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의 이름으로 저질러졌던 자유말살과 인종차별
에도 막부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서 문호를 개방한 이후부터 노동인력 수급을 목적으로 한 일본인의 미국 이민이 이어졌습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미 정착된 이민 1세대의 후손이 꾸준히 늘어나서 1920년대에 10만명이 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국 본토에 거주했으며 1940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에만 일본계 미국인의 숫자가 10만명에 가까웠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의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자 2차 대전은 태평양 전선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일부 미국인들은 일본 해군이 이어서 본토까지 공격할 것이라고 겁을 먹었습니다. 이러한 우려는 미국 정부가 엄연한 자국 시민인 일본계 미국인들의 개인적 자유를 박탈하는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2년 2월 행정명령을 내려 태평양 연안에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미국 태생의 모든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2월 19일부터 야간 통행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유럽계 미국인들은 더 강한 조치를 정부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조상국인 일본에 협조하며 스파이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선전했습니다.
이에 따라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2년 5월에 약 12만명에 달하는 일본계 미국시민들과 영주권자들을 거주지로부터 강제 퇴거시킨 후 네바다 사막 등에 급조한 집단 거주지역에 강제로 이주시키는 결정을 단행했습니다. 12만명의 일본계 강제 수용자들 중에 65%가 미국 시민권자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황량한 네바다 사막에 급조한 Manzanar 일본계 미국인 수용소입니다.
미국정부는 2차대전의 적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미국에 이민와 살던 사람들에게는 집단이주는 물론이고 통행금지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프레드 코레마츠(Fred Korematsu)는 1919년 1월 30일에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입니다. 그는 자신을 일본인이 아니라 미국인으로 여겼고 애국심이 남달랐습니다. 코레마츠는 1940년 2차 대전 참전을 위해 미국 해군에 지원했지만 위궤양으로 인해 징병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미국 국방에 도움이 되고자 용접공이 됐습니다. 하지만 루즈벨트의 조치 이후 코레마츠도 강제로 집단수용소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코레마츠는 미국이 자신과 가족들에게 요구하 행위를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정해진 날짜에 집합 장소에 출두하기를 거부하고 잠적했지만 몇 달 후 체포되어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미국시민자유연합(ACLU)의 지원에 힘입은 코레마츠는 즉각 항소했으나 항소법원 역시 하급법원의 판결을 지지했습니다. ACLU는 코레마츠 뿐 아니라 모든 일본계 미국인인이 공정한 법정 다툼 없이 강제수용한 것은 법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당시 수많은 미국인들뿐 아니라 일본인 단체들도 코레마츠를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강제수용에 협조하는 것이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ACLU과 코레마츠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그 사건을 연방대법원까지 가져갔습니다. 연방대법원은 코레마츠 사건에 앞서 히라바야시 대 미국(Hirabayashi v. United States) 판결에서 이미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내려진 야간 통행금지 명령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ACLU과 코레마츠는 자국민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 생소한 곳으로 강제이주 시키는 것은 통행금치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주장했습니다.
코레마츠 사건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기울어지던 1944년 12월에 내려졌습니다. Korematsu v. United States 이라는 사건의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6:3으로 강제이주를 명령한 정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후 유타주 수용소로 보내진 코레마츠는 동료 일본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쓸데없이 문제를 일으킨 사람' 취급을 받아 왕따를 당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에서 나온 코레마츠는 전과로 인해 직장에서 자신이 임금을 동료의 절반밖에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용주에게 항의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경찰을 불러 체포시키겠다는 협박뿐이었습니다. 절망한 코레마츠는 이후 30년간 조용히 지냈습니다.
30년이 넘게 지나서 19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집단 수용을 당했던 일본인들에게 사과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인 1983년 코레마츠는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사면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미국 정부에 대한 사면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정부를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저지를 행위로부터 사면한다고 소감을 말했습니다.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인종편견, 전쟁공포, 정치 리더십 부재가 일본계 미국인을 억류했던 것을 시인하며 새롭게 제정된 시민 자유법에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수용소 생활을 했던 일본인들에게 각자 2만 달러씩 보상이 이뤄졌습니다.
1996년 코레마츠는 빌 클린턴에게 대통령 자유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습니다. 이는 미국에 거주하는 민간인이 받는 최고의 영예로 간주됩니다. 코레마츠가 미국 정부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 비판하고 끝까지 싸운 점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2005년에 86세의 나이로 사망한 코레마츠의 묘비명은 "오클랜드에서 태어난 프레드는 다른 미국인들과 똑같이 대우받기를 원했을 뿐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2001년 9/11 테러 공격으로 미국이 혼란스러울 때, 미국내 중동 지역 출신이나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별도의 관리가 필요하지 않는냐는 의견이 정부 일각에서 나왔다가 흐지부지 사라졌는데, 이는 일시적인 분위기에 휩쓸린 선택이 공동체에 오래도록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일깨운 코레마츠 사건 덕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특정 인종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 대한 사법집행기관의 감시권한을 대폭 강화한 일명 애국자법(USA Patriot Act)를 제정했으나 독소조항에 대한 논란으로 2015년 6월 폐지되고 미국 자유법(The USA Freedome Act)으로 대체됐습니다.
코레마츠는 세상을 떠났지만 하와이, 버지니아, 플로리다에서는 매년 1월 30일을 프레드 코레마츠 데이로 정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2017년 1월 30일 구글의 메인 로고에는 훈장을 걸고 있는 노년의 코레마츠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벚꽃, 미국 국기, 여러 채의 수용소 건물들과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도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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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베일리님 글 올라 올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항상 정독합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