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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 '훈맹정음'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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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0 16:23:38


송암 박두성   1888.04.26 ~ 1963.08.25

 돈을 모아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땅을 사드려야겠다는 꿈을 가졌던 그는 
1913년 관사를 제공해준다는 조건의 공고를 보고 제생원이라는 맹아학교에 
교사로 지원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제생원에 처음 부임한 그의 눈에는 충격이었다.
말도 우리 말로 하지 못하는데 점자 또한 일본어로 배우고 있는 것.
한글은 그나마 학교에서 한자와 함께 가르치기라도 한다지만 
점자는 아예 한글로된 것이 없다는 점이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맹아들을 가르치며 점차 그의 꿈은 부모님의 땅보다 이 아이들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그의 꿈이 되어 우리 말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자 고민한다.

1919년에는 3.1운동의 여파로 일본이 맹아학교에서 조차 조선어 교육을 할 수 없게 
하려하자, 일본인 관리에게 "실명한 이들에게서 까지 조선 말을 빼앗아 벙어리로 
만들려는 것이오?"라고 편지를 보내어 일본인의 입을 닫게 만들고 교육을 할 수 있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1920년 그는 홀로 한글 점자 연구를 해오던 것을 그가 가르친 
제자 8명과 함께 '조선어 점자 연구회'를 비밀리에 결성한다.

그는 한글 점자를 만드는데 있어 가장 우선될 원칙을 세운다.
그것은 한글과 같이 누구나 배울 수 있게 쉬워야 되고 한글과 같이
점의 수가 적어야 하며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를 원칙으로 두고 제작하기 위해 일제의 눈을 피해 훈민정음을 구해
한글 창제 원리를 공부하며 점자 연구에 박차를 가하며 실패도 했지만
그는 각막염으로 인해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포기 하지 않고 연구를 진행한다.


1926년 훈민정음 반포일인 11월 4일 훈맹정음을 발표하고
전국 맹인학교를 통해 전국에 있는 맹인들에게 취지문을 발송한다.
불과 7년만에 훈맹정음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훈맹정음은 훈민정음과 같이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점자 수 또한 63개로 적으며 배우기 쉽고 헷갈리지 않게 구성되었다.

훈맹정음이 조선팔도에 수 많은 맹인들이 쓸 수 있도록 
자신의 사비를 털어 원판을 제작하고 괄시받고 천대 받고 숨어 살던
맹인들을 찾아 다니며 맹인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1936년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자신의 아내 김경내 여사의 
도움을 받아 신약성서까지 점자 원판을 만들었는데
이를 시작으로 동의보감, 천자문, 성경전서, 약학서적, 이솝우화, 뉴스
등 언어를 통해 기초적으로 인갑답게 누릴 수 있는 것을
한글 점자로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노력으로 광복 전까지 무려 약 200여권의 한글 점자 책을 발간해 보급했다.

광복 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훈맹정음이 사용될 수 있게 통과 되어 
수 많은 맹인들이 투표장으로 나와 투표를 할 수 있었고
그가 만든 훈맹정음은 남북한 모두가 현재까지도 사용 중에 있으며
그는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이라고 불리고 있다.


"눈이 멀었다하여 우울하여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나는 좋은 일이라서 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하느라 한 평생 지나온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나는 창찬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한글 점자만은 남북한 통일을 이뤘다"

"점자책은 쌓아두면 돌출부가 망가지니 꽂아서 보관하라"

- 송암 박두성 선생 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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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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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0 17:10:23

훈맹정음이래서 이건 무슨 드립인가 하고 들어왔는데 가슴벅차오르게 감동적인 글이었군요

3
Updated at 2020-07-30 17:14:43

군대에서 송암박두성 선생님의 동화책(?) 같은걸 봤던 기억이..
생가였는지 관련 유적지인지가 인천 학익동에 있었다고 봤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검색해보니 송암박두성기념관이 있네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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