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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학적 관점으로 본 임진왜란 -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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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19:04:18

안녕하세요?

 

생각해보니 제가 쓰고 있는 시리즈가 두개가 있었네요. 또다른 하나는 '사업이란 무엇인가'인데 이건 차차 쓰기로 하고, 그보다 그 이전에 쓰던 임진왜란 시리즈를 마무리를 못 하였네요. 하여 오랜만에 시간이 좀 나서 마무리 지어 보려 합니다.

 

이제 명량해전이 끝났습니다. 

 

사실상 일본이 재침한 정유재란도 패색이 짙어 졌습니다. 어차피 바닷길에 저 무시무시한 '군신(일본인들 표현) 이순신'이 버티는 한 보급로는 끝난 것이고, 이제 모두 망연자실 한채 남쪽으로 돌아와 성을 짓고 우주방어 하기 시작합니다. 

 

일본 드라마 '군사 칸베에'를 보면 애초에 정유재란은 히데요시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전쟁이었고, 그래도 명령이니 함 시도는 해보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는 방향으로 간다... 가 일본측 장수들의 생각으로 나옵니다. 결국 모두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성에 칩거한채 본국의 퇴각 명령만 기다립니다.

 

 

전쟁 패배를 불러온 일본 혹은 히데요시의 실책은 무엇인가?

 

우선 그동안 조선측에서만 썼는데 일본 쪽 상황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그동안 일본 쪽 지식은 무지했는데, 최근 전국시대를 공부하며 나름 지식이 생겨 함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한국인 대부분은 당시 일본을 생각하면 왕(혹은 그정도 권력의) 히데요시에 그 밑에 서열 2, 3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그리고 수군 에이스에 와키자가 야스하루 정도로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일본 전국시대를 좀 알고 나면 고니시나 가토는 절대로 일본 군의 대표격으로 나설만한 경력이나 위신이 아닙니다. 와키자카는 현 일본 밀덕/역덕들 조차도 누군지 모를 정도입니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서야 '우리 일본에 저런 인물이 있었어?' 합니다.

 

당시 일본군 지휘체계를 보면 

 

총대장 - 우키다 히데이에 : 우키다 나오이에의 아들로 나오이에가 죽으면서 히데요시에게 자기 마누라를 주며 히데이에를 사실상 양자로 넣는다. 임란 당시 20살.

 

선봉1 - 고니시 유키나가 : 우키다 나오이에의 부하였고, 히데요시가 그의 협상능력을 높이 사서 등용. 아버지부터 본인까지 상인. 히데요시가 선봉을 맞긴 건 협상능력이 좋고 조선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아서.

 

선봉2 - 가토 기요마사 : 히데요시 집안의 시동 출신. 가토 기요마사 - 후쿠시마 마사노리 - 구로다 나가마사 이 세명은 어릴 적 히데요시 집에서 같이 컸고, 거의 형제나 다름없이 막역한 사이. 7본창 중 하나라고는 하나 7본창도 어디까지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무장을 기리는 정도지 사령관 급으로 생각해서 7본창을 7대장으로 착각해서는 안 됨.

 

그외 사령관들... 

구로다 나가마사 - 히데요시 군사인 구로다 칸베에(요시타카)의 아들. 칸베에가 일찍 가독을 물려줘서 구로다 가문의 당주. 어릴적 오다 노부나가에게 인질로 보내져 노부나가의 명으로 히데요시가 대리고 키움. 

 

후쿠시마 마사노리 - 위에서 말한 히데요시 시동 중 하명. 칠본창 중 대표격인 인물. 임진왜란 때는 크게 유명한 활약이 없어서 한국인들에게 듣보잡이지만, 히데요시 무장들 중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 나중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구로다 나가마사와 더불어 선봉으로 싸우며 이시다 미쓰나리를 무너트리는데 가장 앞장선 인물.

 

와키자가 야스하루 - 7본창 중 한명이나, 진짜 일본 내에서는 듣보잡. 어쨌든 그도 다이묘이긴 한데, 이상하게 조선에서는 무슨 버프를 받았는지 임진왜란서 에이스급으로 활약한다.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거의 롬멜급 이미지로 나온다.

 

 

이런데...

 

이는 임진왜란을 주도한 각군의 주요 사령관들이 모두 히데요시의 젊은 가신들로 구성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일본이라는 한 나라의 대표 군사령관, 요즘말로 하자면 참모총장이나 군원수급이 되려면 당시로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마에다 토시이에 정도는 되야 합니다. 그러나 뭐 어쨌든 이들은 원로라 치고 다른 일로 바뻐 빠졌다고 하더라도... 총대장으로 갖 20살이 된 우키다 히데이에라니...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물들 중 그래도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나 구로다 칸베에 정도라도 사령관에 임명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모리 가문의 대표 무장격으로 모리 가문이 히데요시에게 복속하며 요즘말로 치면 인수합병 된 기업의 사장 정도로 히데요시 지배 체제하에서는 눈치밥 먹는 바지 사장 정도로 취급을 받았는데... 이 사람은 나름 전국시대 네임드인데 임진왜란서 노년에 개고생 합니다. 웅치-이치 전투나 행주산성 전투 등등 나름 일본 대 모리가문 대표 무장인데 문관출신인 권율에게 굴욕을 겪습니다.

 

더 황당한 건 정유재란 재침 때 일본군 총대장으로 이 사람의 양자인 당시 16세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임명 된 것이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그 이전에는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뭐가 이리 복잡한지...)

 

구로다 칸베에는 히데요시가 평소에 가장 무서워 하는 인물로 도구가와 이에야스와 구로다 칸베에를 꼽을 정도로 의심과 견제를 받으며 사실상 히데요시 입장에서 너무 잘나서 좌천 된 그런 인물이었으나, 그 제주가 아까워서 어쨌든 군감으로 조선에 툭하면 보냅니다. 그러나 젊은 무장들이 말을 안 듣죠...

 

구로다 칸베에야 말로 히데요시가 전국시대에 지배자로 서기까지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주요 전투나 작전마다 그의 지략과 공로가 안 녹아 있는 것을 찾기 힘들정도의 인물로써... 비유를 하자면 유비가 서촉 정복한 다음에 제갈공명을 팽한 것이나 다름 없는... 뭐 그런 인물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구로다 칸베에가 히데요시 조직에서 찬밥센세 된 것은 정말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런식으로 지휘체계가 알고 보면 개판입니다. 

 

1) 선봉장 두명이서 서로 경쟁하며 따로 놀고, 서로 먼저 공을 세우겠다며 앞 다퉈 진격만 하고 있고...

2) 뒷 따르는 3군~9군도 딱히 중앙 통제가 없으며...

3) 모리 가문(고바야카와 다카가게, 모리 데로모토, 시마즈 요시히로) 같은 나름 전국시대 베테랑들은 히데요시 가문의 협력사처럼 취급해 보조 역할이고...

4) 이걸 통제하겠다고 나대는 인물이 전국시대 가장 성격 재수 없고 무장들이 가장 싫어던 이시다 미쓰나리...

 

이렇듯 봉건주의 국가의 군대는 각 가문의 사병조직으로써... 일본군은 각 가문의 연합체적 성격으로 이를 하나로 엮는 강한 힘이 없으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농구로 치면 팀의 모든 선수가 강한 에고를 갖고 서로 볼호그 하며 아이솔만 하는 그런 형국이 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죠.  

 

이럴진데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고 올라 간 것을 보면 얼마나 조선의 방위력이 형편 없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고니시군 하나에게 평양까지 쭉 밀린거죠. 하지만, 이후 이순신에게 바다 보급로가 막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상황이 어려워지자, 이를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통제할 중앙 사령부의 역할이 부족한 상황이 됩니다. (물론 이는 조선도 더 안습이지만...)

 

다시 한양까지 후퇴한 뒤로는 고니시-우키다-이시다 이 셋이서 사령부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들은 어찌보면 그 군사적 역량이나 경험치가 그닥이었고...(대표적인 전투가 행주산성 전투...) 이들과 반대파에 속한 가토-후쿠시마-구로다는 사실상 방관모드로 따로 놀게 됩니다. 

 

더구나 히데요시에게 일일이 봉행들이 보고를 올리고, 이를 히데요시가 결정해서 작전을 하달했으니...

2차대전 때 히틀러가 하던 삽질을 라디오 통신도 없던 16세기에 했으니, 어땠을까요?

우리는 임진왜란 때 하도 털려서 일본군에 대한 과대평가가 강하지만, 일본 측에서 바라보면 임진왜란은 진짜 히데요시의 삽질이 집대성 된 거대한 실책 덩어리입니다.

 

만일이지만,

고바야카와 다카가게가 총대장이고, 군사에 구로다 칸베에... 그리고 나머지 각 군은 이 지휘체계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거나, 아님 히데요시 본인이 직접 총사령관으로 왔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봅니다.

 

물론 여전히 16세기말에 바다를 건너 한 나라를 정복하는게 보급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일본군 내부에서는 이러한 진통이 있었습니다.

 

 

 

다음편은 무엇으로 이 시리즈를 마무리 할지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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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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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20:02:50

  故 이에나가 사부로 선생의 서적 중에 국내에 번역된 『일본도덕사상사』를 보면, 일본 무사들의 충성심이라는 것은 겉으로 표출되지 않으면(표면적으로 확인되어야만) 무의미한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장렬하게 사망하려고 하는 것도 뒤에 누군가 그 죽음을 확인시켜주는 증인으로서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다는거죠. 만약,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무장들은 개죽음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간단합니다. 그런 소위 "개죽음"은 자기 자손과 남겨진 가족에게 아무런 보상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보면, 일본 무사들이라는 족속의 심층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임진왜란 당시에 파병된 무사들이나, 혹은 남겨져서 대기하고 있는 인물들은 무의미한 전투에서 희생되기를 꺼려했고... 뒤에 남아있는 무사들이 그렇다고 정상적이냐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한 예로 일본 이바라키현(과거에는 히타치 國)의 센고쿠다이묘인 사타케씨가 규슈 나고야성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본국(히타치 국)에서 치안 문제, 보상 문제로 민심이 흉흉했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사료에 남아있고, 이는 얼마전에 작고하신 후지키 히사시 선생의 회고록 『전국사(戦国史)를 보는 눈』(번역판 아님)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파병을 시작하면서 미처 봉합되지 않은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했다는 거죠.

 

  무장들은 싫어한다지만, 히데요시 정권에서는 가장 유능한 인물이 이시다 미쓰나리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약 먼저 통일했다고 해도 히데요시가 맞딱뜨린 산적한 문제들은 역시나 엄청난 희생을 해야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통치를 하겠다고 손자 이에미쓰 代까지 가문폐적 작업하다가 큰 반란이 연이어 일어나니 결국 유화책으로 바꾼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히데요시가 멍청해서 노부나가보다 유화적인 정책을 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몇 년 전에 이케가미 히로코 선생이 쓴 『오다 노부나가』(요시카와고분칸)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호쿠리쿠 지방(현재의 후쿠이현에서 니이가타현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동해를 바라보는 지역)의 정복사업 때, 지역 토호들을 구슬려서 오다 노부나가가 보낸 총대장급의 인물과 협력해서 지역을 오다 것으로 만들고 나면, 갖가지 구실을 붙여서 지역 토호들을 몰살해버림으로서 결국 지역에서의 권력은 모두 제거되고, 노부나가 1인을 위한 독재가 여기저기서 문제를 야기함으로써 결국에는 혼노지의 변 같은 꼴을 당한 것입니다. 최근의 여러 논문을 보면, 서국지방(모리, 우키타 등이 있던 교토 서부 지역)을 공격할 때 총대장인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쓰히데 모두 말년에 노부나가의 신뢰를 상실해서 문제의 소지가 커지고 있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데요시가 하던 일은 이런 센고쿠다이묘들을 가급적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때로는 자기 권력을 보다 강고하기 하기 위해 겐치(토지조사)를 통해 도량형 통일이나, 조세제도 개편 등의 갖가지 일은 이 이시다가 해야하고, 또 했으므로 정권이 굴러간 것입니다. 물론 오다와라 전투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시다는 관리감찰이 적합한 인물이지 전투지휘관으로서는 아무래도 재능이 아니었던만큼 임진왜란에서도 딱 그정도의 역할만 합니다. (사실 이시다 위에 하시바 히데나가라는 걸물이자 동생이 있었지만, 히데요시보다 먼저 사망했기에...) 히데요시가 건너갈 수도 없고, 건너가지 못하게 옆에서 말리는 마당에 누군가는 현지시찰하고, 총지휘관의 명령을 하달해야하니까요.

 

   오대로 문제도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센고쿠다이묘라면, 형제, 자매, 혹은 그 혈연과 혼인관계로 인한 인척, 오래도록 가문을 위해 일해온 가신(소위 말하는 후다이라고 불리는 가신)들이 단계적으로 제1인자인 센고쿠다이묘를 보좌해서 가문을 떠받치고, 권력의 중추를 형성합니다. 만, 히데요시는 여기에서 태생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가 있으니... 형제자매라곤 몇 명 없고, 원래 오다 노부나가의 하급무사나 하던 가문이니 후다이가 있을리 없고, 더구나... 원래 센고쿠다이묘가 아니었으니 그런 혼인관계를 이용한 인척이 있었을리도 만무합니다. 이런데다가, 자식복도 없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히데요리 말고 20년 전에 한 지역의 성주노릇 하던 시절에도 측실에게 아이를 보았으나 얼마 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웬만한 다이묘들은 아들들이 많아서 걔네들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면 되는데... 그것도 안되는게 바로 히데요시입니다.

 

  이런 이유로 히데요시는 남편에게 강제로 이혼시킨 누나를 이에야스에게 보내고, 친척의 양자나 시동들까지 다 긁어모아서 후다이급이랍시고 만들어놨으니 정권구조 자체가 히데요시가 없으면 안되는 겁니다. 오죽하면, 히데요시 사후에 후처인 요도도노가 신뢰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남편의 주군가문인 오다가문의 재주없는 인물들을 신뢰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나마도 히데요시가 말년에 이 사람들이라도 회유해서 자기사람이라도 만들어놨으니 그렇지, 아니면 요도도노는 남아있는 기록보면, 스트레스 잘 받는 그냥 보통의 여성인데, 저런 정치적 문제에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으니 남편이 믿던 사람들을 믿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결국 후다이가 없으니 그 대신으로 만들어놓은게 오대로인데, 면면을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 이유가 있어서 선택을 했습니다. 마에다는 친구나 매한가지였고 가장 신뢰할 만 했으며, 우에스기는 시바타 문제로 합심하게 된 나오에가 있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맞았으며, 우키타는 서국 지역 공략할 때부터 계속 인연이 있었으며, 모리는 고바야카와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에야스는 군사적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으므로 최대한 멀리 떼어놓으면서 인척관계로 만든... 다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오대로는 원래 자기 사람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마에다 정도 뿐이고, 우키타는 어려서 양자관계도 형성하면서 그나마 나았기 때문인데... 히데요시가 아니면 서로 협력할 관계는 아니었다는 거죠. 이에야스가 아들들에게 신판을 만들어줘도 나중에 가면 서로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은데, 원래도 다른 출신과 핏줄도 안섞인 사람들이 사이가 좋을리는... 만무하죠. 거기다가 이에야스는 제거하고 싶어도 쉽지 않고, 제거하더라도 피해가 엄청나게 큰데다가... 이에야스가 가장 적극적으로 출병을 반대했기 때문에 이런 위험분자를 놔두고 조선으로 건너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표면적으로는 우키타가 히데요시의 양자 역할에 오대로라는 위치에 있으니 형식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위에서부터 언급한 다 다른 목표와 지향점을 가진 인물들이 금방 창을 거두고 하나로 합심해서 할 이유도 없는거고요. 이에야스처럼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거기다가 보급 문제나, 엄청난 전비가 소요되는데 비해서 상대방도 만만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선교사들이 루손(필리핀) 공격하는게 더 현실적일 거임! 이라고 했던 건 허언이 아니었죠. 물론 계절풍 잘못 만나면 건너가기도 전에 고래밥 되겠지만. 신립이 전사하고 이일이 도망치고 조선군이 초반에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오래도록 축적된 경험과 운영에서 비롯된 조선 조정의 시스템이 그만큼 효과적이고 단단했다는 거고, 일본 국내에서 센고쿠 시대에나 통하던 소위 군단장 시스템으로 알아서 해결하도록 했던 전략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임진왜란 전에 해적정지령 내려서 수군을 자체적으로 전력 다운시켜 놓았으니 바다를 건너가야 병력 수송을 하건, 물자 보급을 하건 하는데 그게 안되는 겁니다.

 

  결국에 이런저런게 안되니까 나중에는(초장부터 편성은 되었지만) 6부라고 해서 기술이나 인적자원 빼돌리는 약탈전으로 수준이 내려가버렸고, 전공이나 더 세워보겠다고 사람들 귀나 코 베어서 바친건 몽고 침입 때 하늘(!)의 도움으로 이겨놓고도 보상받을 길이 없어서 결국 바쿠후 멸망의 원인이 된 전공보상체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걸 입증한 것이죠.

 

  그냥 마구잡이로 생각나는 것만 갈겨도 이런데... 적어도 일본과 한국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히데요시의 과대망상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실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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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20:32:43

긴 답글 감사합니다!!!

제가 메니아 하면서 본 가장 긴 댓글입니다. 

1
2019-12-06 21:06:01

댓글의 질과 양 둘다 감탄하고 갑니다. 쓰셨던 글도 잘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2019-12-07 07:01:46

잘 읽고 갑니다.
코바야카와는 모리모토나리 3남입니다.
모토나리가 2남은 킷카와 3남은 코바야카와 가문으로 양자로 보내 두가문을 모리산하로 꿀꺽. 암튼 코바야카와는 지장으로 전국네임드 다른 참전애들보다는 한티어 위급. 근데 조선에서 두번이나 털리죠 권율장군님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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