제로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 구단주 커슨스는 호크스를 아틀란타 지역 경제 활성화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더불어 그는 아틀란타에 60케이커의 땅을 갖고 있다. 때문에 최초에 호크스가 아틀란타로 온 건 경제적 이유가 주였다. 아직 아틀란타의 새 경기장은 완성되지 못해 조지아텍 경기장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런데  경제 문제로 찾아온 호크스 구단에 인종 문제가 끼어들었다. 사실 앞서 말한 혼돈의 시대에 프로 농구라는, 흑인들의 리그에 속했던 흑인 팀이 (흑백 통합 정책이 시행된지 10년도 안된) 1960년대, 다른 곳도 아니고 백인 천지였던 남부, 조지아 지역에 온 건 정말로 무시못할 사건이었다.

이 때 팀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 레니 윌킨스의 트레이드 사건. 호크스 가드 레니 윌킨스는 1968년 시즌이 끝난 시점에서 MVP 투표에서 필라델피아의 체임벌린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표를 얻었다. 이에 윌킨스는 아틀란타 지역지 기사에 종종 나오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다만 선수로서의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윌킨스는 직전 시즌에 3만 불을 받았는데 문제는 당시 MVP 체임벌린은 25만불을 받고 있었다. 윌킨스는 이에 팀에 연봉 인상을 요구했다. 그가 바랐던 금액은 2년간 6만 불. 하지만 아틀란타에 있는 호크스의 새 주인은 그에게4만불을 제시했다. 이에 윌킨스는 트레이닝 캠프 참여를 거부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호크스는 그를 트레이드 했다. 아마도 “딥 사우스에 막 발을 들인 흑인 팀의 입장에서 건방지면서도 전투적인 흑인 친구 하나가 백인 사회인 남부 지역에서 자기 주장을 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1968년, 새 도시에서 새 시즌을 맞게 된 호크스인데 첫 시즌, 당시 호크스 로스터에 백인이 딱 둘이었다. 그리고 69년, 이어찾아온 두 번째 시즌. 시즌을 48승 34패로 끝냈고 당시 디비젼 1위팀 레이커스에 이어 디비젼 2위 를 차지하였다.  레이커스에게 디비전 파이널에서  졌던 그 시즌의 호크스. (성적은 나쁘지 않았으나) 관중은 첫 시즌보다 떨어졌다. 경기력 측면으로 볼 떄 경쟁력 있는 팀이 분명한 호크스였음에도 말이다. 이에 호크스 운영진들은 팀 스쿼드의 재능있는 선수들을 포기하면서까지 팀을 화이트로 칠해버리기로 결정했다. 다시 말해 이는 (레니 윌킨스에 이어) 또 다른 흑인 수퍼스타를 판다는 의미였다. 폴 사일러스가 그 대상이었다.

호크스는 다음 시즌, 즉, 1970년, 더 많이 전파를 탔다. 헌데 성적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디비젼 파이널에서 또 레이커스에게 졌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슬슬, 괜찮았던 프렌차이즈가 망가진다. 인종 문제때문에 허옇게 허옇게 칠해지던 팀이 이윽고 석회화를 경험했다 해야 할지.

어쨌든 이 해, 1970년 드래프트에서 호크스는 3번째 픽을 행사한다. 바로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의 피트 마라비치를 택했는데 사실 마라비치는 GM인 마티 브레이크와 감독인 리치 게린의 반대를 뒤로하고 구단주 커슨스가 뽑은 선수였다. 마라비치는 흑인처럼 플레이할 수 있는 백인 선수이었고 동시에 “백인의 희망”가 되길 원하고 있었다. 이에 그 구단주—아까 레니 윌킨스에게 2년에 걸쳐 6만불을 주기를 거절했던 그 구단주--- 는 백인 루키 마라비치에게 5년 동안 150만불, 즉 1.5밀을 안겨준다.

더불어 1970년, 호크스는 새로운 홍보 전략을 채택하는데 바로 “뉴 호크스” 였다. 한때 서부 컨퍼런스의 챔피언이었던 역사를 뒤로 하고 “백인이 플레이한다”라는 그 이유로 말이다. 게다가 1970년 홈 게임 때엔 백인 밴드들이 등장, “딕시”를 연주했다. (주: 남부군 군가로도 쓰였던  I wish I was in the Dixie를 말합니다. 이 지역 네이티브가 아닌 제가 보기엔 요즘도 조지아 시골 지역에서 자란 백인들은  이 노래를 남부의 역사를 상징하는 노래로 받아들이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이 지역의 흑인들은 이 노래를 질색 팔색하더군요).

그리고 호크스는 1970년 시즌 초 마라비치와 함께 7승 21패를 찍었다. 호크스의 흑인 베테랑 선수들은 높은 연봉을 받은 마라비치에 대해 분개했다. 마라비치의 과감한 패스가 뿌려졌지만 흑인 선수들의 분노를 심화시킬 뿐이었다. 결국 이 해 호크스는 36승 46패를 찍고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탈락하였다.

헌데 팀 전력이 약해졌음에도 호크스의 인기는 높아졌다. 13 게임의 티켓이 매진되었으며 나머지도 20퍼센트 이상의 관객 상승도를 보였다. 팀 수입도 50퍼센트 이상 높아졌다.

어찌되었건 딥 사우스 지역에 들어간 첫번째 NBA팀인 호크스와 그 팀을 둘러싸고 벌어진 마라비치 와의 이야기는 인종 문제 측면으로 볼 때 공공의 관심을 끌만한 스토리였다. 하지만 그다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

문제는 1970년 조지아 주지사 선거, 호크스의 공동 구단주 칼 샌더스는 주지사 자리를 다시 한 번 노려보기로 결심하면서 인종 문제가 불거진다. 당시 주지사였던 레스트 매덕스는주 헌법 상 한연임할 수 없었다. 때문에 샌더스의 경쟁자는 당시 주 상원의원이었던 지미 카터였다.

샌더스는 카터를 파퓰리즘으로 규정하기 위한 중간 전략을 채택했다 (주: 당시 카터는 인종 차별 철폐에 친화적인 정책을 선거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즉 당시 사람들이 볼 때 흑인에게 치우친 정책을 공약으로 들고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샌더스 측은 샌더스가 키 큰 흑인 둘이 붓는 샴페인을 맞는 사진을 사용했는데, 이 사진은 (스포츠를 아는 사람이 볼 때) 샌더스가 구단주로 있는 아틀란타 호크스가 디비전 챔피온을 자축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즉, 그냥 프로 스포츠와 관련된 사진 한 장이었다. 헌데 아틀란타 외곽에 사는, 호크스에 대해 잘 모르는 조지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사진은 정체 불명의 사진이었다.

사진의 의미야 어쨌든 샌더스의 주지사 선거 본부는 이 사진을 아틀란타 외곽 지역의 시골에도 보냈다. 사진은 KKK 행진에도 사용되었으며 남침례 교회 (주: 조지아 아틀란타에 본부를 둔, 미국 최대의 개신교단입니다) 안에도 걸렸다. 사진을 본 아틀란타 외곽의 조지아 사람들은 샌더스의 부를 연상했고 동시에 술과, (샌더스의 의도와는 다르게)  샌더스와 (질나쁜) 흑인 사이의 연합을 보았다 (주: 해당 사진에서 스포츠를 빼고 나면 술에 쪄든(?) 흑인 및 그들과 술쳐먹는(?) 샌더스만 남게 되죠. 헌데 기독교 문화가 장난 아니게 강한 조지아 지역은 술에 대해 엄격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지아의 몇 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평일의 경우 밤 11시 이후 마트에서 술 판매 금지, .주일날에도 술판매 금지였습니다).

결국 선거는 지미 카터가 이겼다. 즉, 1970년, 주지사 선거 운동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미래의 대통령을 주지사 선거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인종간 벽을 허무는 이미지로서 나타났던 호크스및 ‘검은’ NBA의 이미지는 엉뚱하게도 조지아의 백인 사회에 에 있어서 남부 백인들의 이익에 반하는 돈의 흐름으로 보인 것이다. 재미있는 건 지미 카터가 주지사가 된 후 호크스 경기를 관람했던 곳은 새 경기장인 옴니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옴니는 라틴어로 ‘모두’라는 뜻. 포용하기를 의미하는 이 단어가 실상은 구분짓기를 표상하게 되었달까.

그리고 그 해 1970년 막바지, 앞서 말했듯이 성적 측면으로 볼 때 호크스는 계속 버벅거렸다. 5할  아래를 찍었으니까. 동시에 리그에서 가장 저조한 좌석 점유율을 기록한다.

결국 1960년대, 인종 문제와 연결되는 바람에 인기를 모았던 호크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인종 문제와 연결되는 바람에 인기가 잃고 말았다. 호크 는 이후1985년-86년 시즌에서야 인기를 되찾을 수 있었는데 이는 조지아 대학의 도미닉 윌킨스의 등장 덕택이었다.

윌킨스의 별명은 휴먼 하이라이트 필름. 그는 조지아 지역의 백인 팬들로부터 우리 지역에서 나온 재미있고도 아주 잘 ‘평범스러워진’ 흑인으로 간주되었다 (주: 북부에서 온, 라디컬한, 남부 백인을 공격할 리 없는, ‘필름에나 나올법한’ 얌전한 흑인이라는 의미인 듯 하네요).  더불어 60년대, 인종 문제가 끼어드는 바람에 호크스에서 트레이드된 올스타, 레니 윌킨스는 은퇴하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뒤 감독으로서 호크스에서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커리어를 보낸다.  결국 아틀란타 호크스, 딥 사우스에 위치한 이 팀은 프렌차이즈 커리어를 레니 윌킨스를 트레이드라는 인종 관련 사건으로 시작한 셈.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에야 인종문제와는 다소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도미닉 윌킨스라는 흑인 스타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2004년, 도미닉 윌킨스—레니 윌킨스와 마찬가지로 명예의 전당 입성자이기도 하다— 역시 레니 윌킨스처럼 호크스에 돌아왔다.  돌아온 도미닉은 현재 호크스의VP(Vice President) 로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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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3-11-09 22:24:07

남부 흑인 연구 속에 

레니 윌킨스의 트레이드 이유, 피트의 패싱 센스에 비해 어시스트 갯수가 적은 이유
그리고 전통적으로 관중 수 가 적은 호크스의 최초 원인 까지 나와있군요..

잘 봤습니다. 
2013-11-10 01:38:08

가뜩이나 호크스 관련 소식은 어딜가나 드문데 이런 좋은 글이라니요. 잘 보았습니다. 다만 이렇게 묻혀있는게 아쉬운데 매니아진으로 이동하길 바랍니다. 헝헝 


den
lal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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