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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시민들이 내린 최악의 판결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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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04-12 15:20:47

    

 

 

  세계사 교과서를 펼치면 인류 문명의 기원과 더불어 반드시 소개하는 시대가 있습니다. 로마 공화정을 이룩한 인물들과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참고했다는 정치 체제가 꽃피우고, 거대한 해상 제국을 건설했던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 아테네의 전성기입니다. 최고의 지도자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러 해상 제국의 영역이 최대를 기록한 것과 더불어 당시 아테네 남성 시민들에게는 광범위한 정치 참여의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

 

 

  고대 아테네 시절 정치 참여라는 개념은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한 현대 국가들에서 흔히 대의(代議)민주주의 형태에서의 대표적인 권리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나라를 이끌어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직접적인 형태의 국정 운영 제도 다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시민 중 500명을 추첨으로 뽑아 정무심의회를 구성하여 일정 기간 동안 의회 소집과 의제 선정 등의 업무를 담당하며 근대 국가에서의 행정부의 역할을 대신하였으며, 독립적인 사법부를 마련하지 않고 정무심의회와 마찬가지로 시민들 중 500명을 뽑아 재판관으로 삼고 여러 가지 송사(訟事)들을 다수결로 결정지었습니다. 물론 스트라테고스라고 부르는 장군 직책의 인물들을 매년 10명씩 선거로 뽑아 군사, 정치에서의 지도자로 삼았으나 인류 역사상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형태의 민주주의 제도가 고대 아테네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아테네가 이렇게까지 시민들에게 개방된 국정 운영의 길을 열어줄 수 있었던 것은 근대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적은 (그러나 그 당시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는 최대 규모였을) 4만명 정도의 참정권을 가진 남성 인구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하나의 요인입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가동되는 정치 체제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아테네를 이끌어가는 시민들의 역랑과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당대 최고라 자부할 만한 학문적 거점으로서 자연과학과 철학, 예술의 최신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갈고 닦았던 아테네 시민 개개인이 최고 수준의 지성인들이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아테네의 정치 체제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을 겁니다. 잡일을 맡아 하루마다 일당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도시 노동자들 또한 생업에 지장 받지 않으면서 정치 참여에 동참할 수 있게끔 국가에서 정치 참여 비용을 보전해주며, 부자들은 배정 받은 군함에 장비를 보강하고 단장하는데 있어 자신의 사비를 아끼지 않고 투자하던 아테네의 모습을 바라보면 대단한 국가에 앞서 대단한 시민이 있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합니다.

 

 

  지금까지 다룬 아테네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교과서에서 아테네를 긍정적으로 다루는 서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교과서에서는 현대에 통용되는 민주주의와는 그 형태가 꽤 다르지만, 몇천 년 전에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가 아테네에 훌륭하게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수준에서 끝납니다. 제가 논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대단한 시민들을 재판관으로 보유한 아테네조차도 그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 몇 세대동안 최악이라고 여겨지던 판결들을 여럿 배출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최악의 판결들은 예외 없이 모두 아테네가 평소 엄격히 준수하던 사법 체계를 무시했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시대 순으로 먼저 아테네의 라이벌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과의 대결이었던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전투를 이끈 장군들을 처벌한 재판을 다룰 것이며, 다음으로 그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사형으로 이끈 판결을 다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부상할 무렵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포키온의 사형 판결에 대해 간단히 다룰 것입니다.

 

 

  최고의 시민들이 국가의 권한을 위임받아 행한 재판을 통해 남긴 역사적 오점들을 되짚어 보며 과연 현대 국가에서 현명한 대중이라는 것이 성립 가능한 개념인지, 사법 체계를 무시해가면서 대중의 흐름에 휩싸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첫 번째 재판에 대해서 다루고, 추후 두 번째와 세 번째 재판에 대한 글을 따로 마련하여 올리겠습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후 아테네의 승리를 이끈 장군들의 재판에 대하여

재판 전 상황 간단 소개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통해 곡식을 수입하는 아테네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서는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함을 깨달은 스파르타는 레스보스 섬 근방에 전함을 파견하여 싸움을 걸었지만, 노련한 아테네 해군은 이들을 유인한 후에 포위 섬멸하여 대승리를 거둡니다.

 

       

  여기까지는 정말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승리였습니다문제는 전투 이후 침몰한 전함에서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전사자들의 유해를 인양하는데서 발생합니다.  아테네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따로 매장하는 국립묘지까지 보유할 정도로 전사자들의 대우를 남달리 하였는데, 극심한 폭풍우로 인해 전사자들의 유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음은 물론 물에 빠진 생존자들도 원활하게 구조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가족을 잃고 시신마저 수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처음에는 장군 10명 중 뒤에 따로 남아서 상황을 수습하기로 한 2명의 장군들에 대하여 법정 고발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고소당하게 생긴 장군 2명은 자신들은 폭풍우로 인해 상황이 어려움을 알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묵살한 나머지 8명의 장군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흥분한 시민들은 그들을 두려워해 아테네로 귀환하지 않은 2명의 장군을 포함한 이들 장군 8명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게 됩니다

        

재판 과정

 

  위에서 기술하였듯 아테네는 따로 독립적인 사법부를 두지 않고, 시민 500명을 재판관 삼아 그들의 판결로써 재판 결과를 결정지었습니다.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들에 대한 재판은 아테네 법정이 준수하던 중대한 규칙을 몇 가지 어기고 있었는데 첫 번째로 장군들 개개인마다 고소하여 따로 재판을 연 것이 아니라 장군들의 송사를 통째로 다루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로 이들에게는 일반적으로 피고인들에게 주어지는 개인의 변호를 위한 충분한 준비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주목할 점은 본인의 가족이거나 친구였던 전사자들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여 흥분한 시민들이 재판관을 맡은 시민들을 선동하며 장군들을 처벌하려고 했던 것과 대조되게 당시 협의회의 구성원이었던 소크라테스(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 철학자 소크라테스 맞습니다)는 재판 과정 자체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우연히도 재판 당시 제비뽑기와 순번제로 선택된 협의회의 일원이었던 소크라테스는 다른 협의회 구성원들이 시민들의 겁박에 못 이겨 입장을 철회한 뒤에도 줄곧 일관되게 시민들의 행동이 잘못되었으며 아테네의 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만류에도 불구고 시민들은 결국 제대로 형식도 갖추지 않은 재판을 통하여 결국 기소된 장군들의 사형 판결을 얻어내고 맙니다.

 

 

재판이 끼친 영향

 

  군무와 정무를 담당하던 스트라테고스장군 직책은 국가 지도자급 직책으로 평상시에는 물론 전시(戰時)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직책이었습니다. 당시 장군 직책을 맡고 있던 인물들은 풍부한 해전 경험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국정 운영에 있어서도 능숙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을 일순간에 처형시킨 아테네는 첫 번째로 우수한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는점, 그리고 두 번째로 성난 시민들이 법을 무시한 채 자신의 지도자들을 쉽게 제거하는 광경을 목격한 차기 지도자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두운 전망을 가졌습니다. 이후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전투 채비를 마친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전함들은 다시 아테네의 곡식 수입 통로를 압박해오고, 피할 수 없는 전투에서 아테네는 패배함으로써 길고 길었던 전쟁을 항복으로 마무리 짓게 됩니다.

 

 

  눈여겨 볼 점은 재판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테네 시민들 스스로가 사법 체계를 무시한 본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지하고 그 일을 매우 후회했다는 사실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의 성난 민심을 눈치 채고 이를 부채질하면서 장군들을 고소한 당사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거꾸로 본인들이 고소당하여 피고인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기소된 이들 5명은 법의 처분을 받기도 전에 모두 아테네에서 도망쳐 나오고, 주동자였던 칼릭세이노스라는 인물은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서도 아테네인들의 증오를 받으며 굶어 죽게 됩니다. 아테네인들은 이후 오랜 세월동안 장군들을 처형한 일에 대해 상당한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평소에 법을 존중하여 정당한 절차를 준수해오던 정의로운 아테네였기에 해당 사건은 더욱 더 비정상적인 악행으로 여겨지며 비판받았다고 도널드 케이건 교수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흥분한 시민들이 분위기에 휩싸여 사법 절차를 무시한 행위는 물론, 이들 스스로가 잘못했음을 깨달은 이후에도 본인들의 잘못과 죄책감을 경감하고자 주동자 5명을 내세워 처벌한 행위조차 역사는 냉엄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아테네인들로서는 전사자들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유해를 수습하는 일은 의심의 여지없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한 몸 희생한 이들을 묻어주지도 못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감정은 무력함을 넘어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에 휩싸인 채 본인들 스스로의 손으로 조국의 자랑스러운 규칙들을 깨뜨리며 결국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은 당사자들은 물론 후세의 사람들조차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냉정을 되찾은 이후에조차 주동자’ 5명에게 책임을 돌리고 이들을 처벌하는 모습은 오늘날 대중들이 사실을 단정 지어놓고 일을 그르친 후에 사실 관계가 밝혀지자 본인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슬그머니 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줍니다. 결국 분노에 휩싸인 아테네 시민들은 본인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전사자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사수하려던 조국을 망친 당사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떠들썩한 재판 와중에도 본인의 철학을 따르며 대중의 서슬 퍼런 위협에도 본인의 신념을 굽히지 않던 소크라테스의 모습 또한 흥미로운데요. 다음 글에서는 이런 소크라테스를 처벌한 재판을 다루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타 및 틀린 사항 지적은 항상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1. 플라톤의 대화편 - 플라톤 지음, 최명관 옮김

2.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투키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3.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도널드 케이건 지음, 허승일, 박재욱 옮김

4.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성규 옮김

5. 소크라테스의 재판 - 제임스 A. 콜라이아코 지음, 김승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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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8-04-02 15:17:39

흥미로운 이야기 감사합니다.
정말 몰입해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네요.
그리스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하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WR
2018-04-02 15:32:56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최근에 우연한 기회로 그리스 역사를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어서 계속 여러 가지를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2018-04-02 15:26:29

꿀잼잼!! 감사합니다.

WR
2018-04-02 15:33:29

좋게 봐주시고 응원의 댓글까지 감사합니다 

2018-04-02 15:44:36

역시 소크라테스네요..

WR
2018-04-02 15:50:35

역사서에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나오길래 처음에는 그 소크라테스가 맞는가 반신반의했는데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맞더라고요.

 

예전에는 책 한권 저술하지 않은 소크라테스보다는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플라톤이 훨씬 더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평생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모습을 보면 누구 표현처럼 그의 인생 자체가 멋진 철학이라는 말이 공감이 가더라고요..

2
2018-04-02 15:54:48

쓰시는 내용 그리고 아마 이어지는 내용때문에 직접민주주의에 매우 회의적입니다.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부르짖게 된것은 민중에 대한 엄청난 회의 때문이겠죠

WR
2018-04-02 16:02:32

말씀하신 대로 플라톤도 소크라테스의 사형 판결 등 조국 아테네의 이성적이지 못한 결정들을 지켜보면서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고, 외국인 신분으로 아테네에 거주했던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아테네의 정치 체제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바 있습니다.

 

여성, 외국인 등은 배제했다는 한계를 가지지만 남성 시민들에게 있어서 만큼은 공평하게 광범위한 정치 참여의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칭송받지만, 그 당시의 지식인들이 아테네의 정치 체제보다는 라이벌 스파르타의 과두제를 더 지지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2018-04-02 17:03:10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리즈 연재 기다릴께요~

WR
2018-04-03 12:50:10

응원의 댓글 감사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다음 글도 정리해서 잘 올려보겠습니다

1
2018-04-02 21:05:54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테네의 저 판결은 우리나라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법과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가치라도 그 빛이 바래버린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WR
2
2018-04-03 12:51:30

저 또한 말씀하신 대로 법과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그런 상황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상황일 확률이 높을테니깐요.

2018-04-02 21:11:46

오 시리즈물인가여 흥미로운 주제네요 고딩때 이거랑 비슷한 주제를 사회시간에 배운것같긴한데 이과생이라 용어이름이 기억이 안나네요...

2018-04-02 21:27:23

도편추방제. 주제는 다르지만 아테네정치의 한계죠. 유능한 지도자가 독재자로 모함받아 쫓겨나는 인물이 한 둘이 아니죠

WR
2018-04-03 12:53:20

저도 학생 때 배운 역사 대부분은 시험 끝나면 바로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2018-04-02 21:32:05

페리클레스 리스펙

WR
2018-04-03 12:54:16

도편추방제마저 성공적으로 정적을 제거하는데 사용한 페리클레스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죠

1
2018-04-02 21:47:45

사실 본문에서 언급하신 '시민' 혹은 '대중'의 한계를 요즘 넷상을 보며 참 많이 느끼네요.

 

WR
2
2018-04-03 12:57:13

하워드 라인골드의 '참여 군중'이라는 희망적인 개념까지 나온 세상이지만 항상 인간의 변하지 않는 본성을 간과하고 미래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1
2018-04-03 17:50:06

대중의 가장 무서운 부분은 '반성하지 않는 존재'라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은 반성도 하고 성찰도 하지만 이상스레 그들이 '대중'이라는 집단이 되어버리면 이성적인 존재인 동시에 비이성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Updated at 2018-04-02 21:51:19

정성들여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WR
2018-04-03 12:57:35

두서없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04-12 15:59:26

최근에 했던 100분 토론이 생각나는 글이었습니다.

WR
2018-04-12 16:25:34

몇달 동안 안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100분 토론이 다시 시작했나 보군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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