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선수 이야기(1) - 잊혀진 홈런왕, 박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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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1-10-31 12:28:01
한국의 야구 역사가 100년을 향해 달려가고,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도 30년이 넘었습니다. 그간 수많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리고, 승리에 환희하고, 아쉬운 패배에 쓸쓸히 뒤로 물러섰습니다.
위력적인 투구와 통쾌한 홈런으로 스타덤에 올라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선수들이 있는 반면, 싹을 틔우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잊혀진 선수들도 있습니다.
주로 잊혀진 선수들에 대해 한번 다뤄보고 싶었고, 그 첫 선수로 고 박정혁 씨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70년생입니다. 초등학교 때는 육상선수였다고 합니다. 휘문중에 들어가자마자 야구를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2~3년 정도 늦었지만, 파워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알아주는 홈런 타자였다고 하네요.
결국 휘문고로 진학했고, 여기에서 집중 조련을 받습니다. 아무래도 야구 구력이 좀 짧아서 1,2학년때는 별 활약이 없었지만, 3학년부터 주전으로 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휘문고는 대통령기와 청룡기에서 광탈하고, 봉황대기 하나만을 남겨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가뜩이나 1,2차전에서 당대 최강이었던 부산고-신일고를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강상수가 선발투수를 맡고, 조원우, 김태균(유격수) 등이 버티고 있는 부산고는 강력한 우승후보였습니다.
아직 임선동은 1학년이었고, 그때까지는 별 활약이 없었지만, 이때부터 임선동의 활약이 돋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차전에서 부산고를 5-4로 꺾으며 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2차전, 신일고와의 경기에서 박정혁이 드디어 일을 냅니다. 7회 1-2로 끌려가던 상황에서 투런 홈런을 쳐내며 경기를 뒤집었고, 임선동이 끝까지 막아내며 5-2 승리를 거두고 3회전에 진출합니다. 3회전 상대는 공주고였습니다.
공주고는 77년 김경문 이후 우승을 하지 못한, 잘 알려지지 않은 팀이었습니다. 89년때만 해도 공주고는 그닥 이름이 없던 학교였던 거죠. 1학년 에이스의 공이 좀 빠르다고는 했지만, 휘문고의 상승세가 훨씬 셌습니다. 그리고 3차전, 박정혁은 기어이 일을 내버립니다.
이날 박정혁은 1회부터 타점을 올렸고, 3회 홈런을 쳐 4-0으로 경기를 주도합니다. 하지만 임선동도 1학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5회 4-3까지 추격을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6회 박정혁이 또다시 연타석 홈런을 칩니다. 5-3.
그리고 8회. 공주고의 1학년 에이스는 다시 한번 박정혁과 상대합니다. 그러나 박정혁은 그의 속구를 통타, 3연타석 홈런을 쳐버립니다. 당시 3연타석 홈런은 고교야구 역사상 3번째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경기에서 첫 타석에 홈런을 치면서 4연타수 홈런을 치는 등 봉황기 기록을 세웁니다.
승승장구하던 휘문고를 결승에서 가로막은 것은 동산고였습니다. 당시 위재영은 2학년이었는데, 일찌감치 괴물 투수로 불렸습니다. 그의 전매특허인 슬라이더는 이 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1회전부터 준결승까지 5경기에 매번 등판하면서 힘이 좀 빠졌을 법했지만, 오히려 결승전에서 위재영의 슬라이더는 더 빛이 났습니다.
박정혁은 이날 위재영에게 3개의 삼진을 허용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위재영은 17개의 탈삼진을 솎아냈습니다. 동산고는 6회까지 3-2로 끌려가다가 임선동에서 투수가 류택현으로 바뀌자 7회 역전 적시타를 터뜨려 3-4로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경기가 끝나며 휘문고는 창단 첫 우승을 목전에서 놓칩니다.
하지만 박정혁은 봉황대기에서만 홈런을 7개나 쳐내며 대회 신기록을 세웠고,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려대로 진학하게 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선수의 커리어가 창창해 보였을 것입니다.
고려대에서 박정혁은 1학년때부터 4번 타자를 칩니다. 임수혁, 마해영 등 쟁쟁한 선배들이 있음에도 그는 4번이었습니다. 박정혁의 장타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2학년 들어와서 조금 주춤거렸습니다. 그러더니 사단이 벌어졌습니다.
박정혁은 당시 구타를 당하고 있었는데 부당함을 주장하던 도중 선배가 방방이를 휘둘렀고, 박정혁은 그것을 그만 팔로 막다가 팔꿈치가 부러져 버린 것입니다. 세간에는 허리가 부러진 걸로 알려졌지만, 허리는 원래부터 무리한 웨이트로 인해 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어느정도 재능에 의존해서 야구를 하던 박정혁이었지만, 팔꿈치에 철심을 박은 후로는 그만한 파워가 나올 리가 없었고, 결국 그는 잊혀지게 됩니다.
프로에 대한 꿈을 접지 못해서 95년도 LG에 연습생으로 입단하지만, 6개월만에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박정혁은 스포츠 에이전트 사업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도 잘 되지 않았던 듯했습니다. 그의 고객은 고교 때부터 절친이었던 서용빈이 사실상 유일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요. 서용빈은 출신 고교는 다르지만 박정혁과 고교 때 알게 되어 마지막까지 절친이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사업에 열심이었던 그에게 비극이 찾아옵니다. 1999년 12월 그는 교통 사고로 인해 그만 목숨을 잃게 됩니다. 너무나도 허망한 사고였습니다. 그의 장례에는 휘문고, 고려대 시절 선배 내지 동기들이었던 강상수, 류택현 등이 참가했지만 절친인 서용빈은 끝내 친구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서용빈은 병역 등으로 인해 개인 사정이 굉장히 좋지 못해서였을 것입니다.
1989년 봉황대기에서 박정혁에게 3연타석 홈런을 맞은 1학년 에이스는 그후 92학번의 트리오 중 말석을 차지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 최고의 선수가 되었습니다. 바로 박찬호입니다.
과연 박정혁 씨는 박찬호를 보며 하늘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너무나도 아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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