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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바꿔놓은 만년 참모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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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8 12:23:39

위의 사진은 세계 광고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캐릭터인 말보로맨(Marlboro Man)의 상징인 웨인 매클래런(Wayne McLaren)입니다. 미국의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가 말보로를 시판한 것은 1924년이고, 초창기 말보로는 여성용 담배였습니다. 말보로에는 립스틱 자국을 가려주기 위한 빨간 필터가 붙어있었고, 20년간 말보로의 광고 문구는 ‘Mild as May(오월처럼 부드러운)’이었습니다. 말보로는 그렇게 오래 동안 일부 여성 등 소수 계층에서만 소비되던 담배였고, 1950년대 초에는 유해성 논란과 더불어 매출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필립 모리스는 말보로를 과감하게 변신시켰습니다. 그런데 품질이나 내용을 많이 바꾼 것이 아니라 약간의 공정 변화만을 거쳤고, 과감한 변화는 마케팅에서 이뤄졌습니다.

 

말보로는 광고 모델로 카우보이를 사용했고, 남성들을 위한 담배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1953년에 최초로 등장한 말보로 맨은 바로 말보로 광고에 등장하는 카우보이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서부영화가 많은 인기를 끌었고, 많은 젊은 남성들이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돌아와 회사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말보로가 주로 겨냥한 타겟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말보로는 답답한 사무실 속의 그들에게 남성감과 자유에 대한 환상을 카우보이 말보로맨을 통해서 보여줬습니다. 말보로맨을 내세운 광고 문구는 “Come to Marlboro Country. (말보로 나라로 초대합니다.)”, “Come to Where the Flavor is. (운치 있는 곳으로 오세요.)”

 

오피스에 갇힌 미국 남성들은 말보로를 피움으로써 풍미 있는 곳으로 초대받았고, 자신들을 말보로맨과 동일시 할 수 있었습니다. 말보로맨이 등장하고 1년 만에 말보로의 매출액은 4배로 올랐고, 그 이후에는 필립 모리스 조차도 꿈꾸지 못했을 정도로 말보로의 매출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197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말보로의 매출액은 말보로맨 이전보다 수백배 이상으로 늘었고, 필립 모리스는 세계 10대 기업에 진입했습니다. 사진의 웨인 매클래런(Wayne McLaren)1970년대에 말보로 맨 캠페인을 시작했고, 많은 말보로 맨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얼굴입니다. 그는 199251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사망 전에 처절한 금연 캠페인을 이끌었습니다. 매클래런의 사망 후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라는 논쟁이 급격히 늘어났고, 미국 의회는 1998년에 담배 광고에 사람을 등장시킬 수 없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1935년 미국의 육군참모총장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과 그의 전속부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소령입니다. 당시 55살이던 맥아더는 5년 전부터 육군참모총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45살이던 아이젠하워는 14년째 소령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9년 동안 맥아더의 전속부관을 지냈지만 군 시절 맥아더와 아이젠하워가 나란히 찍힌 사진은 아마 이것이 유일할 것입니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은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졸업한 후 38살에 장군에 진급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웨스트포인트를 132등으로 졸업했고, 지휘관보다 부관으로 군 생활을 이어가며 진급에서도 크게 뒤쳐져 그가 목표로 했던 대령 진급 후 은퇴는 요원해 보였습니다.

 

 맥아더의 아버지는 필리핀 총독을 지냈고, 그의 가문은 필리핀에서 막대한 영향력과 이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 사진은 육군참모총장 맥아더 대장이 1935년 필리핀의 최고군사고문에 위촉된 후 전속부관 아이젠하워 한명만 데리고 필리핀에 도착한 후에 촬영된 것입니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가 가장 뛰어난 사무원(clerk)이라고 말해왔으며 차분하고 빈틈없는 그의 사무처리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의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높이 평가하지 않아 진급을 총괄하는 참모총장 직을 5년 동안 수행하면서도 오랜 전속부관의 진급을 챙겨주지 않았습니다.

 

 훗날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부관으로 지내던 9년 동안을 인내와 굴욕의 시절이라고 술회했습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스타일은 맞지 않았습니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과시와 허세로 부풀려진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35년 필리핀에 도착했을 때 맥아더가 필리핀 대통령에게 자신을 위해 성대한 열병식을 베풀어줄 것을 요청했을 때, 고분고분하던 부관 아이젠하워는 처음으로 맥아더의 의견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사무라이 출신이 아니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의 혼란이 있었기에 모든 신분을 뛰어넘어 최고 권력자에 올라 일본을 통일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역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주원장은 어릴 적에 부모 형제를 모두 잃고 탁발승이 되었지만 홍건적의 난이라는 극심한 혼란이 있었기에 모든 신분을 뛰어넘어 명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본토에서 한참 떨어진 코르시카 섬 출신의 하급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혼란이 있었기에 신분을 모두 뛰어넘고 프랑스 황제에 올라 유럽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웨스트포인트 대선배인 율리시스 그랜트는 중위로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했고, 대위로 승진한 후 캘리포니아에 보직되었을 때 알콜중독으로 불명예 제대하여 군 경력을 마쳤습니다. 퇴역 후 그랜트는 가족이 있는 일리노이로 귀향하여 창고관리인, 농부, 가죽판매상, 땔감나무장사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나 하는 일마다 실패하여 인생을 망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미국의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그랜트는 장교로 복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그랜트는 북군 총사령관에 올라 전쟁을 승리로 가져올 수 있었고, 미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어 현재 미국 50달러 지폐인물로 기려지고 있습니다.

 

1939년에 유럽에서 벌어진 2차 세계대전은 아이젠하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참모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전략과 전술의 마스터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아이젠하워에게 당시 참모총장이던 마셜 장군에게 유럽에서 진행 중인 전투에 대해서 작전을 건의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이젠하워가 건의한 작전은 너무 훌륭했고 마셜은 그를 유럽으로 불러들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194151살의 나이로 그가 꿈꿔왔던 대령에 진급할 수 있었습니다. 작전과 총괄지휘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아이젠하워는 불과 2년 후인 1943년에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44년에는 별 다섯 개인 원수의 계급에 올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습니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의 승승장구를 크게 질투했고, 두 사람의 사이는 껄끄러운 관계로 끝나버렸습니다.

 

 전역 후 대통령 출마를 제의받았지만 트루먼과 신의를 지키기 위해 아이젠하워는 콜롬비아대학교 총장에 부임했습니다. 그 뒤 20년간 지속된 민주당 정권의 장기집권을 멈추려는 공화당의 요청으로 대선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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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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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8 12:28:58

선추천 후열독입니다~

2019-03-08 12:36:33

선추후독..각잡고 봐야함

2019-03-08 12:51:15

당시 대선에서 사용했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가 "I Like Ike"였죠.

군에서 짬밥이 어마어마하여 대통령 재임 당시 군축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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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8 12:54:31

추천 합니다~

맥아더가 국내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추앙 받지만 서구권에서는 별로 평가가 좋지 못하다고 하더군요.

필리핀에 있을 때 상부에서 보낸 첩보가 있어도 일본 침공 대비를 안한것,

1.4 후퇴 한참 전부터 중공군 개입 징조가 있었는데 무시하다가 털린것.. .

2019-03-08 14:24:47

아이젠하워 평 대로 과시와허세가 많은 사람이긴 하죠.

인천상륙작전이 작전의 과감성+서울 수복 등 나무랄데 없이 훌륭한 작전이긴 하지만,

이후에 원산상륙작전은 뭐 쓸데없는 쇼에 불과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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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9-03-08 19:32:17

맥아더는 사실 굉장히 독선적이고 오만했다고 합니다. 사견입니다만 한국에서의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지나치게 고평가되는 느낌입니다. 실제로 맥아더의 커리어를 보면 명장이라고 하기에는 실책도 많고 그가 거둔 업적도 이후 미군에 미친 영향력도 아이젠하워나 니미츠에 비해 미비합니다.

필리핀 시절에도 말씀하신대로 실책이 많았구요. 좋게 말하면 자기 주관이 확고하고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강해서 참모들이 일리 있는 의견을 내도 자기 마음에 안들면 무시하기 일쑤였다고 하죠.

그런 맥아더의 일면이 가장 긍정적인 결과를 낸 건 인천상륙작전이 대표적입니다. 이 작전은 당초 도박성이 너무 짙어서 참모진의 반대가 강했다고 알고 있는데 맥아더는 우직하게 밀어붙였죠. 반면 이후 중국 개입이나 위에 언급한 필리핀 전역은 그런 일면이 부정적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또 다른 일면으로는 질투심과 자기과시욕이(이건 쟤두루미님도 말씀하셨지만) 상당한 인물이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 그리고 일본의 군정 시절에도 이런 일면이 상당히 많았고, 결국 트루먼에 의해 해임되어 귀국할 때도 면책성 해임을 당한 데도 불구하고 대대적으로 퍼레이드를 벌였죠. 이 때의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처럼 정계 진출을 염두에 두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다만 퍼레이드 자체는 지나칠 정도로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맥아더가 워낙 인망이 없어서 결국 정계진출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습니다.

2019-03-08 13:08:09

와 아이젠하워는 워낙 유명한 분인지라 맥아더처럼 처음부터 승승장구했을줄 알았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군요. 정말 술술~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03-08 13:17:11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근데 맥아더의 저 사진 브루스윌리스 닮았네요

2019-03-08 14:19:29

아이젠하워에게 이런 과거가 있는줄은 몰랐네요.
전쟁 영웅 인줄로만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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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8 21:19:23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일생을 비교해보면 참 재밌죠. 한 사람은 할아버지는 주지사 아버지는 필리핀 총독을 지낸 미국의 마지막 귀족세대 출신에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손꼽힐만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초고속 승진을 이루어낸 엘리트중의 엘리트 한사람은 종교박해를 피해 이민한 가난한 독일계 스위스인의 아들로 고등학교 1년 유급 웨스트포인트도 3수 끝에 겨우 들어가 극히 평이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번번이 승진도 미뤄진 만년 대리 과장 출신.

그런대 이 만년 대리 과장의 능력을 제일 처음 알아본 사람은 귀족 엘리트 장군이었습니다. 단 군인이 아니라 사무원으로 말아죠. 그래서 이 오만하고 콧대는 하늘을 찔러 대통령 조차 우습게 보는 이 귀족장군의 따까리 노릇을 장장 9년이나 해야했던 평범한 군인은 이후 단 3년만에 대령에서 원수라는 기적적인 승진을 이룩하는 동안 그 귀족장군 아래에서 연마한 기술을 십분 발휘합니다. 바로 중재자로서의 역할이었죠.
패튼이나 몽고메리 같은 성격 파탄자가 설쳐대는 연합군 수뇌부에서 그 이상의 오만과 독선으로 똘똘뭉친 상사를 경험한바 있는 아이젠하워는 이들의 불협화음과 트러블을 지속적으로 봉합했고 그덕에 이후 반세기를 적대했던 소련군에게 조차 존경을 받고 종전후 소련이 단 17명에게만 수여했던 최고등급의 훈장까지 받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후 패전국의 쇼군으로 군림하던 귀족장군은 한국전쟁에서 거의 도박이나 다름없던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군인 일생의 절정을 달리는가 싶었지만 그 특유의 오만에 일부는 계획된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어이없는 실책이 이어지고 현역군인으로서는 있을수 없는 아니 어쩌면 마지막 귀족인 사람이어서 가능했을지 모를 군통수권자에 대한 끝없는 비난과 항명 뒷다마까기를 이어가다 경질되고 말았죠. 하지만 경질되어 돌아온 그는 700만 인파의 환호를 받으며 의회에서 역사에 남은 퇴임연설을 하고 군인 생활을 마감합니다. 일생을 이미지 메이킹에 전념해온 덕을 본건지 꿈에 그리던 대권 도전이 가시화되는가 싶었지만 이미 대중은 아시아 변방의 나라에서 이룬 그의 승리는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고 그의 대권의 꿈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절되고 맙니다.

그리고 정말 아이러니 하게도 그를 대신해 대권 도전의 꿈을 이루어낸 사람은 불과 십수년전 자신의 밑에서 개고생 하며 일을 하던 만년 대리 과장 아이젠하워였고 그 아아젠하워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한국전쟁을 끝내겠다였죠. 마지막 몽니였는지 맥아더는 공화당 경선에서 아이젠하워의 경쟁자를 지원했지만 대세를 바꿀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시대는 오만한 귀족 맥아더가 아닌 온화한 중재자 아이젠하워를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아이젠하워는 그 바램대로 매카시즘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한국전쟁을 마무리하고 미국의 황금기를 여는 초석을 다집니다. 공화당의 대통령이었지만 민주당의 지지자들에게도 사랑받는 그런 대통령이었죠.

훗날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에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옛 귀족상관을 만나 한국전쟁을 어떻게 마무리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했을때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때 맥아더는 이런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38선을 중심으로 원폭(코발트 폭탄이란 말도 있습니다.)을 터뜨려 방사능 필드를 형성하면 이후에도 북한이나 중국이 남한을 넘보지 못할 것이다. 라구요.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당시 그 제안을 잠시나마 정말 진지하게 고려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던거죠.

2019-04-20 06:44:06

패튼. 몽고메리. 성격파탄자..ㅎㅎ
딱 들어 맞네요
내가 어이 북아프리카에서 어이
내가 롬멜도 때려잡고 어이 그러니깐 네델란드에 공수부대 투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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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9 11:42:50

맥아더 단점도 많은 사람이긴 해도 2차대전 패전국들 명장들에 비하면 그래도 잘 풀린 케이스죠. 롬멜 만슈타인...

그리고 일본군 장성들에 비하면 막아더는 그래도 상위 1티어급인건 분명한 명장은 명장입니다. 만일 한국전쟁을 통일로 끝내기만 했어도 길이남을 수 있었는데... 사실 우린 인정 안 하지만 당시 공산권의 모택동이나 팽덕회 호치민도 군사적으로 대단한 전술가들입니다. 저는 맥아더의 실책도 실책이겠지만 모택동과 팽덕회가 한방 날렸다고 평가하고 싶네요. 근데 우린 여태 이걸 인정 못하니 맥아더를 까온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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