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편한 아버지 이야기
저는 아버지가 불편합니다.
굳이 안그래도 되는 때에도
말 한 마디가 예쁘게 안나옵니다.
아버지는 술 많이 먹는 사람입니다.
제가 꼬맹이이던 시절 우리나라에는 통금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밤 12시 넘으면 밖에 다니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주일 중 닷새, 엿새를
그 통행금지 직전에야 만취되어 들어오던 분이었습니다.
엄마와 저, 여동생 셋이서 창 밖만 바라보며 아빠를 기다리다가
어느 샌가 아이 둘은 쓰러져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아버지가 안방에 주무시고 계신 걸 보고서야 안심하는,
저에게 매일 밤과 매일 아침이 거의 그런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여든되신 지금도 소주 2병을 앉은 자리에서 드실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술을 싫어하고,
술 좋아하는 사람도 과히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아버지는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바둑, 등산, 사이클, 인라인, 스키, 포커, 주식......
일단 하면 적당히라는 게 없는 분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매주말 집에서 포커판이 열렸습니다.
카지노에나 있어야 할 칩세트가 집에 여러 개 굴러다녔죠.
주식이야 당연히 큰 돈 날리셨는데
얼마나 큰 돈을 날렸는지조차도 가족들은 모릅니다.
그런 거 말하는 분이 아니니까요.
임진각 왕복코스 사이클 타고 오셔서
저녁 내내 다리 아프다고 저에게 두드려 달라 하는 분이셨고,
등산을 시작하니 그냥 산만 타는게 아니라
그때까지 없던 출신 고등학교 총동문회 산악회를 창립해
초대부터 몇 대까지 회장을 지낸 그런 분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불편한 아버지는
바로 그래서 어머니를 너무 힘들게 한 아버지였습니다.
매주말 포커판에 모여든 친구분들 술과 담배는 누가 마련했고,
총동문회 산악회가 백두대간 일주라도 오르면 물과 간식은 누가 챙겼겠습니까.
아버지는 지금도 그런 일이 다 저절로 되는 걸로 아는 분입니다.
손 한 번 까딱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80년대 초 어느 날 뜬금없이 자전거 탄다고 산 사이클이
그 당시 돈으로 150만원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포커를 끊은 건 80년대초 어느 날 단 하룻밤에
당시 돈으로 백만원 넘게 잃으시고
본인도 그건 어이쿠 싶어서 그 때 끊으셨다고 하시더군요.
본인이 버신 돈 본인이 쓴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르겠는데,
그나마 그건 돈 잘 버실 때 얘기였고
나중에는 생활비도 잘 못 가져오게 되셨습니다.
사업하는 집이란 게 웃깁니다.
돈이 벌릴 때는 정말 떼돈이 밀려들어온다는 말이 실감나게 들어오지만,
없기 시작하면 말이 좋아 사장님이지
매일 하루 넘기기 위해 돈 빌리러 다니는 게 주된 일입니다.
그건 또 그런 돈 구경도 못해본 어머니 몫이죠.
그 와중에 애들 먹이고 입히고 병원 데려갈 돈 구하는 것도 어머니 몫이 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용돈, 세뱃돈을 꼬박꼬박 모아
10~30만원 통장을 여러 번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저금한 돈을 써 본 기억이 한 번이나 있나 그렇습니다.
당장 오늘 회사 부도나거나, 내일 제사상 차릴 돈도 없으니
아이 통장에서도 돈 뽑아쓰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갚아주시지만 급한 상황이 정신없이 연속되다 보면
그 돈은 이미 녹아서 없어져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빈 저금통이나 0원이 되어 있는 통장을 마주친 건
어린 마음에 꽤 큰 상처였어요.
AIWA 워크맨 사려고 한참 동안 모았던 돈이 사라져 버렸을 때는
지금 생각해도 많이 슬펐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어머니에게는 시댁에 희생하길 바라셨고,
친정에 가끔 가시는 것조차 싫어할만큼 집에 매어두려 하셨죠.
어머니가 외갓집 가셔서 집에 돌아오는 게 조금만 늦어져도
제가 화난 아버지 눈치를 보고 앉아있고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대체 왜 그러신건지 모르겠습니다.
머리가 굵어지며 저는 아버지와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를 닮은 성질머리 때문에 서로 불같이 맞선 것도 있지만,
많은 경우 저는 말도 못하고 속끓이는 어머니를 대신해
일부러 싸우러 나섰습니다.
저는 말을 따박따박 논리적으로 하려고 꽤 노력합니다.
“어디서 어른을 가르치려고 들어?”
네, 나이어린 사람 말이 옳다는
나이 많은 분의 인정이죠.
폭력이 오간 적은 없지만 고성에 극한 대립은 적잖았습니다.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굳이 아버지와 뭘 공유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일상적인 대화, 인사조차도 가끔 전 받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냥 우리 둘은 서로 멀리하고 대화하지 않는 게 그나마 나을 거라고
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좀 느지막히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죠?
아니요, 저는 더 모르겠더군요.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예쁜 아이가 있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자기 멋대로 일생을 살 수 있었던거지?
저는 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저도 나이가 먹어가니
좀 더 제 성미를 가라앉히고 아버지를 대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날,
와이프가 말했습니다.
“오빠, 아버님이 항상 오빠를 보고 있는거 알아요?”
“무슨 소리야?”
와이프는 아버지의 시선은 항상 저를 향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제 시선은 불편한 아버지를 외면한지 너무 오래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아들이 생긴 후 제 시선은 항상 아들을 향해 있었으니
아버지 쪽을 바라볼 여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아마 아버지는 항상 저를, 저는 항상 제 아들을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전 글에 잠시 쓴 적 있는데 제게는 좀 특이하고 힘든 병이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잘 유지하고 있기는 한데,
지속적으로 병원에 가서 여러 검사와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수면 내시경은 보호자가 반드시 있어야 가능한데,
아이가 생기고는 와이프는 아이를 봐야했고
보통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어머니가 일이 있으셨어요.
그래서 제게는 불편한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내시경 후 진료까지 봐야 하므로 기다리는 시간이 꽤 깁니다.
전보다는 그나마 표면적으로 누그러진 부자는
이렇든 저렇든 뭐라도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처음 내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에 어머니께 들은 적 있는 이야기도 꽤 섞여있었지만
아버지의 삶의 굴곡 부분에 대해 들어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혁대로 맞기도 했을 정도로 엄하게 자란 이야기,
그럼에도 공부를 잘해서 명문고에 진학한 이야기,
약대에 진학했으나 학비가 모자라 중퇴하고 나중에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야기,
그런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몸이 약했던 큰 고모를 편애해서
큰 고모를 약대를 졸업해 약사가 되고 본인은 중퇴했던 것이 마음에 박힌 이야기,
잘 나가던 중견그룹 최연소 부장 때려치우고,
갑자기 빈 손 창업해 CEO친구 사무실 옆 방에 책상 하나 간신히 얻어
전화기 한 대 달랑 놓고 사업 시작한 이야기 등
저는 아버지는 정말 제멋대로만 살고
자기 뜻대로 다 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생각해봐도 세상에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건데
아버지에 대해 쌓인 제 감정이 꽤 높은 편견을 쌓았었나 봅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할아버지에게 맞고도 저를 한 대도 안때리고 키우신 아버지셨고,
어찌 보면 굉장히 버르장머리 없는 아들을 심하게 타박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업의 순간, 회사가 위기의 순간 그 힘듦을 가족에게 단 한 번도 직접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도 어떤 때는 괴로웠고, 외로웠고, 약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 한 인간인 아버지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고 있었더군요.
언젠가 다른 친척분과 대화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녀석은 지 애비가 지 엄마 힘들게 하면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만 다 하고 살았다고 생각해요. 하하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제 감정은
그렇게 쉽게 모두 지워질만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고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는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모습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아버지의 다른 모습과 인생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나에 대해 아시는 것이 훨씬 더 클 것 같다는 점입니다.
아버지는 얼마 전에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참 여러모로 말년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
내가 신경 못쓴 것에 비해서 자식들도 잘 자랐고.
그래도...... 내가 좀 더 신경 썼으면 아이들이 좀 더 잘 됐겠지?”
아마도 남은 시간,
여전히 아버지는 저를 바라보고, 저는 제 아들을 바라보게 될 겁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겠죠.
그래도 이제는 누군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압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버팀돌이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뭔가 달라지신 아버지와 달리
아직 달라지지 못한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 마음을 끝내 전하지 못할 것 같은 걱정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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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지금 제 상황이랑은 다른듯 비슷한듯 하네요.
술을 참 좋아하시는 아버지...
갈등 대립...
풀어보려고 노력했고 이제는 풀리지도 않는 갈등이 된거 같습니다.
결혼은 아직 안했지만 적지 않은 나이이고 이해하려고 꽤 노력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상황은 더 답답하네요.
자식이 되서 그냥 저러고 사시느니 빨랑 돌아가시는게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정도니까요..
갈등이 다 풀어지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저처럼 파국은 아닌거 같아서 다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