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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모독... feat. [분노의 포도] by 존 스타인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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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7-05 22:17:06

중학교 시절, 집에 내가 볼 만한 책으로는 백과사전 한 질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세계에 빠져계셨고, 저는 더 이상 UFO가 하늘을 날 것이라는 생각을 접고, 스트리트 파이터와 드래곤볼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고요. 예나 지금이나 공부, 특히 성적에 있어서는 젬병이었던 저는 그래도 선생님들의 눈을 끌고 싶었어요. 웬만한 국어선생님이 아니라 하더라도, 개구쟁이 10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고전명작을 읽어보라고 권하셨죠.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밑에서]나 [제인 에어]같은 책 이름이 기억납니다.


그땐 뭐가 그렇게 잘난체를 하고 싶었는지, 선생님들이 무슨 책 읽어봤냐는 말에 그저 몇 줄 안되는 백과사전의 '청소년이 꼭 읽어야할 XX권의 책' 제목과 그에 딸린 간단한 줄거리를 떠들어 대면,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그렇게도 좋았어요.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좋았죠. 물론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파동권과 에네르기 파를 쏘는 게 더 좋았지만요.


하지만 선생님들의 칭찬이 어느새 식상해 지고, 도서관에 꽂힌 책들을 보면서 이 책들을 다 읽는 것 보단 백과사전의 요약을 읽는 것이 훨씬 쉽고, 저걸 읽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을 한 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고, 그 후 4년동안 [삼국지] 이외의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죠.


언젠가 [분노의 포도]를 서점에서 보았을 때, 궁금했던 것이 어떤 책은 분량이 많아서 분권이 되었고, 시사 영어사에서 나온 빨간색 영한대역 책은 훨씬 작은 크기였죠. 똑같은 작가의 똑같은 제목인 거 같은데...-.-a 여튼 전 얇은 책을 가지고 집에와 읽다가 약 10분 후에 방 구석에 던져버린 다음 책값 2500원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훗날,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죄스러움'이었죠. 특히 [분노의 포도]는 그 죄스러움을 가장 크게 느끼게 해 준 책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거대합니다. 톰 조우드가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로 와서 농장노동자로 살다가 케이시 목사의 죽음을 계기로 지주의 개인 깡패를 죽이고 또다시 떠난다는 이야기...만이 아닌 훨씬 더 따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감옥에서 돌아온 조우드를 맞이하던 어머니의 모습들, 대공황의 분위기와 그 안의 사람들의 끝없는 절망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희망, 땀과 웃음, 희망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케이시 목사. 아름다운 Rose of Sharon... 단 몇줄의 다이제스트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것을 이 작품은 내게 '느끼게' 해 주었죠.


몇 줄의 요약이나, 몇마디 말로 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이 작품에 대한 대단한 모독입니다. 그 모독을 전 14살때 저질렀습니다.

 

https://mania.kr/g2/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3012843&sca=&sfl=wr_subject&stx=%EB%A9%8B%EC%A7%84+%EC%B1%85+%EC%86%8C%EA%B0%9C+&sop=and&spt=-205024&scrap_m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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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7-06 09:56:04

저는 방학 숙제 일기장에 쓸 거 없으면,
백과 사전의 소설 소개와 요약 줄거리
그대로 배껴 내던 기억이 납니다.

몇번의 이사 과정에서 버린
삼성당 16권짜리 학생 백과 사전의
3권인가 그랬는데..
일리아드,오딧세이에서 줄발하여
장구한 서양 문학사를 100페이지 안 쪽으로
(작가 사진,이것저것 그림 많던 걸 감안하면..)
다이제스트본으로 요약해 둔..

그 덕에 위인 수준의 레전드 소설가들 이름과
중요한 소설들 제목만은
지금까지도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존 스타인벡은
'국화'의 오프닝 문단의 한 줄이
유독 오래 남아 있습니다.
"안개가 낀 날은 비가 오지 않는다."

이런저런 핑계로 아직 도전도 하지 않은 작품인데,
읽어야 한다는 기분이 확 드네요.

이 앨범을 주제로 한 컨셉트 앨범도 있습니다..
https://youtu.be/eJnY23w7FQM
https://youtu.be/hqKtM8JFqoU
(음반 전체가 올라있진 않네요.)

WR
2020-07-08 20:06:36

책이나 음악이 무엇보다 '흔하지 않았던' 시대에서 지금은 너무 흔해져버린 시대라... 아직 제가 책에 대한 로망을 접지 않은 사람입니다만, 그런 로망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듯 합니다.

 

노래 감사합니다.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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