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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포틀랜드의 역사 - 드렉슬러의 시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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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1 12:47:12


원문 : http://www.blazersedge.com/2011/7/12/2272421/the-history-of-the-portland-trail-blazers-the-drexler-era-part-2






  포틀랜드는 코어인 클라이드 드렉슬러, 제롬 커시, 테리 포터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서 88-89 시즌을 맞이했다. 베테랑인 스티브 존슨과 키키 벤더웨이, 여기에 두 명의 유망한 센터 샘 보위와 케빈 덕워스가 이 젊은 폭주기관차들을 받쳐줬다. 이러한 기대는 부상, 케미스트리 부족, 만성적인 수비 문제라는 암초를 만나 비참하게 좌초했다. 1989년 여름까지 밴더웨이는 트레이드 되었고, 마이크 슐러 감독은 해고당했다. 오프시즌에 돌입한지 겨우 몇주만에, 스티브 존슨은 확장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 지명 가능 대상자가 되었고 팀을 떠났다. 포틀랜드는 성장하는 선수들, 베테랑의 부재, 조직력의 부재, 수비력의 부재, 터프함의 부재, 뎁스의 부재, 그리고 전 시즌의 실망스러운 39승 이후 방향을 잃어버린듯한 모습들의 느슨한 연합체로서 1989년 드래프트에 임했다. 포틀랜드 신도들에게는 다행히도 포틀랜드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오프시즌을 보내려 하고 있었다. 이런 칭호는 놀랍게도 단 두번의 움직임으로 생기게 된다.


  6월 24일, 포틀랜드는 그들이 실행했던 단일 트레이드 사상 가장 효과적인('일방적'이 아니라 '효과적'이다)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부상이 잦은 센터 샘 보위를 뉴저지로 보내고 PF 벅 윌리엄스를 받았다. 윌리엄스는 뉴저지에서 인기 스타였지만, 뉴저지는 윌리엄스가 28세로 불가피하게 전성기가 지나려 했기에 딜을 하려고 했고, 그 댓가로 센터를 받았다. 포틀랜드는 윌리엄스를 얻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윌리엄스는 팀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 윌리엄스는 포틀랜드에 부족했던 베테랑이었다.

- 윌리엄스는 PF였다. 포틀랜드는 지난 5년간 6명의 PF를 거쳐왔다.

- 윌리엄스는 수비에 능했다.

- 윌리엄스는 강철처럼 강인했다.

- 윌리엄스는 효과적이기 위해 공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하면 득점할 수 있었다. 커리어 대부분에서 평균 18득점 이상을 했다.

- 윌리엄스는 인사이드에서 놀면서 리바운드를 해냈는데, 이는 덕워스가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부족했던 자질이었다. 덕워스는 컨택을 꺼리고 페이스업 점퍼를 선호했다. 벅 윌리엄스는 컨택을 '만들어내고', 상대 눈앞에서 뛰어오르기를 즐겨했다.

- 윌리엄스는 리그 최고의 케미스트리 가이 중에 하나였다.


  포틀랜드 라인업에 윌리엄스가 가세한 것은 꿀에 레몬을, 프렌치 프라이에 케첩을, 연어 무스에 death를 더한 것과 같았다. 그것은 요리의 완성이었다. 윌리엄스는 말그대로 한묶음에 담긴 포틀랜드가 그리워했던 모든 것이었다.


  포틀랜드는 사흘 후에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픽으로 약간 문제가 있는 코네티컷의 포워드 클리포드 로빈슨을 지명하면서 다시 사고를 쳤다. 로빈슨은 6-10에 기동력이 좋고 공격 위주의 선수로 새로운 유형의 빅맨들의 선구자였다. 전통적인 PF와 C들은 자신의 몸을 내던져왔다. 클리프는 그들보다 더 빨리 뛰고 더 슛을 잘 쏘는데 자신이 있었으며, 그들이 무거운 발을 움직이기 전에 솟구쳐서 점퍼를 쏘거나 림에 도달해 있었다. 로빈슨은 수비가 가능했고, 원하는대로 슛을 쏠 수 있었으며, 프론트코트의 3가지 포지션 모두를 소화할 수 있었다.


  1989년 드래프트에서 포틀랜드의 1라운드 지명은 가드 바이런 어빙으로, 또다른 현명한 트레이드로서 곧 유명해지게 된다. 3라운드에서는 드라젠 페트로비치라는 젊은 크로아티아 스타를 지명했다. 페트로비치는 리그에서 누구 못지않은 퓨어 슈터로 모국에서는 '크로아티아 조던'이라 불렸다.


  72시간 만에 포틀랜드는 뎁스와 사이즈 문제를 해결했으며, 또한 2명의 유망한 가드를 지명했다. 윌리엄스를 얻은 것은 도시 전체에서 회자되었다. 유일하게 포틀랜드가 부족한 것은 덕워스를 백업할 센터였다. 1984년 오프시즌과는 정반대로, 원래 보위의 자리를 위해 트레이드 되었던 웨인 쿠퍼가 이제는 보위가 떠난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포틀랜드로 돌아왔다. 포틀랜드는 로스터가 꽉 찼고 89-90 시즌으로 향할 준비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가올 시즌에 좋아질 - 정말 좋아질 -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새로운 라인업이 일궈낼 즉각적이고 미친듯한 성공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포틀랜드는 15승 5패로 시즌을 시작했다. 약간 편한 스케줄 덕을 보긴 했지만, 과거 5할 언저리에서 시작하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포틀랜드는 '모든 것'을 잘 해냈다. 그들은 리바운드하고 달리고 수비하고 득점했다. 드렉슬러는 여전히 대들보였지만, 주변으로 공을 더 돌렸다. 동료들은 오픈 찬스를 무지막지한 성공률로 보답했다. 테리 포터가 시즌 야투율 46%였는데, 이게 주전 라인업 중에 가장 낮은 성공률이었다. 이전 시즌에 포틀랜드는 열심히 뛰고 평균 114.6 득점을 했지만, 실점도 113.1점이었다. 89-90 시즌의 포틀랜드는 득점(114.2)과 페이스는 모두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점은 즉시 5점 이상 하락한 107.9점에 그쳤다. 그것은 기적적인 다이어트 디저트였다 : 모든 맛이 있고, 결함은 없었다. 그리고 충격은 계속해서 다가올 뿐이었다. 1월 말에 성적은 31승 12패였다. 3월 중순에는 10연승을 달리면서 48승 18패가 되었다. 3월 27일 화요일, 포틀랜드는 지배자 레이커스를 130-111로 격파하면서 50승 20패가 되었다. 이때쯤에 홈 관중들은 확신에 찬 광신자가 되었다. 조짐은 모든 곳에 있었다. 소음은 귀청을 찢었다. 블레이저매니아가 돌아왔다.


  그리고 상황은 더욱 좋아지기만 하고 있었다.



  포틀랜드는 레이커스를 격파하면서 - 무의미하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 정규시즌을 59승 23패로 마감했다. 누구도 이팀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이 시기에 서부 컨퍼런스에는 많은 엘리트 팀이 나타났다. 샌안토니오에는 리그 MVP 데이비드 로빈슨과 고화력의 슈터들이 있었다. 피닉스에는 스피드마스터 케빈 존슨과 폭발적인 득점원인 톰 체임버스가 버티고 있었다. 존 스탁턴과 칼 말론은 유타에서 막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물론 터줏대감인 레이커스가 있었다. 포틀랜드는 이 해에 59승을 하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레이커스는 63승을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포스트시즌에서 포틀랜드의 여정에는 많은 낙관론이 뒤따랐지만, 그것은 한두번 숨막히게 침을 삼키는걸 동반했다. 포틀랜드는 바로 최근의 역사에서 훨씬 더 나쁜 팀들을 상대로 서투르게 싸워왔다. 이번시즌은 다르다고 증명해낼까?


  플옵 대진에서 첫 상대로 나타난 것은 댈러스 매버릭스였다. 댈러스에는 여전히 롤랜도 블랙맨, 데릭 하퍼, 아드리안 댄틀리, 샘 퍼킨스가 있었고 여기에 로이 타플리라는 운동능력 좋은 젊은 센터가 가세했다. 포틀랜드는 댈러스를 벽으로 몰아붙여 홈에서 2승을 선취했고, 시리즈를 결정짓는 원정 3차전에서 가장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라운드 징크스는 정말 사라진듯 했다. 다음 상대는 샌안토니오였다.


  샌안토니오는 로빈슨에 PF 테리 커밍스, 좋은 명궁 션 엘리엇, 화려한 PG 로드 스트릭랜드 등이 있어 장난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케빈 덕워스가 댈러스와의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손이 부러지는 바람에, 포틀랜드는 가장 덕워스를 필요로 하는 시기에 덕워스 없이 시리즈를 치러야 했다. 이제 젊고 운동능력 좋은 로빈슨을 노장 웨인 쿠퍼나 PF가 막게 되었다. 스퍼스는 그들의 빅맨에 대한 어떤 더블팀에도 이점을 가져갈 수 있을만큼 깊이가 있었다. 포틀랜드는 곤경에 처했다.


  시리즈는 곧 익숙한 패턴으로 전개되었다. 포틀랜드가 홈에서 첫 2경기를 승리했지만, 샌안토니오에서의 다음 2경기는 대패했다. 포틀랜드는 5차전을 138-132로 잡아냈지만, 2차 연장까지 가야했다. 스퍼스는 슬금슬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샌안토니오는 6차전에서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고 홈코트에서 15점차로 승리했다. 시리즈는 7차전까지 왔고, 스퍼스는 양팀 사이의 어떠한 차이라도 좁혀갈 모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점점 더 목이 메여왔다.


  양팀이 7차전을 위해 모이자 흥분과 당연한 초조함이 뒤섞였다. 워밍업 시간에 덕워스가 유니폼을 입고 깁스'없이' 라커룸 통로를 걸어 내려오자 초조함은 안도의 난리법석으로 변했다. 덕워스는 로빈슨에 대해 어떤 종류의 이점이든 팀에게 주기 위해 의사의 지시를 거슬렀다. 그리고 포틀랜드는 그 이점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샌안토니오는 날아오는 모든 펀치를 자신들이 가진 펀치로 받아쳤고, 포틀랜드는 경기를 속이 뒤틀리는 연장전으로 몰고 가기 위해 맹추격을 해야했다. 어느 팀도 지속적인 이점을 갖지 못했다. 무언가 깨져야 했다. 


  연장전 30초를 남기고 점수는 103-103으로 동점이었고, 샌안토니오가 공격권을 갖고 있었다. 갑자기 로드 스트릭랜드가 머리 뒤로 믿을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패스를 자신만이 본 커터 - 왜냐하면 커터는 아무도 없었다 - 에게 날렸다. 절대 물러서지 않는 선수인 커시는 잘못된 패스에 달려들어서는, 쇄도하는 드렉슬러에게 전력으로 코트를 가로지르는 패스를 했다. 드렉슬러는 인텐셔널 파울로 보상받았고, 자유투를 집어넣었다. 포틀랜드는 이어진 공격에서 득점하며 4점차로 앞서나갔다. 이후 짧은 공방으로 샌안토니오가 3점차로 따라왔고, 포터는 샌안토니오의 마지막 인바운드 패스를 가로채면서 승리를 굳혔다. 포틀랜드 선수들은 모두 코트로 뛰어나와서 오래전 우승 시즌 이후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복귀한 것을 축하했다.


  대진표 반대편에서는 피닉스가 레이커스를 가볍게 업셋했다. 이제 포틀랜드는 케빈 존슨, 체임버스, 에디 존슨, 댄 멀리, 그리고 리그 어떤 팀도 공격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집단과 마주하게 된다. 샌안토니오 시리즈의 경향은 계속 이어져서, 포틀랜드는 홈에서 첫 2경기를 간신히 승리했는데 2경기 도합 3점차밖에 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원정에서 대패했다. 포틀랜드는 홈에서 5차전을 잡아냈고, 피닉스에서는 맹렬하고 결연한 경기를 펼쳐 선즈를 충격에 빠트린 가운데 112-109로 승리했다. 포틀랜드는 NBA 파이널로 돌아왔다.

 

  라디오 진행자 스콧 린이 경기 후의 쇼에서 피닉스로부터 돌아오는 블레이저스의 비행기가 나중에 그날 저녁 힐스보로 공항에 도착한다고 발표하자, 6차전의 승리는 포틀랜드 팬들의 전설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도시의 절반이 미친듯이 경적을 울리며 차를 운전하는 바람에, 어쨌든 사람들이 잠든 교외로 운전대를 돌리는건 쉬운 일이었다. 수천명의 팬들이 전적으로 신뢰받는 시설로 몰려왔다. 팬들은 길에 늘어섰다. 팬들은 나무에 올라갔다. 펜스가 활주로와 바깥 세계를 기술적으로 갈라놓고 있었지만, 무수한 사람들이 펜스가 간단히 부서질 때까지 기어올랐고, 수백명이 그 사이를 진군했다. 블레이저스의 비행기가 늦은 밤의 어둠 속에 착륙했을 때, 블레이저스는 그들을 기다리는 환영 인파를 마주했다. 미디어가 군중들을 쫓으면서 마이크가 준비되었고 많은 선수들이 즉석 연설을 했는데 한번 할때마다 더 큰 함성으로 이어졌다. 그날 밤 작은 공항으로부터 나오는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따라 집에 오는데 몇시간이 걸렸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모두가 흥분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좋은 친구들은 다시 한번 산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아아, 아이재이아 토마스, 조 듀마스, 그리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는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다. 양팀은 59승으로 동률이었지만, 디트로이트가 타이브레이커를 가졌기에 홈에서 시리즈를 시작했고, 1차전을 승리했다. 포틀랜드는 2차전에서 연장 끝에 승리했다. C 빌 레임비어가 말도 안되는 숫자의 3점을 성공시켰지만, 포틀랜드가 자유투로 따라붙었던 경기였다. 포틀랜드는 홈코트 어드밴티지와 추측컨대 모멘텀을 갖고 있었다. 3차전에서 15점차로 패배하고 4차전에서 석패하면서 그 모멘텀은 완전히 사라졌다. 4차전에서 백업가드 대니 영이 코트 2/3 지점에서 던진 동점 버저비터는 머리카락 한 올 정도의 차이로 심판 얼 스톰에 의해 (정확히) 인정되지 않았다. 1/4초 차이로 포틀랜드는 시리즈를 회복할 유일한 기회를 잃어버렸다. 디트로이트의 터프함과 리바운드는 감당할 수 없었고, 5차전은 92-90으로 패배했다. 충격적이게도 항상 홈코트의 영웅이었던 블레이저스는 홈에서 열린 3경기를 모두 패배했다. 1989-90 시즌의 꿈은 우울한 모습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 우울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정한 포틀랜드 정신으로 팬들은 시내 파이오니어 광장에서 열린 포스트시즌 행진에 수천명이 참여했고, 그 행진에는 다음 해에 들어올릴 우승컵을 요구하는 응원과 약속 뿐이었다. 팀과 팬들에게는 빛나는 시대였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시대는 훨씬 더 밝아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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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1-08-21 15:11:42
로드 스트릭랜드..
결국 AD(After Drexler)시대에 잠시 포틀랜드를 이끌었었죠..
한 떄 톱 5 포인트가드에도 들었었던..
 
그를 워싱턴에 보내고 데리고 온 것이,
라쉬드..
WR
2011-08-21 20:19:05

뛰어난 선수지만 포틀랜드에서는 포터와 겹치면서 큰 시너지는 내지 못한듯 합니다.

Updated at 2011-08-21 23:12:19
스트릭랜드가 포틀랜드에 온 시기가
드렉슬러와 동료들의 전성시대에 비해 약간 늦기도 했고..
 
드렉슬러 시대의 선수들이 팀을 떠나고,리빌딩되는 과정에서..
구단도 스트릭랜드의 능력을 믿고,
결국 포터를 미네소타로 트레이드시켰죠..
 
잠시지만,실질적인 리더를 스트릭랜드가 맡은 시기도 있습니다..
 
드렉슬러시대-(잠시)스트릭랜드 시대-올스타팀 시대
이건 그 시기 포틀랜드에 관심이 좀 있었기에 기억합니다..
급속도로 몰락하긴 했지만,
저 시기의 스트릭랜드는 정말 대단한 포인트가드였죠..
2011-08-21 16:12:48

덕워스가 몸싸움을 꺼려하는 스타일이었군요..


덩치는 산만했는데.. 
WR
2011-08-21 20:22:00

사람의 성향에 따른 차이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2011-08-21 20:53:37
정말 잘 봤습니다 이제 마사장님이 슬슬 나오시려나
WR
2011-08-21 22:46:04

역시 그분의 전성기와 일치하다보니 관심이 모아지네요

2011-08-22 10:36:34
스트릭랜드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그 패스는
몇번을 돌려봐도 당황스러워요;; 왜 거기서 그런 패스를 할 생각을 했는지...
WR
2011-08-22 21:37:36

누가 먼저 실수하냐의 싸움이었는데 포틀랜드쪽에 운이 따라준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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