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 선수 전성기
그 동안 1984년이 커리어 정점 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는데, 돌아 가셨던 이후 올라온 각종 유튜브 영상들과 제 기억들과 자료들을 보니 커리어 피크가 1981년 실업 롯데 1년차 때이고, 1981년에 토론토 블루제이스와계약 체결하고 정부 불허로 므르브 못 가면서 커리어가 꺽였네요. 1982년에 한국에서 개최된 세계야구선수권에서 부진했고 결승전 선발도 고려대 2학년 선동렬에 밀렸고, 1983년 프로 데뷔 때는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으로 평가 받고, 1985년은 당시 신인이던 이순철의 증언에 의하면 최동원과 경기 당시 선배들이 최동원 전성기 구위가 사라졌다고 하고, 1986년은 전기리그, 후기리그 나뉘어 치뤄진 시즌인데 후기 리그 에서만 16승 을 한 오비 베어스 최일언에게도 밀리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19승을 올린 상태에서 오비 베어스에 역전패 해 20승 실패하고, 1987년에는 방어율 10 위 밖으로 밀려납니다.
1981년 므르브 진출 실패 상황은 1996년에
임선동이 엘지와 법정 투쟁하며 야구에 집중 못하던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카우트 파동 겪은 선수들 김종부, 강혁, 임선동 사례를 보면 1981년 최동원이 얼마나 안 좋은 상황이었는지 유추할 수 있고, 재판 해 본 사람은 다 알 수 있죠. 재판하면 생업이고 뭐고 다 뒷 전으로 밀리고 재판에 매달리게 됩니다.
관계자들 증언보면 최동원 실업 롯데 시절 라이벌 한국화장품의 간판타자이자 해태 레전드 김봉연, 최동원 동년배 군상상고 출신 해태 레전드 김성한, 동년배 고려대 출신 오비 베어스 김광수, 연세대 선배 박철순, 1981년 대륙간컵 출전한 쿠바 선수, 1981년 대륙간컵 므르브 스카우터 등이 최동원의 엄청난 기량을 증언하고 있고, 그 엄청난 기량의 시기는
고교 2학년 이던 1974년 부터 실업 롯데 2년차 1981년 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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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이 있었죠
선동열이 선발로 나오면 걱정이 없다
단 상대투수가 최동원이라면 모른다
선동열과 유일무이 대등했던 투수
바로 최동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