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후기
예전에 어떤 분이 올리신,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때가 언제였냐" 는 설문에 답글로 지금이라고 답햇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항상 지금이었던 것 같다구요. 지금까지 나름대로 항상 잘해오긴 했는데, 실제로야 어떻건 간에 제가 느끼기에는, 항상 지금 단계에서 더 잘해서 다음 단계로 성공적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지금까지 해놓은건 다 별 소용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건 항상 지금이었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가장 우울했던, 힘들었던 시기는 몇개 콕 찝을 수 있는데요. 어렸을 때 크게 아팠었기 때문에 그 때가 한번이 될거고, 박사 졸업 준비하다가 엎어지던 2018년 말 - 2019년 초가 또 한번이 될겁니다. 사실 그전에는 그냥 되는대로 막 살아도 다 그럭저럭 살아졌거든요. 근데 저 때는.. 에.. 그냥 하는말로 죽고싶다가 아니라, 정말로 집 베란다를 보면 저기서 뛰어내리면 그냥 죽고 끝날텐데 왜 이러고 있나 라는 생각을 몇번을 했는지 모릅니다. 저기서 뛰어내려서 죽으면 다 끝난다는 생각이 든 순간 어떤 안도감같은걸 느꼈었다고 할까요. 아마 결혼안했으면 진짜 그냥 죽었을거에요. 저는 지독하게 현실적인 사람이라서, 내가 죽으면 적어도 나는 아예 끝나는데 다른게 뭐가 어떻게 되던 뭔상관이냐는 생각을 하거든요. 내가 없어지니까요. 와이프를 제 자아만큼 생각해서, 내가 지금 죽으면 와이프가 너무 힘들테니까 안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진짜 아마 한번쯤 뭘 해도 했을거에요.
도대체 뭐때문에 그렇게 힘들었느냐.. 이건 지금와서 생각해보니까 이유가 더 명확해졌는데, 그냥 내가 나에게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에요. 나는 모든게 완벽해야한다 이런건 아니지만, 여튼 내가 스스로 정한 어떤 바운더리 안에서는 무조건 내가 보기에 아주 뛰어나야 하고 그런것만 보여줘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모자라면 일단 공개를 안하고 머리싸매고 해서 퀄리티는 높이건 깔끔하게 없는셈 치건 해야해요. 이건 일할 때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매니아에 글을 하나 쓸 때도 그렇습니다. 질문글이 아닌 이상 누가봐도 뛰어나다고 할만한 글이어야 하고, 심지어 질문글을 쓸 때도 최소한 내가 이만큼 알아봤다 생각해봤다 는 티는 나야 합니다. 사실 이 글도 그래요. 별것 없는 넋두리인데, 이 넋두리마저도 누가 봐도 글 잘 썼다 는 생각이 들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쓰는겁니다. 실제로 어떻건 간에 제가 보기에는요.
성격이 이렇고, 나름대로 능력도 어느정도 있다보니 지금까지는 일적인 측면에서 나름대로 뛰어난 결과물을 내고 남들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인정받으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점점 다음 단계로 나갈수록, 나 혼자 머리싸매고 해서는 잘 안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말그대로 일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서던, 운이 안좋아서던, 하는 일이 너무 많아져서 실수가 잦아지는 것이건 간에, 여튼 혼자 백날 해봐야 스스로 만족할만큼의 결과물이 안나오는 경우가 생겨요. 매니아에 글쓰는게 이렇게 되면 그냥 안쓰면 그만인데, 일은 그렇다고 안할수는 없으니 혼자 끙끙대는거죠.
그리고 어느 임계점을 넘어가면 악순환에 빠집니다. 사실 처음에 나온 결과물도 그닥 나쁘진 않아서, 이 시간에 이만큼 했다고 하면 충분히 괜찮은 수준이었거든요. 근데 그냥 내가 스스로 만족스럽지가 않아서 그만큼의 시간을 더 쓰는데 결과물은 그만큼 더 나아지지가 않는거에요. 시간대비 절반.. 아니 어떤 때는 진척이 있기라도 하면 다행입니다. 그러면 제가 보기에 첫 결과물보다 못한 결과물이 되요. 남한테 지금 이거 보여주면 "이 시간이 지났는데 이것밖에 못했어?"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시간을 더 쓰고.. 시간대비 진척은 더 없고... 결국 뭐가 터져도 터지는거죠. 제 멘탈이 터지던, 보스가 터지던.
저한테 2020년은, 제가 이런 사람이고 이게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걸 깨닳은 해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깨닳은건 대충 프랑스에서 코로나 터지고 갇혀있던 올 봄.. 정도였어요. 제가 봐도 일이 미친듯이 진척이 안됐거든요. 보스도 눈치를 챘는지 여러가지로 신경도 써주고, 미팅도 일주일에 한번씩 zoom 통해서 하기로 했어요. 결과물이 좀 정리가 안됐더라도 slack 에 계속 올려달라고 얘기하기도 했구요. 좋은 사람이죠. 그리고 한국에서 여름 보내고 다시 9월에 프랑스 복귀했을 때, 정말 바뀌어야겠다 생각하면서 일부러 좀 멍청해보일 것 같아도 질문도 많이 하고, 상관없는 주제 연구하는 친구한테도 연구얘기 하고 그랬어요. 결과 공유도 더 많이 했구요. 그러니까 스스로 이 성격도 좀 내려놓게 되기도 하고 실제로 진척도 훨씬 잘 되더라구요. 그래 이렇게 잘 해봐야겠다 싶었죠.
근데 11월 초에 프랑스에 코로나바이러스 2차 웨이브가 오면서 출근을 못하게 되어서 다시 한국에 왔어요. 사실 제가 생각해도 냉정하게 보면 핑계같지만, 옆 오피스에 있는 보스한테 랩탑 들고가서 얘기하는거랑 zoom 으로 얘기하는거랑은 또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아니 어쩌면 그냥 또 나이브하게 생각해버린 것 같기도 해요. 여튼 다시 롤백이 됐고, 제 멘탈은 한 1,2주 전쯤 터졌고, 제 멘탈이 터질 때 쯤 되니 보스도 터졌습니다. 터졌다는게 뭐 저한테 화를 내고 그런건 아니긴 한데, 여튼 인내심이 바닥나서 대놓고 말을 한거죠. 제발 니가 보기에 완벽하지 않아도, 뭐라도 공유를 해달라. 일 진척이 너무 느리다. 이대로면 저번처럼 또 쉽게 고칠 수 있었던 실수 때문에 일이 늦어진다.
나름 personal 한, 장문의 이메일이었고 그래서 저도 다 내려놓고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줘서 고맙고 미안하다. 내가 보기에도 나한텐 이런이런 문제가 있고, 내가 보기에 완벽하지 않은걸 share 했다가 그걸 베이스로 내가 평가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이게 일을 더 안좋게 만든다는걸 알고 있는데도, 여전히 고치기가 힘들다. 사실 상담사를 찾아볼 생각이다. 니 말대로 최대한 내가 보기에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주자주 결과물을 공유하려고 노력하겠다. 미팅도 스케쥴이 허락한다면 지금보다 더 늘려보자.
지금 계약은 내년 9월까지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3월까진데, 이건 funding source 가 바뀌어야 해서 계약을 쪼개놓은 것 뿐이라서요. 여튼, 연말 휴가 빼도 9개월의 시간이 남았지만.. 아마 극적인 반전같은건 기대하기 어려울겁니다. 일적으로 보면 지금 하는 프로젝트를 어쨋든 마무리 하는 것, 개인적으로 보면 이런 내 단점을 알았으니 내려놓기를 체득하는 것.. 정도가 아마 남은 기간에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목표일거에요. 나름대로 정신들고 나서 지금까지, 평생을 살면서 교수가 되는걸 목표로 해왔던 일이지만 아마 내년 9월을 마지막으로 그 꿈은 접게 될 것 같구요.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다른 일을 하게 될텐데 올해에 얻은 깨닳음들이 저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기를 바라야 겠습니다. 사실 이 꿈을 접게 되었다는 점만 빼면 꽤 얻은게 많은 해였기도 하구요. 나름 프랑스에서 살아보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좋은 취미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생각도 더 많이 하게 됐구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많은 분들이 힘드실거고, 사실 냉정하게 보면 이런 제 상황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게 힘드신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제 서서히 끝이 보이니까요. 다들 힘내시고, 이렇게 힘든 와중에도 무엇이 됐던, 건질 것이 있는 한해로 마무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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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분이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 있어 그렇다기 보다는 타인에게 보여지는 자기의 모습을 너무나도 크게 신경쓰고 있는게 아닐까요?
자존감을 높여주는게 우선이 아닐지요. 잘난맛에 사는 성향과 글쓴분의 성향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