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리 어빙은 농구가 하기 싫은 걸까? (데이터주의)
카이리 어빙은
농구가 하기 싫은 걸까?
- [KAI Story: 카이리 어빙 이야기] 2부
(본 글은 카이리 어빙의 독특한 행보에 관한 많은 뉴스들, 인터뷰들을 그의 인생사와 연결하여 구성한 글입니다. 최대한 루머 등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제외하였으나 자료조사 방법이었던 인터넷의 특성상 정확하지 않은 사실이 포함되어있을 수 있으며 작성자의 주관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이나 지적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 본 글은 카이리 어빙의 입장에서 여러 사건들을 바라보며 그의 입장을 이해해보는 글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타 선수 등을 비판, 탓하려는 목적이 전혀 아니며 편향된 관점인 카이리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들이 부정적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본문과 관계 없는 팬의 한탄을 조금 적어봤습니다.. 본문만이 궁금하신 분들은 가볍게 스킵하셔도 좋습니다!)
조만간 온다고 해놓고 2주나 지나서야 글을 올리네요.
브루클린에서의 무단 이탈 등의 상황까지 전부 다뤄보고 싶었는데 제대로 밝혀진 것도 없고 가뜩이나 이미지 안 좋은데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킬까봐 글 쓰는데 매우 조심스럽네요.
카이리 어빙이 개인적인 사유로 또 결장한다고 뉴스가 떠서 일단 브루클린 이적까지만 먼저 다뤄보는 글을 후딱 올리려고 합니다.
어빙이 썩 좋게는 안 보이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배려와 존중의 매니아 아닙니까? 어빙 팬도 상당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 팬들도 잘못한 걸 잘못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일로 욕을 먹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네요. '또 빠지네..' '왜 빠지냐?' '어휴 브루클린이 너 때문에 힘들다' '이번에도 합당한 이유이길 바란다' 정도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라고 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다만 아직 개인적인 사정이 무엇인지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프로의식이 꽝이다' '퇴출해야 한다' 정도의 의견은 조금 지나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번에도 생일 때문이 맞을 것이라며 어빙을 뭐라하고 어떻게 처벌해야한다 등의 글이나 댓글이 꽤 있었는데 출산 때문이었죠.. 그마저도 아기를 '갖기 위해' 결장한 것이 정말 아니냐고 오번역이 수정된 이후에도 못 믿겠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업보가 많고 인과응보라 하시던데 한 번 심한(더티) 파울 하면 더티플레이어입니까? 조금 과장해서 한 번 범죄자는 영원한 범죄자입니까? 잘못이 쌓이고 쌓여서 비판받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어빙은 이번 시즌 딱 한 번 무단 결장했습니다. 비판 받아 마땅하고요. 자세에 관해 뭐라 하시는 분이 계시겠지만 그래도 사과는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농구 경기 설렁설렁도 아니고 커리어하이급으로 잘 뛰고 있습니다. 결장하긴 했지만 아이 출산 때문인데 이도 용인 못해주시지는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흉악 범죄를 저지르거나 타 선수 인생을 끝장냈다거나 한 것도 아닌데 가끔 심한 말도 보입니다. 부디 너무 매시즌 결장해가며 공짜로 돈 버는 선수인냥 취급하며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해 너무 뭐라고 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무단 결장에 관해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매시즌 그래왔던 문제아로 몰아가거나 섣불리 욕하지 말자가 주요 의도였습니다.
지난 글에서 우린 카이리가 어떤 유년기를 보냈는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혹시 보지 않으셨다면 슬쩍 참고하는 것이 본 글을 읽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매우 어린 나이 어머니를 잃으면서 가족과 주변인들에 대한 소중함을 일찍 깨달았고 그들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굉장했다. 그리고 이 때문인지 정든 이와의 이별을 매우 싫어했으며 처음 보는 이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힘들어했다고 한다.
이상하고 독특하게 보였던 그의 기행(경기장에서 잎을 태운다거나 지팡이를 들고다님)은 사실 그의 어머니를 위함이었던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글에서는 어빙의 옛 경험이나 이러한 성격이 ‘농구’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끼쳐왔는지 그의 경기장 밖 이야기도, 농구 활약도 아닌, ‘농구 인생’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3. 르브론과의 갈등? 르브론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카이리가 젊었을 적, 라코타 수우족과 접촉하기 전, 클리블랜드 시절이었을 때로 돌아가보자.
먼저 신인으로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클리블랜드에 뽑혔을 때, 당시 팀 상황에 대해 조금 알아보자.
당시 클리블랜드는 간판스타이자 에이스였던 르브론 제임스의 이탈로 19승 63패, 바닥을 기는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얻게 된 1픽으로 카이리 어빙을 지명하게 된 것인데, 르브론 다음으로 팀의 에이스로 어빙이 지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어빙은 이러한 부담감을 모두 지고 팀이 원하는대로 에이스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크게 성장해갔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팀의 승률은 점차 나아져갔고 어빙이 계속해서 팀을 이끌어갈 것은 분명했다.
첫 해는 신인왕에, 두 번째 해부터 바로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팀의 에이스로 입지를 굳히고 13-14시즌에 어빙의 데뷔 이래 최초로 팀승률 4할을 찍게된다.
비록 어빙과 친했던 바이론 스캇 감독은 직전 시즌 해고되었지만 열심히 뛰어 팀성적을 끌어올린 13-14시즌이 지나고 더 높은 무대로 향하기 위해 어빙은 고든 헤이워드, 지미 버틀러 등을 영입해 함께 뛰길 희망했고 구단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르브론의 클리블랜드 복귀 소식이 뜨게 된다.
마이애미에서 리핏을 달성한 대슈퍼스타의 고향팀 복귀 소식이 나오자마자 세간의 주목은 모두 르브론을 향했고 구단도 마찬가지였다.
구단은 이전까지 고려하던 ‘어빙의 팀’ 플랜을 완전히 버리고 ‘르브론의 팀’을 위한 플랜을 준비했다.
그들은 미네소타에서 3점슛이 가능했던 빅맨 케빈 러브를 영입해 르브론-어빙-러브로 이어지는 빅3를 구축했고 새 감독도 데려왔다.
데뷔 전부터 엄청난 실력으로 주목 받고 결국 두 차례 우승을 통해 증명을 해낸 선수이자 하위권에 머물던 고향팀을 위해 더 좋은 선택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와준 홈타운 선수였던 르브론이니 구단 입장에선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어빙에겐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인도 1픽에 신인왕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농구 천재였고 몇 년간 이 팀을 이끌며 입지를 다져온 선수였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뺏겼으니 당연할 수밖에..
다른 선수라면 대선배이자 레전드 반열에 올라서고 있는 르브론에 한 수 접어주었겠지만 강한 에고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던 어빙은 아니었다. 그리고 역시 어빙은 애초에 이러한 상황(르브론의 클리블랜드 복귀)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우린 르브론이 마이애미 시절 어빙과 코트에서 나눈 대화에서 엿볼 수 있었다.
https://www.google.co.kr/amp/s/syndication.bleacherreport.com/amp/2784792-kyrie-irving-reportedly-never-wanted-lebron-james-back-in-cleveland.amp.html
르브론이 외쳤다.
“계속해 계속해 네가 하던 걸 계속해. 넌 절대 모를 거야. 내가 언젠가 이 곳에 다시 돌아오게 될 수도 있단 걸 말야.”
이에 카이리는 그냥 단순히 말했다.
“쟤(he) 뭐라는 거야. 우린 쟤(him) 필요 없어.”
하지만 르브론의 복귀를 막을 수는 없었고 어빙은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여 ‘르브론의 팀’에서 우승을 향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르브론과 함께한 첫 시즌, 팀은 그 해 바로 파이널까지 올라가며 엄청난 성적 상승을 이뤄냈지만 어빙과 러브 모두 부상을 당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를 갈고 준비한 다음 시즌에선 정규시즌 역대 최다승인 73승을 달성한 초강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상대로 역대 최초로 파이널 1-3 상황을 역전해내며 우승에 성공했다.
극적인 우승과 커리어 최고의 샷인 ‘더 샷’을 맛보며 어빙은 계속해서 르브론과 우승을 도전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결국 다음 시즌도 르브론과 함께 했지만 사실 우승 직후 어빙의 트레이드 요구가 나올 뻔 했다는 사실이 추후 알려졌다.
ESPN의 데이브 맥미너민(Dave McMenamin)이 알렸다.
“우승 이후 카이리와 그의 캠프는 트레이드를 요구해볼 것을 고려했어요. 결국 그들은 요구를 진행하지 않도록 결정했고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게 하지 않았지만 고려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빙은 우승 후 1년을 더 르브론과 함께 뛰었지만 역대 최강팀이라 평가 받는 케빈 듀란트가 가세한 골든스테이트를 넘어설 수는 없었고 파이널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이후 어빙은 ‘갑작스레’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되었다.
본인 중심의 농구를 하기 원했고 팀의 ‘더 맨’이 되고자 르브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했음이 대표적으로 알려진 어빙의 트레이드 요청 이유이다.
하지만 유명 방송인 스티븐 A 스미스나 기자들, 그리고 카이리의 지인들 등 여러 사람들로부터 은근히 크게 작용했던 이유가 한 가지 제기되었다고 한다.
바로 르브론의 ‘아버지 노릇’이다.
우린 이미 어빙이 가족 등 소중한 사람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들에 대한 애착과 애정이 강했음을 알고 있다.
한 번도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어머니에게도 그렇게 사랑을 쏟았는데 홀로 자신을 길러주고 훌륭한 농구선수로 키워준 아버지에게는 어땠을까.
https://www.google.co.kr/amp/s/www.boston.com/sports/boston-celtics/2018/01/08/kyrie-irving-opened-up-about-his-fathers-unwavering-influence-on-his-basketball-career/amp
“아버지가 저에게 어떤 의미인지 저는 감히 말로 설명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빙이 드래프트되기 직전 했던 말이다.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 드래프트까지 어빙의 농구 커리어의 모든 단계를 함께하고 이끌어준 사람이 바로 아버지, 드레데릭이었다.
“16살 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농구로 이겼습니다. 16-0으로 이겼었죠.
그러고나서 코트를 나오는데 눈물이 흐르더군요. 제 아버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농구 선수입니다. 만약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 당신의 아이돌을 꺾는다면 그건 마치... man, 그냥 아무것도 날 막을 수 없게 되죠.”
“만약 삶에 있어서, 당신의 부모님이 그저 뒷배경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바로 옆에 서서 무엇이 닥쳐오든 간에 함께할 준비가 되어있는 지점에 다다르게 되면 깨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유대감이 생기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 특별한 걸 저에게 줬죠.
아버지는 저에게 확신을, 자신감을, 특정 상황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도 이 특별한 걸 아버지에게 돌려드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관계고 유대감이고 신뢰입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이걸 해라’ ‘저걸 해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제가 당신이 가르쳐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해줬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이제 전 제가 내 영역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내 책임 하에, 직접 인생의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많은 인터뷰를 통해 우린 어빙이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도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럼 르브론의 ‘아버지 노릇’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르브론이 팀에 온 뒤 리더의 자리를 즉시 차지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뛰어난 능력과 두 차례의 증명으로 그가 당시 팀에서 최고의 선수임에는 이견이 없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르브론은 자연스럽게 팀원들에게 이것저것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특히 어빙에겐 거슬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호칭이었다.
https://theundefeated.com/features/cleveland-cavaliers-kyrie-irving-lebron-james/
https://www.google.co.kr/amp/s/theundefeated.com/features/nba-opening-night-lebron-james-kyrie-irving-complicated-history-of-black-fathers-and-sons/amp/
“Kid”
이것이 바로 르브론이 어빙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어느 날 클리블랜드 팀연습 때 리포터가 어빙에게 물은 적이 있다.
“르브론이 팀에서 어떤 부모적인(parental) 역할을 해왔죠?”
어빙이 웃으며 얘기했다. 하지만 웃기거나 좋아서 웃는 건 아니었다.
“저는 딱 한 명의 아버지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드레데릭 어빙이요.”
카이리가 클리블랜드를 떠나 보스턴으로 이적한 뒤 해당 시즌 개막 전 미디어 데이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르브론은 인터뷰에서 애써 팀을 떠난 카이리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5번이나 카이리를 “kid”라고 불렀다.
이후 어빙이 반응하길, “이건 그저 두 어른 간의 일입니다. 두 남자(men) 간에요.”
이에 대해 기자 제시 워싱턴이 전 nba 선수인 그랜트 힐에게 물었다.
힐이 '아버지'라는 존재에 있어 말하길,
“말에는 뼈가 있습니다.”
“제가 nba에 도달했을 때 저를 믿어주고 조언해주고 다양한 견해를 제공해주는 사람이 제 곁에 있는 것이 정말 도움이 되었죠. 가장 솔직하고 우리가 잘못하고 있을 때 듣기 싫어하는 말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에요.”
이런 사랑은 아버지 외의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만큼 무겁게 전달할 수는 없다.
그리고 결국에는 충돌하는 날도 생길 것이다.
그랜트 힐은 계속했다.
“자신만의 생각을 기르고 독립심이 점차 생겨날 겁니다. 이건 굉장히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에게 맞서는 경험이 르브론에게 있었다면 카이리와의 관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고 한다.
르브론은 8살 때부터 집안의 가장(남자, man)이 되었다. 코치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 역할을 해주기도 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있던 적이 없었다. 자신의 결정이 거절되거나 아버지의 판단에 맡기게 하는 경험도 말이다. 르브론은 언제나 큰 치킨 조각을 얻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역할 중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언제 아들에게 리드를 내주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아마 르브론은 어빙에게 그러한 공간을 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어빙의 트레이드 요구에 당황했다는 사실을 봤을 때 그게 어빙에게 힘들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르브론 본인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전혀 인연이 없었기에 재능 있던 어린 카이리에게 멘토 역할을 해주며 이끌어줄 수 있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본인처럼 홀로 고생하며 힘들지 않도록, 그리고 카이리가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미 엄청나게 존경하는 아버지가 있으며 강한 에고와 자신감으로 뭉친 어빙에게 공간을 충분히 주지 못했고 오히려 어빙에게 자신을 무시하고 어린 애 취급하며 아버지 노릇을 한다고 느끼게 만들어 역효과가 난 것으로 보인다.
르브론이 이후에 밝히기를, “그가 트레이드 요청을 하지 않도록 제가 더 잘할 수 있는 게 있었을텐데 말이죠...”
다행히도(?) 보스턴에 이적한 뒤 리더 역할을 맡아보며 르브론의 심정을 이해했던 어빙은 뒤늦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했고 화해를 했다고 한다.
(별개로 팀케미 문제가 있었던 당시 이를 미디어에 말한 것은 잘못이라고 볼 수 있겠다.)
4. 농구가 뒷전이 되어버린 어빙, 외할아버지의 죽음.
이번엔 보스턴 셀틱스 시절 어빙에 대해 떠올려보자.
많은 사람들이 1옵션 실패, 락커룸 트러블 메이커, 좋지 않은 리더 등의 이미지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답은 아니다 이다.
분명 첫 해만 해도 어빙과 보스턴은 헤이워드의 이탈과 첫 두 경기 패배에도 불구하고 바로 재정비에 성공하여 16연승을 달리고 강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 받았다. 비록 시즌 중반 어빙이 부상을 당했지만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예상 외로 승승장구하여 동부 컨퍼런스 결승 7차전까지 클리블랜드를 몰아세웠지만 아깝게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했다.
어빙과 헤이워드 없이도 동부 결승 7차전까지 진출한 보스턴은 바로 다음 해 어빙과 헤이워드 복귀에 힘입어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듭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보스턴은 넘쳐나는 재능과 에고 때문에 온갖 라커룸 이슈에 시달렸고 베테랑 대 영건 구도가 만들어지며 팀케미가 망가졌다. 감독도 어찌하지 못했던 문제는 계속 이어져 보스턴은 결국 그해 2라운드에서 밀워키를 상대로 탈락하고 만다.
https://www.nbcsports.com/boston/celtics/kyrie-irving-says-grandfathers-death-impacted-last-season-decision-leave-boston
https://www.google.co.kr/amp/s/www.washingtonpost.com/sports/2019/09/30/kyrie-irving-shines-light-an-overlooked-issue-nba-grief/%3foutputType=amp
시간이 지나고 어빙이 이에 대해 입을 열었다.
“제 책임입니다. 제가 그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리더가 된다는 것과 팀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 있어서 저는 실패했습니다.”
어빙은 당시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극도의 우울함과 슬픔에 빠져 팀원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켰고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참고로 어빙의 외할아버지는 어빙의 아버지와 함께 어빙의 농구를 많이 도와준 인물이며 아버지께만큼 외할아버지께도 의지를 많이 했다고 한다.
(어빙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서 억지로 왼손 드리블만 시켜 양손 모두 드리블이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저는 그것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누구에게도 가서 나는 지금 내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우울함에 빠져있고 이것이 나를 굉장히 괴롭히고 있다고 말하기가 싫었습니다. 상황은 계속해서 힘들어져 갔죠.
그의 죽음 이후 농구는 제 마음에 있어 가장 마지막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농구와 그를 통한 행복은 모두 씻겨내려갔습니다.
1년 내내 저는 특정 표정을 지으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누구도 저에게 접근하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소중한 이의 죽음을 겪은 사람들을 위한 치료나 상담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어요. 자꾸만 저는 제 의도와 다르게 일을 처리해나갔습니다.”
“농구 경기를 뛰느라 저는 그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와 얘기할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어요. 얼마 전에 소중한 사람을 잃었음에도 일을 하러 가는 걸 상상해봐요. 난 내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싸움들에 사실상 준비가 안 되어 있었어요. 제가 그들을 실망시켰습니다. 그 시즌에 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지 못했습니다. 리더가 된다는 것과 팀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 있어서 저는 실패했습니다. 잠시 속도를 늦추고 저도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제게 큰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빙은 이렇게 인터뷰를 마무리지었다.
“이것은 게임이지만, 우리의 삶도 이 게임 속에 들어옵니다. 농구 선수나 업계의 어떤 사람이든 개인적인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빙은 어머니의 출신과 자신의 뿌리를 드디어 찾으며 자신의 마음 속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고 소속감과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소중한 사람, 어머니의 아버지인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다시 큰 상실감에 빠진 듯했다.
여전히 농구 자체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는 어빙이었지만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코트 안팎의 가치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 와중에 불운했던 점은 오래 있던 클리블랜드도 아니고 하필 보스턴에 이적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어빙과 가까운 사람이 몇 없어 이를 눈치채고 위로해줄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몇몇 팀원들은 오히려 에고 싸움을 펼치려고 했다.
https://www.espn.com/nba/story/_/id/27071495/blame-kyrie-not-simple-boston
지난 시즌 어빙 없이도 동부 컨파 7차전까지 간 것이 독이 된 것일까.
시즌 초부터 팀의 영건들은 자꾸만 더 많은 롤을 요구했고 오히려 어빙을 따르지 않았다.
코치진들도 이를 눈치채고 있었는데, 시즌 전 픽업게임에서 ‘엑스트라 패스’를 하며 팀적인 성공을 거둔 그들이 아이러니하게 자꾸만 패스 대신 슛을, 아이솔레이션을 하더라는 이야기다.
당시 셀틱스의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 에피소드를 찾아보자.
때는 19년 1월 9일, 인디애나와 경기하여 승리를 거둔 셀틱스는 바로 다음날 백투백 경기를 위해 마이애미로 향했다. 팀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어서였다. 그날밤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고 이를 위해 어빙은 팀원을 찾았지만 그들은 새벽 5시까지 영업하는 사우스비치의 클럽에 가있었다.
원정길에 클럽을 가는 것은 nba 선수들에게 흔한 일이긴 하나 백투백 경기 중간에 이러한 일을 벌인 영건들에 어빙은 화가 났다.
그리고 그날 경기는 115-99로 패배하는데 작전타임 도중 모리스가 브라운에게 수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지적했고 싸움이 일어났는데 누가 이를 동영상으로 찍어 업로드하며 이슈가 되었다.
https://twitter.com/BleacherReport/status/1083561838107738112?ref_src=twsrc%5Etfw%7Ctwcamp%5Etweetembed%7Ctwterm%5E1083561838107738112%7Ctwgr%5E%7Ctwcon%5Es1_c10&ref_url=https%3A%2F%2Fmania.kr%2Fg2%2Fbbs%2Fboard.php%3Fbo_table%3Dnbatalkwr_id%3D6591211
직후 기자들이 어빙에게 관련해 인터뷰를 원했지만 어빙은 사라지고 없었는데 30분 정도가 지나고 마이애미 연습 코트에 남아 묵묵히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어빙은 그날 경기에서 부진했던 팀원들이 합류하여 함께 훈련하길 원했으나 나타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틀 뒤 올랜도 매직과의 경기가 있었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왜 나한테 공 안 줘’ 장면이 나왔다.
경기 종료 직전 2점차 뒤지는 상황, 브래드 스티븐스 감독은 어빙이 공을 받고 플레이를 하도록 작전을 짰다.
그러나 어빙이 공을 받기로 한 지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인바운드 패서였던 헤이워드는 테이텀에게 패스해버렸다. 와이드 오픈까지는 아니었지만 오픈이 났던 테이텀은 공을 받았고 슛을 던졌고 공은 그대로 돌아나오며 경기를 패배했다. 이에 이전부터 화가 쌓인 어빙은 왜 작전대로 자신에게 공을 주지 않았느냐며 코트에서 바로 짜증을 냈고 이 모습이 방송을 타게 된다.
이후 어빙은 이에 대해 사과했으나 팀케미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전 셀틱스 선수 세드릭 맥스웰이 말하기를,
“단순히 카이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셀틱스는 1983년 이래로 제가 봐왔던 농구팀들 중 가장 고장난 팀입니다.”
감독 브래드 스티븐스도 이후 이에 대해 입을 열었다.
“저는 이것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비난해야하만 한다면 저를 비난해야합니다. 제가 그들을 맞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꾸만 본인이 돋보이길 원하며 영건들은 팀플레이를 해쳤고 이를 문제 삼으며 우승을 노리는 팀으로의 분위기 전환을 위해 어빙은 14-15년차 베테랑 영입을 원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쩌면 예전의 르브론과 본인의 비슷한 상황에 반대 역할을 맡게 된 어빙은 현명하지 못하게도 앞서 말했듯이 르브론에게 전화하여 사과하며 공개적으로 영건들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오히려 영건들만 문제 삼는 어빙이 틀린 것이라며 모두의 잘못이라고 올바르게 인터뷰를 한 제일런 브라운에 힘입어 미디어와 대중들은 모두 어빙만 공격했다.
감독과 코치진들도, 성격이 유했던 팀의 베테랑 호포드나 같이 FA로 합류했지만 부상 복귀로 제 기량을 찾지 못해 입지가 애매했던 헤이워드도 선뜻 강력히 어빙의 편에 들지 못했다.
자꾸만 혼자가 되었지만 르브론의 그늘에서 벗어난 홀로서기 성공을 거두기 위해, 아버지의 팀이었던 뜻깊은 보스턴에서의 성공을 거두기 위해 어빙은 다른 것을 제쳐두며 농구에 전념했다. 하지만 함께가 아닌 홀로 나아갔다.
어빙은 외할아버지나 소중한 이들을 제대로 만나지도 않으며 보스턴에서의 농구를 위해 시간을 들였지만 돌아온 것은 실패와 불명예스러운 꼬리표, 그리고 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또한 자꾸만 힘들었던 본인을 내버려두지 않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본인만 탓하는 미디어에게 이때 반감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어빙은 이를 계기로 코트 안팎의 가치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브루클린에서 인터뷰를 했다.
여전히 농구를 사랑하겠지만 농구가 최우선이고 목숨을 걸 정도냐고 묻는다면 글쎄.. 어빙은 더 이상 쉽게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5. 브루클린 이적
아버지가 보스턴에서 선수생활을 하였기에 뜻깊게 여기며 보스턴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머무를 것이라고 한 어빙이었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보스턴에 머무르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미디어에 의해 이미 어빙은 최악의 팀동료, 리더감이 아닌 어린애, 르브론 따라쟁이 등의 수식어가 그의 이름 뒤에 붙었다.
그가 이제 농구를 위해 할 수 있던 최선의 선택은 낯선 선수들과 다시 마음을 열고 때로는 힘겨루기도 해야하는 피곤한 상황에 처하는 것보다 이미 자신이 마음을 연 친구들과 즐겁게 농구하는 것이었다.
이에 케빈 듀란트, 디안드레 조던과 함께 본인의 고향이었던 뉴저지의 팀인 브루클린 네츠에 FA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된다면 브루클린에서의 일들도 3부로 연결하여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빙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어빙은 공황장애 같은 그런 이슈가 있는거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