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맥주
근무중 짬이 좀 생겨 게시판의 글들을 정주행 중에 에타님의 '인생에서 최고로 맛있었던 라면' 이라는 글을 참 재밌게 봤습니다. 재미도 재미지만 비슷한 소재인 '내 인생 최고의 맥주'를 주제로 얼마전에 친구들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했지만 모두들 '그래 니가 그때 먹었던 맥주가 젤 맛있었겠다'라는 공감을 얻었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고등학교 2학년 한 여름,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이로군요. 왜 남자들은 한번쯤 격투와 관련된 운동을 배우고싶다거나, 배워야할 필요성을 느끼는 경우가 좀 있잖아요…? 저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뜻이 맞는 친한 친구들 대여섯명이서 동네에 막 개업한 '영어로 배우는 합기도'라는 합기도장에 등록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름만큼 특이한 점이 두가지 있었습니다.
1. 교포 출신이라는 관장님께서 직접 수업을 진행하셨는데, 정작 영어로 하시는건 '하나, 둘! 하나, 둘!' 넣는 운동 중 기합을 '원,투! 원,투!'로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2. 관장님 말씀으로는 우리 합기도장의 도복은 유도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유도복이 원래 타 도복에 비해 두껍고 무거운데 그렇기 떄문에 운동효과를 배로 볼수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위에 2번 항목의 관장님 말씀이 팩트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무지하게 무겁고 두꺼웠던건 사실이었습니다. 덕분에 여름이라는 계절적 특성과 맞물려 훈련시간 내내 땀을 엄청나게 흘렸고 끝날 무렵엔 땀으로 목욕을 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엄청나게 땀을 배출했으며 훈련을 한 날 밤에는 기절한듯이 곯아떨어지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무지막지하게 흘러 떨어지는 땀방울들과 함께 힘차게 원,투를 외쳐가며 진행한 훈련이 끝날떄 쯤, 관장님께서 끝나고 다들 사무실로 모이라고 명하시더군요. 전례가 없던일이라 어리둥절해하며 사무실에 가보니 잡다구리한 마른안주들과 맥주가 테이블위에 놓여있었습니다. 특유의 어색한 말투로 '어른이 주는건 먹어도된다! 한잔씩 마셔라!‘ 라며 300ml들이 정도의 컵에 한가득씩 부어주시더군요.
그떄까지만 해도 맥주의 참맛을 모르고 맥주는 그저 약간 보리맛이 나는 쓰디쓴 술이라고만 알고 있던 저에게 무심코 들이킨 한모금은 신세계를 경험케 해주었습니다.
무심코 마신 한입이 선사해준 상쾌하고 청량하고 시원하고 맛도 있고… 글로 표현하기 힘든 그 맛이 저로 하여금 끝까지 마시도록 만들었고 결국은 저도 모르게 원샷을 했더군요.
나이가 먹고 술도 많이 마셔 본 지금 돌이켜보면,
땀을 흘리며 격렬한 운동, 차갑고 김빠지지 않은 맥주
이 단순하지만 ‘맥주가 맛있기 위한 제일 중요한 두가지 요건’이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만큼 충족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되고 집에가는길에 맥주를 한병 사들고 귀가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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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O가 중요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