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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F1 역사] 뿌리를 찾아서 -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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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5-14 16:21:56

 F1 팀들의 역사를 살펴보는 마지막편으로 가장 성공한 독립팀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윌리엄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ROKiT Williams Racing

 

 이전 팀들

 

 윌리엄스 (1978 ~ )

 

 * 1969년부터 75년까지 Frank Williams Racing이라는 이름으로 F1에 참가했지만 현재 윌리엄스와 계보상 이어지지 않는 커스터머 팀이라 제외했습니다. 이 팀은 나중에 Wolf-Williams라는 이름으로 합쳐졌다가 Walter Wolf Racing으로 바뀌게 됩니다.

 

 대표적인 드라이버

 

 알란 존스 (Alan Jones), 카를로스 로이테만 (Carlos Reutemann), 케케 로스버그 (Keke Rosberg), 나이젤 만셀 (Nigel Mansell), 넬슨 피케 (Nelson Piquet), 리카르도 파트레제 (Ricardo Patrese), 알랭 프로스트 (Alain Prost), 데이먼 힐 (Damon Hill), 자크 뷜너브 (Jacques Villenueve), 하인츠-하랄드 프렌첸 (Heinz-Harald Frentzen), 랄프 슈마허 (Ralf Schumacher), 후안 파블로 몬토야 (Juan Pablo Montoya), 니코 로스버그 (Nico Rosberg), 나카지마 카즈키, 루벤스 바리첼로 (Rubens Barrichello), 펠리페 마싸 (Felipe Massa), 발테리 보타스 (Valtteri Bottas)

 

 역사

 

 Sir Frank Williams

 

 윌리엄스라는 팀을 설명하기에 앞서 설립자이자 팀의 전부라고도 할수 있는 프랭크 윌리엄스에 대해 먼저 언급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1942년 윌리엄스는 영국에서 공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이혼을 겪은후 친척집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스코틀랜드에서 대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이 때 친구가 선물해준 재규어를 선물로 받은후 자동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1966년, 윌리엄스는 프랭크 윌리엄스 레이싱 카즈 (Frank Williams Racing Cars) 라는 팀을 만들어 모터 스포츠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스 자신도 드라이버로 참가하기도 했으며 비는 시간에는 식료품 영업을 하며 팀 운영비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F2와 F3에 참가하면서 친구이자 동료이기도 했던 피에르 쿠리지 (Piers Courage) 와 성공적으로 팀을 꾸려나갔습니다.

 1968년 쿠리지가 성공적인 F2 시즌을 치룬후, 윌리엄스 팀은 브라밤의 섀시를 구입해 이듬해 F1에 정식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쿠리지는 모나코와 미국 그랑프리에서 2위를 차지하며 팀의 성공적인 데뷔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윌리엄스 팀은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작업체인 디 토마소 (De Tomaso) 와 손을 잡고 새 레이스카를 만들어냈지만 1970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친구였던 쿠리지가 디 토마소의 레이스카를 타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윌리엄스는 이 사고로 큰 충격을 받았고 디 토마소와의 관계도 1년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1971년 윌리엄스는 마치 (March) 팀의 레이스카를 사들이고 앙리 페스카롤로 (Henri Pescarolo) 를 새 드라이버에 앉혔고 페스카롤로는 영국 그랑프리 4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6위를 차지했습니다.

 1972년에는 프랑스의 석유 회사인 모툴 (Motul) 의 지원을 받으며 F1 참가를 이어갈수 있었고 이듬해부터는 말보로와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인 이소 (Iso Autoveicoli S.P.A) 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76 시즌 캐나다의 석유 재벌이었던 월터 울프가 팀 지분의 절반 이상을 사들이며 울프-윌리엄스 레이싱으로 탈바꿈했고 울프는 철수를 선언한 헤스케스 (Hesketh) 팀까지 자신의 팀에 흡수시켰습니다. (헤스케스는 다시 팀을 만들어 1977 시즌부터 F1에 참가했습니다.) 시즌이 끝나고 울프는 팀의 구조 개편에 착수하며 윌리엄스를 팀의 매니저 자리에서 몰아냈고 이에 반발한 팀원들 중 일부가 윌리엄스와 함께 팀을 떠났습니다.

 

 Williams Racing

 

 프랭크 윌리엄스는 젊은 엔지니어인 패트릭 헤드와 손을 잡고 윌리엄스 그랑프리 엔지니어링 (Williams Grand Prix Engineering) 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F1에 참가했습니다.

 

 1977 - 마치의 761 레이스카를 구입한 윌리엄스는 패트릭 니브 (Patrick Neve, 풀네임은 Patrick Marie Ghislain Pierre Simon Stanislas Nève de Mévergnies) 를 드라이버로 영입했습니다.

 데뮈전은 시즌 5번째 레이스였던 스페인 그랑프리였고 이후 11번의 레이스에서 7번을 완주했습니다. (완주하지 못한 4번 중 리타이어는 단 한번이었습니다. 당시 완주율을 생각하면 꽤 좋았던 편이었습니다.)

 

 1978 - 헤드가 윌리엄스가 처음으로 제작한 FW06의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이 차에는 이 시기 많은 팀들이 그랬듯이 코스워스의 DFV 엔진이 실렸습니다. 드라이버에서는 니브 대신 지난해 호주 그랑프리에서 쉐도우 팀 소속으로 우승을 차지했던 알란 존스와 계약했습니다.

 개막전에서 존스는 리타이어를 기록했지만 남아공 그랑프리에서 4위를 차지하며 팀의 F1 첫 포인트를 안겨주었습니다.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5위를 차지하며 포인트를 보탠 존스는 왓킨스 글렌에서 열린 미국 그랑프리에서 3그리드로 출발해 2위를 차지하며 팀에게 첫 포디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윌리엄스는 11포인트를 거두며 9위로 처음으로 컨스트럭터 순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979 - 이 해 윌리엄스는 많은 부분에서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헤드는 그라운드 이펙트를 도입한 FW07을 프랭크 더니 (Frank Dernie) 와 함께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존스의 파트너로 클레이 레가초니 (Clay Regazzoni) 를 영입하면서 두명의 드라이버 라인업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편 FOCA (Formula One Constructors' Association) 에도 가입하면서 F1 컨스트럭터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시즌이 시작하고 벨기에 그랑프리까지 존스와 레가초니 모두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7번째 레이스였던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레가초니가 간반의 차이로 2위에 오르며 시즌 첫 포인트와 포디움을 동시에 달성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존스가 4위, 레가초니가 6위에 오르며 첫 더블 포인트를 만들어낸 윌리엄스는 홈그라운드인 영국 그랑프리에서 레가초니가 여유있게 우승을 차지하며 F1에서 첫 우승까지 일궈냈습니다.

 기세를 탄 윌리엄스는 독일 그랑프리에서 존스가 우승, 레가초니가 2위를 차지하며 원투피니쉬까지 성공했고 존스가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그랑프리까지 우승을 차지하며 무려 4연승을 달렸습니다. (두번 모두 2위는 페라리의 쉑터, 뷜너브가 차지했습니다.)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페라리가 1, 2위를 차지하며 연승은 끊겼지만 존스가 다시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시즌 4승에 성공했습니다.

 후반기 질주를 선보인 윌리엄스는 75포인트로 페라리에 이어 컨스트럭터 2위에 올랐고 존스도 드라이버 챔피언십 3위에 올랐습니다. (레가초니 5위)

 

 1980 - 윌리엄스는 레가초니 대신 또다른 명 드라이버였던 카를로스 로이테만과 계약했습니다.

 시즌 개막부터 존스는 지난해 후반의 기세를 이어나갔는데 개막전인 아르헨티나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후 존스는 브라밤의 넬슨 피케와 시즌 내내 치열한 챔피언십 경쟁을 이어나갔고 4승과 9번의 포디움을 추가하며 (리타이어 3번과 11위 한번을 제외하면 모두 포디움 피니쉬였습니다.)피케를 13포인트 차이로 재치고 드라이버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로이테만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의 우승과 8번의 포디움을 일궈내며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3위에 올랐습니다.

 존스와 로이테만의 활약으로 윌리엄스는 120포인트로 첫 컨스트럭터 챔피언까지 차지했습니다. (2위였던 리지에와는 54포인트 차이였고 지난해 챔피언이었던 페라리는 10위로 추락했습니다.)

 

 1981 - 지난해 큰 성공을 거둔 윌리엄스는 존스, 로이테만의 라인업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시즌 시작은 오히려 지난해보다 더 좋았는데 개막전이었던 USW(US Grand Prix West, 롱비치) 와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존스와 로이테만이 모두 원투 피니쉬에 성공했습니다. (USW - 존스 우승, 브라질 - 로이테만 우승)

 그러나 피케가 아르헨티나와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2연승에 성공하며 챔피언십 경쟁이 치열해졌고 존스가 시즌 중반 주춤한 사이 로이테만이 피케와 챔피언십 경쟁을 펼치며 시즌 막판 선두에 올랐지만 마지막 두 경기에서 포인트를 획득하는데 실패하며 1포인트 차이로 피케에게 챔피언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존스는 마지막 레이스였던 시저스 팰리스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챔피언십 3위를 차지하는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 시즌 챔피언십 경쟁이 치열했는데 피케부터 5위였던 프로스트까지 7포인트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존스, 로이테만 모두 좋은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에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는 2위 브라밤을 여유있게 따돌리고 2년 연속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1982 - 이 해 윌리엄스는 드라이버에서 큰 문제를 겪었는데 먼저 존스가 지난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며 (나중에 복귀해서 애로우즈 소속으로 한 경기 더 달렸습니다.) 큰 공백이 생겼습니다.

 팀에서는 케케 로스버그를 새로운 드라이버로 데려왔지만 지난해 1포인트도 따내지 못했던 로스버그는 존스에 비해 불안해 보였습니다.

 로스버그는 개막전 5위를 차지했지만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무게 규정 위반으로 실격당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로이테만까지 브라질 그랑프리가 끝난후 아르헨티나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을 이유로 은퇴를 선언하며 윌리엄스는 더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로이테만의 자리는 마리오 안드레티가 잠시 맡았다가 데릭 달리 (Derek Daly) 가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로스버그가 USW 이후 6경기에서 3번 포디움에 오르며 윌리엄스는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산마리노 그랑프리는 FOCA에서 보이콧을 선언해 불참)

 달리가 로이테만 만큼의 성적은 기록하지 못하면서 컨스트럭터 경쟁은 힘들어졌지만 드라이버 챔피언십 경쟁에서 로스버그는 기회를 잡게 되는데 선두를 달리고 있던 디디에 피로니가 독일 그랑프리에서 큰 부상을 당하며 남은 시즌에 나올수 없게 되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연속으로 포디움에 오른 로스버그는 디종-프레누아에서 열린 스위스 스랑프리 (프랑스 그랑프리는 앞서 폴 리카르에서 열렸기 때문에 스위스 이름만 빌린 사실상 두번째 프랑스 그랑프리였습니다.) 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십 선두에 나섰습니다.

 로스버그는 이후 두경기에서 주춤했지만 맥라렌의 존 왓슨, 르노의 프로스트를 따돌리고 첫 F1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로스버그는 F1 역사상 가장 적은 우승으로 챔피언에 오른 드라이버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윌리엄스는 58포인트로 컨스트럭터 4위를 차지하며 어려웠던 한 해를 마쳤습니다.

 

 1983 - 지난해 부진을 겪은후 프랭크 윌리엄스는 스피릿에 터보 엔진을 공급하고 있던 혼다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까지 코스워스 DFV 엔진이 대세였지만 르노의 약진은 터보 엔진이 F1에서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서서히 터보 엔진을 선택하는 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즌 달리가 로이테만의 자리를 매꾸었지만 팀에서는 81 시즌 챔피언십 4위에 올랐던 자크 라피티 (Jaques Laffiti) 를 로스버그의 파트너로 영입했습니다.

 로스버그가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우승,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 2위를 차지했지만 레이스카의 성능은 다른팀들에게 점점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고 라티피도 11포인트를 따내는데 그치며 윌리엄스는 36포인트로 컨스트럭터 4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시즌 후반 윌리엄스는 혼다와 엔진 공급 계약을 맺으며 마지막 레이스였던 남아공 그랑프리에서 선보인 FW09에는 혼다의 터보 엔진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Williams FW07 (1980)

 

 

 1984 - 터보 엔진으로 치루는 첫 시즌 윌리엄스는 레이스카 신뢰성에서 큰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로스버그가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2위, 댈러스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로스버그와 라피티는 시즌 내내 합쳐 21번의 리타이어를 기록하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시즌 도중 섀시와 엔진을 모두 신형으로 교체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리타이어 횟수는 더욱 늘어나기만 했고 결국 25.5 포인트 (모나코 그랑프리가 75%를 채우지 못하고 종료되는 바람에 포인트가 절반만 주어졌습니다.) 를 기록하며 컨스트럭터 6위로 내려갔습니다.

 

 1985 - 새 레이스카인 FW10을 선보였는데 이 차는 탄소 섬유로 만든 첫 레이스카였습니다. (F1에서 처음은 맥라렌의 MP4/1)  그리고 캐논 (Canon) 이 타이틀 스폰서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캐논은 1993년까지 윌리엄스의 타이틀 스폰서로 함께하게 됩니다.

 라피티가 리지에로 떠난 자리에는 거물급 드라이버였던 나이젤 만셀을 영입했습니다.

 로스버그는 첫 세번의 레이스에서 모두 리타이어를 기록했지만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 우승,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2위를 차지했고 시즌 막판 3경기에서 모두 포디움을 기록하면서  (호주 그랑프리 우승 포함) 드라이버 챔피언십 3위를 기록했습니다.

 만셀은 첫 세번의 레이스에서 모두 포인트를 따냈지만 시즌 중반 잠시 주춤했습니다. 그러나 벨기에 그랑프리 2위를 시작으로 유러피언 그랑프리, 남아공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십 6위를 기록했습니다.

 윌리엄스는 막판 3연승에 힘입어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 로터스를 간신히 따돌리며 3위를 차지했습니다. (윌리엄스, 로터스가 71포인트 동률이었지만 우승 횟수에서 윌리엄스가 4번으로 3번의 로터스보다 앞섰습니다.)

 

 1986 - 4년간 윌리엄스에서 좋은 기록을 냈던 로스버그가 맥라렌으로 떠나자 윌리엄스는 1981 시즌 챔피언에 올랐던 피케를 영입하며 강력한 드라이버 라인업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큰 악재가 팀을 덮쳤는데 프랭크 윌리엄스가 큰 사고를 당하면서 팀을 이끌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윌리엄스는 폴 리카르에서 열린 프리시즌 테스트를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하던 중 차가 커브에서 미끄러지면서 도로를 벗어나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윌리엄스는 하반신이 마비되는 큰 부상을 당했고 평생을 휠체어에 앉아 지내야 했습니다. 그의 빈자리는 헤드가 담당하면서 엔지니어링과 팀 운영까지 동시에 맡는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다.

 가라앉은 팀 분위기 속에서도 개막전이었던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피케는 우승을 차지했고 산마리노 그랑프리까지 피케와 만셀은 각각 한번씩 포디움에 올랐습니다.

 벨기에 그랑프리부터 영국 그랑프리까지 5번의 레이스에서 만셀이 4승을 휩쓸며 (디트로이트 그랑프리 5위) 챔피언십 선두로 치고 나갔고 피케는 벨기에 그랑프리부터 4경기 동안 3승을 거두며 만셀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즌 막판 3경기에서 피케와 만셀이 주춤한 사이 프로스트가 3연속 포디움에 오르며 (포르투갈 2위, 멕시코 2위, 호주 우승) 근소한 차이로 드라이버 챔피언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프로스트 - 72, 만셀 - 70, 피케 - 69) 당시 포인트 규정은 최고 성적을 거둔 11경기 성적을 합산하는 방식이었는데 만셀은 프로스트에 비해 리타이어가 한번 더 많았고 피케는 프로스트와 리타이어 횟수에서 같았지만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7위를 기록한 것이 치명타로 작용했습니다.

 그래도 윌리엄스는 맥라렌을 여유있게 따돌리고 141포인트로 5년만에 컨스트럭터 챔피언에 다시 올랐습니다. 

 

 1987 - 피케와 만셀은 여전히 윌리엄스에서 달리고 있었고 시즌 개막부터 피케와 만셀은 챔피언십 경쟁을 시작했습니다.

 첫 7번의 레이스에서 피케는 5번이나 2위에 올랐고 만셀은 3승을 거두었지만 챔피언십 선두는 1포인트 차이로 로터스의 세나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케는 이후 5번의 레이스에서 모두 포디움을 차지하며 3승을 거두며 선두로 치고나섰고 만셀도 시즌 후반 3승을 보태며 후반기 주춤했던 세나를 재치고 2위로 올라섰습니다.

 피케는 이 시즌 9경기 연속으로 포디움에 오르는등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만셀을 따돌리고 챔피언에 올랐고 만셀도 시즌 후반 부상으로 2경기에 빠졌지만 세나를 재치고 챔피언십 2위를 차지했습니다.

 윌리엄스는 137포인트를 거두며 다시 한번 컨스트럭터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혼다가 맥라렌과 로터스에 엔진을 공급하는데 집중하기 위해 윌리엄스와의 계약을 종료하면서 윌리엄스는 커다른 숙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Williams FW11 (1987)

 

 

 1988 - 혼다를 대신할 엔진 공급 업체를 찾았지만 협상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윌리엄스는 존 저드 (John Judd)와 잭 브라밤이 세운 엔진 회사인 저드의 자연 흡기 엔진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피케마저 혼다 엔진을 사용하는 로터스로 떠나면서 드라이버 라인업에도 공백이 생겼습니다. 윌리엄스는 리카르도 파트레제를 데려와 피케의 자리를 매꾸었습니다.

 맥라렌이 시즌을 압도하며 F1을 지배하는 동안 윌리엄스는 만셀이 2번의 포디움을 기록했지만 엔진 성능에서의 큰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20포인트에 그치며 컨스트럭터 7위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1989 - 윌리엄스는 마침내 르노를 새 엔진 공급 업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몇년 동안 윌리엄스에게 신의 한수가 되었습니다.

 만셀이 페라리로 떠나면서 그 자리에는 티에리 부센 (Thierry Boutsen)이 새 드라이버로 들어왔습니다.

 시즌 초반 윌리엄스는 새 엔진과 레이스카를 조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파트레제가 2위를 차지하며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파트레제가 4경기 연속으로 포디움에 오르는 사이 부센은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파트레제가 2번의 포디움, 부센이 4번의 포디움과 호주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하며 파트레제는 드라이버 챔피언십 3위, 부센은 5위를 기록했습니다.

 윌리엄스는 지난해의 부진을 씻고 77포인트를 거두며 맥라렌에 이어 컨스트럭터 2위를 차지했습니다.

 

 1990 - 파트레제와 부센의 드라이버 라인업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파트레제와 부센 모두 시즌 1승 씩을 기록했지만 전체적으로 지난해에 약간씩 못미치는 성적을 내며 윌리엄스는 57포인트로 컨스트럭터 4위를 차지했습니다.

 

 1991 - 지난해 윌리엄스는 약간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 해를 기점으로 앞으로 몇년간 F1을 지배할 토대를 서서히 쌓아올리고 있었습니다. 이 해 선보인 레이스카인 FW14에는 처음으로 반자동 기어박스 (패들 시프트라고 많이 부르곤 합니다.) 를 장착했습니다. 그리고 레이튼 하우스 (Layton House) 에서 엔지니어 한 명을 영입했는데 이 사람이 훗날 공기역학 분야의 전설로 불리게 되는 아드리안 뉴이 (Adrian Newey) 입니다.

 부센이 리지에로 떠나면서 그 자리에는 페라리로 떠났던 만셀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파트레제와 만셀의 라인업으로 시즌을 시작한 윌리엄스는 첫 4번의 레이스에서 파트레제와 만셀 모두 한번의 포디움을 제외하면 모두 리타이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캐나다 그랑프리를 시작으로 윌리엄스 드라이버가 모두 포디움에 오르지 못한 그랑프리는 벨기에 그랑프리가 마지막 (만셀 5위, 파트레제 리타이어) 일 정도로 윌리엄스는 남은 시즌 꾸준했습니다.

 그 결과 만셀이 5승을 거두며 드라이버 챔피언십 2위, 파트레제가 2승을 거두며 챔피언십 3위를 차지했고 (챔피언 아일톤 세나 - 7승) 윌리엄스는 125포인트로 맥라렌에 이어 컨스트럭터 2위를 차지했습니다.

 

 1992 - 윌리엄스는 FW14를 개량한 FW14B를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레이스카는 개량 수준을 넘어 F1 역사상 전설의 명차중 하나로 꼽히는 최고의 레이스카가 되었습니다. 전작과 많은 부분이 달라졌는데 가장 큰 것은 바로 액티브 서스펜션 (Active Suspension) 의 장착이었습니다. 액티브 서스펜션은 전자 장비의 도움을 받아 각 바퀴마다 서스펜션의 높이를 조절하는 시스템으로 이를 이용해 각기 다른 성향의 코너 마다 서스펜션의 높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가공할만한 코너링 성능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초반 문제를 일으켰던 기어박스도 몇가지 문제를 해결했고 헤드의 주도하에 뉴이등의 개발진이 만든 섀시는 공기역학적으로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2011년 즈음 윌리엄스에서 예전 모델들을 가지고 풍동 실험을 했는데 FW14B가 가장 뛰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레이스카를 가지고 만셀은 시즌 시작부터 질주를 시작했는데 첫 10번의 레이스 중 만셀이 거둔 우승은 무려 8승이었습니다. 나머지 두번은 2위를 거둔 모나코 그랑프리 (우승은 '미스터 모나코'라는 별명이 붙은 세나였는데 만셀을 겨우겨우 막아내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와 리타이어를 기록한 캐나다 그랑프리였습니다.

 만셀이 우승한 레이스 대부분에서 2위를 차지한 드라이버도 역시 같은 팀의 파트레제였고 만셀이 마지막 6번의 레이스에서 1승에 3번의 리타이어를 기록했지만 (나머지 두번은 모두 2위) 파트레제를 무려 52포인트로 따돌리며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파트레제는 1승에 6번의 2위를 거두며 56포인트로 2위를 차지했고 윌리엄스는 맥라렌을 65포인트 차이로 재치며 컨스트럭터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1993 - 충격적인 레이스카 성능을 보여준 윌리엄스는 많은 드라이버들이 꿈꾸는 팀이 되었습니다. 프로스트는 물론 세나도 윌리엄스의 자리를 탐내고 있었고 이는 만셀과 파트레제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결국 파트레제는 베네통으로 떠났고 프로스트가 빈자리를 차지했지만 (프로스트는 계약에 윌리엄스가 세나와 계약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을 넣었는데 이것 때문에 프로스트와 윌리엄스간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만셀은 페라리 시절 프로스트와 껄끄러웠던 관계로 인해 CART로 떠나면서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데이먼 힐이 프로스트의 파트너로 F1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스는 신형 레이스카인 FW15를 선보였고 프로스트는 이 차를 가지고 지난해 만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며 첫 11번의 레이스중 8승을 기록했습니다. (브라질 리타이어, 도닝턴 파크 3위, 모나코 4위)

 힐도 시즌 초반 10번의 레이스에서 5번 포디움에 오르며 제 몫을 해주었고 시즌 후반 프로스트가 주춤한 사이 6번의 레이스에서 3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시즌 후반 들어 윌리엄스와 세나가 접촉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윌리엄스에서 프로스트에게 세나와의 계약에 대해 언급하자 프로스트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결국 이듬해의 계약금을 받는 조건으로 시즌이 끝나고 팀을 떠나기로 합의했습니다.

 프로스트는 세나를 재치고 챔피언에 올랐고 힐도 드라이버 챔피언십 3위를 차지하며 윌리엄스는 168포인트로 2년 연속 컨스트럭터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1994 - 오랫동안 팀의 타이틀 스폰서였던 캐논이 떠나고 새 타이틀 스폰서로 로스먼 (Rothmans, 영국 담배회사) 이 들어왔습니다.

 프로스트가 떠나고 세나가 들어왔지만 분위기는 그가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FIA에서는 좀더 "인간적"인 레이스를 펼치겠다는 이유로 액티브 서스펜션, 트랙션 컨트롤 (Traction Control), ABS 등과 같은 보조 시스템을 모두 금지시켰고 이는 레이스카 성능의 대부분을 여기에 의존하고 있던 윌리엄스에게는 치명타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새 레이스카인 FW16은 빠르긴 했지만 도저히 몰수 없을 정도로 컨트롤이 불안했으며 다른 팀 드라이버들도 차 뒤쪽이 심하게 흔들린다며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힐이 2위를 차지하는 동안 세나는 첫 3번의 그랑프리에서 모두 폴포지션을 차지했지만 모두 리타이어를 기록했고 결국 산마리노 그랑프리 레이스 도중 큰 사고를 당하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나의 죽음으로 F1은 발칵 뒤집어져 이몰라 서킷이 위치하고 있던 이탈리아 검찰에서는 프랭크 윌리엄스를 살인 혐의로 고소했고 (고소는 2005년에 가서야 해결됩니다.) 헤드와 뉴이등 핵심 관계자들이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다음 레이스였던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윌리엄스는 힐만 레이스에 참가했고 세나를 추모하는 의미로 한바퀴만 돌고 리타이어 했습니다.

 남은 시즌 윌리엄스의 레이스카에는 세나의 앞글자인 S가 붙어있었고 세나를 대신해 데이빗 쿨싸드 (David Coulthard) 와 만셀이 달렸습니다.

 힐이 모나코 그랑프리를 쉰 후 곧바로 펼쳐진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을 기점으로 개량 버전의 레이스카인 FW16B가 안정을 되찾아갔고 일본 그랑프리까지 11번의 레이스에서 6승과 4번의 2위를 거두며 (독일 그랑프리 8위) 슈마허에 1포인트 차이로 드라이버 챔피언십 2위를 차지했습니다. 만셀이 1승, 쿨싸드가 2위 한번을 보탠 윌리엄스는 118포인트로 베네통을 따돌리고 3년 연속으로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1995 -  윌리엄스는 만셀보다 젊었던 쿨싸드를 힐의 파트너로 결정했습니다.

 시즌 초반 힐과 슈마허는 스페인 그랑프리까지 나란히 2승씩을 거두었지만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슈마허가 우승, 힐이 2위를 차지했지만 두 팀에 연료를 공급하고 있던 엘프에서 FIA에 잘못된 샘플을 주는 바람에 두명 모두 실격 처리되었다가 항소를 통해 순위가 복구되었습니다. 그러나 컨스트럭터 포인트에서는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얻은 포인트가 제외되었습니다.) 중반 이후 슈마허가 치고 나가면서 힐은 챔피언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힐이 드라이버 챔피언십 2위, 쿨싸드가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십 3위를 거두며 총 112포인트로 (118포인트에서 힐의 브라질 그랑프리 6포인트 제외) 베네통에 이어 컨스트럭터 2위를 차지했습니다.

 

 1996 - 1년만에 윌리엄스는 쿨싸드와 계약을 포기하고 쥘 뷜너브의 아들인 자크 뷜너브를 새 드라이버로 데려왔습니다.

  페라리로 옮긴 슈마허가 시즌 초반 팀에 적응하는 사이 힐은 첫 5번의 레이스에서 4승 (한번은 뷜너브가 우승한 유러피언 (뉘르부르크링) 그랑프리) 을 거두며 무섭게 치고나섰고 중반 이후에는 힐과 뷜너브가 우승을 나눠가지며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8승을 거둔 힐이 챔피언, 4승을 거둔 뷜너브가 2위를 차지했습니다.

 윌리엄스는 175포인트를 거두며 2위 페라리를 무려 105포인트 차이로 따돌리고 1년만에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1997 - 지지난해 챔피언십 2위, 지난해 챔피언을 차지한 힐이었지만 윌리엄스는 놀랍게도 힐과의 계약을 포기하고 하인츠-하랄드 프렌첸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시즌 초반 뷜너브가 연승에 성공하며 챔피언십 선두에 나섰지만 슈마허가 다시 연승에 성공하며 시즌 중반을 지나면서 뷜너브와 슈마허의 챔피언십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졌습니다. 시즌 최종전인 유러피언 그랑프리 (헤레즈 서킷) 를 앞두고 슈마허가 뷜너브에 1포인트 차이로 앞서 있었지만 레이스에서 슈마허와 뷜너브가 충돌하는 사고에도 불구하고 뷜너브가 3위를 차지한데다 이 사고의 과정에서 슈마허의 고의가 있었다는 이유로 슈마허가 드라이버 챔피언십 포인트를 박탈당하며 뷜너브는 생애 첫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유러피안 그랑프리는 퀄리파잉도 정말 재미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써보겠습니다.)

 프렌첸도 산마리노 그랑프리 우승을 비롯해 42포인트를 거두며 챔피언십 2위를 차지했고 윌리엄스는 123포인트로 다시 한번 컨스트럭터 챔피언에 오르며 92년 이후 5번째 컨스트럭터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Williams FW14B (1992)

 

 

 1998 - 르노가 F1에 직접 엔진 공급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윌리엄스는 10년 전 혼다가 엔진 공급을 중단했던 위기를 다시 한번 겪게 되었습니다.

 엔진 공급 업체를 물색한 끝에 르노와 협력해 엔진을 만들고 있던 메카크롬 (Mecachrome) 으로부터 RS9을 리브랜딩한 엔진을 받았습니다.

 시즌 도중 윌리엄스는 BMW와 다년간의 엔진 공급 계약을 맺으며 문제를 해결했는데 BMW가 내건 조건에는 드라이버중 적어도 한명은 독일 드라이버여야 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로스먼이 타이틀 스폰서에서 빠지고 윈필드 (Winfield, 호주 담배회사) 가 새 타이틀 스폰서가 된 윌리엄스에게 악재는 엔진뿐만이 아니었는데 뉴이가 맥라렌으로 팀을 옮기며 핵심 엔지니어를 잃고 말았습니다.

 드라이버 라인업은 뷜너브와 프렌첸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새 엔진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뷜너브와 프렌첸 모두 1승도 기록하지 못하는 부진에 빠졌습니다.

 결국 시즌 합계 38포인트로 윌리엄스는 컨스트럭터 3위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순위는 3위지만 2위 페라리와는 95포인트, 4위 조던과는 4포인트 차이밖에 나지않는 성적이었습니다.)

 

 1999 - BMW 엔진과 레이스카의 조합에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윌리엄스는 1년더 테스트 기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엔진 공급 업체를 슈퍼텍 (Supertec)으로 변경했지만 슈퍼텍의 엔진도 르노와 메카크롬의 엔진을 리브랜딩한 것이었습니다.

 뷜너브가 BAR로, 프렌첸이 조던으로 팀을 옮기면서 드라이버를 모두 새로 구해야되는 상황 속에서 윌리엄스는 프렌첸이 들어오면서 자리를 잃은 랄프 슈마허를 데려와 BMW가 요구한 조건을 맞추었고 CART에서 2년간 챔피언을 차지했던 알레산드로 자나르디 (Alessandro Zanardi) 를 데려와 드라이버 라인업을 맞추었습니다.

 슈마허는 브라질 그랑프리 3위를 시작으로 이 시즌 3번의 포디움에 오르며 제몫을 해주었지만 자나르디는 신인의 한계를 드러내며 총 10번의 리타이어와 함께 0포인트를 기록했습니다.

 윌리엄스는 35포인트로 컨스트럭터 5위를 차지했습니다.

 

 2000 - 1년의 테스트 기간을 거친후 BMW 엔진이 레이스에 투입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해 윌리엄스의 스폰서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동안 타이틀 스폰서에서 물러나 있던 로스먼이 브리티시-아메리칸 토바코 (BAT) 에 인수되었고 BAR 팀을 운영하고 있던 BAT에서는 로스먼의 윌리엄스와의 스폰서 계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컴팩 (Compaq)이 메이저 스폰서로 들어왔는데 윌리엄스는 특이하게도 가장 큰 스폰서가 아니었던 컴팩의 이미지 색상으로 리버리를 꾸몄습니다. (보통 타이틀 스폰서나 메인 스폰서의 이미지 색상을 따라 리버리를 꾸밉니다.)

 여기에 더해 윌리엄스는 "깨끗한" 이미지를 추구하기 위해 금연 보조제 브랜드인 니퀴틴 (Niquitin) 등과 스폰서 계약을 맺으며 담배 회사와의 관계를 줄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자나르디와 계약 하지 않은 윌리엄스는 콜롬비아 출신인 후안 파블로 몬토야의 권리를 사들였지만 몬토야의 인디카 계약이 1년 남아있던 관계로 신인이었던 젠슨 버튼 (Jenson Button) 을 슈마허의 파트너로 결정했습니다.

 슈마허는 지난 시즌과 똑같은 3번의 포디움을 기록했지만 시즌 전체적인 페이스는 지난해보다 약간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버튼이 12포인트를 보태며 윌리엄스는 지난해보다 1포인트 오른 36포인트로 컨스트럭터 3위를 기록했습니다. (페라리 170포인트, 맥라렌 152포인트)

 

 2001 - 몬토야가 인디카 계약을 끝내고 팀에 합류하면서 슈마허의 팀메이트가 되었습니다.

 몬토야를 데려온 것에 더해 레이스카 성능이 작년보다 향상되면서 슈마허의 성적도 덩달아 오르기 시작했는데 시즌 4번째 레이스인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슈마허는 우승을 차지하며 윌리엄스에게 1997년 이후 오랫만에 우승을 선물했습니다. 캐나다와 독일 그랑프리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슈마허는 드라이버 챔피언십 4위에 올랐습니다.

  F1 첫 해였던 몬토야는 시즌 성적이 극과 극을 달렸는데 총 11번의 리타이어를 기록할 정도로 지독한 불운에 시달렸지만 (독일 그랑프리는 폴포지션에 패스티스트 랩까지 찍고 리타이어했습니다.) 완주한 6경기에서 1승과 4번의 포디움에 오르면서 (포디움에 오르지 못한 두번은 영국 4위, 헝가리 8위) 드라이버 챔피언십 6위에 올랐습니다.

 윌리엄스는 80포인트로 컨스트럭터 3위에 올랐는데 2위였던 맥라렌과의 차이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 2000 - 116포인트 차이, 2001 - 22 포인트 차이)

 

 2002 - 지난해 결과에 만족한 윌리엄스는 슈마허와 몬토야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팀의 전력은 지난해보다 더욱 올랐지만 페라리는 이 시즌 압도적인 페이스를 보여줬고 랄프 슈마허가 말레이시아 그랑프리에서 페라리의 시즌 전승을 끊은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페라리는 17번의 레이스중 15번 우승을 차지했고 나머지 한번은 쿨싸드가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거둔 우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몬토야가 3위, 랄프 슈마허가 4위를 차지하며 페라리를 제외한 드라이버들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고 윌리엄스는 맥라렌을 누르고 컨스트럭터 2위로 올라섰습니다.

 

 2003 - 페라리의 전력이 지난해보다 약해지면서 윌리엄스는 기회를 잡았지만 맥라렌의 전력이 강해지면서 페라리-맥라렌-윌리엄스 3팀 간의 경쟁이 시즌 내내 치열하게 펼쳐졌습니다.

 시즌 초반에는 맥라렌이 가장 앞섰지만 중반에 접어들면서 페라리가 연승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스는 모나코 그랑프리를 기점으로 몬토야가 페이스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는데 모나코부터 이탈리아 그랑프리까지 8번의 레이스에서 2승을 거두며 모두 포디움에 올라 드라이버 챔피언십 선두였던 미하엘 슈마허를 3포인트까지 추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두번의 레이스에서 몬토야는 3포인트를 추가하는데 그치며 드라이버 챔피언십 3위를 차지했습니다.

 랄프 슈마허는 캐나다, 유러피언,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2승을 거두며 모두 포디움에 올랐지만 나머지 레이스에서 한번도 포디움에 오르지 못하며 챔피언십 5위를 차지했습니다.

 윌리엄스는 이탈리아 그랑프리까지 컨스트럭터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141:137) 마지막 2경기에서 페라리가 모두 우승에 성공하며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아깝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144:158) 결국 144포인트로 컨스트럭터 2위를 차지했습니다.

 

 2004 - 시즌이 시작하기 전 몬토야는 2005 시즌부터 맥라렌에서 달리기로 계약했습니다.

 새 레이스카인 FW26은 특이한 노즈 모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마치 바다코끼리를 연상한다고 해서 왈루스 노즈 (Walrus Nose)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윌리엄스의 레이스카 성능은 지난해에 비해서 썩 좋지 않았고 특이한 노즈도 헝가리 그랑프리에서 교체해야 했습니다. 몬토야는 지난해 만큼의 강력함을 보여주지 못했고 슈마허도 미국 그랑프리에서 큰 사고를 당하며 (인디 게이트의 시발점이 슈마허의 사고였습니다.) 시즌 후반 출전하지 못하게 되면서 윌리엄스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마지막 레이스였던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몬토야가 우승을 차지했지만 88포인트를 기록하며 4위에 머물렀습니다.

 

 2005 - 몬토야가 예정대로 맥라렌으로 떠나고 슈마허도 토요타로 떠나면서 윌리엄스는 새 드라이버들도 빈자리를 매꿔야 했습니다.

 한자리는 BMW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닉 하이드펠트를 데려왔고 나머지 자리에는 호주 출신의 마크 웨버를 영입했습니다. 원래는 버튼과 계약하기로 되어있었지만 FIA에서는 버튼과 계약하지 않도록 윌리엄스를 압박했습니다.

 한편 지난해부터 윌리엄스와 BMW를 마찰을 빚고 있었는데  이 시즌 들어와서 둘 사이의 갈등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BMW는 윌리엄스가 챔피언 타이틀을 노리거나 그랑프리 우승을 거둘만한 레이스카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며 윌리엄스를 비난했고, 윌리엄스는 반대로 BMW가 좋은 엔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면서 서로를 비난했습니다.

 거기에 시즌 도중 BAR에서 버튼은 빼오는데 실패한 것을 두고 ( 버튼은 2006 시즌부터 윌리엄스에서 달리기로 계약까지 했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꿔 BAR에 남아있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9월에 윌리엄스에게 2400만 파운드를 위약금으로 내는 댓가로 계약을 취소했습니다.) 프랭크 윌리엄스와 BMW는 다시 마찰을 빚었고 지난 시즌 리저브 드라이버였던 안토니오 피조니아 (Antonio Pizzonia) 대신 하이드펠트를 앉힌것도 윌리엄스는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하이드펠트는 3번, 웨버는 1번 포디움에 올랐지만 컨스트럭터 성적은 지난해보다 떨어지면서 66포인트로 5위를 기록했습니다.

 

Williams FW25 (2003)

 

 

 2006 - 결국 BMW는 자우버를 사들이며 자신들의 팀으로 만들었고 윌리엄스는 코스워스 엔진을 쓰게되면서 둘은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하이드펠트가 자우버로 떠나면서 그 자리에는 지난해 GP2 우승을 차지한 니코 로스버그가 데뷔했습니다. 

 개막전인 바레인 그랑프리에서 로스버그가 패스티스트 랩을 기록했지만 윌리엄스가 눈에 띄었던 장면은 이 시즌 그것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웨버와 로스버그가 합쳐 20번의 리타이어를 기록할 정도로 레이스카는 끔찍했고 결국 11포인트에 그치며 컨스트럭터 8위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11포인트는 1978년 이후 최악의 성적이었고 당시 포인트 규정이 달랐던 것을 생각하면 첫 해인 1977년 이후 최악의 성적이라고 해도 과연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2007 - 웨버가 레드불로 떠나면서 그 자리에는 알렉산더 부르츠 (Alexander Wurz) 가 새 드라이버로 들어왔습니다.

 코스워스 엔진으로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던 윌리엄스는 토요타를 새 엔진 공급 업체로 결정했습니다. 스폰서십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AT&T가 새 타이틀 스폰서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AT&T는 맥라렌의 마이너 스폰서였지만 경쟁사인 보다폰 (Vodafone) 이 맥라렌의 타이틀 스폰서로 들어오면서 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윌리엄스의 슈퍼컴퓨터 구축을 도왔던 레노보 (Lenovo) 가 윌리엄스의 스폰서로 들어왔습니다.

 팀 전력이 지난해보다 좋아지며 부르츠가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3위로 포디움에 올라 2년만에 팀의 첫 포디움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시즌 후반 부르츠는 은퇴를 선언하며 팀을 나갔고 그를 대신해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나카지마 카즈키가 마지막 레이스였던 브라질 그랑프리를 치뤘습니다.

 로스버그는 시즌 내내 꾸준히 탑 10에 들며 포인트를 따냈고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시즌 최고 성적인 4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습니다.

 윌리엄스는 지난해의 충격을 딛고 33포인트로 컨스트럭터 4위를 차지했습니다.

 

 2008 - 로스버그와 나카지마가 다시 윌리엄스의 드라이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스버그와는 2009 시즌까지의 다년 계약을 맺어 놓았습니다.

 호주 그랑프리와 싱가포르 그랑프리에서 로스버그는 포디움에 오르며 팀의 기대를 만족시켰습니다. 그러나 시즌 전체적으로 보면 탑 10에서 대부분 맴돌고 있었고 나카지마도 마찬자기였습니다.

 레이스카의 성능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특히 고속 코너에서의 성능은 FW30의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결국 26포인트를 거둔 윌리엄스는 컨스트럭터 순위 8위를 차지했습니다.

 

 2009 -  프랭크 윌리엄스는 BMW와의 결별을 후회하지만 토요타의 잠재력을 믿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시즌이 끝난후 바뀌게 됩니다.

 로스버그는 지난해와 달리 한번도 포디움에 오르지 못했지만 전체적인 성적은 오히려 더 좋아졌습니다. 반면 나카지마는 단 한번도 탑 10에 오르지 못하는 부진을 겪으며 로스버그가 홀로 팀을 이끄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윌리엄스는 34.5 포인트 (말레이시아 그랑프리가 비로 중단되어 50%만 포인트가 주어졌습니다.) 를 거두며 컨스트럭터 7위를 차지했습니다.

 브라질 그랑프리를 앞두고 윌리엄스는 토요타와의 엔진 공급 계약을 종료한다고 밝히며 새 엔진 공급 업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이 해 11월 프랭크 윌리엄스와 패트릭 헤드는 자신들의 지분 일부를 오스트리아의 투자 회사에 매각했는데 이 회사를 이끌고 있던 사람은 뒷날 메르세데스의 수석이 되는 토토 볼프 (Toto Wolff) 였습니다.

 

Williams FW29 (2007)

 

 

 2010 - 윌리엄스는 2006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코스워스와 장기간의 엔진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의 엔진에서 업그레이드 된 신형 엔진을 받았습니다.

 로스버그가 메르세데스로 떠나고 나카지마와의 계약을 포기한 윌리엄스는 브론 GP에서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도왔던 루벤스 바리첼로와 지난해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니코 훌켄버그를 새 드라이버로 맞았습니다. 그리고 비어버린 테스트 드라이버 자리에는 지난해 GP2 3위에 올랐던 발테리 보타스를 앉혔습니다.

 코스워스 엔진에 대한 우려가 많았지만 의외로 지난 시즌과 레이스카 성능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브라질 그랑프리에서는 날씨의 덕을 보았지만 훌켄버그가 깜짝 폴포지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윌리엄스는 69포인트로 컨스트럭터 6위에 올랐지만 그동안 쌓아왔던 강팀의 이미지는 5년 사이 거의다 사라져 있었습니다. 

 

 2011 - 괜찮은 성적을 보여준 훌켄버그이지만 그와의 계약을 포기하고 GP2 챔피언이었던 파스토르 말도나도 (Pastor Maldonado) 를 새 드라이버로 데려왔습니다. 이로써 윌리엄스는 1981년 (알란 존스, 카를로스 로이테만) 이후 처음으로 비유럽 출신 드라이버들로 라인업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해 바리첼로의 성적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추락했고 말도나도도 지난해 훌켄버그보다 나은점을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바리첼로가 9위 2번, 훌켄버그가 10위 한번을 기록한 윌리엄스는 첫해 0포인트 이후 가장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컨스트럭터 9위로 내려앉았습니다.

 

 2012 - 윌리엄스는 코스워스와의 계약을 종료하고 르노를 새 엔진 공급 업체로 선택했습니다. 이로써 윌리엄스와 르노는 14년만에 다시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바리첼로가 은퇴하면서 생긴 빈자리에는 브루노 세나 (Bruno Senna, 아일톤 세나의 조카) 가 들어왔고 말도나도는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팀 수뇌부에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오랜 시간 프랭크 윌리엄스와 함께 팀을 이끌어온 패트릭 헤드가 윌리엄스 HPL (Williams Hybrid Power Limited)로 자리를 옮기며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타이틀 스폰서였던 AT&T가 계약을 종료하면서 윌리엄스는 새 타이틀 스폰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르노 엔진을 장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작년과 비슷했지만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말도나도가 깜짝 폴포지션을 따낸데 이어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윌리엄스는 2004년 몬토야 이후 처음으로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말도나도의 커리어 유일한 우승이기도 한데, 여담으로 시상식이 끝난후 세나의 차고에서 불이나 스탭들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윌리엄스는 76포인트를 거두며 컨스트럭터 8위에 올랐지만 윌리엄스가 이긴 팀들은 토로로쏘를 제외하면 캐이터햄, 마루시아, HRT와 같은 팀들이었습니다.

 

 2013 - 그동안 팀을 이끌고 있던 프랭크 윌리엄스는 점점 건강이 안좋아지면서 팀을 운영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고 그의 딸인 클레어가 수석 대리라는 이름으로 팀 운영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말도나도는 3년째 자리를 지켰고 세나와의 계약을 포기한 대신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보타스를 말도나도의 파트너 자리에 앉혔습니다.

 르노 엔진에 대한 적응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성적을 끌어올릴때라고 팀에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도나도의 성적은 그대로 곤두박질치며 헝가리 그랑프리에서 10위를 거둔것이 유일한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보타스가 미국 그랑프리에서 8위를 거두며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말도나도를 앞섰습니다.

 결국 2011년의 성적을 그대로 재현하며 컨스트럭터 9위로 다시 내려앉았습니다.

 

 2014 - F1이 그동안 채택했던 자연 흡기 엔진에서 터보 엔진으로 규정을 변경하면서 윌리엄스도 발빠르게 메르세데스와 다년 간의 엔진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동안 비어 있던 타이틀 스폰서 자리에는 주류 회사인 마티니가 들어오면서 팀 이름이 윌리엄스 마티니 레이싱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주류 광고가 금지되어 있던 몇몇 나라에서 펼쳐진 그랑프리에서는 마티니의 이름을 때고 참가해야 했습니다. (바레인, 러시아, 아부다비)

 그리고 말도나도 대신 페라리에서 자리를 잃은 펠리페 마싸를 데려오며 베테랑 드라이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메르세데스가 지난해와 완벽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F1을 휩쓸었고 그 메르세데스의 엔진을 사용하는 윌리엄스도 이득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우승은 메르세데스와 레드불에 밀려서 못했지만 보타스가 6번, 마싸가 3번 포디움에 오르며 팀 성적은 지난해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윌리엄스는 1997년 이후 17년만에 컨스트럭터 순위에서 페라리를 누르며 320 포인트로 3위에 올랐습니다.

 

 2015 - 지난해에 이어 마싸, 보타스의 드라이버 라인업으로 시즌을 시작했습니다.

 페라리의 전력이 올라오면서 포디움에 올라가는 횟수는 지난해에 비어 줄어들었지만 마싸, 보타스 모두 4~6위권의 성적을 꾸준히 냈습니다.

 보타스가 캐나다와 멕시코 그랑프리, 마싸가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3위를 차지하며 총 3번의 포디움에 올랐고 257포인트로 컨스트럭터 3위를 유지했습니다.

 

 2016 - 마싸와 보타스는 3년째 팀의 드라이버가 되었고 개발 드라이버로 랜스 스트롤이 새로 합류했습니다. 

 지난해까지 메르세데스 파워 유닛의 힘을 업고 좋은 성적을 냈지만 레이스카 자체의 성능에서는 큰 발전이 없었고 다른 팀들이 파워 유닛 성능에서 따라오기 시작하자 윌리엄스의 성적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보타스가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3위를 거둔것을 제외하면 단 한 차례도 포디움에 오르지 못했고 탑 10에 겨우겨우 머무는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결국 페라리 뿐만 아니라 레드불과 포스인디아에게까지 추월을 허용하며 138포인트를 거두고 컨스트럭터 5위로 밀려났습니다. 메르세데스 파워 유닛을 사용하는 팀들중 윌리엄스보다 성적이 안좋았던 팀은 매노어가 유일했습니다. (1포인트 11위)

 

 2017 - 니코 로스버그가 갑작스런 은퇴를 선언하자 메르세데스에서는 그를 대신할 드라이버를 물색하던 끝에 보타스를 데려가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메르세데스는 그 댓가로 윌리엄스에게 상당한 수준의 엔진 비용 탕감과 기술 지원을 지불했습니다.

 마싸가 은퇴하며 떠난 자리를 대신해 스트롤이 대신하기로 했지만 보타스가 떠나면서 마싸는 은퇴를 번복하고 1년더 윌리엄스에서 달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트롤이 아제르바이잔 그랑프리에서 3위로 커리어 첫 포디움에 올랐지만 나머지 시즌은 보타스보다 떨어지는 성적을 기록했고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마싸도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채 윌리엄스는 83포인트로 컨스트럭터 5위를 유지했습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4위였던 포스인디아와의 차이는 더욱 벌어지면서 윌리엄스는 중위권에서도 경쟁력을 장담할수 없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2018 - 마싸가 두번째 은퇴를 선언하며 F1을 떠났고 그 자리를 대신해 세르게이 시로츠킨 (Sergey Sirotkin)이 팀의 새 드라이버가 되었습니다. 리저브 드라이버에는 BMW-자우버, 르노에서 달린 적이 있던 로버트 쿠비짜 (Robert Kubica) 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신인급 드라이버 두 명으로 시즌을 치루는 것은 위험해 보였고 레이스카 개발이 다른 팀에 밀리는 것과 더해져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해까지 포인트는 차곡차곡 벌었던 것에 비하면 이 시즌에는 포인트를 따내는것 자체도 힘겨운 상황이 되었고 팀 성적은 끝을 모르고 추락하며 시즌 합계 7포인트, 컨스트럭터 10위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윌리엄스가 풀시즌을 치루며 컨스트럭터 최하위를 거둔것은 팀 창단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2019 - 스트롤이 레이싱포인트로 떠나고 시로츠킨만 남은 상황에서 윌리엄스는 시로츠킨과 계약을 맺지 않고 메르세데스가 키우고 있던 유망주인 조지 러셀 (Geroge Russell) 과 계약을 맺고 쿠비짜를 올리며 드라이버 라인업을 정리했습니다.

 그동안 타이틀 스폰서였던 마티니가 떠나고 그 자리에는 통신회사인 ROKiT이 새로 들어오면서 팀 이름은 ROKiT 윌리엄스 레이싱이 되었습니다.

 이 시즌은 프리시즌 테스트부터 상황이 안좋게 흘러갔는데 6일간의 테스트 일정 중 레이스카가 준비되지 않아 첫 이틀동안 테스트를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시즌 초반부터 윌리엄스의 발목을 붙잡으며 러셀과 쿠비짜 모두 다른 드라이버들과 큰 격차를 보이며 최하위로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시즌 내내 레이스카에 대한 업그레이드를 진행했지만 다른 팀들과의 격차는 여전했고 독일 그랑프리에서 쿠비짜가 1포인트를 따낸것을 제외하면 최하위를 전전하는 수모를 겪으며 1포인트로 2년 연속 컨스트럭터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Williams FW36 (2014)

 

 

 이것으로 윌리엄스에 대한 역사를 끝으로 현재 F1에 있는 모든 팀들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재미있게 보셨길 바라면서 긴 글 줄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4
Comments
1
2020-05-14 18:31:17

여기서 짧게 언급된 알렉스 자나르디는 이후 굉장히 드라마틱한 삶을 살게 되죠.

WR
1
2020-05-14 18:53:20

 찾아봤는데 정말 놀랍네요.

 그 나이에 그 몸상태로 다시 돌아오다니 인간승리라고 밖에 할말이 없네요. 

1
2020-05-15 20:47:45

성능은 뭐 그저그랬지만 엔진사운드 만큼은 2000년대 윌리엄스가 최고였습니다.

담배스폰서만 안 버렸어도...

WR
2020-05-16 15:54:20

어쩔수 없이 엔진 성능에 따라 팀 성적이 크게 왔다갔다 하는 면이 있었죠. 그것도 최근에는 옛말이긴 하지만...

 BMW 시절에는 엔진 성능도 여느 팀 부럽지 않았죠. 담배회사 스폰서를 거절하면서 깨끗한 이미지를 추구한건 결국 팀 성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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