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이야기 - 입문자용 만년필 추천
안녕하세요.
지난번 글까지 해서 만년필의 구조와 각 파트들의 대략적인 기능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만년필에 처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신 분들께서 처음으로 구매해보시기 좋은 만년필들을 몇 자루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실사용/선물용 입문자 만년필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것들은 아래의 세 가지입니다.
1. 가격대가 적당해야 합니다. 대략 5만원 내외를 상한으로 생각합니다.
2. 품질이 좋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그 품질이 일정해서 불량이 거의 없어야 합니다.
3. 직구를 통해거나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최소한 오프라인 매장이 있는 쇼핑몰을 통해 쉽게 구매하고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위의 세 가지 모두 일반적으로 만년필을 구매할 때 고려되어야 하는 조건들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입문자용/선물용일 때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펜을 좋아하는지 자기 자신도 모르므로 처음부터 비싼 펜을 구매하면 돈을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원래 만년필이 어때야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불량품을 받았는데도 불량품인줄도 모를 수 있겠구요. 혼자 닙을 조정할 줄 모르니 판매처를 통해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들을 모두 만족하는 펜들 중에서도, 제가 써보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펜들을 소개해보겠습니다.
1. Faber Castell Loom - 5만원 내외
제가 여러번 댓글과 쪽지를 통해 소개드렸던 펜입니다. 가격도 적절하고, 파버카스텔의 스틸닙 품질은 아주 좋으면서도 불량을 겪었다는 말을 한번도 못 들어봤을 정도로 아주 일정합니다. 또한 유명 온라인 펜샵들을 통해 언제나 쉽게 구매할 수 있고, 오프라인 매장을 방문하시면 시필도 가능합니다. 거기다 파버카스텔의 국내 서비스는 (저는 한번도 경험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좋기로 유명하구요. 파버카스텔은 이미 색연필 등을 통해 만년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고급 필기구 브랜드로 인식이 되어 있어서, 그 브랜드 가치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파버카스텔의 스틸닙 펜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품질을 보여주는데, 제가 유독 이 펜을 추천드리는 이유는 사실 아주 단순합니다. 걔들 중에 가장 싸거든요. 파버카스텔 엠비션, 운도로 등등.. 모두 룸과 같은 닙을 쓰지만 디자인이나 바디 소재 등등의 이유로 더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2. Pilot Cocoon/Prera/Kakuno - 2~3만원대
이 펜 역시 많은 분들께 추천드렸던 펜입니다. 주로 프레라를 말씀드렸는데, 코쿤과 카쿠노 모두 프레라와 같은 닙을 쓰는, 디자인과 바디 소재 등만 다른 펜입니다. 원래 몇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선 프레라와 카쿠노가 코쿤보다 쌌습니다. 유럽 및 미국 시장에서는 Metropolitan 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는 코쿤이 프레라와 카쿠노보다 더 쌌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주로 프레라를 추천드렸는데, 이번에 다시 확인해보니 파이로트에서 코쿤의 가격을 좀 인하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셋을 나란히 놓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고, 취향에 따라 고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파이로트는 일본 제조사답게 기본적으로 세필이면서도 아주 정교한 닙 세공으로 좋은 품질을 보여줍니다. 파버 카스텔의 스틸닙 보다는 좀 더 사각거리는 필감을 가지고 있구요. 코쿤과 프레라, 카쿠노는 각각 디자인 아이덴티티나 소재가 서로 잘 겹치지 않도록 잘 만들어져 있어서 고르시는 재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파이로트 또한 하이테크 펜으로 많이 유명한, 브랜드 이름값이 꽤 있는 브랜드이기도 하구요. 온/오프라인 매장을 통해 쉽게 구매하실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3. TWSBI Eco - 5만원대
위의 두 브랜드들에 비해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대만의 만년필 제조사입니다. 회사의 모토 자체가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품질의 만년필을 공급하는 것이니만큼, 트위스비의 만년필은 일반적으로 단가가 높지 않고 만들기도 쉬운 카트리지/컨버터 방식이 아닌, 피스톤 필러나 배큠 필러를 사용하면서도 가격이 합리적이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또한 한 가지 모델을 제외한 모델 전부가 투명한 아크릴로 만들어져 있어서, 잉크가 펜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이나 피스톤/배큠 필러의 작동을 전부 밖에서 볼 수 있는 것도 매력적입니다.
추천드리는 이코 (환경의 Eco 가 아니라 경제적의 Eco 이기에 에코가 아닌 이코라 부르겠습니다) 는 트위스비의 펜들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출시된, 더더욱 합리적인 가격을 모토로 하는 펜입니다. 물론 이 리스트의 다른 펜들보다는 약간 더 비싸지만, 피스톤/배큠 필러 방식과 고품질의 투명한 바디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절대 비싼 가격이라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또한 트위스비는 서비스가 좋기로도 유명한데, 예전에 한번 펜의 플라스틱에 결함이 생겨서 갈라지는 문제가 있었는데 접수만 하면 전부 무료로 교환해줬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트위스비 펜만이 가지는 또 하나의 장점은, 피스톤/배큠 필러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분해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예 펜을 사면 분해할 수 있는 렌치가 같이 들어있지요. 여러모로 만년필에 대해 공부하기에 좋은 펜이라고 생각합니다. 필감은 좀 사각거리는 편입니다.
4. Platinum Preppy - 2~3천원대
갑자기 가격이 훅 떨어집니다. 플래티넘 프레피는 아주아주 저렴한 만년필로, 세련됐다거나 클래식하다거나 하는 맛은 떨어집니다만 가격과 닙이 모든걸 말하는 펜입니다. 좋은 볼펜 한자루 사기도 힘든, 4000원이 안되는 가격으로 메이져 제조사가 만든 아주 잘 써지는 만년필을 살 수 있지요.
플래티넘 답게 비교적 세필에 사각거리는 필감을 가지며, 입문자용으로 만들어졌는지 닙의 획 두께를 만년필 기준인 EF, F, M 등으로 표시하지 않고 0.3mm 0.5mm 등으로 표시하는 것도 특징입니다. 다만 오히려 펜의 가격이 너무 저렴하다보니, 만원이 안되는 컨버터와 병잉크의 가격이 오히려 비싸게 느껴지는 (...) 단점이 있습니다. 난 정말 만년필을 좋아할지 몰라 만원도 쓰기 싫은데 일단 체험을 해보시고 싶으시다면, 프레피를 구매하신 후동봉된 카트리지를 쓰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5. Jinhao X450 - 2만원 내외
진하오는 이 리스트에 넣을까 말까를 굉장히 많이 고민한 브랜드입니다만, 그래도 가격대 성능비가 너무 좋으니만큼 마지막에 넣기로 했습니다. 망설인 이유는, 진하오가 (보통의 중국 브랜드들이 그렇듯) 짝퉁을 만드는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진하오 159 모델은 몽블랑의 마이스터스틱 149 를 완전히 카피하고 소재만 바꾼 모델이며, 599는 유명한 라미 사파리를 완전히 카피한 제품입니다. 물론 X450 은 카피제품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행태를 좋아하지 않는지라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회사와 펜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이 리스트에 넣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성능이 매우 좋기 때문입니다. 그립 부분이 삼각형 모양으로 각져 있어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펜을 쥐시는 분들에게는 좀 불편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으나, 그 필감이 매우 좋은데다 직구 시에 4000원이라는 가격에 컨버터까지 딸려온다는 가격적 메리트는, 그 단점을 덮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파버카스텔 룸을 제외하고는 오늘 적어드린 리스트에 있는 펜들 중에 가장 부드러운 축에 속하는 필감을 가진 펜이기에, 중국산을 개의치않고 부드러운 필감을 선호하시는 분들께서는 고려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외에 아주 좋은 입문자용 펜들이지만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지는 못해 이 리스트에 올리지 않은 펜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mrpen.co.uk 에서 판매하는 Italix Parson's Essential 이나 미국 제조사 Nemosine 의 Singularity 등이 그런 경우인데, 국내에서는 직구를 제외하면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직구는 배송비가 배대지를 이용한다고 해도 1~2만원은 하는 것이 보통이기에, 입문자용 펜으로써는 그 가격적 메리트를 상당히 잃는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 외에는 독일의 Lamy 와 Kaweco 가 있는데, 둘 다 아주 유명한 브랜드이고 역사적인 모델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만, 두 브랜드의 펜들을 사보았을 때 아예 사용이 불가능한 수준의 제품이 제게 온 경험이 있어 쉽게 추천드리기는 어려워 넣지 않았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본 글 내용과 상관 없더라도 만년필에 관한 어떠한 질문과 코멘트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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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라미 사파리와 세일러 영 프로피트 보유중입니다.
많이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