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p
F1
β
[위키] [F1 역사] 뿌리를 찾아서 - 르노
 
7
  640
Updated at 2020-04-28 20:20:15
  F1

 이 시리즈도 어느덧 절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F1 팀이자 역사가 가장 복잡했던 팀인 르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Renault DP World F1 Team

 

 이전 팀들

 

 *르노 (Equipe Renault Elf, 1977 ~ 1985)

 

 톨먼 (1981 ~ 1985)

 베네통 (1986 ~ 2001)

 르노 (Renault F1 Team, 2002 ~ 2010)

 로터스-르노 (Lotus Renault GP, 2011)

 로터스 (Lotus F1 Team, 2012 ~ 2015)

 르노 (Renault Sport Formula One Team, Renault F1 Team, 2016 ~ )

 

 대표적인 드라이버

 

 르노 (1977 ~ 1985) - 장-피에르 자뷔에 (Jean Pierre Jabouille), 르네 아누

 톨먼 - 데릭 워윅, 아일톤 세나

 베네통 - 티에리 부센(Thierry Boutsen), 알레산드로 나니니, 넬슨 피케, 미하엘 슈마허, 리카르도 파트레제, 장 알레시

 르노 (2002 ~ 2010) - 젠슨 버튼, 야노 트룰리, 페르난도 알론소, 지안카를로 피지켈라

 로터스 - 키미 라이코넨, 로버트 쿠비짜, 로맹 그로장

 르노 (2016 ~ ) - 니코 훌켄버그, 다니엘 리카르도

 

 역사

 

 설립과 F1 참가 이전

 

 르노는 설립 초기부터 의욕적으로 모터 스포츠에 참가해온 회사였습니다. 르노의 설립자 중 한명이자 3형제 중 한명이었던 마르셀 르노가 1903년 파리-마드리드 레이스에 참가했다가 사고로 사망한 뒤에도 꾸준히 모터 스포츠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르노는 시트로엥이나 푸조와 달리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 밑에서 트럭을 만드는 일에 협력했습니다. 그 댓가는 가혹해 전쟁 도중 공장이 주요 폭격 목표로 정해져 쑥대밭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후 회장인 루이 르노가 체포당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F1에 발을 내딛다

 

 1977 - 르노가 F1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원래 계획은 9번째 레이스이자 자국에서 열리는 프랑스 그랑프리에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레이스카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아 데뷔전은 다음 레이스인 영국 그랑프리로 미뤄졌습니다.

 르노의 첫 F1 레이스카였던 RS01은 F1 역사상 처음 본격적으로 사용된 터보 엔진인 르노-고르디니 V6 1.5리터 엔진을 장착했지만 레이스카의 성능은 너무나 떨어졌고 팀의 드라이버도 장-피에르 자뷔에 단 한명이었습니다.

 결국 '노란 티포트'라는 조롱 섞인 별명까지 얻은 르노는 이 시즌 5경기에 참가해 4번의 리타이어와 1번의 퀄리파잉 탈락을 겪으며 호된 신고식을 치뤘습니다.

 

 1978 - 시작은 전년도와 마찬가지여서 첫 4경기를 모두 망쳤지만 (2경기 불참, 2경기 리타이어) 왓킨스 글렌에서 열린 시즌 15번째 레이스인 미국 그랑프리에서는 자뷔에가 3그리드를 차지한데 이어 레이스에서는 잠시 선두로 나선 끝에 4위를 차지하며 팀에게 F1 역사상 첫 포인트를 안겨주었습니다.

 

 1979 - 르노는 자뷔에의 파트너로 르네 아누를 영입하며 처음으로 두 명의 드라이버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성적은 올라오지 않았고 자뷔에가 남아공 그랑프리에서 르노에게 첫 F1 폴포지션을 안겨준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즌 중반 그라운드 이펙트를 이용한 신형 레이스카인 RS10을 투입하자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했는데 디종-프레누아 서킷에서 열린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자뷔에가 폴투윈으로 르노의 첫 우승을 안겨주었고 아누도 쥘 뷜너브와의 혈투끝에 3위로 포디움에 오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후로 자뷔에는 레이스카 문제로 고생하지만 (폴포지션 2번, 리타이어 6번) 아누는 영국 그랑프리와 미국 그랑프리에서 2위를 차지하며 반짝 활약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고 르노는 26포인트로 컨스트럭터 6위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1980 - 아누와 자뷔에의 명암이 크게 엇갈렸는데, 아누는 브라질과 남아공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위 한번, 3번의 폴포지션과 4번의 패스티스트 랩을 기록하며 드라이버 챔피언십 6위까지 올라섰습니다. 반면 자뷔에는 지독할 정도로 불운에 시달렸는데 참가한 13경기중 무려 11경기에서 리타이어를 당했고 (브라질과 남아공에서 폴포지션을 기록했지만 레이스에서 모두 리타이어)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며 F1 커리어가 그대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아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르노는 전년보다 약간 나아진 38포인트, 컨스트럭터 4위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1981 - 르노는 더이상 레이스가 불가능해진 자뷔에를 대신해 맥라렌에서 데뷔시즌을 보낸 프랑스 출신 드라이버를 영입했는데 바로 알랭 프로스트였습니다. 프로스트가 르노에서의 첫 해 3승과 6번의 포디움에 오르며 드라이버 챔피언십 5위를 차지했습니다.

 반면 아누는 프로스트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며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2위로 포디움에 한번 오르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르노는 프로스트의 활약에 힘입어 윌리엄스, 브라밤에 이어 컨스트럭터 3위를 차지했습니다.

 

 1982 - 프로스트는 2승으로 여전히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아누도 지난해의 부진을 빠져와 2승을 거두며 르노는 62포인트로 페라리, 맥라렌에 이어 컨스트럭터 3위를 다시 한번 차지했습니다. 이 해를 끝으로 아누는 페라리로 이적했습니다.

 

 1983 - 르노는 아누의 자리를 매꾸기 위해 리지에 팀에서 미국 출신의 에디 치버(Eddit Cheever)를 영입했습니다. 이로써 치버는 르노의 첫 비 프랑스 출신 드라이버가 되었습니다.

 시즌이 시작하자 프로스트는 맹렬한 기세로 포인트를 쌓아올리기 시작해 3경기를 남겨놓고 지난해까지 팀메이트였던 아누를 8포인트 차이로 재치고 챔피언십 선두를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3경기에서 프로스트는 2위 한번에 그치는 부진에 빠졌고 아누도 2위 한번에 그친 틈을 놓치지 않고 넬슨 피케가 1위 2번, 3위 한번에 오르며 프로스트를 2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프로스트가 대활약을 펼쳤지만 치버가 프로스트 만큼의 성적을 내주지 못한 르노는 페라리에게 10포인트 차이로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내주었습니다. 

 시즌이 끝나자마자 프로스트는 레이스카였던 RE40의 개발이 부족했다며 팀을 비난했고 르노는 시즌이 끝난후 불과 이틀만에 프로스트를 해고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치버 또한 알파로메오로 팀을 옮겼습니다.

 

 1984 - 프로스트와 치버 모두 떠난 자리를 매꾸기 위해 르노는 페라리에서 패트릭 탐베이(Patrick Tambay), 톨먼에서 데릭 워윅(Derek Warwick)을 영입했습니다.

 그러나 탐베이가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폴포지션을 따냈고 탐베이와 워윅이 5번 포디움에 오르긴 했지만 레이스카의 성능이 다른 팀들에 비해 떨어지고 있었고 결국 34포인트로 컨스트럭터 5위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1985 - 이 해 독일 그랑프리에서 르노는 F1 역사상 처음으로 온보드 카메라를 차에 장착한 팀이 되었습니다. (드라이버는 프랑수아 헤스노 (Francois Hesnalut) 였습니다.) 그러나 팀의 성적은 전년도보다 더욱 떨어지며 16포인트로 컨스트럭터 7위까지 추락했습니다.

 결국 재정 문제까지 겹친 르노는 이듬해 엔진 공급 업체로만 참가한다고 선언했고 1986 시즌을 마지막으로 엔진 공급도 그만두며 F1을 한동안 떠났습니다.

 

 

Renault RE40 (1983)

 

 

 톨먼

 

 톨먼은 1926년 에드워드 톨먼이 세운 자동차 회사에서 출발했습니다. 초창기 톨먼은 포드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자그마한 회사였습니다.

 이런 톨먼이 모터 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였습니다. 그리고 1977년 톨먼은 브리티시 포뮬러 포드 2000에 톨먼 모터스포츠(Toleman Motorsports)라는 이름으로 참가하며 모터 스포츠에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F2에서 활동하던 1979년에는 명 엔지니어로 이름을 날린 로리 번 (Rory Byrne)이 합류했습니다.

 마침내 1980년 11월, F1에서 톨먼의 F1 참가를 공식 발표하면서 톨먼은 F1까지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1981 - 시즌이 시작하기 전 란치아의 터보 엔진을 공급받는 것에 대해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국 F2에서 자신들이 사용하던 엔진을 터보 버전으로 개량해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드라이버 라인업은 F2 시절부터 톨먼에서 함께했던 브라이언 헨튼 (Brian Henton) 과 데릭 워윅 (Derek Warwick) 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번이 디자인한 TG181은 무게가 너무 나갔고 헨튼은 이탈리아 그랑프리, 워윅은 시저스 팰리스 그랑프리(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그랑프리) 전까지 한번도 퀄리파잉을 통과하지 못하는 부진을 겪었습니다.

 

 1982 - 톨먼은 F2 시절부터 팀에서 달렸던 헨튼을 테오 파비(Teo Fabi)로 교체하고 지난해 레이스카를 개량한 버전인 TG181B로 시즌을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퀄리파잉에서 탈락을 거듭했던 것과 달리 시즌 중반에 들어서 TG181C로 레이스카를 교체한 이후로는 꾸준히 레이스에 참가할 정도는 되었고 워윅이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패스티스트 랩을 찍기도 했습니다.

 시즌 말에는 탄소 섬유로 제작된 TG183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0포인트로 컨스트럭터 순위에 들지 못했습니다.

 

 1983 - 이 해 톨먼은 이탈리아의 가전 회사인 캔디(Candy)가 스폰서로 들어오며 자금 사정이 좋아졌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제작된 TG183B는 지난해보다 나은 성능을 보여주었고 워윅이 마침내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4위로 팀의 F1 역사상 첫 포인트를 따냈습니다. 워윅은 이후 3번의 레이스에서 모두 포인트를 따냈고 톨먼은 이를 바탕으로 컨스트럭터 9위로 처음으로 순위에 들어올수 있습니다.

 

 1984 - 워윅이 르노로 팀을 옮겼고 지난해 팀에서 달렸던 브루노 지아코멜리와도 계약을 맺지 않았습니다. 

 대신 톨먼은 베네주엘라 출신 F2 드라이버였던 쟈니 세코토(Johnny Ceotto)와 지난해 F3에서 챔피언에 오른 브라질 출신 루키 드라이버 한명을 영입했는데 이 드라이버가 훗날 F1의 전설이자 브라질의 영웅이 된 아일톤 세나였습니다.

 시즌 개막전인 브라질 그랑프리에서는 세나와 세코토 모두 레이스카 문제로 리타이어 하면서 불안하게 시즌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나는 두번째 레이스였던 남아공 그랑프리에서 6위로 첫 포인트를 따낸데 이어 빗속에서 치뤄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2위로 첫 포디움에 올랐고 영국,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포디움에 오르며 팀이 거둔 16포인트중 13포인트를 따내는 대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세나가 이미 시즌 중반에 1979 시즌 로터스로 이적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 밝혀지며 세나는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톨먼과 계약할때부터 더 나은 제안이 있을 경우 계약을 해지할수 있도록 보장받았지만 로터스와의 계약을 팀 수석인 알렉스 호크리지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나의 활약에 힘입어 톨먼은 컨스트럭터 7위로 전년보다 두계단 상승했습니다.

 

 1985 - 지난해 피렐리와 타이어 공급 문제로 마찰을 일으켰던 톨먼은 (사정이 좀 복잡한데 시발점은 산마리노 그랑프리였습니다. 톨먼이 피렐리의 타이어 성능이 미쉐린이나 굿이어보다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피렐리와의 계약을 끊었는데 톨먼은 F2에서 굿이어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끊었던 적이 있어서 미쉐린밖에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쉐린이 1984 시즌을 끝으로 F1에서 철수하는 바람에 톨먼은 피렐리, 굿이어 어느곳에서도 타이어를 공급 받을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톨먼의 새 스폰서인 베네통이 스피릿 레이싱 팀을 인수하고 스피릿이 피렐리와 맺었던 타이어 계약을 그대로 톨먼으로 가져오면서 겨우 타이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첫 3경기를 불참해야 했습니다.

 세나와 세코토를 대신해 테오 파비가 돌아왔고 피에르카를로 긴짜니(Piercarlo Ghinzani)가 합류했지만 0포인트에 그치며 2년만에 컨스트럭터 순위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한편 스폰서로 들어온 베네통이 시즌이 끝난후 톨먼 팀을 사들이며 톨먼은 운영에서 손을 때게 되었습니다. 이후 톨먼은 직접 레이스에 참가하기보다 경영이나 레이스 운영에 주로 참여했고 오스트레일리안 미니 첼린지 (Austrailian Mini Challenge) 시리즈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Toleman TG184 (1984)

 

 

 베네통

 

 베네통은 1983년 티렐과의 스폰서 계약을 시작으로 F1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후 알파로메오를 거쳐 1985년 톨먼과 스폰서 계약을 맺은후 시즌이 끝나자 톨먼 팀을 그대로 사들여 자신들의 팀으로 바꾸었습니다.

 

 1986 - 베네통은 지난해 톨먼이 1986시즌 용으로 개발한 TG186을 B186으로 이름을 바꾸고 BMW로부터 V12 엔진을 가져왔습니다.

 드라이버 라인업에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긴짜니 대신 애로우즈에서 게르하르트 베르거가 옮겨 왔습니다.

 베네통의 첫 시즌은 인상적이었는데 베르거가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첫 포디움을 차지한데 이어 시즌 막바지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파비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폴포지션을 차지하며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B186은 심각할 정도로 불안정한 레이스카였고 베르거와 파비가 도합 19번의 리타이어를 기록하며 첫 시즌을 컨스트럭터 6위로 마쳤습니다.

 

 1987 - BMW가 F1 참가를 축소하면서 베네통은 엔진 공급 업체를 잃을 위기에 놓였지만 하스-롤라 팀이 F1에서 철수하면서 베네통은 포드를 새 엔진 공급 업체로 얻을수 있었습니다.

 새 레이스카인 B187은 시즌 초반 엔진 문제로 고생했지만 터보 차저를 줄이고 나서 문제는 많이 해결되었습니다.

 페라리로 떠난 베르거를 대신해 들어온 티에리 부센은 전반기 부진했지만 후반기들어 포인트를 착실히 따냈고 파비도 시즌 중반 포인트를 따내며 베네통은 컨스트럭터 5위로 한단계 상승했습니다.

 

 1988 - 파비가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하자 베네통은 미나르디에서 달렸던 기대주인 알레산드로 나니니와 계약을 맺었고 파비는 그대로 F1을 떠났습니다.

 터보 엔진 금지 규정에 대비해 포드로 부터 자연 흡기 엔진을 받은 B188은 전년보다 나은 성능을 보여주었고 아직 많은 리타이어를 겪었지만 부센과 나니니가 7번의 포디움에 오르며 (모두 3위) 39포인트로 컨스트럭터 3위까지 뛰어올랐습니다.

 

 1989 - 부센이 윌리엄스로 떠나자 베네통은 루키인 쟈니 허버트(Johnny Herbert)를 영입했습니다. 그러나 새 레이스카인 B189에 장착할 엔진이 준비되지 않았고 지난해에 썼던 엔진은 새 섀시에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베네통은 울며 겨자먹기로 B188로 시즌 초반을 보내야 했습니다. 거기에 허버트도 지난해 입은 큰 부상(현재까지 부상 후유증이 있을 정도로 큰 부상이었습니다.)이 회복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결국 캐나다 그랑프리를 마지막으로 에마누엘레 피로(Emanuele Pirro)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니니가 시즌 내내 버텨주면서 1승과 4번의 포디움에 올랐고 허버트와 피로가 합계 7포인트를 보탠 베네통은 컨스트럭터 4위로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1990 - 시즌이 시작되기 전 베네통은 팀의 개편을 진행했는데 새 감독으로 플라비오 브리아토레가 부임했습니다. 또한 피로 대신 챔피언 출신인 피케를 영입하면서 드라이버 라인업을 강화 시켰습니다.

 시즌 초반 두 경기에서 B189를 사용한 베네통은 나머지 시즌을 모두 새 레이스카인 B190으로 소화했고 피케가 2승과 4번의 포디움에 오르며 드라이버 챔피언십 3위를 차지하면서 베네통도 컨스트럭터 3위로 다시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팀에서 기대를 받고 있었던 나니니가 일본 그랑프리를 앞두고 헬기 사고를 당하며 그대로 F1 커리어가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사고로 오른팔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F1에서 실력에 비해 커리어가 불운했던 드라이버들을 언급할때 나니니도 언급되곤 합니다.)

 

 1991 - 이 시즌부터 미국의 담배 회사인 카멜이 베네통의 타이틀 스폰서가 되었습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B190으로 초반 두 경기를 치룬 베네통은 B191로 나머지 시즌을 치뤘습니다.

 지난해와 같은 드라이버 라인업으로 시즌을 진행했지만 피케가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만셀의 리타이어 덕분에 우승을 차지한 것 외에는 피케만 3위를 두번 차지하는데 그쳤고 피케와 로베르토 모레노는 장기적으로 팀을 이끌어가기에는 나이가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베네통은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조던 팀 소속으로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룬 독일 드라이버를 바로 다음 레이스에 영입하며 모레노를 대신했는데 이 드라이버가 바로 미하엘 슈마허였습니다. 이 영입은 조던 팀의 극심한 반발을 낳았고 조던에서는 영국 법원을 통해 소송을 걸었지만 무위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1992 - 슈마허를 영입하면서 많은 구설수를 낳았지만 베네통은 착실하게 전력을 끌어올리고 있었습니다. 톰 워킨쇼 레이싱(Tom Walkinshaw)에서 베네통의 지분을 매입하면서 설립자인 톰 워킨쇼와 또 다른 인물이 팀 운영에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이 앞으로 슈마허와 오랜 시간 파트너가 될 로스 브런이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베네통은 본사를 옥스포드셔(Oxfordshire)에서 엔스톤(Enstone)으로 이전했습니다. (지금 르노팀을 언급할때 나오는 엔스톤 팀이 여기에서 따온 말입니다.)

 피케가 은퇴를 선언하며 떠난 자리에는 그동안 F1에서 많은 경력을 쌓은 마틴 브런들을 영입하며 신구 조화를 맞추었습니다. 

 지난 몇년과 마찬가지로 시즌 초반에는 지난해의 레이스카를 업그레이드 하면서 사용한 베네통은 4번째 레이스부터 신차인 B192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베네통은 시즌 동안 13번의 포디움에 올랐습니다. 여기에는 슈마허의 첫 F1 우승인 벨기에 그랑프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베네통은 지난해보다 50포인트 이상 늘어난 91포인트로 컨스트럭터 3위를 차지했습니다.

 

 1993 - 베네통은 브런들 대신 리카르도 파트레제를 영입하며 드라이버들의 네임벨류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슈마허가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슈마허와 파트레제가 11번의 포디움에 오른 베네통은 작년보다 포인트는 덜 따냈지만 순위는 3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F1을 지배하고 있던 윌리엄스와의 격차는 매우 컸습니다. (윌리엄스 - 168포인트, 맥라렌 - 84포인트, 베네통 - 72포인트)

 

 1994 - 타이틀 스폰서가 카멜에서 일본의 담배 브랜드인 마일드 세븐으로 바뀌었습니다. 

 파트레제가 은퇴를 선언하며 빈자리가 생기자 베네통은 그 자리에 JJ 레토 (J.J Lehto)를 영입했습니다. 그러나 레토가 프리시즌 테스트에서 큰 부상을 당하면서 급하게 요스 베르스타펜으로 대체했습니다.

 새 레이스카인 B194가 슈마허와 좋은 궁합을 만들어내면서 슈마허는 6승을 만들어냈고 1986 시즌 이후 처음으로 베네통의 폴포지션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반면 베르스타펜은 초반 부진을 면치 못했고 레토는 산마리노 그랑프리부터 복귀했지만 4경기에서 단 1포인트에 그치는 부진을 겪으며 베르스타펜이 남은 시즌을 레토대신 치뤘습니다. 독일 그랑프리에서는 핏스탑 도중 베르스타펜의 레이스카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베르스타펜의 하이라이트에 꼭 나오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베르스타펜은 독일 그랑프리 이후 2경기 연속으로 포디움에 올랐습니다.

 6승을 거둔 슈마허도 시즌이 순탄하게만은 풀리지 않았는데 영국 그랑프리 포메이션 랩에서 데이먼 힐을 추월한데 이어 블랙 플래그까지 무시했다는 이유로 다음 2경기에 출전 금지를 당했고 (출전 금지는 이탈리아 그랑프리부터 수행)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스키드 블록의 마모가 규정을 초과했다는 이유로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실격처리 되었습니다.

 2경기를 남겨놓고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 도전하기 위해 베르스타펜을 허버트로 교체하기도 했지만 허버트는 모두 리타이어를 기록하며 팀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고 베네통은 윌리엄스에 이어 컨스트럭터 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슈마허는 드라이버 챔피언십 경쟁을 이어나가 최종전이었던 호주 그랑프리에서 힐과의 충돌로 나란히 리타이어를 기록하며 생애 처음으로 챔피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사고가 고의였다는 얘기도 많습니다.)

 

 1995 - 베네통은 그동안 함께 했던 포드 대신 르노를 새 엔진 공급 업체로 낙점했습니다.

 슈마허와 허버트는 시트를 유지했고 베르스타펜은 고전을 면치못하던 심텍(Simtek) 팀에 임대 형식으로 합류했습니다.

 시즌 초반 슈마허와 새 레이스카였던 B195는 고전했지만 셋업을 손본 이후 전력이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하면서 남은 시즌을 지배했고 시즌 마지막 17경기에서 9승을 챙길수 있었습니다. 허버트도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생애 첫 포디움을 차지하고 영국과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베네통은 윌리엄스의 4년 연속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저지하고 새로운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더불어 슈마허도 2년 연속 드라이버 챔피언에 오르며 베네통은 창단 후 처음으로 더블 챔피언에 성공했습니다.

 

 1996 - 이 해 부터 베네통은 국적을 영국에서 이탈리아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본사는 영국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러나 드라이버 라인업에 큰 공백이 생겼는데 슈마허가 계획을 틀어 페라리로 이적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허버트도 팀을 떠나 자우버와 계약을 맺으며 장 알레시와 게르하르트 베르거의 드라이버 라인업으로 시즌을 준비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알레시와 베르거는 지난해까지 페라리에서 호흡을 맞추며 달린 사이였습니다.

 새 레이스카인 B196을 앞세워 베네통은 10번의 포디움을 거뒀지만 1988 시즌 이후 처음으로 시즌 무승에 그쳤습니다. 

 결국 베네통은 전년보다 반 이상 떨어진 포인트를 거두며 컨스트럭터 3위에 머물렀습니다.

 

 1997 - 슈마허가 지난해 페라리로 떠난데 이어 이번에는 로스 브런과 로리 번을 비롯한 수많은 스태프들이 페라리로 이동하면서 베네통은 전력이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통은 꾸준히 포디움에 올랐는데 베르거가 아버지의 죽음과 건강 문제로 첫 3경기에 불참한 사이 그 자리를 매꾼 알렉산더 부르츠가 영국 그랑프리에서 포디움에 올랐고 돌아온 베르거가 독일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 이 우승이 베네통이 F1에서 거둔 마지막 우승이 되었습니다.)

 알레시, 베르거가 시즌 끝까지 분전한 베네통은 전년도보다 1포인트가 줄어든 67포인트로 컨스트럭터 3위를 유지했습니다.

 

 1998 - 베르거가 은퇴를 선언하고 알레시도 자우버로 떠난 베네통은 부르츠와 지안카를로 피지켈라로 시즌을 꾸렸습니다. 르노가 F1에서 철수를 선언하는 바람에 베네통은 전년도에 쓰던 엔진을 메카크롬에 맡겨 업데이트를 진행했습니다. 베네통은 이 엔진에 자신들의 브랜드인 플레이라이프(Playlif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팀의 수장인 브리아토레도 팀을 떠났고 그 자리는 랠리 챔피언 출신인 데이빗 리차즈(David Richards)가 대신했습니다.

 피지켈라가 2번의 2위를 차지했지만 경쟁력이 다한 베네통은 마지막 7경기에서 단 1포인트만 따내며 33포인트로 컨스트럭터 5위를 차지하는데 그쳤습니다.

 

 1999 - 베네통과 장기적인 전략에서 마찰을 일으킨 리차즈는 1년만에 팀의 수장 자리를 내려놓았습니다. 베네통은 가문의 일원이었던 로코 베네통을 새 수장에 앉혔습니다.

 지난해 메카크롬이 담당했던 엔진은 이번에는 브리아토레의 슈퍼텍에서 개발을 담당했지만 여전히 이름은 플레이라이프를 유지했습니다.

 시즌내내 부진했던 베네통은 피지켈라가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거둔 2위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고 결국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인 16포인트, 컨스트럭터 6위로 마쳤습니다.

 

 2000 - 베네통 팀은 F1을 복귀를 선언한 르노에게 1억 2000만 달러에 매각되었지만 팀 이름은 여전히 베네통을 유지했습니다.

 성적은 전년보다 약간은 나아지며 피지켈라가 3번의 포디움을 거두었지만 부르츠가 2포인트에 그친 베네통은 20포인트를 거두며 컨스트럭터 4위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2001 - 팀 이름이 마일드 세븐 베네통 르노 스포츠 (Mild Seven Benetton Renault Sport)라는 긴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3년간 부진을 면치 못하던 부르츠는 결국 윌리엄스에서 나온 젊은 드라이버인 젠슨 버튼으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이제 베네통은 퀄리파잉 탈락을 걱정해야 하는 위치까지 떨어지며 첫 11경기동안 피지켈라가 브라질에서 거둔 1포인트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즌 중반부터 베네통은 부활의 기운을 조금씩 드러냈는데 독일 그랑프리에서 피지켈라와 버튼이 4, 5위를 거두었고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피지켈라가 포디움에 오르며 10포인트로 컨스트럭터 7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해를 끝으로 르노는 팀 이름을 르노 F1 팀 (Renault F1 Team)으로 바꾸며 베네통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Benetton B194 (1994). 슈마허의 아들인 믹이 이벤트에서 몰았던 사진입니다.

 

 

 르노 F1 팀

 

 2002 - 르노는 2000년 베네통을 사들였지만 팀의 경쟁력이 올라올때까지는 자신들의 이름을 붙이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2001 시즌 베네통이 부활의 조짐을 보이자 르노는 팀 이름을 변경하고 피지켈라 대신 야노 트룰리를 영입하며 팀을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17년만에 자신들의 이름으로 참가한 르노는 23포인트를 거두며 컨스트럭터 4위로 올라섰습니다. 그러나 앞의 빅3 팀에 비하면 성적은 한참 떨어졌습니다. (3위 맥라렌 - 65포인트, 르노 - 23포인트)

 

 2003 - 지난해 트룰리보다 나은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르노는 버튼대신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페르난도 알론소를 트룰리의 파트너로 정했습니다.

 알론소는 이런 르노의 기대대로 헝가리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1983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이후 팀의 첫 F1 우승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결국 르노는 컨스트럭터 4위를 유지했지만 포인트는 지난해에 비해 대폭 상승했습니다. (2002 - 23포인트, 2003 - 88포인트)

 

 2004 - 이제 르노는 컨스트럭터 2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위치까지 올라섰지만 트룰리는 알론소 위주로 흘러가던 팀 분위기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룰리는 시즌 중반 토요타로의 이적을 선언했고 마지막 두 경기에서 토요타 소속으로 참가했습니다. 마지막 3경기에서 트룰리를 대신해 1997년 챔피언이었던 자크 뷜너브를 영입했지만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르노는 BAR에 이어 컨스트럭터 3위를 거두었습니다.

 

 2005 - 트룰리를 대신해 르노는 자신들이 버렸던 피지켈라를 다시 영입했습니다. 개막전인 호주 그랑프리에서 피지켈라가 우승을 차지하고 알론소가 다음 3경기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며 르노는 컨스트럭터 선두를 질주했습니다. 그러나 시즌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피지켈라가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팀과 알론소도 스피드만큼은 빨랐던 맥라렌과 라이코넨에게 추격을 허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중국 그랑프리에서 맥라렌이 원투 피니쉬에 성공하며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 르노를 추월했지만 알론소는 이 레이스에서 드라이버 챔피언을 확정지었고 중국 그랑프리에서 연승에 성공하며 팀의 컨스트럭터 챔피언까지 이끌었습니다. 이로써 르노는 페라리의 6년 연속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저지하며 르노의 이름으로는 사상 처음, 그리고 프랑스 컨스트럭터로는 역사상 두번째(첫번째는 1969년 마트라) 컨스트럭터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2006 - 알론소와 피지켈라 라인업을 유지한 르노는 여전히 강팀이었습니다. 알론소가 개막전인 바레인과 호주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말레이시아에서는 피지켈라가 우승, 알론소가 2위를 차지하며 1982년 아누와 프로스트 이후로 첫 원투피니쉬에 성공했습니다. 

 팀의 F1 200번째 그랑프리였던 영국에서도 알론소는 우승을 차지했고 캐나다, 미국 그랑프리에서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레이스카 성능에서는 페라리가 르노를 앞지르기 시작하고 있었고 FIA에서 매스 댐퍼 (노즈콘에 스프링과 결합한 추를 장착해 차체의 진동을 줄여주는 시스템. 이때 르노, 페라리를 비롯한 7개 팀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를 금지시키는 바람에 르노는 더 큰 어려움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르노는 이에 반발했고 FIA 항소 법원까지 이 사안이 올라갔지만 결국 르노의 매스 댐퍼는 규정 위반이라는 결론만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노는 2년 연속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지켜냈습니다.

 

 2007 - 타이틀 스폰서가 마일드 세븐에서 네덜란드 은행인 ING로 바뀌었습니다. 알론소가 빠져나간 자리는 기대를 받던 헤이키 코발라이넨 (Heikki Kovalainen) 으로 대신했습니다.

 ING가 스폰서로 들어오면서 기존의 하늘색과 노란색의 리버리 대신 ING를 상징하는 노랑, 파랑, 오렌지의 리버리로 바뀌었습니다.

 시즌 초부터 르노는 부진을 거듭했고 코발라이넨이 일본 그랑프리에서 2위를 거둔 것이 팀의 유일한 포디움어있습니다. 

 게다가 시즌이 끝난 후 르노가 맥라렌의 기술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폭로되면서 스파이게이트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했지만 FIA에서는 르노에게 별도의 패널티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르노는 지난해에 비해 큰폭으로 추락하며 (2006 - 206포인트, 2007 - 51포인트) 컨스트럭터 3위를 거두었습니다.

 

 2008 - 맥라렌으로 이적했던 알론소가 다시 르노로 돌아왔고 팀은 나머지 한 자리를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넬슨 피케 주니어로 결정했습니다.

 개막전에서 알론소가 4위를 거두었고 전력이 점점 나아졌지만 여전히 팀은 중위권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독일 그랑프리에서 피케 주니어가 첫 포디움을 차지했지만 알론소는 여전히 포디움에 올라가지 못하던 상황에서 싱가포르 그랑프리에서 피케 주니어의 사고에 힘입어 알론소가 첫 포디움과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훗날 크래쉬게이트로 폭로된 사건이었습니다.) 기세를 탄 알론소는 일본 그랑프리에서 우승,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2위를 차지하며 시즌 마무리를 좋게 끝냈고 팀은 지난해 보다 30포인트 가까이 오른 80포인트로 컨스트럭터 4위를 차지했습니다. 

 

 2009 - 지난 시즌 후반 좋은 페이스를 보여준 르노는 더블 챔피언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론소가 첫 6경기에서 4번의 포인트 피니쉬 만을 기록하며 그 목표는 허상이었다는 것이 금방 드러났습니다.

 독일 그랑프리에서 패스티스트 랩, 헝가리에서 폴포지션, 벨기에에서 포디움을 기록하며 알론소와 르노는 점점 페이스를 끌어올렸지만 피케 주니어는 부진에 시달리며 팀에서는 결국 시즌 후반 3경기를 피케 주니어 대신 로맹 그로장으로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르노에서 쫓겨난 피케 주니어는 언론에 2008년 싱가포르 그랑프리에서의 사고가 팀에서 지시한 것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F1이 발칵 뒤집어졌고 WMSC (World Motor Sport Council) 까지 올라간 사건은 르노가 항소를 포기하기 전 수장이었던 프리아토레와 엔지니어였던 펫 시몬즈 (Pat Symonds)를 팀에서 추방시키며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리고 FIA에서는 브리아토레에게 영구 제명, 시몬즈에게 5년간 참가 금지 (브리아토레와 시몬즈는 프랑스 법원에 항소해 2010년 승소를 거두었고 브리아토레는 2011년, 시몬즈는 2013년 F1에 복귀하게 됩니다.) 를 명령했습니다.

 팀은 단 26포인트 만을 거두며 컨스트럭터 8위에 그쳤고 ING와의 타이틀 스폰서 계약도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2010 - 최악의 오명을 뒤집어쓴 르노는 팀 지분의 대부분을 룩셈부르그의 투자 회사에게 매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팀 지분의 25%를 가지고 있었고 팀 이름도 르노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지난해의 드라이버들이 모두 팀을 떠난 가운데 르노는 로버트 쿠비짜, 비탈리 페트로프를 영입했고 페트로프는 F1 역사상 첫 러시아 드라이버가 되었습니다.

 팀 내 개편도 이루어졌는데 임시로 수장을 맡고 있던 밥 벨이 원래 보직이었던 테크니컬 디렉터로 복귀했고 팀의 새 수장에는 에릭 불리에 (Eric Boullier) 가 임명되었습니다.

 개막전에서 쿠비짜와 페트로프 모두 포인트를 획득하는데 실패했지만 다음 레이스였던 호주 그랑프리에서 쿠비짜가 포디움을 차지했습니다. 이후로 쿠비짜는 3경기 연속으로 포인트를 따냈고 페트로프도 중국 그랑프리에서 7위로 첫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시즌 전체적으로 쿠비짜에 비해 페트로프의 성적이 부진했지만 헝가리 그랑프리에서 5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23그리드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9위로 마치며 만만치 않은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전인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는 레이스 내내 알론소를 막아내며 베텔의 챔피언을 도와준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시즌 말 라이코넨과의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라이코넨이 르노의 팀 이미지를 거론하며 르노에게 뛰는 것이 싫다고 루머를 일축하기도 했습니다.

 팀은 포인트 규정의 변경까지 겹치며 대폭 오른 163포인트를 거두며 컨스트럭터 5위를 거두었습니다.

 

 2011 - 결국 르노는 자체적인 팀 운영에서 손을 떼는 대신 로터스가 팀의 지분 25%를 사들이며 로터스와 공동으로 팀을 운영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제 르노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팀의 엔진만을 공급했습니다. 리버리도 로터스의 유명한 존 플레이어 스페셜 (John Player Special) 리버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 해 이름을 바꾼 로터스-르노는 팀의 명명권을 두고 라이트스피드 F3 (LightSpeed F3) 팀을 사들여 팀 로터스라는 이름으로 F1에 참가한 토니 페르난데스(Tony Fernandes,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퀸즈 파크 구단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와 법정 공방까지 가기도 했는데 결국 페르난데스가 팀 이름을 캐이터햄으로 바꾸면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팀의 국적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바꾸면서 F1에서 1975년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 국적의 컨스트럭터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해에는 시즌 전부터 악재가 끊이지 않았는데 쿠비짜가 오프시즌동안 랠리에 참가했다가 큰 부상을 당하면서 전력에서 이탈했고 급한대로 팀은 닉 하이드펠트(Nick Heidfeld)를 영입하며 쿠비짜의 빈자리를 매꾸었습니다.

 페트로프가 개막전에서 첫 포디움에 오른데 이어 하이드펠트가 말레이시아 그랑프리에서 포디움에 올랐지만 시즌이 지나갈수록 팀의 전력이 떨어지는 것은 명백히 드러났고 후반기 브루노 세나를 하이드펠트 대신 기용했지만 세나는 단 2포인트만을 기록하며 르노는 73포인트로 컨스트럭터 5위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를 끝으로 르노는 다시 엔진 공급 업체로 물러나 F1에 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Renault R25 (2005)

 

 

 로터스

 

 2012 - 팀 이름을 로터스 F1 팀 (Lotus F1 Team)으로 바꾼 로터스는 여전히 르노로부터 엔진을 공급 받았습니다. 로터스는 이름 뿐만 아니라 팀 자체의 개편도 진행했는데 지난 2년간 F1을 떠나있었던 키미 라이코넨을 드라이버로 영입했고 2009 시즌 잠시 팀 (르노)에서 달렸던 로맹 그로장을 라이코넨의 파트너로 영입했습니다.

 개막전에서는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4번째 레이스였던 바레인 그랑프리에서 라이코넨이 2위, 그로장이 3위를 거두며 더블 포디움에 성공했고 캐나다 그랑프리에서는 그로장이 커리어 최고 성적인 2위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라이코넨은 시즌 내내 포디움을 들락날락 할 정도로 좋은 활약을 펼쳤고 헝가리에서는 라이코넨과 그로장이 다시 한번 더블 포디움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그로장이 첫 랩에서의 큰 사고를 유발하며 다음 레이스 출전 금지를 당했고 (그로장도 심리 치료를 받을 정도로 충격을 크게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고가 시발점이 되어 노즈 디자인이 대대적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라이코넨이 우승을 거두며 팀의 시즌 첫 승과 본인의 F1 복귀 이후 첫 우승에 성공하며 라이코넨은 1승, 7번의 포디움과 20경기 중 무려 19경기에서 포인트를 따내며 드라이버 챔피언십 3위를 차지했고 로터스는 컨스트럭터 4위를 기록할수 있었습니다.

 

 2013 - 이 시즌에도 라이코넨과 그로장의 드라이버 라인업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개막전에서는 라이코넨이 작년의 기세를 계속 이어 우승을 차지했고 중국 그랑프리에서도 라이코넨이 2위를 거두었습니다.

 바레인 그랑프리에서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라이코넨과 그로장이 더블 포디움에 성공했지만 시즌 막바지 아부다비 그랑프리를 앞두고 라이코넨이 수술 (등 부상)로 남은 시즌을 빠지게 되었고 코발라이넨이 라이코넨을 대신해 남은 시즌을 달렸습니다.

 라이코넨은 두 경기를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1승과 8번의 포디움에 오르며 (그로장은 포디움 6번) 드라이버 챔피언십 5위를 차지했고 팀도 작년과 똑같은 컨스트럭터 4위를 유지했습니다.

 

 2014 - 시즌이 시작하기 전 팀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영국 출신 투자가인 앤드류 루한 (Andrew Ruhan)의 투자를 받으며 그가 공동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팀의 자금 운영은 게니 캐피탈 (Genii Capital)에서 맡았고 게니는 팀의 지분 10%를 요타폰 (Yotaphone, 러시아 모바일 회사) 에 매각했습니다.

 루한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단독으로 CEO에 취임했고 에릭 불리에가 맥라렌으로 떠난 수장 자리에는 루한이 매튜 카터(Matthew Carter)를 임명했지만 카터는 F1을 한번도 운영해본 적이 없는 신출내기였습니다. 이에 카터를 보조하기 위해 기업가 출신의 제라르드 로페즈(Gerard Lopez)가 명목상의 팀 수석, 팀에서 오랜 시간 일해온 페데리코 가스탈디(Federico Gastaldi)가 팀의 부 수석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라이코넨이 페라리로 떠난 빈자리에는 PDVSA (Petroleos de Venezuela S.A, 베네주엘라 국영 석유회사) 의 스폰서를 받는 파스토르 말도나도 (Pastor Maldonado) 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말도나도와 그로장은 시즌 내내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키며 단 한번도 포디움에 오르지 못하는 최악의 부진을 겪었고 팀은 10포인트를 거두는데 그치며 컨스트럭터 8위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2015 - 로터스는 지난해의 부진을 씻기 위해 엔진 공급 업체를 르노에서 메르세데스로 변경했습니다. 이로써 르노와의 20년간 이어져온 협력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그로장과 말도나도는 여전히 시트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개막전부터 그로장과 말도나도는 사고를 일으키며 나란히 리타이어 하고 말았고 레이스카의 신뢰성 문제까지 겹치며 로터스는 좀처럼 부진에서 해어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로장이 중국 그랑프리에서 7위를 차지한데 이어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3위를 거두며 오랫만에 포디움에 올랐지만 로터스는 합계 78포인트로 메르세데스 엔진을 쓰는 팀들 중 가장 낮은 컨스트럭터 6위에 올랐습니다. (메르세데스 1위, 윌리엄스 3위, 포스인디아 5위)

 시즌이 끝난후 12월 팀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르노가 2016 시즌 복귀를 위해 로터스 팀을 인수했다고 밝히면서 팀은 다시 르노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Lotus E21 (2013)

 

 

 다시 르노로

 

 2016 - 자신들이 매각했던 엔스톤 팀을 다시 사들인 르노는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알랭 프로스트를 팀의 고문으로 영입했습니다.

 드라이버 라인업도 모두 교체했는데 그로장과 말도나도 대신 케빈 마그누센, 졸리온 팔머가 새 드라이버가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드라이버 아카데미를 열어 잭 에잇켄, 루이스 델레트라즈 등의 젊은 드라이버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또한 수뇌부에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전에 르노에서 일했던 밥 벨이 팀의 Chief Technical Officer로 복귀했고 프레데릭 바써 (Frederic Vasseur) 가 새 레이싱 디렉터로 임명되었습니다.

 르노-닛싼 연합의 든든한 지원외에도 수많은 스폰서가 들어왔는데 여기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피렐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즌 성적은 처참할 정도로 부진하며 1978년 이후 (3포인트, 12위) 최악의 성적인 10포인트, 컨스트럭터 9위로 마쳤습니다.

 

 2017 - 바써는 팀과의 계약을 거부하고 떠났고 르노는 회장으로 제롬 스톨 (Jerome Stoll), 새 매니징 디렉터로 시릴 아비테불 (Cyril Abiteboul) 을 임명했습니다.

 마그누센이 하스로 떠난 자리에는 니코 훌켄버그를 영입하며 드라이버 라인업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팔머가 시즌 8포인트로 부진을 면치 못하자 팀은 그를 대신해 미국 그랑프리 직전 카를로스 사인츠를 영입했습니다.

 훌켄버그가 시즌 내내 꾸준한 모습을 보여준 르노는 (훌켄버그 43포인트, 사인츠 6포인트) 총 57포인트로 컨스트럭터 6위에 올랐습니다.

 

 2018 - 르노는 훌켄버그와 다년 계약을 맺으며 기대를 걸었고 훌켄버그와 사인츠가 시즌 내내 포디움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착실하게 포인트를 벌어들이며 합계 122포인트로 컨스트럭터 4위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시즌 중반 레드불에서 달리고 있떤 다니엘 리카르도와 계약에 합의하면서 시즌이 끝나고 사인츠와의 계약을 포기했습니다.

 

 2019 - 리카르도가 새 드라이버로 합류한 르노는 2021 시즌 상위권 도약을 목표로 잡고 이번 시즌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잡았습니다.

 시즌 초반 파워 유닛의 신뢰성 문제가 드라이버들을 괴롭혔고 레이스카의 코너 성능도 뛰어나지 않았지만 시즌 중반부터 전력이 점차 올라오면서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는 리카르도가 4위, 훌켄버그가 5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그랑프리에서 브레이킹 시스템이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실격처리 당하기도 했고 자신들의 파워 유닛을 쓰는 맥라렌에 밀리며 합계 91포인트로 컨스트럭터 5위에 올랐습니다. 

 시즌이 끝나고 르노는 훌켄버그와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고 프랑스 출신의 에스테반 오콘을 영입했습니다.

 

Renault R.S 19 (2019)

 

 

 마치며 

 

 이것으로 르노의 복잡하다면 복잡했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본문 형식을 약간 바꾸고 분량을 늘렸는데 재미있게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음편에서는 새롭게 이름을 바꾼 레드불의 자매팀 알파타우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F1
7
Comments
2
2020-04-07 23:41:00

팔머하니까 He cut the chicken. Five seconds it’s a yoke. Where is Palmer? (Palmer has retired) Karma!라고 희대의 명언을 남긴 알론소가 생각나는군요.

WR
2020-04-08 00:31:38

 알론소의 베스트 팀라디오를 꼽을때 항상 빠지지 않죠. 

1
Updated at 2020-04-07 23:55:31

로터스 시절 한때 그로장과 말도나도의 핵폭탄 듀오가 같이 달리던 시절도 있었죠....
hasmaldonadocrashedtoday.com 이라는 사이트는 아직도 기억납니다.

2
Updated at 2020-04-07 23:56:27

그로장은 지금도 하스에서 마그누센과 함께... 말도나도의 뒤를 이어 러시아산 torpedo 크비앗이 있죠.

WR
2
Updated at 2020-04-08 13:34:59

 토피도를 붙여준게 베텔이었죠. 아마 중국에서 그랬던걸로 기억하는데 설마 러시아에서 제대로 격추할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그리고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리카르도도 잘써먹었죠.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베텔의 생일 파티에 토토가 갔는데 드라이버들도 갔냐는 질문이 주어졌는데 베를라인이 초대 못받았다고 베텔이 자길 좋게 안보는것 같다고 너스래를 떨었고 크비앗도 잘 모르겠다고 얘기하니까 옆에서 리카르도가,

 

 리카르도: 아마 토피도한테는 초대가 갔을꺼야. 내가 봤음.

 

 이렇게 거들었고 해밀턴이 '토피도가 뭔데?' 라고 리카르도한테 물어보자 리카르도가,

 

 리카르도: 셉이 작년에 다닐한테 붙여준거야.

 

 라고 얘기했죠. 마지막에 크비앗이 '참 기억력도 좋네.'라고 혀를 내둘렀죠. 

WR
2020-04-08 00:32:59

 그때 당시에는 F1을 별로 챙겨보지 못했지만 Maldonado's Fault 밈이 돌았던건 기억나네요. 

 막스까지 이어져 왔는데 이제는 누가 될려나요. 

2020-04-23 00:09:34

하아 항상 정성글 감사합니다

글쓰기
검색 대상
띄어쓰기 시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