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과 자연과학 역사에서 가장 헛되고 비극적인 죽음
에바리스트 갈루아(1811.10~1832.05)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들 중에 꼭 포함됩니다. 갈루아는 만 20세에 결투로 요절한 천재로, 사망 직전에 남긴 그의 업적은 현대 대수학이론의 초석이 됩니다. 만일 갈루아가 장년이 될 때까지 살았다면 영국의 뉴턴과 독일의 가우스에 필적하거나 능가할 수 있었다고 많은 프랑스인들은 믿고 있습니다. 아래는 15살 즈음의 갈루아의 모습입니다.

중등학교 시절부터 갈루아는 수학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했지만 자신보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동급생이나 교사를 무시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교내에서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많은 천재들이 그랬듯이 어릴 적 갈루아는 학교 수업을 무료하고 쓸모없다고 여겼습니다. 학교 수업보다 수학자를 대상으로 씌어진 전문 서적과 논문을 읽는데 모든 시간을 보냈기에 수학 이외 다른 과목들은 평균에도 못 미치는 성적을 얻었습니다.
갈루아는 자연과학에서 최고명문대학인 에콜 폴리테크닉에 진학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했지만, 머리속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적 사고를 이어나가는 갈루아의 천재성은 그가 교사나 시험관을 대할 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당시 갈루아를 면접한 에콜 폴리테크닉 교수들 중에는 프랑스의 대표 수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뻔한 내용을 쓸데없이 자질구레하게 질문하는 것을 갈루아는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갈루아는 과학도의 천국이라는 에콜 폴리테크닉에 두해 연속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해에는 자신의 답변에 대해 더 알기 쉽게 설명해달라는 면접 교수에게 갈루아가 칠판 지우개를 던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듯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의사소통 능력의 부족이 갈루아의 짧은 인생에서 가장 큰 단점이었습니다.
갈루아는 가까스로 국립사범학교에 입학하지만 인문계통의 명문대학인 그곳에는 뛰어난 수학자가 없었기에 그를 이끌고 지도해줄 스승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갈루아는 국립사범학교에서 자신의 선배이자 진정한 평생친구인 오귀스트 슈발리에를 만났습니다.
에콜 폴리테크닉 입학을 위해 재수하는 동안 갈루아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5차 방정식의 대수적 불가해법에 대한 독창적이지만 엄밀하지 못한 논문 원고를 당대 최고의 수학자인 오귀스탱 코시(Augustin Cauchy, 1789~1857)에게 보냈습니다. 코시는 이전에도 아벨이라는 무명 수학자로부터 5차 방정식의 대수적 불가해법에 대한 논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와 달리 코시는 갈루아의 원고를 검토하는 동안 논문 안에 담긴 아이디어에 매료되었습니다. 1828년 코시는 프랑스 과학원 회원들에게 자신이 17살의 과학도 갈루아에게 받은 논문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다음 회의에서 온전히 설명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코시는 자신이 약속했던 과학원 발표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갈루아의 논문을 분실했습니다. 코시는 위대한 수학자이지만 아벨과 갈루아의 재능을 파묻어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했다는 비판을 후대에 받습니다. 아벨의 경우와 달리 코시가 갈루아를 인정하고 도와주려고 했다는 정황들이 계속 발견되지만 결국 갈루아의 논문을 분실해서 원본조차 돌려주지 못한 책임은 코시에게 분명히 있습니다. 아래는 코시의 초상화입니다.

일년이 지나도록 코시에게 아무 연락이 없자 갈루아는 자신의 논문을 더 발전시켜 프랑스 과학원상 공모에 제출했습니다. 프랑스 과학원 그랑프리는 유럽에서 최고의 과학상으로 현재 노벨상보다도 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랑프리가 아닌 그 아래 상이라도 받게 된다면 전 유럽 수학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습니다. 갈루아가 제출한 논문은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명인 조세프 푸리에(Joseph Fourier)가 심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푸리에는 갈루아의 논문을 받고 몇 주 후인 1830년 5월 열병으로 사망했고 결국 갈루아의 논문은 또다시 분실되었습니다. 심사위원의 보고서가 없었기에 갈루아는 프랑스 과학원에서 아무 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1830년 그랑프리는 바로 이전 해에 가난과 결핵으로 26살에 사망한 노르웨이의 수학자 닐스 아벨(Niels Abel, 1802.08~1829.04)에게 수여되었습니다.
아벨의 가장 큰 업적은 일반적인 정수계수 5차 방정식들을 한 번에 풀 수 있는 절대적인 공식이 존재하지 않음을 최초로 증명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5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증명은 당시로선 너무 난해하고 추상적이어서 논문으로 출판할 수 없었기에 아벨이 빚을 내서 책자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아벨은 그 책자를 유럽 최고의 수학자로 불렸던 독일의 가우스와 프랑스의 코시에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5차 방정식에도 근의 공식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가우스는 아벨의 연구결과를 무시했고, 코시는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며 아벨에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우스와 코시가 아벨의 연구에 무심했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다른 수학자들은 그의 환상적인 성취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이센의 기술전문 학자이자 고급공무원이었던 크렐레는 최고의 실력을 갖췄으나 불운한 청년 수학자 닐스 아벨을 돕기 위해 1826년 유럽 최초의 수학전문 학술지인 『순수·응용 수학 저널, Journal für die reine und angewandte mathematik』을 창간했습니다. 이 학술지는 『크렐레 저널, Crelle’s Journal』 이라고 불리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연구논문이 크렐레 저널에 발표된 덕분에 아벨은 26살에 베를린 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그것을 통보받기도 전에 가난과 결핵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아벨 사망 후 프랑스 과학원은 그에게 그랑프리를 수여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후손이 없었던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은 생전에 자신이 남긴 유산으로 세계에 기여한 이들에게 주는 상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노벨은 이 상의 분야를 물리, 화학, 생리·의학, 평화, 문학으로 정했고, 한참 후인 1969년 스웨덴 중앙은행이 별도 기금을 마련해 노벨의 이름을 딴 경제학상이 추가됐습니다.
그런데 여러 과학 분야의 기초가 되는 수학상은 의외로 없었습니다. 그 대신 수학에서 노벨상과 맞먹는 권위의 상은 192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 조직위원장인 존 필즈(John Fields)의 제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1936년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에서 2명의 수학자에게 최초의 필즈메달이 수여되었고, 그 이후 4년마다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룬 수학자 2~4명에게 필즈메달이 수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필즈메달은 상금이 1만 5천달러에 불과하고, 40살 미만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매년 수상자가 결정되는 노벨상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2002년 1월 노르웨이 학술원은 자국의 위대한 수학자 닐스 아벨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아벨상을 제정했습니다. 아벨상은 노벨상처럼 나이 제한 없이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을 아울러 매년 수상자를 결정합니다. 상금도 노벨상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벨상이 진정한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갈루아 이야기로 돌아가면 프랑스 과학원상 수상이 무산된 직후 갈루아는 급진적인 공화주의 성향 때문에 보수적인 국립사범대학교에서 제적당했습니다. 갈루아는 공개 강의를 통해 자신의 업적을 알리기로 결심하고 1831년 1월 13일에 열리는 첫 강의의 광고를 신문에 냈습니다. 첫 강의에는 40명에 가까운 청중이 모였는데, 그들 속에는 프랑스 과학원 회원이자 그랑프리 심사위원이던 수학자 푸아송(Simeon Poisson)이 있었습니다. 푸아송은 강연 직후 갈루아에게 자신이 편집장인 프랑스 과학원회보에 논문을 제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갈루아는 이전까지 아이디어를 종합해서 논문으로 만들어 푸아송에게 보냈습니다. 푸아송이 향후 과학원 회의 때 갈루아의 연구 결과를 보고할 사람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갈루아는 희망을 품고 과학원의 주간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갈루아는 그의 연구에 대한 논의를 듣지 못했습니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과학원에 대한 갈루아의 좌절감은 다른 쪽으로 폭발했습니다. 구금에서 풀려난 동지들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갈루아는 당시 국왕이던 루이 필립의 목숨을 위협하고 군중을 선동한 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갈루아의 친구인 슈발리에는 그를 변호하기 위해 생시몽 운동을 지지하던 신문 '글로브'에 갈루아가 과학원과 푸아송으로부터 몇달 동안이나 답변을 듣지 못해 좌절해서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고 썼고, 그 기사를 읽은 푸아송은 여러군데의 사소한 부분을 흠잡아 논문을 퇴짜놓았습니다.
학계와 정부를 향한 좌절감에 더더욱 급진주의자가 된 갈루아는 프랑스혁명 기념일 전날 국민군의 군복을 입고 무장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9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다음해 파리에 콜레라가 퍼졌고, 갈루아는 감옥에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1932년 봄 갈루아는 그 병원 의사의 딸 스테파니를 만나 비극적인 첫사랑에 빠졌습니다. 스테파니는 갈루아를 사랑하지 않아 그냥 친구로 지내길 원한다면서 갈루아를 구애를 거절했습니다. 얼마 후 스테파니와 관련된 석연히 않은 이유로 결투를 받아들였습니다. 갈루아와 결투한 사람의 신원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결투를 앞둔 갈루아는 상대가 명사수라는 사실로 커져가는 공포감 속에 자신의 발견들을 조금이라도 더 명확하게 하려고 애썼고, 결투전날에 그의 친구 슈발리에에게 그동안 연구했던 수학 이론을 정리해서 편지로 남겼습니다. 결국 결투에서 복부에 맞은 총상 때문에 그 다음날 2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갈루아는 사망 직전 신부가 제안한 종부성사도 거절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수학과 자연과학 역사에서 가장 헛되고 비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갈루아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는 갈루아를 기념하는 가묘입니다.

갈루아가 결투 전날 밤에 친구 슈발리에에게 남긴 편지는 무려 서른 한장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유언장이기도 했던 편지 곳곳에는 "날이 점점 밝아오고 있구나.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같은 애절한 문장도 담겨 있었습니다. 슈발리에는 갈루아가 남긴 편지의 내용을 정리할 수학적 능력은 없었지만 갈루아를 위해 그의 업적이 묻히지 않도록 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아래는 갈루아가 슈발리에에게남긴 편지의 일부입니다.

슈발리에는 편지의 중요한 부분들을 사본으로 만들어 유럽의 수학자들에게 보냈습니다. 갈루아는 편지에 자신의 업적이 독일의 가우스나 야코비(Jacobi)에게 평가받고 싶다는 의견을 남겼는데, 이는 자신의 논문을 제대로 심사하지 않은 프랑스 수학자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슈발리에는 독일로부터 어떠한 답변도 듣지 못했습니다. 슈발리에가 유럽의 수학자들에게 갈루아의 업적에 대한 편지를 보낸 후 십년이 지나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에콜 폴리테크닉의 교수인 조세프 리우빌(Joseph Liouville)에게 긍정적인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리우빌은 갈루아의 업적을 정리해서 갈루아가 사망하고 11년이 지난 1843년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수학저널에 세 편의 논문으로 출판했습니다.
수학자들이 갈루아의 연구를 계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간 결과 대칭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열렸습니다. 1870년 까미유 조르당이 갈루아가 언급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대수방정식론』을 출판해 갈루아의 이론을 완전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조르당이 정리한 갈루아 이론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대수방정식의 대수적 가해성 판별문제입니다. 이것으로 갈루아 이론을 다시 설명하자면, 방정식의 차수가 높아질수록 대수방정식이 풀리는 체의 확장에 대응되는 갈루아군의 대칭성이 떨어집니다. 즉, 정수계수 5차 방정식부터는 갈루아군이 가해군(solvable group)이 아닐 수 있게 되어 대수적 해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 펠릭스 클라인(Felix Klein)과 소퍼스 리(Sophus Lie)가 갈루아의 군론과 대칭이론을 기하학에 응용하여, 갈루아의 이론은 수학의 전 분야에서 기존의 관점을 뒤엎는 많은 연구를 생산해내게 되었습니다. 갈루아로부터 유래된 군론이 지니는 통합적 힘이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에 19세기 말이 되자 물리학자들까지 군론에 주목하기 시작하여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에 군론을 이용하면서 앞으로 군론이 자연을 기술하는 강력한 언어가 될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20세기 중반의 입자물리학 이론에서 군론은 더욱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20세기 중반의 물리학자들은 갈루아가 창안한 군론을 이용해 세 힘인 약력, 전자기력, 강력을 통합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표준 모형입니다. 군론은 이론의 뼈대를 이루는 게이지 불변과 더불어 표준 모형의 살을 이루고 있어, 입자들의 상호작용을 규정하는 매개 입자들을 그 성질에 따라 몇 개의 집합으로 고르고 묶어내는 데 사용됩니다. 표준 모형 이후 초끈이론에서 M이론에 이르기까지 대칭과 군론에 대한 이해 없이는 더 이상 최신 물리학의 성과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학에서도 1970년부터 갈루아 이론을 중심으로 수학의 각 분야를 통합하려는 시도인 랭랜즈 프로그램(Langlands Program)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랭랜즈 프로그램은 21세기의 대표적인 수학자들을 배출하는 산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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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루아가 듀얼을 해서 요절했다는건 알고 있었는데 그 전에 이런 일들이 있었군요. 원래도 사회성은 없던 사람이었겠지만 저 지경이었으니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