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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F1 역사] 뿌리를 찾아서 - 맥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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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4-28 20: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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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F1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수 없는 팀인 맥라렌의 역사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페라리도 마찬가지였고 마지막 편에서 다룰 윌리엄스와 마찬가지로 팀 창단 이후로 이름이 바뀌거나 팀 자체가 바뀐적이 없었기 때문에 역사에 대해서 주로 다뤄보겠습니다.

 

 Mclaren F1 Team

 

 이전 팀들

 

 맥라렌 (1966 ~ )

 

 대표적인 드라이버

 

 브루스 맥라렌, 조디 쉑터, 에머슨 피티팔디, 제임스 헌트, 니키 라우다, 알랭 프로스트, 아일톤 세나,  게르하르트 베르거, 미카 하키넨, 데이빗 쿨싸드, 키미 라이코넨, 후안 파블로 몬토야, 페르난도 알론소, 루이스 해밀턴, 젠슨 버튼

 

 역사

 

  •  설립과 F1 참가 이전 

 

 맥라렌은 이름에서 봐도 알수 있듯이 F1 드라이버이자 1960시즌 챔피언을 차지한 뉴질랜드 출신 드라이버 브루스 맥라렌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레이싱 팀에서 출발했습니다.

 브루스 맥라렌이 회사를 세운 계기는 이전에 언급한적이 있는 타스만 시리즈와 연관이 있는데, 당시 쿠퍼팀 소속이었던 맥라렌은 타스만 시리즈에 쿠퍼팀 소속으로 참가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쿠퍼의 설립자이자 팀을 이끌고 있던 찰스 쿠퍼 (Charles Cooper)는 F1과 엔진 규격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타스만 시리즈는 2.5리터, F1은 1.5리터 엔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맥라렌에게 F1용 엔진만을 공급하겠다고 고집했고 맥라렌은 팀 동료였던 티미 마이어를 끌어들여 자신들의 팀을 만들어 타스만 시리즈에 참가했습니다.

 맥라렌은 1964년 타스만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만 티미 마이어는 이 시리즈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맥라렌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이전부터 도움을 주고 있던 티미의 형 테디 마이어의 도움으로 레이스를 계속 할수 있었습니다.

 펜스키로부터 레이스카를 구매할 자금이 필요하게 되자 맥라렌은 테디에게 공동 사업을 제안했고 브루스 맥라렌 모터 레이싱 회사 (Bruce Mclaren Motor Racing Limited)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66년 쿠퍼 팀의 규모가 축소될 처지에 놓이자 맥라렌은 아예 쿠퍼 팀을 나와 맥라렌의 이름으로 F1 팀을 창단하게 되었습니다.

 

  •  초창기

 

 맥라렌의 F1 데뷔전은 1966년 모나코 그랑프리였습니다. 레이스카 섀시는 자체적으로 개발했지만 엔진은 포드와 세리니시마 사의 엔진을 가져와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데뷔전인 모나코 그랑프리부터 레이스카 문제로 리타이어 하고 말았고 시즌 내내 크고 작은 문제로 첫 해는 맥라렌의 이름값에는 걸맞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이듬해에는 BRM의 V12 엔진을 쓰려고 했지만 도착이 늦어지며 초반에는 같은 팀의 V8 엔진을 써야만 했고 레이스카도 두개의 사양으로 제작되어야 했습니다. 이 때문인지 시즌 성적도 나아지지 않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거둔 4위가 맥라렌의 최고 성적이었습니다.

 1968년 맥라렌은 엔진을 코스워스의 DFV 로 교체하게 되는데 이 엔진은 F1 역사에 손꼽힐 정도로 좋았던 명품이었고 맥라렌은 이 엔진을 1983년까지 업데이트를 거쳐가며 사용하게 됩니다.

 덕분에 1968 시즌 성적은 몰라보게 좋아지며 브랜즈 햇치, 실버스톤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마침내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첫 F1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브랜즈 햇치, 실버스톤은 논 챔피언십) 그리고 이 해 새로 들어온 데니 흄(Danny Hulme) 도 이탈리아,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맥라렌 팀은 컨스트럭터 2위라는 성적을 거머쥐었습니다.

 1969년은 맥라렌이 3번의 포디움을 차지했지만 우승은 흄이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거둔 1승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이해 맥라렌은 M9A 모델을 통해 4륜 구동을 시험해보기도 했습니다.

 1970년 맥라렌에는 비극이 찾아왔는데 브루스 맥라렌이 캔암 (Can-Am)에 참가하고자 준비한 레이스카를 테스트 하던 도중 굿우드 서킷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때 맥라렌의 나이는 고작 32살이었습니다.

 맥라렌의 죽음으로 팀은 큰 위기에 빠졌지만 테디 마이어가 팀을 지휘하면서 위기를 수습하기 시작했고 댄 거니와 피터 게틴이 새 드라이버로 합류하면서 1970시즌 팀은 전년과 똑같은 컨스트럭터 5위를 기록했습니다.

 1971년 한번의 포디움만 기록하며 부진했던 맥라렌은 이듬해 흄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새로 들어온 피터 렙슨(Peter Revson)이 10번의 포디움을 차지하면서 컨스트럭터 3위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이 해에는 시즌 최종전에서 훗날 명 드라이버가 되는 조디 쉑터가 맥라렌 소속으로 F1 데뷔전을 치루기도 했습니다.

 이듬해에도 맥라렌의 기세는 이어졌고 흄이 스웨덴, 렙슨이 영국과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1974년 맥라렌에 2년전 챔피언을 차지했던 에머슨 피티팔디가 합류했고 피티팔디는 브라질, 벨기에,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드라이버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1975시즌을 끝으로 피티팔디가 팀을 떠나면서 드라이버 라인업에 큰 공백이 생기고 말았고 이때까지 팀을 이끌고 있던 테디 마이어는 F1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젊은 드라이버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이 드라이버는 훗날 전설적인 드라이버 중 한명으로 남게된 제임스 헌트였습니다.

 1976년은 역사에 남을 정도로 치열한 챔피언십 경쟁이 펼쳐졌는데, 시즌 초반까지 라우다가 앞서나가다 부상으로 빠진 사이 헌트가 맹렬하게 라우다를 추격했고 시즌 최종전인 일본 그랑프리에서 라우다가 레이스를 포기한 반면 헌트는 끝까지 레이스를 이어나가 3위를 차지하며 극적으로 헌트가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1977 시즌 맥라렌과 헌트는 경쟁을 이어나갔지만 라우다와 페라리의 조합은 강력했고 맥라렌은 컨스트럭터 3위, 헌트는 드라이버 챔피언십 5위를 차지하는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부터는 그라운드 이펙트로 무장한 로터스까지 경쟁에 가세하면서 맥라렌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헌트는 1978시즌이 끝나고 팀을 떠났고 맥라렌은 로터스에서 당시 주목받던 드라이버였던 로니 피터슨(Ronnie Peterson)을 데려오기로 했지만 피터슨이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존 왓슨과 대신 계약을 맺었습니다. 왓슨은 이후로도 5시즌을 맥라렌에서 더 달렸습니다. 그리고 1980년에는 훗날 맥라렌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쌓게 되는 알랭 프로스트가 맥라렌 소속으로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1980년에 들어오면서 맥라렌의 가장 큰 스폰서였던 필립 모리스 사는 맥라렌의 부진한 성적을 이유로 들며 팀의 책임자였던 메이어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맥라렌은 론 데니스가 이끌던 프로젝트 2팀과 합병하게 되었습니다.

 론 데니스는 이 때 존 바나드 (John Barnard)라는 걸출한 엔지니어도 함께 데려왔는데 바나드는 다른 카테고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론 데니스의 프로젝트 4 팀의 레이스카에서 영감을 받은 탄소 섬유로 만는 섀시를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맥라렌과의 합병은 자금 사정에 숨통을 틔어주었고 바나드는 곧바로 개발에 착수해 1981년 맥라렌의 레이스카인 MP4/1 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바나드가 디자인한 섀시와 모노코크 구조는 현대 F1 레이스카를 만드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합병 직후 맥라렌은 본사를 그동안 있던 콜브룩에서 현재 본사가 위치한 런던 근교의 워킹(Woking)으로 옮겼고 테디 마이어는 1982년을 끝으로 가지고 있던 지분을 전부 매각하며 맥라렌을 떠났습니다.

 

Mclaren M7A (1968, 현재와 같은 파파야 오렌지의 리버리가 눈에 띕니다.)

 

Mclaren M23 (1976)

 

 

  •  위대한 시대 

 

 F1에서 "위대한 시대"라는 말은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까지 F1의 전성기를 일컫는 말로 이 시기에 F1은 기술적인 면 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크게 성장했습니다.

 만셀, 피케, 세나, 프로스트 등의 전설적인 드라이버들도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는데 이 시기를 가장 오래 지배했던 팀이 바로 맥라렌이었습니다.

 1982년까지 페라리, 르노, 브라밤 같은 팀들은 1.5리터 터보 차저 엔진을 쓰고 있던 반면 맥라렌은 여전히 코스워스의 3.0리터 자연 흡기 엔진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맥라렌도 터보 엔진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TAG 사에 포르쉐에서 개발하는 엔진에 대한 투자를 요청했습니다. TAG가 이를 받아들이며 포르쉐가 만든 TAG 브랜드의 터보 엔진이 제작되었고 맥라렌은 1983 시즌 중반부터 이 엔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984년 르노를 나온 프로스트가 맥라렌에 합류하면서 맥라렌은 라우다, 프로스트라는 드라이버 라인업을 구성했습니다. 새 엔진의 힘까지 더한 맥라렌은 무려 12승을 쓸어담으며 압도적인 차이로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했고 라우다가 0.5포인트 차이로 프로스트를 재치고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차지했습니다. 

 (우승이 9포인트를 받던 시절이었는데도 2위 페라리와의 격차가 86포인트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라우다와 프로스트가 0.5포인트 차이가 나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모나코 그랑프리였는데 비로 인해 레이스가 중간에 중단되는 바람에 우승을 차지한 프로스트가 4.5포인트만 받았습니다. 한편 이 레이스에서 막판 프로스트를 맹렬히 추격하면서 2위를 차지한 톨먼 팀 소속 드라이버가 눈길을 끌었는데 바로 아일톤 세나였습니다.)

 1985년에도 맥라렌은 강력했고 다시 한번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함과 동시에 이번에는 프로스트가 드라이버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1986 시즌 맥라렌은 나이젤 만셀, 넬슨 피케의 라인업으로 무장한 윌리엄스에게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내주었지만 만셀과 피케가 포인트를 나눠 가지는 틈을 타 프로스트가 최종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잭 브라밤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챔피언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987년 그동안 맥라렌의 레이스카 개발을 도맡아 오던 바나드가 페라리로 떠나고 또 한명의 유능한 엔지니어인 스티브 니콜스가 들어왔지만 맥라렌과 TAG 엔진으로는 강력해진 윌리엄스와 혼다의 조합을 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이에 1988년 맥라렌은 엔진 공급 업체를 혼다로 교체하면서 지난해까지 맥라렌에서 달렸던 스테판 요한손 (Stefan Johansson)을 대신해 세나를 로터스에서 데려오는데 성공했습니다. 규정이 바뀌면서 터보 엔진의 성능이 떨어질것이라는 예측이 무색하게 혼다 엔진은 강력했고 맥라렌의 레이스카였던 MP4/4 또한 역사에 남을만한 명차였습니다. 

 거기에 최정상급 반열에 오른 프로스트와 촉망받는 드라이버인 세나까지 더해지며 맥라렌은 시즌 16번의 레이스 중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제외한 15경기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 괴력을 발휘하며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했고 세나가 프로스트를 재치며 드라이버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이듬해 터보 엔진이 금지되면서 맥라렌은 혼다의 3.5리터 V10 엔진을 장착한 MP4/5 를 만들었습니다. 이 차 또한 강력한 성능을 자랑했지만 너무 압도적이었던 나머지 세나와 프로스트가 챔피언을 놓고 과열 경쟁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듬해 일본 그랑프리에서 세나와 프로스트가 서로 충돌하는 사고를 일으켰고 레이스에서는 세나가 우승했지만 사후 조사 결과 실격 처리된데다 맥라렌의 실격이 부당하다는 항의에 FISA가 세나에게 추가 자격 정지까지 주는 소동이 벌어지며 프로스트가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결국 팀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한 프로스트는 이 시즌을 끝으로 페라리로 이적했고 니콜스도 페라리로 팀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1990 시즌 맥라렌은 프로스트를 대신해 게르하르트 베르거를 영입했는데 베르거는 세나와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세나는 프로스트와 또 한번 치열한 챔피언십 경쟁을 펼친 끝에 드라이버 챔피언을 차지했고 팀도 3년 연속으로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1991년 세나와 맥라렌은 다시 한번 더블 챔피언을 차지했지만 이듬해 액티브 서스펜션을 도입한 윌리엄스에게 드라이버와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모두 내주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93년 혼다가 인디카 진출 선언과 동시에 맥라렌과의 엔진 공급 계약을 중단하면서 맥라렌은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갑작스럽게 다른 팀을 알아봤지만 르노와의 협상은 결렬되었고 급한대로 포드의 엔진을 쓰기로 했지만 임시 방편이었습니다. 

 거기에 세나마저 시즌 중반 다음 시즌 윌리엄스로의 이적을 밝히면서 팀은 더욱 곤란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마지막 3경기에서 미카 하키넨이 마이클 안드레티 대신 달리기도 했던 맥라렌은 컨스트럭터 2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듬해 맥라렌은 람보르기니 엔진을 테스트한 후 람보르기니의 소유주였던 크라이슬러와의 협상을 거쳐 거래의 일환으로 푸조 엔진을 사용했습니다. 지난해 데뷔한 하키넨과 더불어 마틴 브런들이 합류했지만 시즌 성적이 반토막 나면서 컨스트럭터 4위로 10년만에 컨스트럭터 3위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시즌 내내 문제를 일으켰던 푸조에 실망한 맥라렌은 1년만에 계약을 해지하고 메르세데스와 엔진 공급 계약을 맺었고 메르세데스 산하의 일모어에서 공급하는 엔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Mclaren MP4/4 (1988)

 

 

  •  메르세데스와의 재도약

 

 메르세데스 엔진으로 바꾼 첫해 맥라렌은 레이스카와 엔진을 조합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전 챔피언이었던 나이젤 만셀을 데려왔지만 단 2경기만 치루고 팀을 떠나고 말았고 마크 블런들 (Mark Blundell) 이 만셀을 대신해 남은 시즌을 소화했습니다.

 1996 시즌 맥라렌은 하키넨의 파트너로 데이빗 쿨싸드를 영입했고 여전히 윌리엄스가 F1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전년보다 나은 성적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습니다.

 1997 시즌 맥라렌의 성적은 더욱 나아졌는데 개막전이었던 호주 그랑프리에서 쿨싸드가 우승을 차지하며 3년만에 팀의 그랑프리 우승을 가져다줬고 8월에는 윌리엄스를 나온 아드리안 뉴이를 영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레이스카의 신뢰성 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었고 하키넨은 영국과 룩셈부르그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림) 그랑프리에서 선두를 달리다 리타이어하는 불운을 맛봐야 했습니다.

 1998 시즌 뉴이가 만들어낸 레이스카는 좋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고 윌리엄스가 르노와 결별하면서 맥라렌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시즌 초반 하키넨과 쿨싸드가 6경기 중 5승을 차지하며 치고나갔고 슈마허와 페라리가 끝까지 맥라렌을 추격했지만 마지막 룩셈부르그와 일본 그랑프리에서 하키넨이 우승을 차지하며 1991년 이후 7년만에 맥라렌이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했고 하키넨도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차지했습니다.

 이듬해에도 하키넨은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차지했지만 잦은 레이스카 문제와 리타이어가 겹치며 페라리에게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0년 맥라렌은 7승을 거두었지만 슈마허와 페라리에게 더블 챔피언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2001년 부진을 겪으며 쿨싸드보다 뒤쳐지는 성적을 기록한 하키넨은 은퇴를 선언하며 F1 커리어를 마감했고 맥라렌에서는 같은 핀란드 출신 드라이버인 라이코넨을 하키넨의 후임자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2002년 맥라렌은 쿨싸드가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거둔 1승에 그치며 페라리가 자신들이 1988 시즌에 기록한 시즌 15승을 달성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2003시즌 새로운 MP4-18로 첫 두경기에서 쿨싸드와 라이코넨이 우승을 차지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레이스카가 신뢰성 문제에서 불안함을 보인데다 충돌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서 전년도에 썼던 MP4-17을 개량해 써야하는 상황에 몰렸고 라이코넨이 분전했지만 2포인트 차이로 챔피언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2004시즌 맥라렌은 MP4-18의 문제를 해결한 MP4-19를 선보였지만 성능에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즌 도중 개선 버전인 MP4-19B를 투입하는 등 어수선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라이코넨이 1승을 차지했지만 컨스트럭터 순위는 5위로 1983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2005년 쿨싸드가 신생팀이었던 레드불로 떠났고 맥라렌은 그자리에 윌리엄스와 불화를 일으키며 떠났던 후안 파블로 몬토야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몬토야와 라이코넨은 좋은 활약을 펼치며 10승을 차지했지만 MP4-20의 문제(특히 타이어 온도와 신뢰성 문제) 에서 여전히 라이코넨을 괴롭히며 알론소와 르노에게 더블 챔피언을 내주었습니다.

 거기에 2006 시즌은 르노뿐만 아니라 페라리에게 밀리면서 10년만에 시즌 1승도 거두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고 몬토야가 시즌 도중, 라이코넨이 시즌이 끝나고 팀을 떠난데다 아드리안 뉴이까지 레드불로 팀을 옮기며 총체적인 난국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2007년 맥라렌은 르노에서 2년 연속 챔피언을 차지한 알론소와 유망주였던 루이스 해밀턴을 데려왔고 이 듀오는 곧바로 시즌 4승을 따내며 기대에 보답했지만 시즌 도중 알론소와 해밀턴은 치열하게 대립했고 결국 알론소가 시즌 후 팀을 떠난데다 스파이게이트에 맥라렌이 휘말리며 컨스트럭터 포인트 몰수와 1억 달러라는 초유의 벌금을 물게 되었습니다.

 2008 시즌 맥라렌은 해밀턴이 5승을 거두며 챔피언십 경쟁에 다시 뛰어들었고 최종전인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마지막 랩 마지막 코너에서 극적으로 추월에 성공하며 5위로 드라이버 챔피언을 차지했지만 기대를 모았던 헤이키 코발라이넨이 시즌 7위에 그치며 컨스트럭터 챔피언은 페라리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결국 오랜 시간동안 맥라렌을 이끌어오던 론 데니스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수장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2009년은 상황이 더 안좋아졌고 해밀턴과 코발라이넨의 성적도 덩달아 떨어졌습니다.

 맥라렌은 그동안 부진했던 코발라이넨을 내보내고 2009년 브론 GP 소속으로 챔피언을 차지한 젠슨 버튼을 영입했는데 2010 시즌 버튼이 2승, 해밀턴이 3승을 차지하며 선전했지만 새로 떠오른 레드불에게 더블 챔피언을 내주어야 했습니다.

 2011시즌도 해밀턴과 버튼이 각각 3승씩을 거두며 버튼이 드라이버 챔피언십 2위, 맥라렌이 컨스트럭터 2위에 올랐지만 맥라렌의 저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2012시즌 시즌 중반까지 극도의 부진에 빠진 맥라렌은 페라리에게 밀리며 컨스트럭터 3위로 떨어졌고 해밀턴까지 메르세데스로 이적하며 드라이버에 큰 공백이 생겼습니다. 세르히오 페레즈로 해밀턴의 빈자리를 매꿨지만 2013 시즌에는 1980년 이후 처음으로 단 한번의 포디움도 차지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2014시즌 페레즈를 케빈 마그누센으로 교체하고 론 데니스가 CEO로 복귀했지만 호주 그랑프리에서 마그누센과 버튼이 2, 3위를 기록한걸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한채로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Mclaren MP4-23 (2008)

 

 

  •  혼다와의 재결합

 

  2015 시즌이 시작하기 전, 맥라렌은 오랜 파트너였던 메르세데스와의 계약을 종료하고 새 엔진 공급 파트너로 혼다를 선정하며 예전의 위용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드라이버 쪽에서도 알론소를 다시 데려오며 힘을 보탠 맥라렌은 시즌 시작전부터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개막전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는데 알론소가 뇌진탕 증세를 보이며 리저브 드라이버였던 마그누센이 대타로 참가한데다 레이스에서는 버튼이 레이스를 마친 드라이버중 최하위인 11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기대를 가졌던 혼다 엔진은 시즌이 지나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27포인트로 컨스트럭터 9위에 그치며 1980 시즌 이후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2016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알론소가 이번에는 호주 그랑프리에서 큰 사고를 당하며 바레인 그랑프리에 빠지게 되었고 전년보다는 나아졌지만 76포인트로 컨스트럭터 6위를 차지하며 맥라렌이라는 이름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표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리고 이해를 끝으로 7년간 맥라렌에서 달린 버튼이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은퇴한 버튼을 대신해 스토펠 반두른을 2017 시즌 드라이버로 낙점했지만 반두른은 여러가지 요인들이 겹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시즌 최종 30포인트 컨스트럭터 9위로 마무리 했습니다. 

 결국 두고 볼수 없었던 맥라렌은 이 시즌을 끝으로 혼다와의 계약을 종료하고 르노와 새 엔진 공급 계약을 채결했습니다.

 

Mclaren MP4-30 (2016)

 

  •  르노와 함께

 

 2017년 맥라렌은 르노와 2018 시즌부터 시작하는 3년 간의 엔진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2018 시즌 개막전인 호주 그랑프리에서 알론소가 5위를 차지하며 긴 부진의 늪을 빠져나오는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첫 4경기에서 포인트를 따낸 이후 남은 16경기에서 26포인트를 따내는데 그치며 컨스트럭터 6위에 머물렀고 알론소가 F1을 떠난다고 선언하며 팀을 떠났습니다.

 2년간 부진했던 반두른과 계약을 맺지 않은 맥라렌은 카를로스 사인츠, 란도 노리스의 젊은 드라이버 두명으로 라인업을 맞추었고 메르세데스, 페라리, 레드불과 큰 격차를 보였지만 컨스트럭터 4위에 오르며 2012년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Mclaren MCL32 (2017). 이때부터 레이스카 이름이 MP에서 MCL로 바뀌었고 파파야 오렌지의 리버리도 돌아왔습니다.

 

  •  다시 메르세데스로

 

 2019년 9월 맥라렌은 메르세데스와 2021 시즌부터 시작하는 엔진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로써 맥라렌은 2014년 6년만에 메르세데스와 다시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맥라렌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편에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레이스 팀인 르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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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0-04-04 16:21:04

77년 맥라렌 성적이 뒤바뀌었네요
헌트가 드라이버 챔피언쉽 5위를 기록했고
맥라렌이 컨스트럭터 순위 3위였죠
그리고 로니 페터슨 대신 맥라렌으로 간 선수는
토니 왓슨이 아니라 존 왓슨 아닌지요?
82년 챔피언쉽 디디에 피로니와 공동 2위였던..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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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16:46:33

 요새 아주 오타가 밥먹듯이 나오네요. 어흐흑....

 얼른 수정해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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