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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기] 놓치기 아쉬운 앨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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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9 23:12:46

01. Fiona Apple - Fetch The Bolt Cutters (Art Pop)



싱어송라이터 피오나 애플의 5번째 정규앨범 <Fetch The Bolt Cutters>는 새로운 연대의 출범을 선포했던 칸예 웨스트의 대작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의 뒤를 이어10년 만에 피치포크에서 10점이라는 점수를 받았다. (현재 메타크리틱 점수는 98점이다) 이 앨범은 말 그대로 새로운 연대의 출발을 기념하고 동료 예술가들과 음악팬들을 격앙시키는 위대한 걸작이다. 하지만 나는 "지난날의 그릇된 인식과 편견을 말소시키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모태가 될" 등의 이 앨범을 향한 거창한 수식에는ㅡ설령 그것이 피오나가 의도한 것이라 하더라도ㅡ회의감이 든다. 나는 <Fetch The Bolt Cutters>가 과대평가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차라리 나의 입장은 하나의 카테고리에 국한시켜 과소평가할 여지를 주지 말자는 쪽에 가깝다. 라디오헤드의 <Kid A>, 애니멀 콜렉티브의 <Merriweather Post Pavilion>, 칸예 웨스트의 <Dart Fantasy> 등 이 십수 년 전 발매된 앨범들의 미래를 우리는 얼마나 성마르게 단언했던가. 초월적인 시금석이 될 거라는 우리의 전망은 모두 엇나갔지만, 명반이라는 가치는 여전히 그대로다. So go with the flow, 그러니 지금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자.    




 

02. Jessie Ware - What's Your Pleasure? (Dance, Electronic)



자신의 기존 스타일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예술적 변신을 꾀하는 것. 이것은 오랫동안 참된 예술가의 덕목으로 여겨져왔다. 정말로 그럴까? 일단 이 덕목을 달성한 뮤지션들을 손으로 꼽아보기만 해도 이것이 머릿속의 개념과는 달리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손쉽게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스타일은 돈과 명예와 '정체됐다'라는 한 줄의 비평을 보장하지만, 예술적 변신의 경우 '발전했다(그렇다고 모든 변신이 발전으로 인정받진 않는다)'라는 한 줄의 평론이 돈과 명예의 상향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시 웨어의 용단은 그 자체로 높게 평가받을만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에게 헌신하고, 요리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유로댄스와 이탈리아 디스코를 기반으로 사람들을 춤추게 하고 섹스하게 만드는 레코드를 제작한다는 사실은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큰 정열과 두근거림을 안겨준다.     





03. Lorenzo Senni - Scacco Matto (Electronic)



이탈리아의 일렉트로닉 프로듀서인 로렌조 세니는 전자음악에 스며든 온기를 경멸했고 그는 음악에 관해서라면 근본주의자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이 근본주의자가 신봉하는 교리가 자기 자신이라는데 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확신과 강경함은 '10대들의 마약 소굴에서나 울릴법한'이라는 평가를 받던 10년 전부터 이어져온 기조였고, 이 같은 속성은 6년 만의 새 앨범인 <Scacco Matto>을 통해서도 세습된다. 기어이 이전과는 달라진 점을 꼽자면 우리가 멜로디로 분류할 수 있는 구간이 아주 조금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니의 음악은 여전히 최소한의 주의만 기울인 채 듣는 것이 좋다.  





04. Medhane - Cold Water (Hip-Hop)



릴 웨인과 칸예 웨스트 같은 대중문화의 아이콘, 드레이크와 제이 콜처럼 스타성과 잠재력을 동시에 지닌 루키들, 통신 기기의 발달로 말미암은 정보 이동 거리의 축소 등의 사건들이 맞물려, 힙합은 대중음악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러 힙합이라는 캔버스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지역색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노네임, 사바, 스미노를 필두로 한 시카고 불스와 얼 스웻셔츠, 마이크, 마비, 그리고 메드헨의 뉴욕 닉스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해마다 EP 규모의 프로젝트를 꾸준하게 발표하는 워크홀릭이지만 이들의 관념적인 산문에는 목적과 취지가 없다. 메인스트림의 힙합 뮤지션들이 샘플을 매만지고 엔지니어들과 토론을 주고받는 동안, sLUms라고 불리는 이 젊은 크루는 정성껏 마리화나를 말고,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고, 책을 읽다가 단잠에 빠진다. 설령 헤게모니를 상실할지언정 나는 장래의 힙합이 이런 풍경이길 기대한다.


 


 

05. Moses Sumney - grae (Art Pop)



<grae>의 러닝타임은 65분이지만 나는 이 앨범을 청취하며 단 한 번도 무료함을 느낀 적이 없다. <grae>의 짜임새는 단출하기 그지없지만 앨범이 전달하는 복잡한 감정에 나는 항상 경외감을 느낀다. <grae>라는 앨범은 내가 이 앨범을 위해 작성한 3000자 남짓의 글을 부질없는 것으로, 때로는 가장 보배로운 것으로 만들어준다. 나는 <grae>를 들으면 한 권의 심리학 서적을 읽은 것처럼 타인의 관점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grae>는 나로 하여금 예술의 구조적인 측면, 즉 형식미를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grae>에는 한 명의 예술가가 자신의 심원을 전시하는 가장 훌륭한 방식이 있다. <grae>는 우리가 예술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grae>는 의심할 여지없는 걸작이다. 



 


06. Phenomenal Handclap Band - PHB (Funk)




뉴욕의 사이키델릭 솔 밴드 Phenomenal Handclap Band의 음악 경력은 BBC 라디오 1에서 폴 매카트니가 그들의 음악에 찬사를 보내던 순간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폴의 찬사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는데 이 밴드가 그 뒤로 8년간 자취를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공백의 속 사정이 어찌 됐든 간에 PHB가ㅡ8인조로 출발했던 밴드가 3인조가 되어ㅡ돌아왔다. 아날로그 댄스 음악, 요트 록, 집시 음악, 요란스러운 베이스 연주 등 긴 공백 뒤의 복귀지만 이들의 음악적 인장만은 한결같다. 크로스오버와 해체의 시대에 이런 뻔뻔스러운 복고주의가 환영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PHB의 음악은 미래를 염려하지 않고 과거를 탐미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나는 이런 무드가 좋다. 





07. Phoebe Bridgers - Punisher (Alternative Folk)



나는 피비 브리저스의 <Punisher>를 들으며 일상의 배경음으로 알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앨범을 일상의 배경음으로 소비하고 있는 이들은 이 앨범의 진가를 놓치기 쉽다. 인디 포크와 소프트 록을 적절하게 배합한 듯한 <Punisher>는 남이 된 아버지를 향한 원성이고, 메시지로 폰섹스를 요구한 멘토에 대한 지탄이자, 살인자의 임종이다. 그 나이대의 젊은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피비 역시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지만, 짐작건대 그녀는 그중에 최고가 되고 싶은 것 같다. 나는 피비 브리저스의 <Punisher>를 들으며 문득 엘리엇 스미스가 떠올랐다. 이 별 특색 없는 목소리를 가진 새파란 싱어송라이터의 속삭임은, 엘리엇 스미스의 그것처럼 일상의 배경음으로도 꼭 알맞지만, 진중한 사색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제격이다.    




08. The Bilinda Butchers - Night and Blur (Indietronica)



구글에 Bilinda Butcher를 검색하면 마이 블러드 발렌타인의 베린다 버처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 밴드의 음악에 대한 평에는 '마이 블러드 발렌타인 같다'라는 표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샌프란시스코의 인디팝 밴드는 왜 하필이면 슈게이징의 여왕의 이름으로 밴드명을 선택한 것일까. 더군다나 이들은 '최애' 밴드가 마블발이 아니라 라디오 디파트먼트라고 밝혔고, 슈게이징과 드림 팝을 사양길에 놓인 한물간 제품이라고 평했다. 그런데 이 밴드의 음악에서 사양길에 놓인 한물간 제품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The Bilinda Butchers의 음악에는 16살의 사내아이들이 제일 쿨해 보이는 이름을 밴드명으로 선택하는 모습처럼 천진난만한 면이 있다. 그것은 마이 블러드 발렌타인처럼 아주 좋진 않지만, 베린다 버처의 목소리처럼 적당히 좋다. 



 


09. The Strokes - The New Abnormal (Alternative Rock)



쿨하다. 그 누구도 뉴욕의 록밴드 스트록스만큼 쿨하다는 형용사를 잘 이해시켜주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당신의 차 안에서 <Is This It>이 흘러나온다면 그곳에서 용인되는 감정은 흥겨움, 유쾌함, 들썽거림뿐이다. 밀레니엄의 벨벳 언더그라운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의 적통이라는 수식마저 스트록스의 미래를 담기에는 왜소해 보였다. 하지만 스트록스는 이카루스처럼 추락했다. 무려 19년 동안! 쿨함과 자의식의 표상이었던 어린 왕자들이 불혹의 아저씨가 되어 중년 뮤지션들의 전철을 뒤쫓는 모습은 우리에게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운다. "나는 새로운 친구들을 원하지만 그들은 나를 원하지 않지." '새로운 비정상'의 세계를 살고 있는 힙스터들이여, 이제 앨범의 품질에 대한 갑론을박은 집어치우자! <The New Abnormal>은 <Is This It>ㅡ조금 양보한다면 <Room on Fire>ㅡ이후로 들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스트록스의 앨범이란 말이다. 



 


10. Yves Tumor - Heaven To A Tortured Mind (Neo Psychedelia, Art Rock)

 


미국의 전자음악 프로듀서 입스 튜머는 ''록은 죽었다'라고 말하면서 록은 죽었다고 말한 1403번째 유명 인사가 됐다. 오늘날의 록 음악은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스타 밴드가 아니라, 열정적인 보컬과 일렉 기타가 토하는 굉음으로 가득 찬 공연장이 아니라, 청춘의 무모함과 원석의 아이디어가 샘솟는 대학교의 캠퍼스ㅡ그럼에도 여전히 록 음악의 요람이다ㅡ가 아니라, 바로 튜머 같은 괴짜들의 실험성에 의해서 그 명맥을 유지한다. 그러나 튜머의 최근 앨범인 <Heaven To A Tortured Mind>는 작사 작곡뿐만 아니라 많은 면에서 실험보다 전통의 영역에 놓인듯한 작품이다. 세계 최고의 히트곡을 만들고 싶다는 튜머의 진술에서 마돈나의 양자가 되고 싶다는 제이펙마피아의 발언을 연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좌우지간 (척 베리가, 리틀 리처드가, 지미 헨드릭스가, 데이비드 보위가, 그리고 프린스가 떠오르는)Kerosene!은 올해 들은 것들 중에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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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기 들었던 앨범들 중에

기억에 남는 앨범들을 급속으로 꼽아봤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시길!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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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7-09 23:14:57

대표곡 위주로 즐겁게 들어보겠습니다!! 추천 너무 감사합니다!! 이전 글들도 볼께요 ㅎㅎ 

2020-07-09 23:19:56

 이런 글은 무조건 추천합니다. 맨날 들을 거 없다했는데 

1
2020-07-09 23:30:01

덕분에 감 안잃고 있습니다 감샤합니다

2020-07-10 00:55:03

피오나 애플 앨범 나왔었군요? Extraordinary machine 앨범 아이팟으로 엄청 들었던 기억이...

2020-07-10 01:33:22

엇 엘이 분이신가봐요
엘이에서 글 보고 왔는데 또 읽게되네요

2020-07-10 01:34:38

그리고 저중에서 제가 들어본건 모제스 섬니 앨범인데,
처음에 앨범 한바퀴 돌리고나서 몇일을 계속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좋았네요

2020-07-10 02:01:50

모제스 앨범 그리고 스트록스 앨범은 진짜 매일 듣고 즐기고 있는 앨범들일 정도로 완성도가 너무 너무 좋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소개글을 보니 무척 반갑네요.

2020-07-10 13:29:44

차근차근 들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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