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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이야기 - 닙 (펜 촉) 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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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8-04-02 15:20:49

 

안녕하세요. 

 

 

 바디가 어떻고 잉크 충전 방식이 어떻고 해도, 역시 만년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한가지만 꼽으라면 닙 (NIB,  펜 촉) 일 것입니다. 그만큼 말씀드릴 것도 많기에, 이번 글에서는 먼저 만년필 닙의 구조와 각 파트들의 기능에 대해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1. 피드 (Feed)

 

 위 그림과 같은 일반적인 만년필 닙에서, 닙을 아래에서 받치고 있는 (일반적으로) 검정색 플라스틱과 같이 보이는 것을 피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피드는 그 이름에서 유추하실 수 있듯이 잉크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는데요. 닙과 피드를 그립에서 분리해서 보면 보통 아래와 같이 생겼습니다. 

 

 

 가운데에 얇은 홈이 보이시나요. 바디쪽에 저장되어 있던 잉크가 모세관 현상에 의해 이 홈을 따라 흘러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모세관 현상이란, 아주 미세한 틈으로 액체가 저절로 빨려 들어가는 현상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화장지가 물에 낳으면 물이 화장지를 타고 거꾸로 올라가는걸 볼 수 있는데, 화장지에 있는 아주 작은 구멍들이 모세관 역할을 해서 그 길을 따라 물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피드는 인위적으로 이런 얇은 홈을 파서, 잉크가 그 쪽으로 나오도록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피드의 얇은 홈 주변에는 아주 가는 판들이 쭉 늘어서 있는 듯한 구조로 되어있는데요. 이 판들 사이사이에도 잉크가 조금씩 들어가서, 갑자기 너무 빠른 속도로 필기를 한다던가 했을 때 잉크 흐름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즘 나오는 펜들의 피드는 대부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집니다. 일부 브랜드의 특정 라인들 (또는 빈티지 펜들) 에서만 예외적으로 에보나이트 (바디 재료로 쓰였던 것과 같은 재료입니다.) 를 쓰는데, 에보나이트는 재료 특성상 잉크를 피드 전체에 좀 더 머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잉크 흐름이 좀 더 풍부해지는 효과가 있기는 합니다만, 아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플라스틱 피드로도 얼마든지 풍부한 잉크 흐름을 유지하는 펜들이 많거든요. 다만 눈으로 보았을 때 에보나이트 피드가 머금고 있는 잉크의 색이 은근히 보이기 때문에 아주 아름답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2. Breather hole (브리더 홀, 숨구멍)

 

 처음에 만년필에 잉크를 꽉 채웠다가 필기를 하면서 조금씩 잉크가 줄어들게 되면, 그 줄어든 공간은 거의 진공 상태가 됩니다. 잉크는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있으니 (컨버터를 쓰는 펜이라면) 컨버터 맨 윗쪽에 그 진공상태가 형성되는데요. 그러면 펜 바깥의 대기압이 잉크를 누르기 때문에 잉크 흐름이 좋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잉크가 빠져나온만큼 컨버터 쪽으로 공기를 넣어줄 수 있는 구멍이 필요하게 되구요. 이런 목적에서 닙의 타인들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지점에 다양한 형태로 구멍을 뚫어놓는데 이를 브리더 홀이라 합니다. 

 

 그 형태는 원형, 하트 모양, 열쇠 구멍 모양 등 매우 다양합니다만, 기능적인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보급형 펜들의 경우 이 브리더 홀이 없거나, 있어도 매우 작은 경우가 많은데요. 그런 경우는 보통 피드의 뒷쪽에 원래 잉크를 충전할 때 쓰이는 구멍이 브리더 홀의 역할을 대신 하게 됩니다. 

 

 

3. Shoulder (숄더, 어깨)

 

 아래 사진과 같은 보통의 닙 형태에서, 아랫부분부터 닙이 접접 더 넓어지다가 그 너비가 가장 큰 부분을 보통 숄더라고 부릅니다. 기능적인 면에서는 숄더의 형태나 크기가 닙의 휘어지는 정도에 영향을 주기는 합니다만, 여기에는 닙 전체의 크기나 재료가 더 영향이 크다고 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아주 큰 팩터는 아닙니다. 따라서 만년필 닙의 숄더는 디자인적인 요소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실재로 닙이 많이 숨어 있는 후디드 닙 펜들의 경우에는 닙을 꺼내 보면 숄더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4. Tine(s) (타인)

 

 브리더 홀 부터 시작해서 닙이 둘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 갈라진 가지들을 각각 타인이라고 부릅니다. 위의 브리더 홀과 숄더와는 다르게 타인들은 닙의 품질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요. 그만큼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야 합니다. 우선 맨 윗 그림의 방향에서 보았을 때, 두 타인은 브리더 홀부터 시작해서 위로 갈수록 서로 점점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피드의 홀을 따라 나온 잉크가 타인 사이의 갭을 따라 모세관 현상으로 닙의 맨 끝까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타인들이 서로 너무 평행하거나 오히려 점점 더 벌어지게 되면 잉크가 펜 끝까지 도달하지 않아 잉크 흐름이 매우 불규칙하거나 최악의 경우 아예 나오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두 타인들은 닙의 맨 끝에 가더라도 절대 붙어서는 안됩니다. 붙어버리면 모세관이 없어지니까요. 그래서 아주 이상적으로 조율된 닙은, 두 타인들이 맨 끝에서는 거의 붙어있는 것 처럼 보이나 루페로 들여다보면 아주 조금은 떨어져 있는 형태를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위의 그림처럼 펜의 축방향을 정면으로 바라봤을 때의 정렬도 중요한데요. 만약 한쪽 타인이 다른쪽 타인보다 조금이라도 더 위에 있게 되면, 특정 방향으로 획을 그었을 때 한쪽 타인의 안쪽면이 종이에 긁히면서 종이를 파고 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필감이 아주 기분나쁘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긁힌 종이의 섬유질이 타인들 사이에 껴서 잉크 흐름을 방해하는 일도 생깁니다. 

 

 따라서 잉크의 흐름과 필감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타인이며, 닙을 수리할 때에도 가장 먼저 체크하는 것이 타인들의 정렬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5. Tip (팁)

 

 이렇게 타인들을 따라 닙 맨 끝으로 오면 약간 뭉툭하게, 또는 동그랗게 붙어있는 티핑을 볼 수 있습니다. 만년필 닙은 보통 금속으로 만들어지는데, 닙의 재료로 쓰이는 금속들은 그 성형성이 좋은 대신 상대적으로 무릅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사용하게 되면 닙 끝이 쉽게 깎여나가 버리는데요. 이를 막기 위해, 닙 재료와는 다른, 아주 경도가 높은 합금을 닙 맨 끝에 붙이게 되는데 이를 티핑이라 합니다. 

 

 

 

 만년필에 입문하신지 얼마 안되신 분들의 경우 금 촉이 스틸 촉 보다 훨씬 부드러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실재로 종이에 닿는 것은 항상 티핑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필감에는 닙 재료보다 티핑의 상태와 위에 말씀드렸던 타인의 정렬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닙의 재료가 필감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티핑의 양과 형태는 만년필 획의 굵기와 형태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종이에 닿는 티핑의 형태와 크기가 그대로 획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티핑의 양이 많을수록 더 굵은 선이 나오게 되구요. 의도적으로 세로획이 더 굵게 나오도록 하기 위해 원형이 아닌 직사각형 형태의 단면을 가진 티핑을 쓰기도 합니다. 

 

 만약 타인들의 정렬이 완벽한데도 펜이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부드럽지 않다면, 아주 가는 사포에 펜으로 몇번 획을 그어주어서 티핑의 요철을 깎아주는 방식으로 아주 쉽게 펜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경험이 없다면 이 작업은 아주 주의해야 하는데, 티핑이 아무리 강한 재료로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사포에는 쉽게 깎여나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약 타인의 정렬이 정말 완벽하다면 그 펜은 절대 종이를 파고드는 필감이 아니라 기분 좋게 사각거리는 필감을 주기에, 펜의 필감이 안좋다고 해서 섵불리 사포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닙을 다루다보니 이전의 글들보다는 좀 더 기술적인 내용이 많아진 것 같아 잘 읽힐지 걱정이 앞섭니다. 또한 이번 글 부터는 되도록이면 모든 사진과 그림을 제가 직접 찍거나 그려서 올리려고 합니다. 따라서 사진이나 그림의 퀄리티가 좀 떨어질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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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18-03-19 09:25:03

글씨가 참 멋지시네요 부럽습니다

WR
2018-03-19 11:01:41

감사합니다  저 정도는 누구나 연습하면 쉽게 쓸 수 있는 정도라서요. 핑거롤 님께서도 관심 있으시면 한번 유튜브 찾아보시고 연습하시면 금방 저것보다 훨씬 잘 쓰실 수 있을겁니다  좋게 봐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18-03-19 12:00:53

최근에 파이로트 743 만년필을 하나 선물받았는데 저도 연습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정말 너무 부럽네요

WR
2018-03-19 12:54:44

파이로트 743을 선물받으셨다니 선물하신 분께서 만년필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신가 봅니다. 굉장히 좋은 펜이예요. 

 

연습은 유튜브에 검색해보시면 따라하기 좋은 영상들이 많습니다. 보시면서 연습하시면 금방 마음에 드는 글씨를 쓰실 수 있을거예요 

2018-03-19 17:50:51

영상 추천좀 해주실수 있나요?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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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9 18:13:46

한글과 영문 중 어떤 것을 연습하시고 싶으신가요. 저는 한글은 쓸 일이 잘 없어서 따로 연습한 것이 없고, 영문 필기체의 원형 내지는 정석에 가까운 Copperplate Calligraphy 를 연습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t67oDvgL_o

 

이 시리즈로 연습했었네요.

2018-03-19 18:29:28

네 감사합니다

2018-03-19 11:18:20

저는 글씨를 너무 못써서 펜글씨 연습 교재라도 사서 연습을 해야하나 싶습니다.

 

모나미 3천원짜리 만년필도 쓰는 재미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글씨를 너무 못써서... ^^

2018-03-19 12:01:14

저도 학창시절부타 너무 악필이라 ㅠ

WR
2018-03-24 11:15:16

연습 조금만 하시면 금방 느실겁니다^^

2018-03-22 14:49:24

오 만년필 글을 또 올리셨군요~ 잘 읽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엔 자신이 있었는데 컴퓨터만 쓰고, 짧은 문장만 쓰다보니 망가진게 아닌가 하는 슬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만년필 써보고 "살아있네"를 외치고 있는 요즘 입니다ㅋㅋ 올리신 것 같은 그림 같은 글씨도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WR
2018-03-24 11:17:59

저 글씨는 보시다시피 획 굵기가 달라지는데요. 일부러 힘을 주면 타인들이 쉽게 벌어지도록 만들어진 flex 펜으로 쓴 것입니다. 일반 만년필로는 저런식으로 글을 쓰시면 펜이 망가질 우려가 있습니다 . 예쁜 글씨에 관심이 있으시면 vintage flex 펜을 알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18-03-24 02:19:39

만년필이란 글감도 좋지만 글솜씨가 워낙 좋으셔서 읽기가 참 편합니다.
계속 소재 발굴하셔서 자주 자주 써주세요

WR
2018-03-24 11:20:19

감사합니다 매니아에는 워낙 글을 잘 쓰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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